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루카 6,36-38
완전한 용서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많이 들어본, “뿌린 대로 거둔다.” 법칙입니다. ‘부메랑’ 법칙이라 해도 될 것입니다.
법칙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심판받지 않으려면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 됩니까? 잘 안 됩니다.
영화 ‘밀양’에서는 신앙으로 용서를 하려고 해도 잘 안되는 불편한 상황을 잘 그려냈습니다.
회개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느낌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먼저 어떻게 하면 남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을지를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그 책임을 물을 때 다른 이들에게 책임을 떠넘깁니다.
이렇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심판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심판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타인을 심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자신부터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였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두려워 몸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 것입니다.
자기를 심판하지 않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솔직함입니다.
타인의 판단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부끄러운 것을 쉽게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판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도 아니요, 이웃도 아니요 하느님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임을 믿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할 때 저절로 자기가 자기를 심판합니다.
이것으로 충분할까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용서를 위해
반드시 여기까지 이르러야 했습니다. 바로 나 자신을 심판하는 내 안의 심판자,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는 일입니다. 자아는 ‘나의 뜻’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아니면 절대 완전히 죽지 않고 계속 나를 심판합니다.
영화 ‘반지의 제왕: 반지 원정대’에 나오는 아라곤은 왕국 곤도르의 정통 후계자로 태어났으나,
자신의 조상이었던 이실두르가 사우론에게서 ‘절대반지’를 빼앗고도 끝내 파괴하지 못한
과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두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이실두르의 그 선택은 훗날 사우론이 다시 힘을 키우는 빌미가 되었고, 후손인 아라곤은
“나도 언젠가 조상처럼 약해져서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와 자격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부터 그는 은둔자처럼 숨어 지내며 방랑 생활을 이어갔는데,
이는 스스로 “내가 왕의 자리에 설 자격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내가 힘을 발휘하면, 혹시 조상 이실두르처럼 반지와 악의 유혹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마음 한편에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자기 정죄가 쌓여서, 아라곤은 왕좌를 이어받을 수 있는 용기도 없었고,
왕이 되어야 한다는 소명조차 뿌리 깊이 거부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반지 원정대에 함께하면서 서서히 자신의 두려움과 조상의 죄책감을 이겨 내기
시작합니다. 절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해 길을 떠난 이들과 동행하는 동안,
아라곤은 단지 무력이나 권위가 아닌, 진정한 용기와 헌신으로 동료들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조상과는 달리 “절대 반지의 악한 힘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없애는 사명을 완수하도록 동료들을 돕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스스로는 반지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반지를 지닌 프로도와 그 곁의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숱한 전투와 유혹 속에서도 ‘반지의 힘을 탐내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켜 냅니다.
결국 그는 “이실두르가 실패했던 과제를 후손인 내가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으로 모든 두려움을
떨쳐 내고, 인간과 엘프, 호빗과 드워프가 하나 되는 연대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프로도가 반지를 파괴하기까지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사우론의 군대를 상대로 과감히
전쟁을 걸고, 자신의 힘을 다해 동료들을 지켜 내는 장면에서, 그는 더 이상
“조상의 잘못된 길을 밟을까 두려워 숨어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됩니다.
그렇게 반지가 결국 파괴되고 사우론의 권세가 무너져 내렸을 때, 아라곤은 마침내 스스로
“나는 조상과 다르며,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책임 있게 완수했다”는
내적 확신을 얻게 됩니다. 그 결말로 아라곤은 ‘엘레사르’라는 이름을 받아 곤도르의 왕으로
즉위하고, 왕이 된 이후에도 과거의 경험과 겸손을 잊지 않으면서
백성과 중간계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훌륭한 통치자가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를 가리려는 노력을 멈췄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마련하신 용서의 가죽옷을 입었어야 합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또 과거의 망상이 자기들을 괴롭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일’에 매진했어야 합니다. 그 뜻에 자기 뜻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당신의 뜻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셨던 것처럼.
여기까지 오지 않으면 자아는 끊임없이 나를 괴롭혀 다른 이들을 심판하게 만들 것입니다.
탈출기에서 ‘모세’는 사실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민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민족에게 되돌아가야 했습니다.
하느님은 그러한 직무를 맡기심으로써 과거의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결국 나에 대한 죄책감을 없애는 가장 완전한 길은 그분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믿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자격이 없다’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타인을 판단하면서 합리화하려고만
합니다. 죄책감이 없었다면 분명 사명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사명을 받아들여 수행함으로써
이전의 나를 판단하던 자아는 죽습니다.
자아를 죽이는 가장 완전한 길은 하느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입니다.
자격이 있다고 하느님께서 인정해 주셨고 내가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나의 발밑에서
계속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뱀의 소리는 그저 쐐야 쐐야 하는 소리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렇게 뱀이 무력하게 될 때 나는 의로움으로 타인을 심판할 존재가 아닌
용서할 존재로 새로 태어납니다.
이것이 완전한 용서의 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가톨릭 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