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신 100주년 朴正熙를 생각한다
아버지와 딸, 극과 극의 차이가 만든 그리스적 비극
-하나 빠진 것은 관중의 연민이다.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박정희 전기 저자)
전두환, 노태우의 충고
2002년 초 박근혜(朴槿惠) 의원이 한나라당을 탈당, 대통령 출마를 준비할 때 전두환(全斗煥), 노태우(盧泰愚) 두 전직 대통령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두 사람의 충고가 같았다고 한다.
“내가 대통령을 해 봐서 잘 아는데 한국에서 대통령직을 끝낸 뒤 칭찬 받기가 매우 어렵다. 박 의원이 그렇게 되면 아버지까지 욕보이게 된다.”
이 말을 전했더니 박 의원은 듣기만 했다고 한다.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12월17일자에 ‘청와대의 딸’이라는 제목의 무기명 칼럼을 실었는데 최순실 사태를 문학적으로 설명하였다. 박 대통령의 몰락은 신파극과 코미디적 요소(정유라의 애완견이 사건의 발단)가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 비극 같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 잡지는 그러나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 부족한 게 있다고 했다. 그것은 ‘관중의 연민’(the pity of the audience)이다.
나는 TV토론이나 대중강연장에 나가면 이런 말을 한다.
“우리를 가난과 굶주림에서 구출하고도 비명(非命)에 간 박정희 육영수의 따님에 대하여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무슨 값싼 동정심이냐는 비판이 있을 법한데 의외로 수긍하는 이들이 많다. 이코노미스트는 칼럼의 마지막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부모의 사진들과 유품(遺品)들에 둘러싸여 살면서 그는 젊은 시절의 외로움에서 벗어나 성숙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침을 뱉은 딸
2012년 9월24일 기자회견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사과를 했다. 박정희의 역사적 평가를 결정짓는 5·16군사혁명과 유신선포는 딸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과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박정희는 한 번도 두 조치가 정치발전을 저해하였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자신의 역사적 결단으로 일기에서도 당당하게 자랑하던 일인데 딸이 사과한다? 나는 ‘이제는 딸이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는구나’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 다음 날, 부산 사람이고 경남고 출신이며 골수 박근혜 지지자인 60代 후반 인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이렇게 말하였다.
“어제 사과하는 것 보고 박근혜에게 정나미가 떨어졌습니다. 아버지를 지키지 못하는 딸이 나라를 어떻게 지킵니까? 보통 아버집니까? 대한민국 최고의 아버지 아닙니까? 아니 딸이 아버지를 고발하여 대통령이 되겠다는 겁니까? 그러면서 어머니를 죽인 김정일은 왜 찾아가 만나요? 박근혜가 사람 쓰는 것 보세요.”
그날 이런 전화도 받았다. 유신시절 정보부에서 근무하였던 60代 인사였다.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지만 박정희를 민족의 지도자라고 확신하고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악역(惡役)을 맡았습니다. 그 역할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박근혜가 무슨 자격으로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과하나요. 박정희를 믿고 따랐던 내 인생은 뭐가 되나요? 대통령이 된들 좌파에 끌려 다니다가 끝날 것입니다. 차라리 좌파가 대통령이 되어 국민들이 정신을 차리는 게 낫겠어요.”
박근혜 씨는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아버지의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아버지를 욕보인 점이 한두 번이 아니다. ‘대통령이 되려면 인면수심(人面獸心)의 괴물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올해 탄신 100주년을 맞는 이 위대한 인물의 평가에 딸이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전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후계자에 성적표에 의하여 역산(逆算)되는 경우가 많다. 박정희의 산업화 성공 덕분에 근대화의 기초를 놓은 이승만(李承晩)이 높게 평가될 수밖에 없고, 전두환-노태우의 성공적 경제성장과 민주화 조치가 역사 속에서 박정희에 대한 부동(不動)의 자리매김이 가능하게 하였다.
박정희의 성적표
32년에 걸친 세 군인 대통령 시절은 고려 무신란(武臣亂) 이후 약 800년 만에 군인이 집권한 예외적 시기인데 예외적 국가발전을 이룩하였다. 이 예외의 시대를 연 박정희는 가난과 망국(亡國)과 전란(戰亂)의 시대를 살면서 마음속 깊이 뭉쳐 두었던 한(恨)의 덩어리를 뇌관으로 삼아 잠자던 민족의 에너지를 폭발시켰던 사람이다. 니체의 초인(超人)에 대한 정의(定義)대로, 썩은 강물 같은 세상을 삼켜 바다 같은 새로운 세상을 빚어낸 사람이다. 쏟아지는 비난에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일체의 변명을 생략한 채, 부하가 쏜 총탄에 가슴이 뚫리고도 ‘체념한 듯 해탈한 듯 담담하게(신재순 증언)’ 최후를 맞은 이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 박정희였다. 그가 죽을 때 ‘허름한 시계를 차고, 도금이 벗겨진 넥타이핀을 꽂고, 해어진 혁대를 두르고 있었던 것’은, 그리하여 시신(屍身)을 검안한 군의관이 ‘꿈에도 각하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가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세계 역사에서 최단기간에 최소의 희생으로 최대의 문명 건설을 이룬 사람으로 기록될 것이다. 키 164cm의 이 작은 지도자의 그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으며 그 성공 원리는 21세기에도 실효(實效)가 있나? 이게 탄신 100주년의 화두(話頭)일 것이다.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 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南美)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나세르의 민족주의 노선을 따라 배우려 했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1965∼19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1990년의 11년간, 즉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국정(國政)을 운영하던 1965~1989년 사이 세계은행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그 동력은 수출입국 전략이었다. 한국은 무역부문에선 세계 51위에서 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인권(人權)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두 차례의 진정한 혁명을 뒤집는 민중혁명?
후계자를 누구로 세우느냐 하는 것은 왕조시대 권력자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민주정부에서도 그 정도는 아니지만 중요한 평가 요인이 된다. 박정희는 재임시절 정규 육사 장교집단을 키워 비상시에 대비하였다. 그의 급사(急死) 후 부국강병 노선을 잇는 두 대통령이 장교단 속에서 나오게 하였다는 점에서 성공적이었다. 전두환 자리에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앉았더라면 오늘 한국인이 기억하는 박정희는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후임자를 결정하는 데 긍정적 영향을 끼칠 수가 없게 되었다.
만약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이 결정되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종북 좌파세력이 일어날 것이다. 민중혁명, 촛불혁명이 완성되었다, 이제는 보수를 불태워야 한다, 이승만· 박정희 옆에 박근혜를 파묻어야 한다, 부역자를 숙청해야 한다, 광화문에 단두대를 세우자, 촛불혁명탑을 세우자, 국가기념일로 만들자, 이렇게 나오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60일 뒤의 대통령 선거를 그 분위기 속에 치르려 할 것이다.
한국의 진정한 혁명은 두 번이었다. 첫째는 이승만의 지도 아래 1948년 8월15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국민국가를 세운 혁명이다. 조선조와 식민통치의 구(舊)체제를 청산하고 국민이 주권자가 된 새로운 국가체제를 출범시킨 것이다. 두 번째는 5·16 군사혁명이다. 군인들이 주도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질서를 바꾸고 기업인, 군인, 과학자, 기술자가 역사의 새 주역으로 등장, 경제개발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
계급투쟁론으로 무장한 종북 좌파세력은 공고해진 반공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뒤엎으려 할 것이다. 이는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는 반역이지만 자신들의 정체와 목표를 민족주의(사실은 인종주의)와 민주주의(사실은 공산주의)로 위장할 것이다.
한국은 반공자유민주주의라는 이념적 가치관 덕분에 미국, 일본 등 해양문화권과 손잡고 개혁, 실용, 개방 노선을 걸을 수 있었다. 탄핵과 대선을 거치면서 박근혜 노선이 부정되면 한국은 친북(親北), 친중(親中)으로 집약되는 대륙회귀(回歸)의 노선변경을 겪으면서 개인의 기본권과 국가의 활력이 약해질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 시리아 같은 내전이 일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기에 북한의 핵무기가 끼어들면 민족공멸의 위기가 조성될 것이다. 이 사태를 초래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딸의 불효(不孝)를 넘어서는 국가에 대한 불충(不忠)이다. 성공한 국가 시스템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권력자의 가장 큰 범죄이다.
엘리트를 가장 많이 만난 아버지
아버지와 딸은 모든 면에서 극과 극이다. 그런 점에서 연구감이다. 아버지는 62년간 교사, 군인, 혁명가, CEO(경영자)의 네 가지 역할을 수행하였다. 딸이 유일하게 아버지보다 잘한 것처럼 보였던 것은 ‘선거의 여왕’이라고 불린 점이다. 이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 표가 후광(後光)으로 작용한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국가경영의 귀재(鬼才)였지만 딸은 국가경영의 문란자였다. 가장 유능한 지도자의 딸이 가장 무능하였다는 기막힌 사연의 비밀을 찾다가 보니 간단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대통령 시절 가장 많은 사람들(대부분이 엘리트)을 만났고 딸은 가장 적은 사람을 만났다. 최순실 사건을 가능하게 한 것도 박 대통령의 대면(對面)기피증이었다. 매일 여러 번 만나야 하는 비서실장은 1주일에 한 번도 못 만날 때가 있고 수석 비서관들은 1년에 한 번도 못 만났다고 한다. 주(週) 1회 대면 보고가 관례화되었던 세 명의 국정원장은 거의 만나지 못했고 장관들은 더했다.
청와대 일정표를 보면 하루 2~3회 정도의 의례적 행사 정도이다. 아베 일본 총리의 일정은 다음날 언론에 공개되는데 하루 평균 10명 이상의 장관, 국장, 실장의 보고를 받는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임(在任) 면담 일지(1964.1.4~1979.10.26)를 보면 5656일간 3만9318회의 회의에 참석하고 보고를 받았다. 하루 평균 7회이다. 유신시절 전에 면담자가 많은데, 1964년의 경우엔 4042회의 보고 및 회의였다. 하루 11회이다. 대통령이 똑똑해지는 것은 엘리트를 많이 만나 핵심정보를 보고받는 덕분이다. 이런 지식은 서면 보고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 사람을 만나는 것과 활자를 만나는 것은 천지 차이이다. 대면 보고를 많이 받았더라면 최순실 사건도 방지할 수 있었다. 수년 전 기자회견에서 대면보고 문제가 나오자 박 대통령은 배석한 장관들을 향하여 “그게 반드시 필요해요?”라고 묻는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대통령이 사람을 많이 만나지 않으면 사람도 정책도 모르게 된다. 활자로 세상을 이해하겠다는 것은 문틈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超人으로 만든 것은 교사의 品性
아버지는 왜 사람을 많이 만나고 딸은 피했나? 답은 간단하다. 인간애이다. 사람을 좋아하면 자연히 많이 만나고 싫어하면 적게 만난다. 박정희의 생애는 교사, 군인, 혁명가, 경영자의 네 역할을 해냈지만 그를 초인(超人)으로 만든 기본은 교사적 성품과 자질이었다. 위대한 지도자와 그냥 유능한 지도자를 가르는 것도 교사적 자질의 유무(有無)이다. 문무왕, 세종대왕, 이순신,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은 바탕이 교사였다. 아래 사람을 단순히 부리는 데 그치지 않고 가르치려 할 때 일과 조직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다.
1961년 5월16일 새벽 군사 쿠데타의 성패를 가르는 곳은 KBS였다. 5시에 예정대로 혁명방송이 나오느냐 못나오느냐가 열쇠였다. 당직을 하다가 혁명군에게 붙들려 온 박종세(朴鍾世) 아나운서는 군모(軍帽)의 별 두 개가 유난히 선명한 장성 앞에 세워졌다. 그는 대뜸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즉석 강연을 했다.
“지금 나라가 너무 어지럽소. 학생들이 판문점에 가서 북한 학생들과 만나겠다고 하지를 않나. 국회는 매일 같이 싸움질만 하고 이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소. 그래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군이 일어섰소. 오전 5시 정각에 이것을 방송해 줘야겠소”라면서 전단지 한 장을 내밀었다.
혁명공약이 적힌 인쇄물을 건넨 뒤로도 박정희 소장은 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사정을 몇 마디 더 보태면서 설득했는데, 그런 그의 모습은 “진지했고, 말에는 조리가 있었다”고 한다. 박종세 씨는 “직접 방송하시고 제가 소개 멘트를 해드리면 안 될까요?”라고 했다. 박정희는 “박 아나운서가 하시오”라고 하는데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단호하였던 것이 오래 기억되더라고 한다.
그는 경제개발만 한 게 아니다. 국민교육헌장 선포, 새마을운동 등 정신 개조 운동을 동시에 하였다. 정신적 자조(自助) 위에 경제적 자립(自立)이 가능하고, 그래야 자주(自主)국방과 자유(自由)통일이 이뤄진다고 믿었다. 국가운영에서 교사적 관점을 항상 깔았다.
꼴찌 학생
민족의 위대한 교사가 되었지만 그는 꼴찌 학생이었다. 박정희가 다닌 대구사범 5년간(1932~1937년)의 성적표는 대구사범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공개를 금지시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정희의 집권 시절에 나온 전기류(傳記類)에서는 1등만 한 구미보통학교의 성적표는 소개하면서도 사범학교 시절의 성적은 그냥 ‘우수한 편’, ‘중간 정도’식으로 넘어 갔었다. 나는 작고한 이낙선(李洛善·상공부 장관 역임)이 남긴 메모와 자료들을 1991년에 열람했었다. 그가 육군 소령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모아 두었던 ‘박정희 파일’ 중에서 사범학교 성적표를 발견했다.
박정희는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으나 1학년 석차는 97명 중 60등으로 내려갔다. 2학년 때는 83명 중 47등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3학년 때는 74명 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 중 73등, 5학년 때는 70명 중 69등을 했음이 밝혀졌다. 박정희의 행동 평가도 나빴다. 품행을 의미하는 ‘操行(조행)’은 5년간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그를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이라 적었다.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이라 되어 있고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이라고 적혀있다.
더 놀라운 것은 장기 결석이다.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이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앉았기 때문이다.
박정희 학생의 성적표 ‘취미’란에는 ‘검도’라고 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박정희는 사격, 나팔, 육상에 뛰어났다. 학업에서는 꼴찌였지만, 교련 시간에는 소대장이었다. 학과 중에서 그래도 성적이 괜찮은 과목은 역사, 지리, 조선어였다. 요사이 교육제도에선 도태되었을지 모르는 성적이지만 인문적 교양을 중시하는 일본식 교육이 그를 버리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박정희는 자녀 교육과 이념 교육에서 실패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로 가기 전 초등학교 교사로 3년간 근무하였던 문경 시절이 그가 지난 교사적 품성을 잘 보여준다. 지금도 제자들이 몇 분 살아있는데, 이들의 증언들을 종합하면 이런 이미지이다. 아침마다 나팔 불고 청소에 철저한 사람, 운동과 병정놀이를 좋아하고 학생들과 잘 놀아 주는 선생, 일본사람들에게 얕보여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투지를 불어넣어주던 분, 빈부귀천(貧富貴賤)을 가리지 않고 제자들을 사랑한 사람, 일본인들도 어려워한 대담한 배짱, 술을 좋아한 교사, 가정 방문을 많이 하고 학부형들과 잘 어울렸던 선생, 나팔·스파이크 달린 운동화·목검으로 기억되는 사람, 그리고 교사로 만족할 분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 선생. 주영배(周永培·전 초등학교장) 씨는 자신이 3학년일 때 막 부임해 와서 담임이 되었던 박 선생을 이런 일로 기억하였다.
“가정실습지도 시 문경에서 12km나 떨어진 벽촌에 있는 저희 집에까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기뻐서 부모님에게 여쭈었더니 ‘이렇게 먼 곳까지 오시겠니’라고 하셨지만 선생님은 자전거를 타고 정말 오셨습니다. 농촌이라 별다른 접대는 없었지만 만족하시고 가셨습니다. 선생님의 모습이 산모롱이로 숨어들 때는 울고 싶도록 감사했어요.”
박정희는 교사적 군인, 교사적 혁명가, 교사적 경영자였다. 못 살고, 못 배우고,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情)이 그를 권력자로 만든 가장 큰 동기였다.
반면 그 딸을 대통령으로 만든 동기는 연민의 정도, 국가개조의 야망도 아닌 권력 그 자체였지 않을까? 그는 청와대로 들어가자 한나라당 대표, 새누리당 후보 시절의 활발한 정치인 모습을 벗어던졌다. 옛날 집으로 돌아온 사람의 안도감과 적막감, 목표를 달성한 뒤의 허탈감이 대통령직 수행의 보람과 흥분됨을 잃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권력의지를 심은 사람이 최태민이었다면 집권 이후의 청사진을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때 그를 채워줄 인문적 교양은 터득한 게 없었고 철학적 고뇌도 생소하였으리라. 최순실 사건 발생 후에 그와 여당이 저항을 포기하고 무너져 내린 과정, 그리고 새누리당의 배신과 비겁이 더 충격적이다. 한 중국공산당 간부는 “박 대통령은 권력이 선전부의 장악 없이는 유지할 수 없고 국민을 화나게 만들면 안 된다는 점을 몰라 유소기(劉少奇)처럼 인민재판을 당하고 있다”고 평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위대한 교사였지만 두 면에서 실패하였다. 자녀 교육과 이념 교육이다. 자신의 자주국방 노선을 이념적으로 이어받는 정치세력을 만들지 못하여 동상조차 서울 도심에 당당하게 세우지 못하고 있다(지금도 프랑스 정치를 주도하는 드골리즘과 대비된다).
세 사람이 모두 同族의 손에 요절이 난다
극과 극의 아버지와 딸 이야기는 인간의 성취와 한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에 어울리는 소재이지만 이코노미스트가 지적하였던 대로 하나가 모자란다. 박근혜의 몰락 과정을 어떻게 이기적으로 이용할 것인가 하는 정치와 언론의 계산과는 별도로 비극성에 공감하는 관중(국민)이 있어야 비극은 완성된다. 한국인의 삶을 바꾼 아버지는 부하의 총에, 퍼스트레이디의 전범을 보여주었던 부인은 공산주의자의 손에 죽었고 그 딸은 언론 검찰 정치인들의 손에 빈사(瀕死) 상태이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연민의 정이 없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박정희가 보냈던 연민은 메아리가 없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연두순시에서 노동청을 방문하고 아래와 같은 지시를 한다.
“작년에 구로동 어느 수출 공단에 갔을 때입니다. 아주 정밀한 기계를 취급하는 직공인데, 그 아주 작은 이런 것을 들여다보고 작업하기 때문에 시력(視力)이 대단히 피로하기 쉽고 또 어두우면 아주 작업에 지장이 많은데, 가보니 저쪽 구석에서 컴컴한 거기서 일하는데 불은 여기서 거꾸로 뒤로 비치는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현장에 가서 지적을 했지만, 한 가지 간단한 예지만, 책임자가 다닐 때 여기는 전기를 하나 따로 더 달아 준다든지 조명을 더 밝게 해준다든지 이런 건 간단한 착안입니다.
어떤 때 가보면 직공들이 머리가 또 요즘 히피마냥 이만큼 길게 하고 있는데 ‘왜 자네 머리 안 깎느냐?’ 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늦게 일하고 가면 뭐 이발소 가고 할 시간이 없다 그래요. 그런 것은 기업주들이 이발사를 데리고 와서 할 수 있고, 종업원들을 가족같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일을 시켜야 능률이 오르고 생산이 늘고 이러지 그런 정신 안 가진 기업체는 나는 절대 성공 못 한다고 봐요.”
그리스 비극은 못되더라도 국민적 연민의 부족, 이 점이 한국식 비극의 핵심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버지-어머니-딸이 대(代)를 이어서 동족(同族)의 손으로 요절이 나는데 외국 언론이 동정론을 펴는 게 그래서 더 인상적이다. 한국인은 원래 이토록 잔인한 민족인가? 과연 영웅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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