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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음모시초(陰謀始初)
1.혈륜(血輪)
그는 이제 갓 이십 세쯤 되었을
갈의청년(葛衣靑年)이었다.
갈의청년은 보통 체구에 이목구비가 수려했는데 먼
길을 달려온 듯 전신에 뽀얀 먼지가 앉아 있었다.
갈의청년은 조자건을 보자 반가워 어쩔 줄 모르는
듯 급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형님...... 과연 형님이셨군요. 접니다. 저
모르시겠습니까?"
조자건은 난데없이 갈의청년이 불쑥 나타나 자신을
형님이라고 부르자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돌연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너는 혹시 승남(勝男)이 아니냐?"
갈의청년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손을 덥석
움켜잡았다.
"예 형님. 저 진승남(秦勝男)입니다. 절 잊지
않으셨군요."
조자건은 찬찬히 그를 살펴보다가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어찌 너를 잊겠느냐? 그 동안 네가 너무 많이
자라 미처 못 알아봤구나. 그때는 열다섯 살의
어린아이였는데......."
갈의청년, 진승남은 반가움이 가득한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때도 어린애는 아니었습니다. 형님만 그렇게
생각했지 전 그때 벌써 다 컸는걸요."
조자건은 흥분한 기색으로 마구 떠드는 진승남의
얼굴을 새삼스러운 듯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진승남은 조자건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친구인
진표(秦豹)의 둘째 동생이었다. 진표에게는 모두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바로 밑이 진결(秦潔)이고 그
밑으로 진승남과 진봉(秦鳳) 남매가 있었다.
진승남은 어려서부터 조자건을 친형처럼 몹시
따랐는데 호승심(好勝心)이 강하고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본성은 몹시 착했다.
한데 생전 고향을 떠난 일이 없던 진승남이 어떻게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한동안 반가운 기색으로 어쩔 줄 모르던 진승남은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자 갑자기 조바심이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참, 형님. 저의 큰 형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조자건은 그렇지 않아도 지금 진표에 대해서 물어
보려던 참인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듣지 못했다. 네 큰 형은 잘 있느냐?"
진승남의 얼굴에 침통한 표정이 가득했다.
"사실은 그 때문에 형님을 급히 찾아온 것입니다.
진표형님은...... 지금 몹시 위급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자세히 말해 보아라."
"사실은......."
진승남은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원래 진표의 세 동생 중 제일 맏이인 진결은 하남성
일대에서는 소문이 자자한 미녀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낙양성을 나갔다가 혈륜(血輪) 막비(莫飛)의
눈에 띄게 되었다.
막비는 장강이북(長江以北)에서는 가장 유명한 고수
중 하나로 특히 손속이 매섭고 잔인하며,
호색(好色)하기로 악명(惡名)을 날리는 인물이었다.
평소부터 여색(女色)을 즐겨 하던 막비는 그녀의
미색(美色)에 눈이 번쩍 띄어 그녀를 희롱하려다가
그녀의 결사적인 반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간신히 막비의 마수(魔手)에서 벗어난 진결이
집으로 돌아와 진표에게 이 사실을 말하자 성격이
불같은 진표는 참지 못하고 막비에게 결투를 신청했던
것이다.
그는 상대가 천하에 악명이 자자한 혈륜 막비라는
것을 알았으나 추호도 겁을 집어먹거나 꼬리를 빼지는
않았다. 그것은 과연 철혈객(鐵血客)이라고 소문난
진표다운 행동이었으나 많은 사람들은 막비가 얼마나
무서운 인물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너무
무모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진결을 비롯한 진승남, 진봉 등 세 남매는
필사적으로 진표를 만류했으나 그의 결심이 추호도
흔들리지 않자 불안과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그때마침 진승남은 우연히 종남산(終南山)부근에서
조자건이란 인물이 나타나 고수들을 연파하여 명성을
날리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그가 과거 진표와
친하게 지내던 그 조자건이 아닌가 하여 급히
달려왔던 것이다.
그는 이곳에 올 때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으나 조자건이 노호령에서 강장비환 현일립과
비무를 한다는 소식을 주워듣고 이곳으로 왔다가
드디어 조자건을 만나게 된 것이다.
"자건형님, 제발 큰 형님을 막아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큰 형님은 아주 큰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막비는...... 너무 무서운 인물이에요."
조자건은 묵묵히 진승남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 동안에도 그는 조금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을
뿐더러 화를 내거나 걱정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짤막하게 물었을 뿐이다.
"그들이 싸우기로 한 날짜가 언제냐?"
진승남은 기대 반 걱정 반의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모레 오시(午時)입니다."
"장소는?"
"동작대(銅雀臺)입니다."
조자건은 한동안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가
돌연 나직하게 탄식을 했다.
"이곳에서 동작대가 있는 임장현(臨璋縣)까지는
모레 아침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너무 늦게 왔다."
진승남은 영문을 몰라 하는 얼굴로 물었다.
"늦게 오다니요......?"
조자건의 얼굴에는 별반 표정이 떠올라 있지
않았지만 왠지 침울한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진표가 막비에게 결투를 신청하기 전에 내가
알았다면 반드시 두 사람을 싸우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하나......."
조자건의 음성은 납덩이를 달아 놓은 듯 무겁기
그지없었다.
"일단 그들이 결투를 약속한 이상 진표는 결코 내
도움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 * *
동작대는 이름처럼 대(臺)라든지 무슨 궁(宮) 같은
건물이 있는 곳은 아니었다.
아니 예전에는 분명히 크고 아름다운 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 전에 무너지고 지금의
동작대는 오직 폐허와 타 버린 잿더미만이 남아
영화(榮華)의 무상(無常)함만을 나타내 주고 있을
뿐이었다.
동작대는 원래 위(魏)의 조조(曹操)가 세운 것으로,
큰 동작(銅雀)을 주조하여 다락 꼭대기에 놓았으므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후 조(趙)의 석호(石虎)가 더욱 화려하게
축영했으나 파괴, 재건을 거듭하다가 최후에는
북주(北周)때 완전히 파괴되었다.
한낮의 햇살은 제법 따가웠다.
진표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을 겨를도 없이
양손을 질풍같이 휘두르고 있었다.
파파파팍!
눈 깜짝할 사이에 그는 무려 스물네 개의 각기 다른
초식을 줄줄이 펼쳐 냈다. 하나 소용없었다.
어느새 막비의 신형은 그의 노도와 같은 장세(掌勢)
속을 유연하게 빠져 나오고 있었다.
막비는 하남성 신야(新野)의
막가장(莫家莊)출신이었다. 아버지는 이십 년 전에
무림천하에 혈명(血名)을 자자하게 떨쳤던 윤마(輪魔)
막동(莫童)이었는데 막비는 막동의 둘째 아들이었다.
막비의 형이며 막동의 큰 아들인 막상(莫尙)은
스물한 살의 나이에 중주삼사(中州三邪)와 시비가
붙어 싸우다가 죽었다. 막동은 아들의 죽음에
분노하여 중주삼사에게 도전했으나 그들의 합공을
견디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물러나고 말았다. 막동은
꼬박 칠주야(七晝夜)를 앓다가 죽었는데 그때 막비의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막비가 다시 무림에 출도한 것은 팔 년 뒤였다.
그는 출도하자마자 제일 먼저 중주삼사에게 도전하여
십 초 만에 그들을 모두 도륙했다.
그때 막비는 그들의 눈알을 뽑고 혀를 자른 다음
심장을 꺼내 죽였는데 그 처참한 방법 때문에 많은
무림인들을 전율하게 만들었다.
그 해에 막비는 모두 열다섯 명과 싸웠는데 상대를
전부 악랄한 방법으로 살해해서 살명(殺名)을
자자하게 떨쳤다. 이 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막비라는
이름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고 다시 오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이름은 누구에게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막비의 장기는 별호 그대로 륜(輪)이었는데 그의
륜법(輪法)은 아버지인 막동을 훨씬 능가했다. 이유는
모두 두 가지였다. 하나는 그의 재질이 탁월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우연한 기회에 이백 년
전의 마인(魔人)인 색혈비마(索血飛魔)
허구패(許九覇)의 비급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허구패는 당시 비마보(飛魔步)라는 경공과
색혈륜(索血輪)수법으로 강호를 주름잡았었는데
막비는 이 색혈륜 수법을 더욱 발전시켜 자신만의
독특한 절학을 만들어 냈다.
그것이 바로 대혈칠륜(大血七輪)이라는 무공이었다.
막비의 대혈칠륜은 우내십대기문병기에 거의
필적한다고까지 소문난 무서운 절기였다.
허구패의 비마보를 터득한 막비는 경공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의 경공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스르르.......
그의 신형은 마치 보이지 않는 줄을 타고 허공을
자유자재로 나르듯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표는 입술을 질끈 깨문 채 다시 벼락같이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며 십이장(十二掌)을 질풍처럼
갈겨댔다. 그가 회심의 절기로 생각하는
쇄심십이참(碎心十二斬)이라는 상승무공이었다.
쐐쐐쐐쐐쐐!
사방이 온통 칼날 같은 손그림자로 뒤덮여 버렸다.
하나 막비의 몸은 마치 허깨비와도 같이 그 엄밀한
장영(掌影) 속을 유유히 헤집고 다녔다.
진표는 이미 백 초 이상을 미친 듯이 퍼부어 댔다.
그런데도 막비의 몸에 티끌만한 상처조차 입힐 수
없었다.
스르르.......
막비의 몸이 미끄러지듯 허공을 가로지르며 진표의
코앞으로 다가들었다. 이제까지 계속 피하기만 하던
막비가 처음으로 진표를 향해 돌진해 들어오는
것이다.
진표는 피하기는커녕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막비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막비의 오른손에는 기이한 모양의
윤(輪)이 쥐어져 있었다.
윤은 마치 피처럼 시뻘건 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보기만 해도 섬뜩했는데 사방으로 날카로운 톱니바퀴
같은 칼날들이 예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막비의 혈륜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막비의 대혈륜 초식아래에서 십 초
이상을 견뎌 낸 사람이 없다고 한다. 진표는 이미
이런 사실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지만 추호도 겁을
집어먹거나 꼬리를 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더욱 투지만만하게 두 눈을 번뜩이며
막비를 향해 맹공을 취했다.
"이얍!"
그는 주위가 떠나갈 듯한 고함을 내지르며 양손을
마치 풍차처럼 휘둘러 댔다.
파파파파.......
세찬 돌풍이 몰아치듯 주위가 온통 휘몰아치는
광풍의 소용돌이에 갇혀 버렸다. 이것은 진표의
삼대절학 중 하나인 선풍사십사수(旋風四十四手)라는
절기였다. 찰나의 순간에 사십사수가 폭풍노도처럼
몰아닥치면 누구라도 당해 내지 못한다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섬전처럼 다가들던 막비의 몸이 순간적으로
허공에서 멈칫하는 것 같았다.
팟!
하나 다음 순간, 그의 오른손에 들린 혈륜이
번뜩거렸다.
그것은 마치 마른 하늘에 뇌전(雷電)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진표는 자신의 엄밀하기
그지없는 장세의 일각이 맥없이 무너지며 무언가 빗살
같은 예기가 쏘아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그 속도는 그야말로 진표가 이제까지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던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크윽!"
진표는 어깨죽지에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고
짤막한 신음을 토하며 뒤로 비틀 물러났다. 어느
사이에 그의 왼쪽 어깨는 쭈욱 갈라져 시뻘건 선혈을
뿜어내고 있었다.
혈륜이 살짝 스치고 지나갔기에 망정이지 제대로
격중되었다면 그의 어깨는 송두리째 잘려 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하나 단순히 스치기만 했는데도 진표는 왼쪽 팔을
들어올릴 수도 없을 만큼 심각한 통증을 느꼈다.
그가 미처 몸을 가눌 사이도 없이 다시 시뻘건
혈륜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혈륜의 길이는 겨우 두 자 반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그것이 어찌나 영활하고 생동하게 움직이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파라라락!
진표는 자신이 마치 수백, 수천 개의 칼날 속에
갇힌 듯한 착각에 빠져 버렸다. 그 엄청난 공세
속에서 몸을 피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로만
여겨졌다. 그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파앗!
"크윽!"
진표는 다시 오른쪽 팔에 막대한 통증을 느끼고
몸을 휘청거렸다. 또다시 막비의 혈륜이 그의
오른팔을 스치고 지나간 것이다.
그의 오른팔은 두 치 가량 쭈욱 갈라져 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었다. 하나 그 순간
진표는 어떤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 자는 지금 나를 일부러 쓰러뜨리지 않고 있다!'
사실 처음의 일격조차 진표는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막비의 혈륜은 단지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기만 했을 뿐이다.
그때 진표는 자기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번의 공세는 진표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진표는 그저 목을 길게 내민 채 상대의 손에 쓰러질
수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막비의 혈륜은 이번에도
역시 그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막비 같은
절대고수의 손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빗나갈
리는 없는 것이다.
진표는 이 사실을 알자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부드득 갈아붙였다.
고수들 간의 격전에서 상대가 사정을 봐주어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치욕스럽기조차 한 일이었다. 더구나
막비의 조소 어린 눈빛은 그가 진표에게 호의를
가지고 사정을 봐준 게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었다.
막비는 진표를 희롱하려는 뜻임이 분명했다.
그것은 마치 고양이가 부상당한 쥐를 금방 잡아먹지
않고 실컷 약을 올리고 골탕을 먹이려는 것과 같았다.
쥐를 먹는 고양이는 꼭 배가 고프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일종의 즐거움이며 오락이었다.
막비는 그 오락을 마음껏 즐길 생각인 게 분명했다.
진표는 누구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희롱을 당하고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분노로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이었으나 이미 양 팔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몸을 제대로 가눌 수조차 없었다.
그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질끈 깨물며 허공을
박차고 뛰어올라 막비를 향해 맹렬하게 양발을
휘둘렀다.
양손을 고정시킨 채 허공을 비스듬히 날아가며
순식간에 열여덟 번의 발길질을 해대는 이 수법은
원앙십팔퇴(鴛鴦十八腿)라는 독특한 절기였다.
하나 진표의 사력을 당한 공격으로도 막비의 옷자락
하나 건드릴 수 없었다.
막비는 아주 간단하게 그의 발길질을 피하며
진표에게 바짝 다가들었다. 가격할 목표를 잃고
허공에서 비틀거리는 진표를 응시하는 막비의
입가에는 싸늘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팟!
그의 오른손에 들린 혈륜이 다시 섬뜩한 빛을
뿌리자 진표의 몸이 허공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윽!"
진표는 다시 오른쪽 허벅지를 윤에 찔려 맥없이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의 몸은 양 팔과 다리에서
흘러 나오는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막비는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띠며 바닥에서
바둥거리며 일어나고 있는 진표를 바라보았다.
"벌써 지쳤나, 진표? 남들이 하도
철혈객(鐵血客)이라고 떠들어대서 그래도 한 가닥
하는 줄 알았는데 이거 정말 실망이군."
진표는 분노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간신히 일어났다. 하나 그가 채 몸을 완전히 가누기도
전에 막비는 장난하듯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번쩍!
"큭!"
혈륜이 날카로운 빛을 뿌리자 진표의 마지막 남은
왼쪽 다리에서 시뻘건 핏줄기가 뿜어 나왔다. 진표는
다시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그는 벌레처럼 바둥거리면서도 필사적으로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나 이미 사지(四肢)에 모두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몸을 일으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도 진표는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막비는 그 모습을 내려보며 냉랭하게 웃었다.
"어서 일어나지. 내게 뜨거운 맛을 보여주겠다고
큰소리쳤던 것 같은데 벌써 생각이 바뀌었나?"
진표의 얼굴은 무섭도록 창백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를 쓰고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는 금시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막비를
향해 다가왔다.
하나 그가 채 두 걸음도 떼어놓기 전에 막비의 손이
번뜩함과 동시에 진표의 몸에 다시 두 개의 핏줄기가
뿜어 나왔다. 양쪽 옆구리가 모두 갈라 터졌는데 이번
상처는 상당히 심각해서 갈비뼈가 드러나 보일
정도였다.
진표의 비쩍 마른 몸은 크게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그는 신음조차 내지 않고 핼쑥한 얼굴을
하고 막비를 향해 계속 다가오는 것이었다.
막비는 음산하게 웃으며 다시 왼손을 슬쩍
흔들었다. 진표의 몸에는 다시 세 개의 핏줄기가 새로
생겨났다.
그래도 진표가 쓰러지지 않자 막비는 몇 차례 더
혈륜을 휘둘렀다.
이제 진표의 몸은 상처에서 흘러 나오는 선혈로
인해 완전히 시뻘겋게 변해 버렸다. 그의 몸은
그야말로 단 한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혈인(血人)이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막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피에 젖어 있는 진표를
향해 계속 손을 휘둘렀다. 진표가 제아무리
철혈한(鐵血漢)이라 해도 엄연히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이었다. 이제 진표의 인내에도 한계가 왔고
체력은 바닥이 난지 오래였다.
쿵!
마침내 진표는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썩은
고목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말았다.
그제서야 막비는 손을 멈추며 무표정한 얼굴에
싸늘한 미소를 떠올렸다.
"진표, 과연 끈질기군. 하지만 오늘은 상대를 잘못
골랐다."
그렇다.
확실히 막비는 진표에겐 너무도 벅찬 상대였다.
막비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진표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삼 일 내로 네 동생을 내게 보내지 않는다면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때 내 손이 오늘처럼
자비로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막비는 떠나갔다.
진표에게 도저히 씻을 수 없는 치욕과 상처를 남겨
준 채로.
조자건은 묵묵히 쓰러져 있는 진표를 바라본 채
미동도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그는 동작대의 허물어진 폐허 한 구석에서
진표와 막비의 대결을 구경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표가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졌을 때도 그는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막비를 막으려 하거나
앞으로 나서려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사마결은 그 점이 못내 아쉽고 궁금했다.
그는 비록 조자건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가 알고 있는 조자건이란 인간은 절대로
친구가 위기에 처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진표는 조자건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런데도
그는 진표가 남에게 모욕을 당하고 무참한 꼴이 되는
광경을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사마결은 조자건을 향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막비를 막지 않았소?"
그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사실 그는 진표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단지
그는 까닭없이 화가 났을 뿐이다.
조자건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진표를 끌어안은 채
눈물을 떨구고 있는 진승남을 쳐다보다가 오히려
반문했다.
"당신은 진표란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소?"
사마결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즉시 대답했다.
"자세히는 모르오. 하지만 소문으로 듣기에는
신의가 대단하고 아주 의지견정(意志堅定)한
사람이라고 하오."
그는 조자건의 눈치를 슬쩍 살피면서 덧붙였다.
"그리고 특히 남에게 모욕을 당하면 참지 못한다고
하더군."
조자건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한 말은 모두 옳지만 한 가지는 약간
틀렸소."
사마결은 즉시 물었다.
"그게 뭐요?"
"진표는 남에게 당한 모욕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소. 그가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친구에게
모욕을 당하는 것이오. 친구에게 모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그는 죽는 길을 택할 거요."
사마결은 머리가 비상한 인물답게 조자건의 말 속에
숨은 뜻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를 돕는 게 그를 모욕하는 일이란 말이오?"
"진표는 항상 자신의 가족은 자신의 힘으로 지켜야
한다고 믿어 왔소. 자신의 동생이 남에게 수모를
당했다면 당연히 자신의 힘으로 설욕을 해야 하오.
설혹 죽는 한이 있어도 그는 그 일에 다른 사람이
끼여드는 걸 용납하지 않을 거요. 더구나 친구의 도움
따위는 절대로 받으려 하지 않을 거요."
조자건은 단호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조금 전에 내가 만약 나서서 그를 구해 주었다면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거요. 그에겐 그보다 더
수치스럽고 치욕스러운 일이 없을 테니까."
조자건은 진표의 오랜 친구이니 만큼 그에 대해서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자세히 알고 있을 것이다.
사마결은 조자건이 이런 말을 한 이상 절대로
틀림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성격이 정말 그렇게 과격하오?"
"과격한 게 아니라 그만큼 순수한 거요. 그에게
있어 친구란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존재이니까."
사마결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친구를 귀중하게 생각한다는 건 알겠는데
친구에게서 도움을 받는 건 수치스럽게
생각한다니......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구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오."
사마결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슬쩍 조자건을
돌아보았다.
"그럼 당신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작정이오?"
조자건은 한동안 진승남의 품에 안겨 있는 진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비록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침울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참 후 그는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를 도와주는 건 그를 모욕하는 일이오. 하지만
그를 위해 복수하는 일은 친구라면 의당해야 하는
일이오. 진표도 그건 모욕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요."
2.음모(陰謀)
막비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최소한 금화루(金華樓)의 이층에 특별히 마련된
그만의 전용좌석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는
그랬었다.
금화루는 낙양의 동문대로(東門大路)끝에 위치한
크고 아름다운 삼층누각이었다. 이곳은 비단 낙양
일대에서 제일 가는 주루일 뿐 아니라
기루(妓樓)이기도 했다.
이 금화루에 자신의 전용좌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낙양에서 겨우 다섯 명뿐이었고, 막비는 당연히 그
중에 속해 있었다.
그의 전용좌석은 금화루에서도 가장 전망이 좋은
이층의 창가에 인접해 있었다.
특별히 마련된 푹신푹신한 호피(虎皮)의자에 앉아
창문을 내다보노라면 비단 낙양의 번창한 거리뿐만
아니라 산자수려(山紫水麗)한 낙양 일대의
풍광(風光)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동쪽으로 멀리 백마사(白馬寺)가 보이고 남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도도히 흐르는 낙수(洛水)의 물결과 그
유명한 이궐용문(伊闕龍門)도 볼 수 있었다.
막비는 호피의자에 편히 앉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금존청(金尊淸)을 기울이며 입가에 느긋한 미소를
매어 달았다.
그는 지금 더할 나 위없이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와
싸움을 하고 나면 그의 마음은 항상 상쾌했고 몸도
개운해지곤 했다.
더구나 덤으로 절세미녀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으니 더욱 기분이 흡족한 것이다.
그는 일전에 우연히 보았던 미녀의 초롱한 눈과
야들야들한 피부의 감촉을 떠올리고는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
'흐흐...... 진결(秦潔)이라고 했던가? 진표 같은
놈에게 그런 동생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군.'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진표의
여동생은 그에게 올 것이다.
그는 그녀를 품에 안게 되면 먼젓번의 일까지
보태서 끔찍하게 사랑해 줄 작정이었다. 먼젓번에는
방심하다가 거의 품속으로 들어온 고기를 놓쳤으나
이제는 그 고기가 스스로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올
것이고 그도 결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만에 하나 그녀가 오지 않는다면.......
막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는 진표뿐만 아니라 그놈의 일가(一家)를 모두
없애 버리겠다!'
하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림에 자자하게 퍼져 있는 자신의
악명(惡名)을 생각해 냈다. 혈륜 막비는 지독한
호색한(好色漢)으로 소문이 났고,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자에게는 무자비한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악명은 비록 그리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대신에 편리한 점도 있었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그의 말에 고분고분
복종하기 때문에 번거롭게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는 다시 앞에 놓인 금존청이 가득 담긴 술잔을
쭈욱 들이켰다.
그가 술잔을 탁자 위에 막 내려놓았을 때 누군가가
이층으로 올라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막비는 힐끗 고개를 돌려보았다.
허름한 백의를 입고 머리가 부스스한 사나이 한
명이 주루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백의사내는 한 손에
목검같이 생긴 나무막대를 들고 있었는데 술이 몹시
취했는지 걸음걸이가 불안정해서 위태위태해 보였다.
막비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는데 주력했다.
한데 그가 막 술잔을 입에 대려는 순간 그의 곁을
지나가던 백의사내가 휘청거리며 엉겁결에 그의 팔을
건드렸다. 그 바람에 술잔 속의 술이 고스란히 막비의
옷 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막비의 짙은 눈초리가 꿈틀거렸다.
이 옷은 평소에 그가 무척 아끼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다.
더욱 그를 분노하게 한 것은 그 빌어먹을 녀석이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고개만 까닥거린 채 다시
비틀거리면서 걸어가려는 것이었다. 그는 눈에
쌍심지를 돋우며 그 백의사내를 불러 세웠다.
"이 놈! 죽으려고 환장했느냐?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의 호통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백의사내는 걸음을
멈출 생각도 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막비의 눈초리가 쭉 찢어지며 두 눈에서 싸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 놈이?'
막비는 불같이 노해서 그 건방진 작자의 어깨를
거칠게 붙잡으려 했다.
그의 갈고리같이 변한 손가락에는 무서운 공력이
깃들이어 있어 붙잡히기만 하면 뼈가 으스러지고
힘줄이 끊어질게 뻔했다.
휘청!
한데 그가 막 백의사내의 어깨뼈를 으스러뜨릴
순간, 백의사내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그 시기가 공교롭게도 막비의 손이 막 그의 어깨에
닿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막비의 손은 어이없게도
헛되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막비는 움찔 놀랐다. 강호를 울리는 절정고수답게
그는 백의사내의 행동이 절대 무의식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두 눈을 번뜩이며 백의사내의 뒷등을 노려보고
있다가 다시 번개같이 쌍수를 내밀었다. 이번에 그는
한결 신중해졌기 때문에 손속 또한 먼젓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악독했다.
쓰악!
마치 바람이 가르는 듯한 음향이 터져 나오며
백의사내의 양 어깨는 그대로 막비의 독수리 발톱
같은 손아귀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흐흐...... 이 놈! 어디 맛 좀
봐라!'
막비는 악독한 미소를 띤 채 양손에 바짝 공력을
돋우었다.
우드득!
손마디 뼈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짤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크윽!"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난 사람은 뜻밖에도
막비였다.
공력을 돋우어 백의사내의 어깨뼈를 산산이
박살내려 했는데 놀랍게도 백의사내의 몸이 얼마나
단단한지 오히려 그의 손가락이 부러질 듯 아팠던
것이다. 막비는 손가락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눈앞에
벌어진 일이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서 두 눈을
부릅떴다.
그의 손가락에 실린 공력으로 말하자면 황소의 뼈라
해도 박살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오히려 자신이
고통을 느끼다니.......
인간의 몸이 어찌 이토록 단단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철벽무적(鐵壁無敵) 악교(岳蛟)가 창안해 낸
고금최강의 불괴연혼강기 때문임을 그가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막비가 경악과 불신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때
백의사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백의사내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티없이 맑았다.
그의 눈빛과 시선이 마주치자 막비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런 맑고 차가운 눈빛의
소유자는 절대로 평범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는 누구냐?"
자신도 모르게 그는 불쑥 물었다.
백의사내는 아무 말 없이 씨익 웃기만 했다.
그 미소를 보자 막비는 다시 불같은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그 미소는 마치 그를 조롱하는 비웃음처럼
보였던 것이다. 막비는 아직 누구에게서도 이런
모욕적인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그의 두 눈에서 진득한 살기가 피어 올랐다.
"건방진 놈! 한 가닥 재주가 있다고 함부로
까불다니....... 나를 화나게 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뼈저리게 느끼도록 해 주겠다!"
막비는 사납게 외치며 번개같이 백의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그의 오른손에는 섬뜩한
혈륜이 들려 있었다. 그의 혈륜을 뽑아 드는 솜씨는
그야말로 무림일절(武林一絶)이라 할 만 했다.
평상시 그는 혈륜을 왼쪽 어깨 뒤에 메고 있었는데
일단 손을 움직이기만 하면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찰나의 순간에 혈륜은 이미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다.
파팟!
뭐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싸늘한 한광이
백의사내의 미간(眉間)을 노리고 짓쳐 들었다. 그
속도의 가공함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나 백의사내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이 슬쩍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장난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는데도 그 시기가 실로
적절하여 막비의 혈륜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고
말았다.
막비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는 아직
자신의 혈륜을 이처럼 간단하게 피해 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백의사내는 그가
일찍이 만난 일이 없는 무서운 고수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막비는 백의사내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더 이상 상대방을 경시하는 마음을
버리고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일단 들끓던 마음을 가라앉히자 그의 마음속에는
필승의 자신감과 함께 불같은 살심이 피어 올랐다.
'이 놈! 누군지는 모르지만 나의 대혈륜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똑똑히 알게 해 주겠다!'
막비는 살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백의사내를
뚫어지게 노려보다가 서서히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휘리리릭!
그의 손에 있는 혈륜이 기이한 광망을 뿜으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혈륜이 회전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져서 나중에는 불그스름한 빛만 어른거릴 뿐
혈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우웅!
그의 오른손은 기이한 파공음과 함께 번쩍이는 붉은
광망만이 이글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백의사내는 우두커니 선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뿐 몸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혈륜이 뿜어내는 광망에 압도된 듯한 모습이었다.
붉은 광망이 점점 짙어졌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 광망이 폭발하듯 확산되어
백의사내의 전신을 송두리째 뒤덮어 버렸다.
파파파파파.......
주위 사방이 온통 광풍을 만난 듯 요동을 치고
탁자와 의자들이 박살난 채 사방으로 비산되었다.
이것은 대혈칠륜 중의 혈륜단혼(血輪斷魂)이라는
초식이었다.
이 초식에 걸리게 되면 누구도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목이 떨어져 나가는 무시무시한 수법이었다.
과연, 백의사내는 어떻게 피할지를 모르는지
엉거주춤한 상태로 멍하니 서 있었다.
스윽!
그의 몸이 붉은 광망에 의해 갈가리 찢겨질 순간,
그는 휘청거리며 옆으로 두 걸음, 그리고 빠르게
앞으로 세 걸음을 내디뎠다. 어찌 보면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단치 않은 동작이었다.
하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토록
엄밀하던 혈륜단혼의 공세 속에서 백의사내의 신형이
너무도 수월하게 빠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막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음을 느꼈다. 백의사내가
펼친 신법은 얼핏 보기에 단순하기 그지없는
용협십이로(龍峽十二路)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무림의
하류무사들이나 펼치는 시시한 용협십이로 따위로
어찌 자신의 무시무시한 혈륜단혼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더 생각을 굴릴 여유도 없이 막비는 다시 오른손을
세차게 앞으로 휘둘렀다.
쾌애액!
무시무시한 파공음과 함께 십여 줄기의 시뻘건
혈광(血光)이 앞으로 다가오는 백의사내의 전신을
향해 쏘아져 갔다. 바로 대혈칠륜 중의 절초인
혈광참망(血光斬芒)이라는 수법이었다.
얼마나 많은 강호의 고수들이 이 빠르고 악독한
초식에 목숨을 잃었는지 모른다.
백의사내의 몸이 허공에서 크게 휘청거렸다. 그
순간 믿을 수 없게도 혈광참망의 열두 개 혈광은 모두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막비의 얼굴이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는
자신의 혈광참망 초식을 이토록 수월하게 벗어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정녕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막비는 이를 악문 채 질풍처럼 혈륜을 휘둘렀다.
쐐쐐쐐쐐.......
삼십여 장이 넘는 드넓은 금화루의 주루 안이 온통
혈광에 휘감긴 것 같았다. 그 요동치는 광풍 속에서는
천하의 어느것도 살아날 수가 없을 듯했다. 이것이
바로 대혈칠륜 중에서 삼대절초(三大絶招)의 하나인
혈영변색(血影變色)이었다.
백의사내의 훤칠한 신형은 혈영변색의 무시무시한
공세 속에서 끊임없이 요동을 쳤다. 그것은 마치 폭풍
속에 휩쓸린 하나의 가랑잎 같은 위태한 모습이었다.
그런데도 용케도 백의사내는 쓰러지지 않고 버텨 내고
있었다.
무려 서른여섯 가지의 변화가 숨어 있는 혈영변색의
공세가 절반이 넘게 펼쳐졌는데도 백의사내의
흔들거리는 몸은 아직 쓰러지지 않았다.
눈 깜박할 사이에 혈영변색의 삼십육변(三十六變)은
모두 끝나 버렸다.
공세가 끝난 자리에는 폐허만이 존재했다. 그토록
아름답고 호화스러웠던 금화루의 이층누각은 부서진
탁자와 의자들로 인해 거의 제모습을 잃어 버렸다.
하나 백의사내는 아직도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어찌 보면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단지
바람만이 그를 스치고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했다.
막비의 눈자위가 실룩거렸다.
혈영변색 속에서도 몸을 피할 수 있는 자가
존재하리라고는 결단코 믿어 본 적이 없는 막비였다.
게다가 상대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가 아닌가?
그는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백의사내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지쳤소, 막비? 혈륜 막비는 대단한 고수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정말 실망이군."
막비는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백의사내가 한 말은
얼마 전에 자신의 입으로 누군가에게 직접 했던
말이었다.
하나 막비는 전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미처 그
점을 깨달을 겨를이 없었다. 이제 보니 상대는 이미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자는
계획적으로 자신에게 시비를 걸어온 것이 분명했다.
"네 놈은 누구냐?"
백의사내는 여전히 입가에 기이한 미소만을 머금은
채 막비의 물음에는 일언반구 대답이 없었다.
하나 그의 냉혹하게 가라앉은 눈빛을 보자 막비는
난생 처음으로 마음 한 구석에 어떤 불안감이
떠오름을 느꼈다. 막비는 이내 그 불안감의 정체를
깨닫고는 흠칫 놀랐다. 그 불안감은 다름아닌 상대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되리라고는
이제까지 결단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는 막비였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이 자의 무공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백의사내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다른 사람을 위압하게 하고 불안하게
하는 신비한 기운이 있었다.
누구라도 이런 사람을 적으로 삼게 된다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 이 자가 언제 자신의 적(敵)이 되었단 말인가?
자신은 아직 이 자를 만난 적도 없지 않은가?
막비는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았으나 눈앞의
백의사내가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시비를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막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에게 일단 시비를 건 이상 결말을 보아야 한다.
상대에게 모욕을 당하고도 가만있는다면 그건 이미
혈륜 막비가 아니다.
그 동안 쌓아올린 혈륜의 찬란한 명성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자를 절대로 살려 둘 수는 없다!
막비의 눈에서 기이한 광망이 번뜩였다.
그와 함께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부르르.......
그의 오른손에 있던 혈륜이 저절로 움직이는
듯했다. 아니, 팔딱팔딱 뛰놀고 있었다.
동시에 그의 손은 혈륜처럼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어디까지가 손이고 어디까지가
혈륜인지를 도대체 분간할 수 가 없었다.
짐작하건대 막비는 자신의 최대최고의 절학을
전개하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무서운 일격이 될 것이고 둘 중의 하나는 죽거나
회복불가능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것이다.
백의사내도 그것을 알았는지 눈빛이 혜성처럼
반짝거렸다.
파르르.......
막비의 손 위에서 마치 생명이 있는 듯 뛰놀고 있는
혈륜은 점점 그 속도가 빨라지더니 종내에는 그
형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백의사내는 태연한 자세로 우뚝 선 채 반짝이는
눈으로 막비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아압!"
찰나, 막비의 입에서 엄청난 호통 소리가 터져
나오며 그의 손에서 회전하고 있던 혈륜이 빗살처럼
허공으로 폭사해 나갔다.
파파파.......
주위 사방이 온통 시뻘건 혈광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대혈칠륜의
최고절예인 혈무천리(血霧千里)인 것이다.
그 패도무쌍한 위력 앞에는
금강동인(金剛銅人)이라도 갈가리 찢겨지고 말 것
같았다.
순간 백의사내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더니
수중에 들고 있던 나무막대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주
간단한 동작이었는데 기경스럽게도 순식간에
나무막대가 여덟 개로 불어났다.
아니 불어난 것처럼 보였다.
나무막대가 여덟 개의 그림자를 그리며 다가들자
폭발하듯 거세게 밀려오던 혈광의 한 가운데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다. 그 구멍 사이로 경악에 가득 찬
막비의 얼굴이 언뜻 내보였다.
"크악!"
순간, 혈광이 사라지며 막비의 입에서 커다란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막비는 입가로 시뻘건 선혈을
내뿜으면서 뒤로 정신없이 물러나고 있었다.
창졸지간에 여덟 개의 그림자 중 여섯 개를
막아냈으나 나머지 두 개를 막지 못하고 옆구리와
허벅지를 강타 당했던 것이다. 그 타격이 어찌나
강했던지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지고 허벅지도 금세
퉁퉁 부어 올랐다.
막비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금시라도 바닥에
주저앉을 듯했다. 하나 그 와중에도 그는 고통보다
오히려 경악을 느꼈다.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조금 전 백의사내가 펼쳐 자신의 혈무천리를 격파한
초식은 분명 복마검법 중의 팔방풍우(八方風雨)라는
초식이었던 것이다.
팔방풍우!
무림에 갓 입문(入門)한 풋내기 무사라도 펼칠 수
있는 하찮은 초식이 아닌가? 그런데 그 팔방풍우가
백의사내의 손에서 펼쳐지자 그 위력은 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막비 자신도 직접 당하지 않았다면 평범한
팔방풍우에 이와 같은 엄청난 위력이 있을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막비가 입으로 폭포수 같은 피를 흘리며 경악 어린
표정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백의사내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왜 더 손을 쓰지 않는 거요? 내게 뭘 느끼게
해주겠다고 큰소리쳤던 것 같은데 그새 마음이
달라졌소?"
그 말에 막비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번에야
비로소 그는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백의사내가 한 말은 얼마 전에 자신의 입으로 했던
말과 같은 것이 아닌가? 막비는 그제서야 무언가를
느낀 듯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 너는 진표와 어떤 사이냐?"
백의사내는 그의 물음에는 대답도 없이 다시 씨익
웃었다. 그 순간 번개같은 그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쐐액!
막비는 뻔히 상대의 발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서도
이상하게도 피할 수가 없었다.
쾅!
"크윽!"
어이없게도 그는 상대의 발길질에 옆구리를 격중
당해 맥없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조금 전에
다쳤던 반대쪽 갈비뼈가 부러지며 그의 코에서 뜨거운
피가 주르르 흘러 나왔다. 막비는 고통을 억누르며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다.
그 순간 다시 상대방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기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막비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상대의 발길질을 피하려 했으나
역시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할 수가 없었다.
상대의 평범한 발길질 속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교묘한 변화가 무궁무진하게 숨어 있어서 그가 어느
곳으로 움직이던 완벽하게 피해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퍽!
"우욱!"
이번에는 아랫배를 정면으로 강타 당하고 앞으로 푹
꼬꾸라졌다. 이번의 발길질은 상당히 충격이 강해서
막비는 한 순간 고통으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무공을
익힌 후 그가 남에게 이렇게 세게 맞은 적은 아직
없었다.
한참 후에야 막비는 간신히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하나 그가 채 몸을 가누기도 전에 다시 예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막비는 사력을 다해
비마보(飛魔步)를 시전 했으나 소용없었다.
단순한 대좌골퇴법(大挫骨腿法)같았는데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백의사내의 발은 한치의 사정도 없이 막비의
아래턱을 그대로 강타해 버렸다.
쾅!
이번에는 아주 벼락치는 듯한 음향이 들렸다.
막비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입뿐만 아니라 코와 귀에서까지 피가 흘러
나왔다. 그의 눈빛이 아주 희미해지며 얼굴이
회색으로 변했다.
"끄으으......!"
그의 입이 열리며 부서진 이빨들이 시뻘건 핏물에
섞여 꾸역꾸역 흘러 나왔다.
막비는 아래턱 뼈가 완전히 박살난 채 바닥에
엎어져서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제서야 백의사내는 발길질을 멈추며 냉혹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떤 기분인지 알겠지?"
막비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입 속은 잘려진 혓바닥과 부서진 이빨들로
피범벅이 되어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백의사내는 잠시 그를 내려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곧 그의 훤칠한 신형은 금화루를 벗어나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다.
백의사내가 사라진 직후, 다시 하나의 인영이
금화루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장내를 둘러보다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막비를 발견하자 그에게로
다가왔다.
막비는 가물가물한 눈을 억지로 치켜 뜨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갈의를 입은 이십
대 초반의 청년이었다.
갈의청년은 막비의 앞으로 다가오자 그를 내려보며
히죽 웃었다. 그 웃음을 보자 막비의 두 눈에 불안과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갈의청년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잔인한 살기가
번뜩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갈의청년은 음산한 미소를 흘리며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막비의 얼굴이 공포로 새하얗게 질렸다.
갈의청년의 오른손이 푸르스름하게 변한 것을 본
것이다. 순간 갈의청년은 오른손으로 세차게 막비의
두개골을 내리쳤다.
쾅!
비명도 없었다.
막비는 머리통이 박살난 채로 즉사하고 말았다.
"쳇!"
갈의청년은 막비의 피로 더러워진 자신의 손을
인상을 찡그리며 내려보다가 피묻은 손을 막비의
옷으로 대충 닦은 후 허공을 올려 보며 다시 웃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자신이 의도한 대로 모든 일을
성취한 후 기뻐하는 듯한 그런 웃음이었다.
갈의청년은 한참을 소리없이 웃다가 몸을 날려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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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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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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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글구 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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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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