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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연설이셨습니다. 대원수 각하. 저는 인류 연방 지상군 본부에서 대원수님을 보좌하기 위해 파견한 보좌관입니다. 종신직인 대원수님의 직책과는 달리, 제 직책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지만, 인류의 명백한 운명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대원수님과 인류 연방에 봉사할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기개가 마음에 드는군요. 뭐. 지상군 본부에서 제게 특별히 전달하라고 한 말은 없나요?"
"없었습니다. 대원수님을 지지한 것 역시 지상군 본부이니까요. 다만, 지상군 본부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으로서 약간의 의구심이 있습니다. 몇년 전부터 해군 본부에 인재가 몰리긴 하였다지만, 창설된지 얼마 안 된 해군 본부에서 내놓은 후보가 대원수로 선출될 것으로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대원수님께서 선출되신 이후로는 쓸모 없어진 얕은 예상이니 마음에 담아두시지 않읏셔도 됩니다."
시드니 보클레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드니의 침묵을 확인한 보좌관이 보고를 시작하였다.
"초공간 항행이 발명됨과 별개로, 우리 은하의 전체 지도가 완성되었습니다. 앞으로는 대원수님의 집무실 안에 있는 은하 지도에 양자얽힘 통신으로 변동사항이 보고되면 실시간으로 변경 사항이 반영될 것입니다. 인플레이션의 중심지를 기준으로 은하를 동서남북으로 나누는 더레트 기준에 따르면, 우리 데네브는 은하 북부 중심부에 위치합니다.
대원수님의 연설마따나 은하수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데네브이므로, 이 정도 위치가 될 것이라는 것은 연방 천문학계에서도 미리 예상하던 바였습니다. 이런 은하 중심부에 우리보다 먼저 우주에 나온 성간 문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같은 일입니다. 유니티의 선례에서 보였듯, 은하의 생명체는 많고, 데네브는 그들이 노릴만한 별이니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지난 백 년도 너무 많이 허비한 셈입니다. 백 년은 다른 문명이 데네브에 닿기에 충분했던 시간이니까요. 아마 가까운 곳에 외계 문명이 데네브를 향해 오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왔다가 갔을 지도 모르죠."
시드니 보클레르의 명령에 따라, 알베르토 데 실리오가 주도하는 CNS 선구자 과학선이 남서쪽 우주로 탐사를 시작했다.
시드니 보클레르는 전대 대원수의 정책 중 몇 가지를 보수하고 나섰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풍요 전도사'라는 시드니 본인의 특기에 힘입어 인류 연방의 모든 국민들에게 넉넉한 영양 상태를 보장한 것이었다.
"대원수 각하. 데네브의 항성기지에서 새로운 과학선이 건조되었습니다. 연방 정부는 대원수님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과학자 아메드 엘-바즈를 고용하였고, 아메드 엘-바즈는 CNS 여행자에 탑승하여 북쪽 우주를 향해 탐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새로 고용된 과학자 아메드 엘-바즈의 실력은 다른 고위 과학자와 비교해 손색없는 수준이지만, 해군 본부와 지상군 본부에서는 그가 품고 있는 사상에 대해 우려를 표했습니다. 이 우려는 기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만, 지금 와서 승진을 없던 일로 할 수도 없으니 지켜보시는 것이 답일 듯 합니다."
"아메드 엘-바릭이 해냈습니다!"
보좌관이 소리지르며 시드니 보클레르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CNS 여행자에서 인류가 거주가능한 행성을 발견했다는 보고를 보내왔습니다! 지상군 본부와 해군 본부의 아메드 엘-바릭을 향한 모함은 쏙 들어갔으며, 정부의 모든 부서가 식민지화 계획을 진행 중입니다!
쿤바르 항성계에 인류가 정착 가능한 대륙형 행성, 쿤바르 III가 존재하며, 이는 지구나 유니티와 비슷한 환경으로 보입니다! 그 외에도 고산형 행성인 쿤바르 IV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쿤바르 IV에는 인류가 바로 정착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 환경에 개조할 수 있게 된다면 또다른 인류의 요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세한 사항은 CNS 여행자에서 이 두 행성에 대한 조사를 마친 후에 대원수 각하께 보고서로 올라갈 예정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드니 보클레르는 아메드 엘-바릭이 올린 쿤바르 III에 대한 보고서를 마주할 수 있었다. 쿤바르 III에는 거주 가능한 기후와 함께 외계 생명체들이 서식하고 있었고, 지적 생명체는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보고서를 받아든 시드니 보클레르는 쿤바르 III 식민지화 계획을 최종 승인했다. 보고서의 뒷자락에는 그녀의 보좌관이 추가한 유니티 시민들의 반응에 대한 보고서가 짤막하게 달려 있었다. 시드니에게 보고됨과 동시에 민간에 공개된 아메드의 보고서는(군사 독재정이라고는 하나, 양자 컴퓨터가 개발된 이후로 국민들을 전자 사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선 모든 정부부처를 완전히 투명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유니티 시민들에게 작은 충격을 선사한 듯 했다.
"고작 하이퍼레인 하나라니. 다리 하나만 건넜는데 거주 가능한 행성이 둘이나 나왔습니다. 이 정도라면 아무리 파종인류론이 맞다고 해도 데네브를 노리는 탐욕스러운 지적 생명체를 만나는 것도 시간 문제겠군요."
그녀의 보좌관이 이를 갈았다.
쿤바르 III의 발견에 따라, 흥분한 인류 연방 정부부처에서는 거주적합 행성에 대한 탐사 프로젝트를 창안하여 시드니 보클레르에게 올렸다. 프로젝트의 내용은 학계에서 자연스레 진행되고 있던 외계 생명체 체계화 작업을 연방 정부가 나서서 진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시드니 보클레르의 반응은 이랬다.
"너무 갔는데."
다음 날부터 시드니의 책상 위에 이에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정부 관료들이 인류 연방 내에서 시드니 보클레르가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쿤바르 III에서의 발견이 너무 충격적이었기에, 인류 연방의 정부 관료들은 이보다 더한 연구결과는 당분간 나타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예상은 아메드 엘-바즈의 다음 보고서로 인해 빠르게 박살났다.
시드니 보클레르의 보좌관이 창백한 표정으로 시드니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평소라면 불호령이 떨어졌겠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시드니 보클레르는 창백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던 눈을 자신의 보좌관에게 옮겼다. 시드니가 말했다.
"당신이 저번에 제게 말했었죠. 어쩌면 외계 문명이 먼저 왔다가 갔었을 수도 있다고. 그 말이 맞았던 것 같네요. 우리의 선조가 유니티에 닿기 훨씬 전이지만, 분명 유니티에 외계종이 다녀갔어요.
이에 관한 특별 프로젝트를 준비하라고 각 정부부처에 이르세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 문제는 꼭 조사해야 하니까요."
첫 번째 연맹에 대한 소식이 유니티에 공개되자, 유니티 시민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시드니 보클레르는 그에 관련된 보고서를 읽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보좌관이 말했다.
"이제 유니티에 인류가 유일한 성간 문명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주장을 직접 반박하는 증거가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되었군요. 이 우주 어딘가에 외계 지적 생명체가 있을 것이며, 그 수가 꽤 많을 거라는 의견이 이제 유니티의 주류 의견입니다.
당분간 치안청 관료들이 야근을 해야겠습니다. 인류 연방이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는 체사레의 파종인류론도 아주 약간의 수정은 불가피해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군 본부와 지상군 본부, 나아가 대원수 각하의 지도력에 일반 대중이 의문을 품게 되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입니다."
시간은 흘러, 쿤바르 III 식민지화 계획은 착실히 진행되었다. 쿤바르 III에 사용될 개척선 건조에 돌입은 유니티 언론들의 주목을 받았다. 고작 배 하나를 건조하는 것 뿐인데 이렇게 주목을 받은 이유는, 국화 호를 타고 온 여행자들이 어느덧 국화 호를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리라. 개척선 건조 소식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인류 연방 중장년층이 있을 정도였고, 개척선 건조지를 관광 명소로 삼는 관광객이 늘어났을 정도였다.
시드니 보클레르는 인류 연방이 가지는 특별한 문화적 정체성을 인정, 관광객들의 출입을 최대한 통제하지 말라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대원수 각하. 보고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녀의 보좌관이 입을 열었다.
"이번 보고는 아메드 엘-바즈의 과학 보고 같은 것이 아닌, 문화적인 보고입니다. 인류 연방 국민들이 이륙해낸 사회적 통합이 쌓임에 따라, 인류 연방에도 문화적인 전통이 자리잡을 때가 되었다는 보고입니다.
성간 문명의 시대에 전통의 중요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입니다. 사회적인 통합은 사회 구성원들이 사회적 소속감을 느끼게 하여 궁극적으로 인류 연방 정부에 호의를 가지게 된다는 뜻이며, 우리는 이를 이용하여 적절한 선전을 통해 사회의 여력 역량을 우리가 원하는 바에 집중하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설명이 길었습니다. 지난 번 개척선 건조로 인류 연방 국민들의 동질감 의식이 높아져 사회적 통합이 쌓인 결과, 우리는 또 하나의 전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일단 대원수 각하의 지시대로 지금 인류 연방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확장에 대한 전통을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인류 연방의 국기를 단 CNS 여행자가 고요한 암흑 항성계를 지나 프로톤 항성계로 진입할 때였다. 아메드 엘-바즈는 피로에 취침을 취하고 있었다. 연달아 엄청난 과학적 발견을 이룸으로서 자신의 사상에 대한 해군 본부와 지상군 본부의 지극히 합리적인 우려가 있었음에도 상당한 발언권을 확보한 아메드 엘-바즈였다.
그런 아메드 엘-바즈에게 또 한 번의 행운이 찾아왔다. 자신을 깨우는 조수의 소리에 아메드는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CNS 여행자에 통신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 연방의 것이 아니었다. 중앙 정부의 것이 아니었음에도 확실히 알아들을 수 있는 인류어였다.
놀란 아메드 엘-바즈는 창백한 표정으로 중앙 정부와 양자 통신을 시작하는 버튼을 눌렀다.
"대원수 각하. CNS 여행자로부터의 긴급 양자 통신입니다만……. 직접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야 했던 것은 유니티에 있던 시드니 보클레르도 마찬가지였다. 시드니 보클레르는 인류 연방 최초로 외계 지적 생명체와 마주해야했다. 시드니는 침착하고 단장을 마친 뒤 자신들을 라비스의 남겨진 자들이라고 칭하는 외계 지적 생명체와 교신을 나누었다.
그런 시드니가 만나야 했던 자들은 인류 연방에 비해 아득한 기술력과 경제력,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진보된 종족이었다. '꺼지지 않으면 쫓아내겠다' 따위의 말로 위협을 시도해보았지만, 저들은 그것마저 귀엽다는 듯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첫번째 연맹인가. 압도된 시드니의 보좌관이 중얼거렸을 때였다.
"첫번째 연맹? 너희가 그들을 어떻게 알지?"
그러더니 이내 저들은 상관없다는 듯 인간으로 치면 턱에 해당되는 부위를 긁었다.
"뭐. 우리가 우주로 나간 건 그들이 사라지고 난 바로 다음이다. 너희에겐 가늠조차 안 될 오래 전이지. 우리는 첫번째 연맹이 아니라, 라비스의 남겨진 자들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너희를 신경쓸 겨를이 없다. 우리 국경선 인근으로 확장을 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다면, 너희가 절망하든, 자멸하든 우린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CNS 여행자는 라비스의 남겨진 자들과는 별개의 적대적인 외계 함대에 프로톤 항성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CNS 여행자는 동쪽으로 탐사 방향을 바꾸었다. CNS 여행자에게 닥친 변화는 이것이 끝이었지만, 유니티는 아니었다.
"대원수 각하. 드디어 우리가 우주에 혼자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기뻐한 우리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군요. 치안청 관료들의 야근은 더 연장될 예정입니다."
유니티의 언론들은 시드니 보클레르와 라비스의 남겨진 자들 간의 짧은 교신 영상을 하루 종일 방송했다. 국민들이 당시 압도되어 괜한 말을 꺼낸 보좌관을 비난하고, 보좌관 본인은 얼굴을 붉히는 동안, 시드니 보클레르는 연방 첩보부의 보고를 받아들고 결론을 내렸다.
다음 날, 시드니 보클레르가 전 국민에게 연설하기는 이랬다. 그 긴 연설을 짧게 요약하자면 이랬다.
"무엇이 어찌되었든, 저들은 무력하고 동력을 잃었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는 아닙니다. 저들의 시간은 이미 끝났습니다. 이제는, 인류의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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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기를 쓰다 보니까 아메드 엘-바즈가 이번 편을 다 먹여 살렸습니다.
참, 게임 세팅은
난이도 대원수, 제국 수 18개, 진보된 문명 18개, 진보된 이웃 켜기, 제국 호전성 높음, 위기 강도 5배
빼고 기초 세팅입니다. 다이나막 디피컬트 모드는 안 깔았습니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