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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碧波 藝術村 원문보기 글쓴이: viva
"Non ti scordar di me" (논 티스 코르다르 디메)는 Ernesto de Curtis작곡으로 우리말로 <나를 잊지 말아 주세요> 라는 뜻이다. 이 곡은 1952년 4월 "마리오 란자 쑈" 에서 오케스트라와 공연한 노래를 RCA 사에서 취입한 곡으로 훗날 란자의 장례행렬에 이 곡을 같이 하였다 함.
Mario Lanza(마리오 란자) (1921 - 1959 )
영화 '위대한 카루소'를 주연한 테너 마리오 란자. 1921년은 이태리 오페라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한 해이다. 금세기 최고의 테너라는 신화를 창조했던 엔리코 카루소가 이 해에 죽었는데 다행히도 이 해에는 그의 신화를 이어 나가고 빛낼 테너들이 출생했다. '위대한 카루소'라는 영화에서 카루소 역을 맡아 세계적인 테너의 반열에 오른 마리오 란자가 1921년에 출생했고 카루소, 질리를 이어 이태리 테너의 계보를 이은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그의 달콤한 미성과 대조되는 힘있고 격정적인 음색의 테너 프랑코 코렐리도 같은 해에 태어났다. 비록 카루소는 죽었지만 위대한 3명의 성악가가 그의 혼을 이어 태어났던 것이다. 그들 중 어쩌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고 할 수 있는 테너 마리오 란자는 1921년 1월의 마지막 날에 이태리에서 이민 온 부모의 외동 아들로 South Philadelphia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부터 란자는 카루소를 우상으로 삼았고 훗일 오페라 무대에서 카루소 같은 훌륭한 성악가가 되기를 바랬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목소리는 성공을 예견했고, 레나드 번스타인이 있었던 매사추세스 주의 Tanglewood 음악 학교에서 얼마 동안 공부했다. 그 후에 그는 베냐미노 질리의 발성을 코치하기도 했던 엔리코 로사티에게 배웠다. 그러나 마리오 란자는 오페라 무대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유명해졌다. 그는 트럭 운전사로 일하면서 성악 교사의 지도를 받고 지내던 중, 20세가 되던 어느날 커티스 음악원 강당에 피아노를 배달하러 가서 평소처럼 오페라 아리아를 흥얼거리며 일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이곳을 지나던 당시 보스톤 심포니의 지휘자 쿠세비츠키는 그의 예사롭지 않은 재능에 놀라며 그를 버크셔 음악센터에 소개해 잠재된 능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물꼬를 터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인 1945년에는 드디어 당시 미주 대륙 최대의 레코드사였던 RCA사와 전속 레코딩 계약을 체결, 히트메이커로서 오페라 극장과 음반계를 섭렵했다. 그리고 1947년에는 헐리우드보울 연주회에 참가해서 대성공을 거둔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까지 진출했다. 1949년에 를 시작으로 란자는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고 당시의 인기 발라드 뿐만 아니라 베르디 오페라의 유명한 아리아도 불렀다. 그의 두 번째 영화 도 흥행했고 그는 'Be My Love'로 세계 음악 차트의 10위권 안에 들었다. (오른쪽은 58년 알버트홀 콘서트 라이브) 그의 세 번째 영화가 바로 유명한 물망초 이며 이로서 그는 세계에서 유명한 오페라 가수로서의 그의 입지를 다졌다. 하지만 그는 실제 오페라 무대엔 1948년에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핀커톤 역으로 단지 두 번만 섰다. 그는 급격히 증가하는 체중 때문에 다음에 찍을 영화인 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스튜디오와의 마찰로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그러다가 다음 해에 찍은 영화 에서 감독과의 논쟁을 벌인 이후로 헐리우드 영화계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헐리우드에 환멸을 느껴 새로운 시작을 해보고자 란자와 그의 가족들은 1957년에 로마로 이사를 갔다. 거기에서 그는 영화 두 편을 찍고 유럽 콘서트 여행을 가졌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 무대 컴백에 관한 얘기가 오갔는데 갑작스런 비극으로 영영 이루어질 수 없게 되었다. 1959년 8월 7일 로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던 것이다. 카루소의 계승자로 불리던 란자는 38세의 나이로 아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전설은 그가 남긴 영화와 RCA에 10여 년간 남긴 400회의 레코딩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그가 불러 히트를 쳤던 에 삽입된 'Be My Love', 'The Lovelist Night of the Year', 'Because You're Mine' 등은 지금도 세계 유명 성악가들에게 널리 애창되고 있다. 그의 영화 는 세계의 많은 성악도들에게 감명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카루소처럼 훌륭한 성악가가 되겠다는 꿈과 용기를 가지게 했다. 실제로 테너 호세 카레라스는 7세 때 그의 고향 바르셀로나에서 상연 중이던 영화 를 보고는 란자의 노래에 넋이 빠져 자신도 크면 반드시 란자와 같은 그리고 카루소와 같은 성악가가 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같은 결심은 카레라스의 천재성과 결부되어 그 역시 세계 최정상의 테너가 되었고, 1993년에는 그에게 성악도의 꿈을 심어 주었던 란자를 기리며 'With a song in my heart'라는 타이틀로 추모앨범을 냈다. 그 앨범에는 란자가 즐겨 불렀던 레퍼토리들이 있다. 세월이 흘러가도 마리오 란자는 영화를 통해 대중의 곁에 가까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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