마을버스에 실려 돌아왔다. 저녁,
아파트 동 입구에서 영산홍이 실없이 웃고 있다.
까닭 없는 웃음도 괜찮아, 괜찮고말고.
한창 때 좀 넘겼으면 어때?
우편함에 손을 넣어 내용물을 더듬고 엘리베이터에
갇혔다 풀려나
자물쇠에 내장된 번호들을 누르고
집에 들어왔어.
식구 아무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
웃옷 벗어 걸고 들고 올라온 편지를 뜯었어.
불을 켰는데도 어두워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면
형광등 자리에 형광등 켜 있고 달력과 그림들 제자
리에 걸려 있는
그저 그런 저녁.
형광등 수명이 다 돼 그런가, 새것으로 갈아야?
의자를 옮기려다 생각한다.
혹시 시력 낮춘 건
졸아드는 에너지 아껴 쓰려는 몸의 지혜가 아닐까?
몸이여, 그대 처분에 나 맡겨야 하지 않겠나.
주어진 시력 계속 쓰다가 어느 순간
눈 없어 더 환하다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잘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만큼
보는 맛 조금씩 더 돋구며 살다
소리의 근원에서 멀어지는 귀, 한 발짝이라도 더
가까이 가
음(音)의 옷깃을 잡아채려다가 놓치기도 하는
상처 입은 뇌를 가지고 가련다.
흠집 없이 곱게 간수한
그런 명품 혼을 모시고 산 적 없으니.
[사는 기쁨], 문학과지성사,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