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의 교회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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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 전환기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지금까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가치관이 무너지고 기성세대에게는 낯설은 가치관이 지배하는
신세대의 시대이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돈 때문이라면 부모까지도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그러므로
가치관의 갈등시대다.
이와같은 전환기에는 방향설정이 어렵다. 그것은 이 사회가 매우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전환기는 위기시대이다. 그러나
위기시대는 결코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기시대는
새로움을 창조할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위기시대는 결단을 요구한다.
인간은 위기시대에서 하늘과 땅, 좌와 우의 결단을 그 어느 시대에서
보다도 강요받는다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위기시대는 결단의 시대이다.
우리의 결단에 의해서 전환기의 위기시대는 창조적 새 시대가 될 수도
있고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전환기에 우리는 갈등속에서
방황할 수도 있으나 새 역사 창조의 주역이 될 수도 있다. 새 역사는
반드시 전환기의 위기시대에서 가능하다.
산다는 것은 개혁의 연속이다. 산다는 것은 단순히 [있음]이 아니다.
산다는 것은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다. 이 변화는 자기변혁의 형태이다.
개혁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여기서 개혁은 창조일 수도 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을때, 그것은
교회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동시에 살아있는 교회는 개혁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기개혁은 자기 삶의 위기를 가져오고 또 이 위기는 자기개혁을
가능케 하는데 이 개혁이 결정적일때 삶의 큰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예수사건 또는 예수운동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왜 성서는
예수오심의 때를 [카이로스]라고 했는가? 예수는 왜 [그때] [거기에]
오셔야 했는가? 예수가 오심으로 시대가 전환기가 되었는가? 아니면
전환기에 예수가 오셨는가? 예수가 {때가 차서 오셨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운동은 전환기의 위기에서 새 것을 창조하는 역사운동이다. 그는
율법을 재해석했고 새로운 인간이해를 한 것이다. 그러기에 안식일의
주인은 인간이라고 한 것이다. 그는 간음한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회개는 옛 가치관을 버리고 새 가치관을 가지라는 것이다. 인간은 새
인생관,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운동은 새
인간운동이다. 예수는 전환기에 우리로 하여금 새 인간이 되도록 결단을
요청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들은 새 인간이 되는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러나 그에게는 부활의 새 아침이 있었다.
이것이 새 역사의 창조다.
교회역사는 예수운동을 그 시대에서 재현시키는 것이다. 그 역사가
바로 반(F") 예수운동으로 갈 때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그와같은 때,
다시 예수운동으로의 역사가 시작되므로 교회역사는 다시 바른
역사운동을 전개시킬 수가 있었다.
교회역사에도 전환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느 때가 전환기인가는
역사해석의 문제이다. 물론 역사는 해석이다. 그러므로 전환기라고 보는
것도 해석에 의한 것이다.
전환기에 교회와 신학이 일으킨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 몬타니즘운동 - 이 운동은 몬타누스에 의해서 일어난 운동이다.
2세기에 들어오면서 교회는 희랍, 로마 문명권에 광범위하게 세워지게
되면서 다양한 사상이 교회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는
종전의 단순한 문화속에서와는 달리 복합성을 띠게 되었고 예수에 대한
사상도 단순하게 되지가 않았다. 동시에 교회는 1세기와 달리 강력한
지도체계를 구상하게 되면서 조직의 강화가 시작되었다.
이 제도화의 추진이 결국 교회생활에 활력을 잃게 했다. 즉 1세기의
감격적인 믿음과 체험에 의한 신앙의 뜨거움이 식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교회생활이 형식화되어 가고 있었다. 몬타누스는 이와같은
교회생활의 획일화, 형식화에 반대한 것이다.
그는 성령강림과 예언자적 열성을 강조하면서 신자들은 엄격한
윤리도덕생활과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순교를 기쁨으로
맞이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임박한 종말을 주장했다.
이 운동은 형식화된 교회가 생동감을 잃고 교회속에서 인간의 삶에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을때, 성령의 역사에 의한 역동적 신앙생활을
교회가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공헌했으나 다른 한편으로 성령의 강림,
예수 재림등에 대한 또 다른 교조주의에 빠지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둘째, 중세 신비주의 운동 - 중세신학을 대표하는 것은
스콜라주의이다. 이 신학은 유명론적 입장에 있든, 아니면 실재론적
경향을 가지든 간에 신앙과 이성의 관계속에서 사변적 성격을 갖는다.
13세기가 되면서 교회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스콜라주의를 극복하려고 한 것이다. 그것이 신의 내재적 경험의
강조였다. 엑크하르트, 존 타울러, 토마스 아 켐래스 등은 모두 체험을
통한 역동적 신앙생활을 강조하면서 믿음과 생활의 일치를 주장했다. 즉
생활의 신앙인들이었다. 이 신학이 유럽의 경전주의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신비주의 운동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 운동에 의해서
공적의 신학과 은총의 신학은 하나가 될 수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두 신학은 배타적이 아니었다. 신비주의 운동은 문예부흥 운동과 함께
16세기 종교개혁 역사에 배경사상이 되고 있다.
셋째, 16세기 종교개혁 운동 - 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종교정책에 힘
입어서 개혁운동을 강화해 가다가 중세기 동안 줄기차게 정치권과의
권력투쟁을 하게 된다. 교회가 지배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으면서
세상을 섬기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지배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교회의
조직도 국가조직을 본받았다. 교권과 정권의 싸움은 불가피했고 이로
인하여 교회는 세속정치권과 다름없이 부패했다.
교회가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이 된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문예부흥에 의한 비판정신, 고전연구에 의한 인간자유 정신,
즉 인본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16세기까지의 중세교회는
인간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신도, 인간도 교회당에 감금하는, 인간
억압의 교회요 죽은 신을 섬기는 교회가 되고 있었다.
종교개혁자들이 교회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교회의
부패상도 있었겠으나 독일의 정치, 경제, 사회가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은 교회개혁의 범위를 넘어서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넷째, 한국인의 기독교 수용 - 한국인이 언제 기독교를 수용했는지의
연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해도 우리는 1876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해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개항을 한 해다. 이 개항사건이
민족사에 주는 의미는 매우 크다.
개항은 외세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개항에 의해서 우리는
터진 뚝을 통해 홍수같이 밀려오는 외국의 문화와 그 힘을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이 때가 우리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기였다.
민족의 역사가 비극의 역사로 치닫고 있었던 이 때, 우리의 청년 몇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기독교가 민족의 개화와 독립운동의
핵심적 힘이 되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3.1운동이다. 3.1운동이 기독교에 의해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기독교는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민주, 평등사상과
정의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었고 하늘의 희망을 가지고 내일을 향해
살아가는 삶의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민중신학과 민중교회 운동 - 이 운동의 구체화는
1970년대 라고 할 것이다. 우리 사회는 급격하게 산업사회가 되어가고
군사독재체제가 굳어져 가면서 부정부패가 우리 사회를 좀먹고
노동자들은 인간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인권이 유린당하는 한편 사회는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됐다.
그래서 인간화의 신학과 운동이 요청되고 있을때 한국 신학계에서
민중신학을 제창하게 되었고 동시에 민중교회 운동이 싹트게 된 것이다.
민중신학은 [신의 선교신학]에 근거한 샬롬신학이며, 민중교회 운동은
가난하고 억압받고 힘없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교회운동이다.
우리는 오늘 전환기에 살고 있다고 했다. 여기 전환기란 어떤 변화와
개혁이 특별히 요청되고 있는 때를 의미한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전환기는 무한 자유경쟁시대가 문밖에 가까이 왔음을 뜻한다.
지금은 [불량품 제로 경쟁시대]이다. 기성세대가 가난해서 보리밥만
먹고 살았다고 하면 지금의 신세대는 오트밀이 영양가 있는 죽이라고
말하는 시대이다. 지금은 정보통신의 시대와 컴퓨터를 모르면 [컴맹]이
되는 시대이다. 그리하여 1시간 전과 후가 다르게 변화하는 초급변의
시대이다. 인간이 이 사회의 주인이 아니라 사회의 악세사리가 되고 있는
것같은 시대다.
이 사회 속에서 교회와 신학에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가? 교회와 신학이
사회의 개혁에 밀려갈 것이 아니라 사회개혁을 주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고 신학은 항상 새 신학이어야 한다.
개혁을 주도하는 교회와 신학의 주제는 [새 인간]이다.
<주재용 총장(한신대)>
크리스챤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