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인권 인터뷰
“곧 나올 새 앨범을 기대해주십시오!”
지난 7월 우연히 방송국에서 전인권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됐을 때, 대뜸 서운한 마음을 건넸다. 이전에 그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이 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필자가 쓴 책 '우리 대중음악의 큰 별들'에도 부득이하게 전인권의 이름이 빠져야 했다. 하지만 전인권이야말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한국 음악계의 큰 별 아닌가.
“그때는 왜 인터뷰를 거절하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인터뷰를 거절하다니. 난 거절한 적이 없는데요.” “그래요? 만나기가 부담스러워서 사양한 것으로 전 들었는데요.” “아니에요. 제가 왜 임진모씨를 안 만나요? 뭔가 (과정이) 잘못 됐나 보네.”
전인권은 그 자리에서 바로 인터뷰를 하자고 흔쾌히 약속했다. 그가 단서를 단 것이라고는 '이혼 같은 얘기는 빼고'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뷰 일정 잡기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며칠 뒤 다시 방송국에서 그와 부딪쳤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큰 스케줄이 줄줄이 이어진 관계로 날짜를 확정지을 수가 없었다.
다시 섭외 차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요즘 대상포진을 앓고 있어서 더욱이나 시간이 여의치 않았어요. 미안합니다. 바로 만나죠. 시간을 잡아서 전화 드릴 게요.”라고 했다. 8월17일 오후5시 서울 종로 삼청각에서 비로소 대화의 시간이 마련되었다.
그는 약속한 현장에 먼저 나와 있었다. 거물이 베푸는 그러한 매너는 인터뷰섭외를 둘러싼 한 달 간의 심적 동요(?)를 후련히 씻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는 다시 한번 대화의 조건을 확인시켜 주었다. “음악 얘기만 하는 거요!” 하지만 그리 까다롭게 들리지 않았다.
삼청각 내 전통찻집의 자리에 앉으면서 전인권은 알약이 들어있는 작은 병 두개를 꺼냈다. 전화로 말한 대상포진 때문에 복용하는 것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신경계통의 병이에요. 한두 군데가 아니라 온몸에 통증을 일으켜요. 혈압도 조금 높아진 것 같고..” 나이 오십 줄(54년생)에 들어선 만큼 건강에 주의해야 할 때라고 하자 그는 “그러나 건강은 전혀 문제가 없어요. 이번의 대상포진을 빼고는 몸 상태는 완벽해요.”라고 답했다. 사실이 예의 어눌한 말투였지만 목소리나 자세나 중력이 실려 있었다.
TV에서든 공연에서든 전인권을 본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그 특유의 개성적 외모와 복장을 떠올리게 된다. 마치 감지 않은 듯 무질서하게 뻗쳐진 이른바 폭탄 머리모양, 검정색 선글라스, 검은색 티에 역시 검정색 재킷 그리고 별로 깨끗해 보이지 않는 청바지...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손쉽게 스케치할 수 있는 특징적 외형이다. 이 땅의 어떤 대중예술가도 외모로 그런 '독자적 브랜드'를 확립한 사람은 없다. 그 자유분방함, 특히 헤어스타일은 지저분함이 아니라 멋짐으로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심지어 필자처럼 모발에 문제 있는 사람에게는 열등감마저 불러들인다. 그는 자신이 봐도 멋진 모습이라며 인터뷰어의 기를 죽였다.
언제부터 그렇게 머리를 기른 건가요? 17살부터였죠. 그때 제가 멋을 굉장히 부렸어요. 장발에 흰 셔츠에 청바지 스타일을 그때 벌써 굳혔죠. 머리를 기르니까 멋있어 보이더라구요. 한번은 대마초 피우며 거울을 봤는데 내가 봐도 괜찮았죠.
이제 '전인권브랜드'라고 할 외형인데, 그 모습으로 계속 갈 생각인가요? 그럼요. 남 보기에 자유분방해 보이고 무엇보다 우선 내가 편해요. 옷차림이나 치장이나 하나로 가는 거죠. 어느 정도 멋은 부려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겉모습에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외모에 신경 쓰는 것보다 내 할 일을 하는 게 중요하죠. 어릴 적 한창 히피문화를 동경하던 당시 그 중에서 평화 사랑 자유와 같은 히피의 좋은 측면에 매료되었는데, 장발을 비롯한 지금의 모습은 거기에서 비롯된 거예요. 평화 사랑 자유는 제 삶의 목적입니다.
실례지만 세수나 목욕은 자주 하십니까? 얼핏 봐선 몸단장에 게으른데서 나오는 모습 같기도 하거든요. 매번 같은 차림인데 검정색 재킷이 여러 벌인가 봅니다. 대여섯 벌 되요. 선글라스도 그 정도 있고. (조금 목소리를 높이며) 세수요? 당연히 하죠. 안 씻는다는 게 말이 되나. 남들 하는 정도는 다 해요. 게을러서 이런 모습이 된 것은 전혀 아니에요.
광고에서 히트한 '인권이 라이프'의 실제는 어떤가요? 하루 생활이 어떤지 궁금합니다. 광고에서 비쳐진 모습과 실제가 똑같아요. 실제와 이미지가 다를 리 없죠. 아침에 일어나면 음악부터 들어요. 요즘에는 60-70년대에 활약한 폴 로저스(Paul Rogers)란 영국가수에 푹 빠져있죠. 한마디로 세계에서 가장 노래잘하는 가수예요. 제가 얼마 전까지 8명의 여성과 사귀었어요. 그런데 지금 다 끊었어요. 음악이 좋아서요. 음악 듣고 나면 씻고 밥 먹고 스케줄 전선에 나서죠. 곧 신보가 나오거든요. 작업에 이리저리 바빠요. 8인조 전인권밴드와 하루 종일 연습하고 녹음하죠. 때문에 무조건 방송은 관두었습니다. 단 하나, 현재 제가 멤버와 매니저 등 14명을 먹여 살리고 있거든요. 그래서 돈벌이 차 두 군데 밤업소를 뛰고 있습니다.
신보라는 말을 듣자마자 뒤따른 생각은 '벌써?'였다. 지난해 4월 그는 <데스트니(운명)>라는 제목의 통산 세 번째 앨범을 발표한 바 있다. 그것은 무려 14년의 신작 공백을 깨고 내놓은 작품이었다. '사랑한 후에' '돌고 돌고 돌고'가 실린 첫 솔로 앨범이 1988년에 나왔고, 이듬해 두 번째 앨범 <지금까지 또 이제부터>를 내놓았으니 15년 동안 겨우 3장의 앨범을 발표한 셈이다.
그런데 그 지독한 소산(小産)주의자가 1년 반 만에 다시 앨범을 낸다는 것이다. 적어도 2005년까지는 앨범 구경을 못할 줄 알았다. 발표 템포가 상당히 빨라진 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 음악시장은 걷잡을 수 없는 침체의 미궁에서 허우적거리는 실정이다.
지난 앨범 <데스트니>는 반응이 예상에 미치지 못했는데... 제가 그 앨범을 내기 전 3년 동안 무지 슬펐거든요. 이혼하고, 많은 사람들과 헤어지고. 약물을 비롯해 사적인 문제로 우울한 날들이 많았지요. 앨범은 그것들이 극복이 되지 않은 채 여전히 슬퍼있었어요. 방송작가 송지나씨 말대로 전인권의 매력은 끝까지 우기고 강하고 그러면서 낙천적인 모습에 있죠. 그런데 앨범은 그렇지를 못했어요.
사실 전인권의 매력하면 고음에서 시원하게 치솟으며 듣는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앨범은 고음부분에서 시원한 게 아니라 자글자글하게 들려서 실망했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인정해요. 그 앨범은 일본인 하찌가 프로듀서를 맡았거든요. 그는 앨범의 완벽성에 중점을 두었어요. 앨범은 편하게 만들고 강한 면모는 라이브에서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었죠. 그러다보니 강한 울림이 줄어들었고 우리가 갖고 있는 멋과 풍자가 부족했어요. 한마디로 너무 얌전했다고 할까. 들국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없었던 게 사실입니다.
우리의 멋과 풍자라는 게 뭔가요? 우리 음악만이 지니고 있는 멋과 풍자가 분명히 있어요. 그것이 우리 음악의 매력이죠. 잘 아시겠지만 록이라는 게 블루스에 발전해온 거잖아요. 그런데 그 블루스는 우리의 창과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록의 매력은 우리 가락 즉 민요와 연관이 있다는 말이죠. 록을 한다지만 그것을 살린 우리 록은 없다고 봅니다(이 대목에서 그가 약속장소인 삼청각을 잡은 데는 부근이 그가 자란 고향이기도 하고 일화당 공연장과 찻집 등 전체가 전통문화의 공간이라는 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새 앨범은 결론적으로 우리 느낌을 강조하면서도 가창은 강력한 게 되겠군요. 그렇게 될 겁니다. 곡도 내가 많이 쓰고. 전권을 제가 쥐고 작업 중에 있어요. 3곡의 가사만 남았죠. 전체적으로 60년대 록 풍이 될 겁니다. 우리 냄새가 배어나고 강한 얘기가 될 거예요. 이제 슬픔은 없으니까요. 앨범을 지난해에 이어 올해 또 내는 것은 이 때문이에요. 내 자신을 다시 찾은 거죠. '전인권소리'가 나올 테니 이번 음악 기대해주세요. 정말 좋을 겁니다.
지난 얘기지만 14년 만에 신작을 낼 만큼 음반은 왜 자주 내지 않았던 겁니까? 앨범을 적게 내는 것은 과거에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얘기했다는 판단 때문이에요. 음악적 변화가 없을 때는 낼 필요가 없어요. 대신 그 공백동안 새로운 것을 찾아 무진 고민했죠. 왜 우리한테는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 같은 곡이 없을까, 왜 우리 음악은 해외로 수출이 안 되는 건가 등등. 그래서 창도 배우고 속초에 8개월간 득음한다고 발버둥치고. 음악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런 고민해야 되는 것 아닌가요. 음악은 감성을 전달하는 건데, 테크닉이라는 그릇이 있어야죠. 그래서 (테크닉을) 열심히 연마해야 됩니다. 모자라는 상태에서 자꾸 앨범을 내는 것은 말이 안돼요.
좀 전에 들국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란 말을 했는데 '들국화세대'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요즘 유행하는 7080세대에 대한 구체적이면서 대표적인 상징어이기도 합니다. 그 말을 듣는 기분이 어때요? 나로서는 영광이죠. 특정 음악가의 작품이 세대와 연관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그것도 그렇지만 들국화세대는 희망과 꿈이 키워드잖아요. 들국화가 당시 사람들에게 희망과 꿈을 주었다는 점에서 그런 말이 나왔겠죠. 정말 특별한 느낌입니다.
들국화세대라고 해서 그가 비단 기성세대에게만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안다. 세대에 관한 한 가히 '전천후' 인기인이다. 물론 이것은 수더분하고 약간은 망가진 모습이지만 너무도 개성적이고 자유롭게 비쳐진 위성방송 광고, 바로 '인권이라이프!' 덕분이다.
인터뷰 하루 전인 8월16일 북한 금강산 콘서트를 막 다녀온 그는 “그 무대에 같이 출연한 젊은 가수보다 내가 더 인기 있더라”며 껄껄 웃었다. '인권이 형!' 하며 달려든 초등학교 학생들의 사인공세에 시달렸다는 것이다. 본인은 이에 대해 “어리지만 그들도 나를 보면 희망적이고, 강렬함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나름대로의 이유를 풀이했다.
인권이라이프가 왜 주목을 받았다고 보나요? 조금은 지치게 만드는 이 시대에 사람들로 하여금 소속감을 느끼게 한 것이라고 봐요. 뭐에 대한 소속감이냐 딱 잘라 말하기 어렵지만 사람들은 아무튼 뭔가에 소속되고 싶은 마음이 있잖아요.
아까도 대마초 피며 거울을 봤다는 말을 스스로 꺼냈는데, 아무래도 전인권씨 하면 대마초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새삼스레 들춰내고 싶은 기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마초사건의 고초를 겪으면서 그것에 대한 회한이나 감정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말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나라 온 국민이 대마초를 피워야 한다는 거예요. (왜냐고 묻자) 왜라는 질문이 도리어 이상하지. 반성처럼 즐거운 것은 없잖아요. 대마초를 피우면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싸움하는 것이 싫어져요. 저도 어렸을 때 폭력전과 2범이었거든. 대마초 흡연 이후 싸움과 완전 작별했죠. 그리고 삶이 흥미로워져요. 어차피 누구나 하루를 보내게 되는데 대마초는 하루를 진짜 애드립으로 재미있게 만들어준다는 말입니다.
전인권의 화법은 비록 어눌하지만 차분하게 더듬어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솔직한 내용들이지만 비유법에 따른 비약이 만만치 않다. 인터뷰 중에도 “어렵네요!”를 연발했더니 “뭐가 어려워요? 쉬운 말들인데.” 하며 도리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정말이지 듣다 보면 무릎을 딱 칠 정도로 기막힌 비유에다 공감할 만한 말이 수두룩했다.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요즘 사람들은 설렘과 전율이 사라졌어요. 뭐든 아무런 감정이 없어. 예를 들면 '이대 앞' 같은 말도 그래요. 우리는 그 말을 들으면 무조건 설렜잖아요. 지금도 그렇고. 특히 나같이 공부 못한 사람들은 공부 잘한 여자들을 좋아했거든요.” “우리는 정말 문제가 많아요. 그간 잘못된 관행과 질서 때문에 사람들이 솔직하지 않죠. 그러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쟁이가 됐어요.” “로마교황청에 일제히 날아가는 비둘기를 봐요. 그 비둘기들은 메시지를 전하고 남기는 미디어나 다름없죠. 그 비둘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살아가면서 느꼈던 얘기를 그대로 쓴 거예요.”(들국화가 말해주듯 항상 노래에 사회적 메시지가 깃들어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하며) “만족스럽지 못해서 그렇죠. 폴 로저스가 부른 노래 'Can't Get Enough'를 봐요. 젊음은 기본이 불만족이거든요. 거기서 나의 비명이 나온 겁니다. 괜히 질러대는 게 아니죠.”(외모든 노래든 한창때 왜 그렇게 삐딱했느냐는 말에) “우린 음악을 하더라도 치열했어요. 세포가 움직이는 기분으로 곡을 썼죠. 요즘은 그런 음악이 없어요. 전부 이등병 일등병 노래야. 장교급 노래를 근래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요즘 음악 풍토에 대해 개탄하면서)
음악적으로 근래 가장 신경 쓰거나 고민하는 점이 있다면? 60년대 외국 록을 들으면서 그 넓고 순수한 점에 끌립니다. 하지만 그 음악은 그들의 것이죠. 전 한국인이니 우리 음악을 해야죠. 그런 점에서 '번역'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있어요. 번역은 또 다른 창작의 재미가 있죠. 우리 것으로, 전인권의 것으로 창조적 각색을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아까 말한 우리만의 멋과 풍자가 나오겠죠.
이제 음악계의 어른입니다. 어른의 눈에 지금 음악계는 어떻게 비쳐지고 있나요? 옛날부터 누누이 클럽 음악이 중요하다고 역설해왔어요. 클럽활동은 한마디로 라이브고 훈련이에요. 들국화도 무명시절 4년 동안 클럽을 전전하며 연주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서야 히트가 났어요. 지금의 가수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저 만들어준 음악을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가수에 대한 신비나 두근거림이 있을 수 없죠. 한마디로 요즘은 가수를 훔쳐보는 재미가 사라져버렸어요.
그동안 부른 노래 가운데 가장 만족스러운 곡은요? '사랑한 후에'죠. 외국 팝송을 번안한 것인데 남자들만의 우수와 괴로움이 표현된 곡이라고 봅니다. '돌고 돌고 돌고'도 괜찮고 들국화 2집에 있는 '너는'도 맘에 들어요. (85년 9월에 발표되어 '행진' '그것만이 내 세상'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등 수록곡 모두가 애청 애창된 들국화 1집은 왜 꼽지 않느냐고 묻자) 1집은 사랑스럽죠.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아요.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이 노래면 사람들이 좋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리고 그 곡이 히트된 때였죠. '행진'이 그랬어요.
그럼 가장 괴로웠던 때는요? 대마초사건으로 날 잡아갔던 놈들에게 치사한 방식으로 취조를 당했을 때였죠. 87년 9월이었어요. 그건 사람대접이 아니야. 그래서 네 번째 잡아갔을 때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들에게 항변했어요. '너희가 뭐길래 날 잡아가느냐? 망치더라도 내가 나를 망치는 것 아닌가. 국가가 개인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느냐?' 라고 말이죠.
이것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대마초사범으로 수차례 낙인찍히면서 그의 자녀들은 과연 어떤 심정이었는가를. 22살 딸인 인영과 13살 중학생 아들인 진환, 아마도 그들은 수도 없이 마약장이의 아들딸이라는 멍에를 진 채 주변의 가혹한 눈초리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래서 전인권은 이렇게 선언한다.
“죽을 때까지 아이들의 명예를 찾아주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고통 받은 우리 아이들을 위해 끝까지 뛸 거예요. 우리 딸 아들은 아버지를 너무 사랑해요. 애들에게 아버질 믿느냐고 물으면 가슴 시원해질 정도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전 꼭 승리할 겁니다. 패자가 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그러기 위해 끝까지 꼬장을 부리며 살 겁니다.”
“이렇게 얘기하다 끝이 없겠다”며 시간을 본 그는 불쑥 대화의 마침표를 찍으며 다음 스케줄을 위해 자리를 떴다. 사실 인터뷰 중간 중간 그는 전인권밴드의 숙소를 섭외하느라고 연신 핸드폰과 씨름했다. 택시를 불러 삼청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꼭 할 얘기가 있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화젯거리는 아니었다. 거장 음악가의 말이라기보다 단지 한 중년남자의 권고였다. 그랬지만 그 말도 인터뷰에서 한 여러 언급처럼 알아듣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우리 인생은 무지 슬프고 외로워요. 하지만 생명은 빛나는 겁니다. 이걸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생명은 곧 희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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