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가입해 있는 의인 수필모임 '수석회'에서 수필집이 나왔습니다.
앞으로 몇번에 나누어 글을 올리겠습니다.
개인 연구실을 마련하고
나의 반생을 훌쩍 넘은 33년 4개월의 의과대학 교수생활을 마치게 되었다.
그동안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에서 계속 근무는 하였지만 연구실은 여러 번을 옮겨 다녔다.
군대를 제대한 직후 1980년 부속 필동병원에 처음 자리 잡은 연구실은
공간이 별로 없어 외래를 연구실로 같이 사용하였다.
복도에서 환자들 떠드는 소리가 연구실에 그대로 들리고
내가 방을 드나드는 것이 외래 간호사실에서 빤히 보여 일거수일투족이 모두 노출되었다.
사실 그 시절은 교수진이 적어 나의 전공 신장 분야 아닌 환자들도 보았고,
주니어 스태프로 여러 가지 잡다한 일을 하다 보면 연구실에 조용히 있을 시간도 별로 없었다.
1984년 용산병원으로 옮겨와서는 구관의 넓은 연구실을 두 교수가 잠시 같이 썼다.
붉은 벽돌에 6․25전쟁의 상흔인 총알구멍이 남아 있는 철도병원 옛 건물로
지금은 서울의 유형문화재로 지정이 된 곳이다.
천장이 높았던 이 방은 여름철에는 시원하였으나 겨울철은 낡은 창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찬바람이 말이 아니었다. 이후 진료부장과 기획실장의 보직을 맞게 되어
응접세트까지 갖춰진 넓은 곳으로 이사를 하였다.
이 역시 연구실 앞에 비서실이 있어 입출입이 그대로 비서들의 눈에 잡혔다.
종종 건너편 병원장 실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는 불만 많은 환자들도 조마조마하게 보아가면서.
보직이 끝난 후 한동안 궁색하게 인공신장실 옆의 작은 연구실을 쓰며 신장실 환자들과 가까이 지내었다.
신장실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알 수가 있었으니까 한편으로 환자 관리에 편리하였다.
기억나는 일은 어느 조용한 토요일 아침, 갑자기 인공신장실에서 ‘아악’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놀라 들어가 보니 중심 정맥도자를 통하여 응급혈액투석을 받고 있던 제초제 음독환자가
삽입된 도자를 교환하다 그 끝이 심장에 닿아서 생긴 일이었다.
이 방의 문은 이중 합판으로 되어 있어 밖에서 가볍게 ‘톡, 톡, 톡’ 노크를 하여도
안에서는 ‘탕, 탕, 탕’ 크게 들렸다.
나에게 찾아오는 대부분의 방문객들, 환자나 그 보호자 아니면 전공의나 학생들은
뭔가 아쉬움이 있어 나에게 부탁하러 오는 사람들인데,
이러면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기분부터 나빠진다.
재작년 용산병원이 문을 닫아 떠나기 전 마지막 나의 연구실은
창으로 봄이면 움트는 나무들과 가을이면 담쟁이 단풍까지 볼 수 있어 계절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방은 옛 철도 병원 특실이어서 화장실까지 있었고. 앉은자리에서 걸상을 옆으로 돌리면
다른 보조 컴퓨터와 커피포트, 반대쪽에는 미니 오디오와 냉장고 등.
그러나 손님 접대용 의자는 궁색하게 두 개만 있는,
나에게는 편했지만 찾는 이들에겐 너무 불편한 곳에서 지냈다.
연구실 밖 복도 끝에 인공신장실과 한 층 내려가면
나의 전용외래가 있어 방문객들은 주로 그곳에서 만나곤 했었다.
또 흑석동병원과 용산병원을 1년 반 동안 같이 근무를 하느라 용산으로 출근하여 흑석동으로 퇴근,
아니면 거꾸로 출퇴근하며 지낼 때도 있었다.
흑석동병원에도 규모는 작으나 갖출 건 모두 갖춘 작은 연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다시 흑석동병원으로 왔다. 오래된 연구실을 이사하다 보니
끌고 다닌 짐들 중 버려야 할 것이 정말로 많아 내 스스로가 놀랄 지경이었다.
책장 다섯 개 중 세 개는 책을 포함해 버리고, 캐비닛 한 개도 통째로 없앴다.
가지고 있던 많은 것 중 좋은 것은 남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흑석동에 새로 준비된 연구실은 창으로 멀리 국립현충원 담과 서달산 생태공원이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
하지만 향이 나빠 여름철에는 실내가 복도보다 더 더웠다.
그래도 복도를 나가면 나의 전용 소규모 정원(이용하는 사람들이 없어 나의 전용이었지만)도 있었다.
불편한 점은 보안카드가 있어야 교수실 복도를 들어갈 수 있어 외래에서 보안카드를 잊고 올라왔다가
연구실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허탕을 치는 수도 있었고,
엘리베이터가 환자용이 아니면 서지 않아 불편하기도 했다.
외래에도 나만의 방이 있어 편하게 지내면서 배가 출출할 때는 항상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
인공신장실에 들러 입을 다실 수도 있었다.
이제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게 되었다. ‘그래, 병원 가까운 곳 오피스텔에 개인 연구실을 하나 마련하자.’며
석 달 전부터 인근 부동산 소개소에 알아보았다.
그 이유는 첫째, 집에는 늘어난 짐들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1978년부터 살던 집에 아직 애들까지 같이 살고 있으니.
둘째, 1974년 결혼 후 무의촌 파견 6개월은 시골에서 하루 종일 처와 같이 지냈다.
1년간 아내와 떨어져 지낸 군대 전방 생활을 제외하면 나머지 기간은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일이 끝나면 퇴근하는 생활을 거의 사십 년이나 해왔으니
백수가 되어 아침부터 하루 온종일 집에 박혀 있으면 여러 모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웬걸, 이 동네에는 학생들이 많아 원룸텔은 있어도 오피스텔은 아예 없었다.
연구실을 구한다니 보여주는 공간들은 너무나 이상하였다.
간신히 구한 곳이 상권이 죽어 있는 한강변 아파트 상가의 약국 하던 자리를
권리금도 없이 보증금에 월세 얼마로 2년간 계약을 맺었다.
이곳의 좋은 점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는 내가 근무하였던 병원이 가깝다는 점이다. 아직도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동안 내가 보아주면서 친하였던 환자들, 몸이 불편해서 나를 찾는 친구들, 친척들, 다른 지인들도.
이럴 때 마을버스 세 구간, 걸어서도 십여 분밖에 걸리지 않은 곳이라 금방 약속을 하고 갈 수가 있다.
둘째, 내가 오래 지내던 곳이라 식당, 커피 집, 약국 등 모두 꿰뚫고 있어
구두도 여기서 닦고, 이발도 여기서 하고 모든 게 편하다.
셋째, 집에서 차로 20분이면 오고 주차도 쉽다. 40분이 걸리지만 집 앞에서 바로 오는 버스가 있어 교통도 편하다. 넷째, 평소에 내가 즐겨 산책하는 국립현충원, 동작충효길이 한강변 산책로와 연결이 쉽다.
다만 옆 가게와 석고보드로 칸막이를 해 방음이 잘 되지 않은 것과
높다란 창밖으로 볼 만한 전망이 없다는 것이 아쉽다.
하기야 좁은 감방에서도 훌륭한 저서들이 나오고 전직 모 대통령은 그곳에서 독서로 일가견을 이루었다니까
나도 본을 보자. 또 하나 어디 가서 밥 먹으려 해도 갈만한 데가 없는 것도 흠이라면 흠이지만,
아직 병원에 가면 쓸 수 있는 식권도 남아 있어 싼 밥을 먹을 수 있으니 이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 아닐까?
아니면 나가서 같이 밥 먹을 동료들도 있고. ‘어디 입에 맞는 떡이 있으려고’ 하고 자위를 해본다.
이사 후 방 정리를 하였다. 연구실은 그럭저럭 혼자 쓸 만한 곳이다.
새로 벽을 도배하고, 낡은 환풍기를 바꾸고 신장실에서 선물한 에어컨을 달고, 책장에 책을 가지런히 꽂고,
가져온 미니 오디오도 연결하고, 친한 간호사들이 사다 준 Esopresso 커피머신도 선반에 얹어놓고,
한쪽 벽에 그림과 액자를 걸었다. 쓰던 작은 냉장고를 바꾸었고 소파 세트도 나의 오랜 친구가 선물해주었다.
문패도 달았다. 문패라야 프린트한 걸 비닐 코팅한 것이다. 이름은 나의 호를 딴 ‘慶山齊’. 그런데 곰곰 생각해 보면 가까이에 효사정이 있고 멀리는 압구정이 있으니 경산제에서 ‘慶山亭’으로 문패를 바꾸어 다는 게 좋을 것 같다. 훨씬 멋스럽지 않은가.
앞으로 당분간은 여기서 늘 해오듯이 혼자서 빈둥빈둥 지낼 예정이다.
적당한 시간에 찾아와서 책 보고 음악 들으며 컴퓨터도 들여다보고,
이도 싫증나면 나가서 한참 걷기도 하고.
볕바른 가을이 오면 묵혀두었던 시집을 들고 나가 낙엽 지는 국립현충원 경내나
흐르는 한강 물을 바라보며 읽으면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첫댓글 유유자적하는 노선비의 여유로움이 대단히 부러운데 나무도 각개 용도가 있으며 동물도 다 태어난 용도가 있는 법이다. 말은 뛰라고 태어난 동물이며 낙타는 사막의 배로 태어났으며 노새는 짐을 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그럼 나는 ? 나는 노새로 태어난 인간이다. 따라서 노새에게 짐을 지지말라고 한다면 그는죽으라는 말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나는 노새다. 그런데 '경산정' 보다는 '경산제'가 더 좋을 듯한데 그저 내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그 연구실, 겨울에 난방은 어떻게 하십니까 ?
패널 히터와 전기 라디에이터 난방 둘로 하지요.
일반전기면 몰라도, 가정용 전기면 가격이 꽤 나갈 것 같습니다.
연구실 부럽습니다. 언제 한번 놀러가도 되나요?
동기들 한 번 초청하라. Socrates 는 내집이 비록 작다하나 친구들로 가득할 수 있다면 고대광실에 살면서 외로운 친구보다 나을 것이라고 했는데 약간의 음식과 술 한 잔이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음악은 나와 영식이가 준비할 것이고......
히히 한번 고려하마.
그 동안 바쁘게 지냈으니 이제 시간적 여유를 갖고 인생을 연구하며 즐겁게 지내야지요. 경산님 연구실이야기가 나오니 예과때 문리대 건물에 마이트 연구실이 생각나는구려.
본과 계단 강의실 안쪽의 MGR방은 어떡하고. 이문호선생한테 한번 혼이 났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