鷄舍得卵爲養鷄-닭장은 계란을 얻기 위해 닭을 키운다 牧場得乳爲養牛-목장은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기른다 學校爲人才教育-학교는 인재를 위해 교육을 시킨다 軍人爲戰爭對備-군인은 전쟁에 대비 훈련을 시킨다 不勞農事爲育牛-농사일을 하지 않고 키우는 소는 養育食肉爲飼育-식육으로 사용하기 위해 키운다 농월(弄月)
아무래도 보이는 것보다 안보이면 정(情)이 멀어진다 !!
맹자(孟子) 양혜왕상편(梁惠王上篇). 曰 臣聞之胡齕曰 王坐於堂上 有牽牛而過堂下者 王見之 曰 牛何之 對曰 將以釁鍾 王曰 舍之 吾不忍其觳觫若無罪而就死地 對曰 然則廢釁鍾與 曰 何可廢也 以羊易之 不識有諸 (원문은 간단히 줄였음)
정(情)이 멀어지지 않으려면 자주 만나고 못 만나면 전화라도 틈틈이 하라는 것이다.
맹자(孟子)가 공자(孔子)처럼 천하를 여행하면서 고대 중국 양(梁)나라 양혜왕(梁惠王)을 만나 그에게 말하기를 제가 전하의 신하인 호흘(胡齕)이라는 사람으로 부터 들은 말인데 왕께서 당상(堂上)에 앉아계실때 소(牛)를 끌고 왕(王)이 계시는 대청 아래로 지나가는 자가 있었습니다. 이때 왕께서 보시고 “소를 어디로 끌고 가는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소를 끌고 가는 사람이 대답하기를 이 소를 “흔종(釁鍾)”에 쓰려고 합니다.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소를 놔주어라. 내가 보기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그 소가 무서워서 부들부들 떨면서(觳觫) 죄 없는 것이 죽으려 끌려가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노라.
소를 끌고 가던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런면 “흔종(釁鍾)”을 하지 말가요? 하고 반문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흔종(釁鍾)”을 안할 수는 없지 않느냐 양(羊)으로 바꾸라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흔종(釁鍾)-새로 종(鐘)을 만들 때 희생(犧牲)할 소를 잡아 그 피로 종(鐘)에 바르고 제사(祭祀) 지냄을 말한다. 기독교 성경에서는 보통 쓰는 “희생양(犧牲羊)”과 같은 말이다.
※곡속(觳觫)-두려워 부들부들 떠는 모양(模樣).
▷희생(犧牲)이란 말은 주례(周禮)제도, 고대 중국 주(周)나라 때에 왕실의 관직제도(官職制度)와 전국시대(戰國時代) 각 나라의 국가제도(國家制度)를 기록한 유교경전(儒敎經典)에 나온다.
주례(周禮) 지관목인(地官牧人)에 기록하기를 凡祭祀共其犧牲 以授充人繫之 무릇 제사(祭祀)를 지낼 때는 그 희생(犧牲)을 함께하는데 소를 충인(充人)에게 주어서 이를 묶게 한다는 내용이 있다
▷기독교 구약성경 창세가 46장 1절에 1절-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Beersheba)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Yitskhak)의 하나님께 희생제사(犧牲祭祀)를 드리니
※참고-기독교 성경에서는 희생양(犧牲羊)이라한다. 희생(犧牲) 한자(漢字)는 소(牛)를 말하는 것이다. 희생양(犧牲羊)은 “희생은 소, 양(羊)” 즉 “제사지내는 소(牛)의 양(羊)”이라는 한자어인데 말이 성립 안 되는 성경의 한자어(漢字語)다.
소(牛)면 소(牛)이고 양(羊)이면 양(羊)이어야 하는데 소와 양이 짬뽕되어 있는 것이 성경의 “희생양(犧牲羊)” 한자어다 아마 기독교인들은 이런 잘못된 성경 내용을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개정 성경이 나와도 계속 “희생양(犧牲羊)”이란 말이 안 맞는 한자어(漢字語)를 사용하고 있다.
필자생각으로는 성경이 중국에 처음 들어와 번역할 때 잘못 생각한 것으로 본다. 불교가 처음 중국에 들어와 경전(經典)을 번역할 때의 격의불교(格義佛敎)때에도 이런 잘못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다시 본 이야기로 이어진다. 양혜왕(梁惠王)이 말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왕(王)께서 이러한 마음이면 족히 왕(王)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백성은 소를 양으로 바꾸는 것을 다 왕께서 인색해서라고 하지만 제생각(臣)은 진실로 왕께서 차마 못하실 일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왕이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땅이 작은 나라(褊小)이기는 하나 내 어찌 한 마리 소를 아끼겠습니까 ※편소(褊小)-나라의 땅이나 장소(場所) 등(等)이 좁고 작음.
그 두려워 부들부들 떠는 소가 죄 없이 사지(死地)에 나가는 것을 차마 볼 수 없기에 양(羊)과 바꾸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왕이 인색하여 큰 소를 작은 양(羊)으로 바꾸어 사용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왕께서는 백성들이 왕께서 인색하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바꾸었으니 백성들 쉽게 왕이 짜고 인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왕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왕께서 만일 죄 없는 소가 사지(死地)로 나아감을 측은히 여기셨다면 양(羊)도 생명이 있는데 소와 양(羊)을 어찌 가리시겠습니까.
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것 참 대체 내가 무슨 마음에서 였던가. 나는 단순히 죽으러 가는 소가 불쌍하여 한 것인데 내가 그 재물을 아껴서 소를 양(羊)으로 바꾸라 한 것이 아니지만 마땅히 백성들은 내 속을 모르고 나더러 인색하다고 합니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신경쓰지마십시오. 이것이 인(仁)을 행하는 좋은 방법입니다. 소(牛)는 눈앞에서 보았고 양(羊)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보이는 양(羊)을 끄고 갔다면 안 보이는 소와 바꾸라 하였을 것입니다.
군자(君子)는 금수(禽獸)의 살아있는 모습을 보고난 뒤에는 죽는 것은 차마 보지 못합니다. 그 짐승이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차마 그 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그래서 군자는 푸줏간을 멀리 합니다.
그러나 보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정(情)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주 만나지 않으면 정(情)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위의 내용은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킨다는 뜻으로도 쓰이지만 본질적으로 이는 맹자(孟子) 철학의 핵심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나타내기 위한 글이다. ※측은지심(惻隱之心)-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타고난 착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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