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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형 '먹튀' 로나 기억되는 지금의 앨런 휴스턴을 보면서... 아쉬움이 들때가 많다.. 하긴 1억달러의 사나이가 되는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ㅋ 9년 연속 20-10-5를 기록한 케빈 가넷도 몸값 1억달러에 대한 가치에 논쟁이 있는 마당에, 부상으로 계속 누워 계신 휴스턴의 모습은 '먹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슛폼을 가진 사나이면서, 언제나 위기의 순간에 강한 면모를 보여줬던 그의 모습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리그를 호령하던 NO.1 슈팅가드의 모습이었다. 특히 99-00시즌, 8번 시드로 올라온 뉴욕 닉스가 플레이오프 1라운드 마지막 경기에서 마이애미를 거꾸러트리는 결정적인 슛, 일명 '통통슛'의 전율은 휴스턴 팬들에겐 가장 큰 이야기거리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라트웰 스프리웰과 '트윈 테러'를 이루며 가장 매력적인 콤비를 이루었던 휴스턴은 미국에서는 물론이고 한국 NBA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였다. 우리 한국의 MC 주석께서 '앨런 휴스턴의 쓰리 포인트 샷처럼~' 이라는 라임을 넣으실 정도 였으니 말이다...
휴스턴의 롤모델은 그의 아버지였다. 루이빌 농구 코치였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휴스턴의 농구 선수의 꿈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그가 어릴때부터 NBA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2학년때까지 그의 목표는 오로지 스타팅 자리를 꿰차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고, 자기 스스로도 그때처럼 많은 연습을 한적은 없을 것이라 회고할 정도였다.
물론 그의 농구 실력이 형편없었던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시절, 그는 자신이 뛰던 밸러드 고등학교를 1988년 켄터키 주 챔피언으로 올려놨고, 테네시 대학 시절 졸업때에도 대학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을 갱신할 정도로 휴스턴은 뛰어난 선수였다. 1993년 드래프트 참가자들을 대상으로한 스카우팅 리포트에서도 휴스턴은 극찬을 받는다.
'포인트가드도 가능할 정도로 시야가 넓고, 3점슛에 일가견이 있다. 골대를 향한 드라이브 인도 뛰어나며, 움직임이 물 흐르듯이 부드럽다. 상대 수비를 등진 포스트 플레이도 가능하다. 드리블과 패스도 수준급으며, 그의 사이즈 (198cm) 에 비해 리바운드도 많이 잡는다. 그는 지금 당장 주전이나 주요 벤치 멤버로 써도 가능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비록 NCAA 토너먼트 켄터키와의 경기에서 1-15의 부진을 보였지만, 그는 프로선수로의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로터리 픽안에서 그를 노려라'
이 리포트의 권유처럼 그는 1993년 1라운드 10번째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지명된다.
휴스턴의 이런 모습 첨 보나?
디트로이트에서의 루키 시즌, 휴스턴은 백업 포인트가드 겸 슈팅 가드로 출전한다. 79경기에서 출전 시간은 20분을 넘기지 못했지만, 팀 선배였던 조 듀마스의 지원아래 서서히 성장을 거듭해 나간다. 듀마스는 "휴스턴은 힐과 함께 디트로이트를 이끌 미래다" 라며 휴스턴의 미래를 약속해준다. 그리고 95-96시즌 마침내 휴스턴은 자신의 능력을 만개하기 시작한다. 그랜트 힐과 디트로이트의 원-투 펀치로 활약하면서 평균 19.7득점을 기록한다. 3점슛 성공률도 42.7%에 이른다. 비록 1라운드에서 오닐-페니를 앞세운 올랜도 매직의 힘에 0-3으로 굴복당하지만, 휴스턴은 이 시리즈에서 평균 25득점을 기록하며 팀 득점 리더로 맹활약했다. 힐과 휴스턴의 공격력은 디트로이트의 미래를 보장해 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휴스턴은 자신을 키워준 디트로이트와의 재계약이 아닌 뉴욕 닉스를 선택한다. 당시만해도 패트릭 유잉을 중심으로 우승권 팀이었던 뉴욕은 공격적인 선수 영입을 통해 우승을 노리고 있었다. 휴스턴도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팀을 원했고, 거기에 미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인 뉴욕, 그곳의 심장부인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뛸 수 있다는 사실은 휴스턴의 마음을 움직이기 충분했다.
당시 뉴욕의 주전 슈팅가드였던 존 스탁스는 휴스턴에게 기꺼이 주전 자리를 양보하면서 식스맨을 자처할 정도로 휴스턴에게 거는 기대는 매우 컸다. 하지만 뉴욕에서의 첫 시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평균 득점도 14점대에 머물렀고, 모든 기록 수치에서 지난 해보다 떨어진 기록을 남긴 것이다.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샬럿 호네츠를 물리치고 2라운드에 진출했지만, 신흥 강호로 떠오른 마이애미 히트에게 막히면서 탈락한다. 5차전까지 게임 스코어 3-2로 앞섰던 뉴욕이지만, 5차전 막판에 벌어진 선수들간에 난투극이 원인이 되어 주요 선수들이 출전 정지처분을 받았고, 주전 대부분이 온전했던 마이애미에게 역전패를 당한다. 징계에서 한 발자국 벗어났던 휴스턴은 지난 시즌 PO에서 보여준 포스를 보여주지 못한채 역전패를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98-99시즌 뉴욕과 휴스턴은 멋진 복수극을 펼친다. 주전 선수들의 부상과 잇다른 트레이드로 시즌 8위로 마감한 뉴욕은 마커스 캠비-라트웰 스프리웰-앨런 휴스턴의 활약으로 1번 시드인 마이애미와 최종전까지 가는 대접전을 펼친다. 그리고 마지막 5차전 76-77로 뒤진 경기 종료 4초전 뉴욕은 마지막 공격 찬스를 잡는다. 모든 관중들과 선수들도 긴장한 마지막 순간, 휴스턴은 탑에서 워드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받는다. 그리고 절묘한 퍼스트 스텝으로 수비수 2명을 제치면서 원해드 슛을 시도한다. 뉴욕의 운명을 건 마지막 슛은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로 날아간다. 승리의 여신이 뉴욕의 편이었던 것일까? 그 공은 골대 앞부분을 맞고, 다시 백보드를 맞춘 후, 거짓말 처럼 림을 통과한다.
NBA 역사상 2번째로 마지막 시드 팀이 1번 시드 팀을 잡는 파란을 일으킨 것이다. 휴스턴의 마지막 슛이 뉴욕의 잠재된 능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까? 뉴욕은 2라운드에서 애틀란타를 지구 결승에서 인디애나를 물리치고, NBA 파이널에 오른다. 스프리웰 포스트때 언급했듯이 뉴욕은 샌안토니오의 벽에 막혀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휴스턴과 스프리웰의 '트윈 테러'는 뉴욕 농구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NBA 팬들의 큰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2002년 앨런 휴스턴은 뉴욕 닉스와 두 번째 재계약을 맺는다. 뉴욕의 대표 스타였기에, 휴스턴에게 큰 돈이 안겨질것이라 예상을 하긴 했지만, 최종 공개된 계약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무려 6년간 1억 2천만 달러 가량을 보장해준것이다. 경기를 제압할 수 있는 센터나 포워드도 아닌 가드에게 1억달러 이상을 보장한 것에 많은 논란이 일었다. 그리고 이 계약은 많은 사람들도 잘 알고 있듯이 휴스턴에게나, 뉴욕 닉스에게 별로 행복하지 못한 'Bad Ending' 으로 끝나게 된다.
계약 당시 휴스턴은 "내 몸값을 증명해 내겠다" 라며 굳은 의지를 보였지만, 이 장담은 채 1년도 가지 못했다. 2003-04시즌 무릎 부상으로 32경기를 결장하더니 2004-05시즌에도 무릎 부상으로 단 20경기 출전에 그쳤다. 그리고 2005-06시즌에는 단 1경기도 뛰지 못한 것이다. 뉴욕 닉스는 휴스턴을 써보지도 못한채 꼬박꼬박 2000만 달러씩 매년 휴스턴에게 상납해야 했고, 샐러리캡의 압박도 이만저만이 아닌 상태가 된다. 그야말로 NBA의 '대표 먹튀'로 전락한 것이다.
이번 시즌까지 휴스턴에게 연봉을 지급해야 하는 닉스의 문제는 샐러리캡이 묶였다는 것이다. 사실 연봉 금액 자체는 보험사에서 처리해주기에 큰 문제는 아니다. 휴스턴의 연봉에 가뜩이나 고액 연봉자들로 넘쳐나는 뉴욕은 리빌딩에 큰 장애를 겪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2005-06시즌 선수 협약을 맺으면서 이른바 '사면룰' 이란 것을 시행했었다. 각 팀마다 1명씩 방출을 하면 이것을 샐러리캡에서 해소시켜주기로 한 1회성 협약이었다. 많은 미디어들은 이것을 뉴욕 닉스와 앨런 휴스턴을 위한 룰이라 하여 '앨런 휴스턴 룰' 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앨런 휴스턴 룰'의 당사자는 휴스턴이 아니었다. 닉스의 새감독으로 부임한 래리 브라운이 자신의 공격 옵션에서 휴스턴을 활용할 수 있다면, 방출하지 말자고 건의하고, 팀도 이를 받아들려 애궂은 제롬 윌리암스가 방출된 것이다. 물론 휴스턴은 이후 단 1경기도 활용하지 못했다.
결국 이번 시즌을 앞두고 휴스턴은 은퇴를 선언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몸 상태는 괜찮아졌다. 하지만 다시 NBA 코트로 돌아올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고 말하기도 했다.
2003년 이후의 모습은 비록 보여준 것도 없이 돈만 챙기는 먹튀의 전형이었지만, 그 이전까지 그가 보여준 모습은 슈팅 가드는 어떻게 플레이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슈팅 가드의 교과서였다. 워낙 3점슛이 뛰어나 외곽슛만 뛰어난줄 알지만, 무릎 부상전까지 그는 운동능력도 괜찮은 가드였다. 1994년 올스타 덩크 콘테스트에도 출전한 적이 있을 정도다. 물론 무지막지한 체공 시간과 파워를 이용한 덩커는 아니었지만, 그의 별명인 "smooth as water" 란 말처럼 부드럽고 쓸데없는 움직임이 없는 기교넘치는 가드였다.
앨런 휴스턴을 조금 더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했지만, 결국 팬들의 기대는 기대로만 끝나고 말았다. 휴스턴의 아름다운 슛 터치와 3점슛이 너무 일찍 끝나버린 것은 NBA 팬들에겐 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198짜리 가드들도 덩크를 내려찍고 화려한 기술만을 추구하는 요즘 시대에 앨런 휴스턴에 대한 추억은 정말 진하게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Pure Shooter가 없다고 한탄하는 NBA 코트에서 휴스턴의 빈자리는 정말 크게 느껴진다... 먹튀가 아닌 진정한 Pure Shooter였던 휴스턴을 추억하게 된다... |
첫댓글 요즘 다시 돌아온다는 루머가돌져...휴스턴에 대해 몰랐던분들도 잘알수있게 설명잘해놓으셨네요!
참 믹스는 별거없네요. ㅎ
다른 믹스를 가지고 있는데 업로드가 안되서 못올렸습니다.
다시한번 그의 슛을 볼수 있었음 좋겠네요
정말 릴리스 쩐다 쩔어. 너무 부드럽나. 리듬이 똑같네....
역시 퓨어슈터..슛타이밍 정말 간결하고 빠르네..알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전형적이 2번. 그가 한참 전성기때가 제가 nba를 즐겨보던 시절이였는데 어느덧 세월이...
앨런휴스턴 이거 말고 딴 믹스 가지고 있는분 없나요 ?? 앨런휴스턴 믹스는 거의 다 이 믹스 던데 ;;-_-
유튜브에 allan houston쳐보세요 다른 버전으로 2개정도 있습니다^^
다른 믹스를 가지고 있는데 업로드가 안되서 못올렸습니다.
대체 닉스는 휴스턴에게 왜 저렇게 많은 돈을 주었던 것일까요? 그 문제만 아니었으면 정말 좋은 선수였다고만 기억할텐데..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