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김인현 교수 著 《선장 교수의 고향 사랑》에 부쳐
한영탁(언론인. 수필가. 전 「토벽문학회」회장)
--애향(愛鄕)과 바다 사랑 이야기--
이 책은 저자가 《바다와 나》에 이어서 두 번째 펴낸 수필집(Miscellany Collection)이다.
현재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는 외항선 선장 출신의 해상법 전문가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유니크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바다와 나》는 자기가 몰던 상선을 좌초시킨 후 실의에 빠진 30대 초반의 선장인 저자가 좌절을 딛고, 한국을 대표하는 해상법 학자로 일어선 입지전적인 재기가 내용의 중심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책은 동해 바닷가 어촌, 유교 가풍을 물려받은 가정에서 태어나 자라면서, 집과 학교에서 받은 인성교육이 성실한 품성을 길러준 데 대해 늘 감사하며 사는 내용도 담고 있다.
김인현 교수가 이번에 새로 펴낸 미셀러니(misceiillany) 모음인《선장 교수의 고향 사랑》도 똑같이 태어나면서부터 뗄 수 없이 가까워진 바다 이야기와 시골에서의 유년기, 청소년 시절의 삶과 그의 남다른 고향에 대한 사랑과 사색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다.
이 책의 제1장 「그리운 고향」에 실린 14편의 글들도 대체적으로 저자의 어린 시절의 온갖 추억을 담고 있다.
저자는 어린 시절 할아버지 앞에서 글씨 쓰기와 한자를 배우던 일을 추억한다. 추운 겨울 학교에서 돌아오면, 차가운 손자의 손을 아랫목 이불 속에 넣고 데워 주던 할머니 손의 따스함. 아버지의 양계를 도와드리며 협업의 중요성을 배운 일. 그때 느낀 갓 낳은 달걀의 따스한 온기를 기억한다. 우등상을 받으면 할아버지가 사주시던 별미 짜장면 맛과 인자한 할아버지의 자애를 잊지 못한다. 한자를 익히기에 열심이던 꼬마 조카가 속임수로 제 자랑을 하는 걸 알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칭찬해주던 삼촌. 그것이 어른들의 아이 기(氣) 살려주기였다고 저자는 이제 와서 깨닫는다.
집안에 오래 남아 있던 리어커에 대한 추억도 많다. 아버지를 도와 리어커로 연탄재를 날라 웅덩이를 매워 부지를 만들던 일을 회상한다. 그 리어커는 나중 페인트 일을 하는 아버지의 작업 도구를 운반하고, 오징어 건조 작업 때는 참 많은 오징어를 실어 날랐다. 어릴 적 저자는 호기심이 많고 관찰력도 대단했던 것 같다. 자기네 집 2층 창고에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그 가운데는 개인용 개다리소반이 2백여 개 있었다. 동네에 큰일이나 잔치가 있으면 저자와 형은 그것을 꺼내주는 일을 도맡아 했다. 삼촌이 어릴 적 쓰던 야구 클럽, 매트, 방망이들도 있었다. 저자는 그걸 꺼내 동네 아이들과 골목에서 야구 놀이를 했다. 부엌에는 커다란 조선 가마솥이 걸려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 가마솥으로 밥을 짓고 집안의 명품인 구수한 숭늉을 끓였다. 저자는 집안의 큰 어른인 조부님에 대한 조모와 어머니의 극진한 정성, 아버지의 효도를 보면서 어른에 대한 공경을 배운다.
필자는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크고 작은 옛 일들을 어떻게 그처럼 빠짐없이 소상하게 기억하고 파노라마 같이 세세하게 그릴 수 있는 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정선의 금강산 진경산수화나 일본의 세밀화 풍속도를 보는 것 같은 사실감을 느꼈다.
이런 기록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먼 훗날 농어촌 사람들의 생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귀중한 자료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2장에 실린 △동해안 반찬 이야기 △김, 미역 그리고 성게 알 △동해안 생선에 대한 품평 △동해안 정치망 어장의 묘미와 한계 △오징어 건조에 대한 단상 등의 글도 동해안 어민이 살아가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생생히 서술하고 있다. 세 척의
큰 어선의 선주이자 조선소 두 곳을 운영하던 조부와 부친이 파산을 당한 후, 저자의 12명 대가족은 오징어 건조로 생계를 꾸려가게 되었다. 저자와 형, 누이들은 모두 부모님을 도와 리어커로 오징어를 실어 날라 건조대에 내다 걸어 말리고, 그것을 손질하여 상품으로 만드는 작업에 매달렸다. 한때 오징어가 대풍을 이루던 시절, 동해안 어민들이 살아가는 풍속도였다. 이런 풍경도 똑 같이 민초들의 훌륭한 어촌 생활사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제2장 「바다와 나」에 실린 ‘기억에 남을 멋쟁이 선장 이야기’는 특히 흥미롭다. 1960년 한국해양대학은 항해학과 50명, 기관학과 50명의 해기사들을 졸업생으로 배출한다. 그러나 승선할 선박이 없었다. 국비로 키워낸 졸업생들의 일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선장 출신 교수 한 분이 교수직을 그만두고 일본에 건너가 스스로 선장이 되어 일본 선박 한 척에 제자 졸업생들을 승선시켰다. 선원 수출의 효시였다. 그는 곧 한국선원 담당 선원송출 부장이 되어 한 척 두 척 한국 선원 송출 척수를 늘려갔다. 이것이 실마리가 되어 우리 선원 송출은 1980년대 5만 명에 이르러 연간 매출 5천억 원을 달성하게 되었다. 그는 우리 해운 발전의 숨은 선구자가 아닐까.
페르시아 만에서 전쟁이 났을 때 일이다. 한국 정유사가 용선한 유조선의 외국인 선원들이 전쟁터로의 입항을 거부했다. 정유사에 난리가 났다. 원유를 실어오지 못하면 국내 산업이 마비된다. 한국 선원이 승선한 유조선을 찾아 용선하기로 한다. 그러자 Y선장은 선원들을 모아놓고 호소한다. “ 죽을 각오로 페르시아 만으로 들어가서 원유를 싣고 오지 않는다면, 우리 조국의 산업시설이 멈추어 선다. 같이 들어가자. 반대하는 사람은 하선시켜 주겠다.”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장은 무사히 원유를 싣고 한국의 항구에 입항했다.
위 두 선장의 일은 한국 해양 개척사의 귀중한 한 장(章)이 될 것으로 본다.
외항선 선장 가운데는 가끔 기인(奇人)도 나타났다. 프로 야구단의 단장이 된 해양대 출신 선장 일화도 재미있다. 그는 선상에서 TV중계방송을 보면서 롯데자이언츠 팀의 전략을 오랫동안 연구했다. 그리고 1990년《필승전략 롯데자이언츠》라는 책을 출판했다. 롯데 팀은 그를 구단주로 초대했다. 그는 배에서 내려 프로 야구 구단주 직을 맡았다. 그는 2년 만에 그때까지 만년 꼴찌이던 롯데를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다시 선장으로 돌아갔다. 정말 멋쟁이 캡틴들 이야기이다.
김인현 교수는 첫 수필집을 펴낸 뒤 일간 동아일보에 외항 상선 선장으로서의 생활 경험을「바다, 배, 그리고 별」이란 타이틀의 칼럼으로 장기 연재하고 있다. 현재 29회까지 나간 이 칼럼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절찬을 받으며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 고른 △ ‘다양한 용도에서 사용된 어선’ △닻 △‘선박에서 특진하는 방법’ △ ‘어려울 때일수록 바다로 가자’ 등 네 편의 글이 제2장에 올라 있다.
저자 김인현 교수는 바다를 사랑하고 자기가 ‘바다 사나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걸 잊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이다. 아마 그래서 그는 고려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국내 굴지의 로펌인 <김&장>법률사무소에 스카우트 되었을 때도, ‘선장(해사자문역)’이란 자격을 고집해서 관철시켰던 것 같다. 이 책의 타이틀에 ‘선장 교수의 고향 사랑’이라고 ‘선장’을 강조해 넣고 있는 이유도 짐작할 만하다.
필자는 저자와 동향의 출향인이다. 필자는 서울의 언론계에서 정년퇴직한 뒤 동향 후배들의 청을 물리칠 수 없어서 주간 《영덕신문》의 편집인 직을 맡아 거의 10년간 운영했다. 1999년부터 국립목포해양대학 교수로 있던 김인현 교수의 칼럼을 싣게 되었다. 애향심이 넘치는 그의 글을 보면서 그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영덕 출신 문학인 30여 명이 향토 문학동인지《토벽(土壁)을 펴낼 때 김인현 교수도 참여하여 함께 활동하고 있다.
저자 김인현 교수는 우리가 자란 고향을 누구보다 더 깊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책의 제4장 ‘지속 가능한 영덕과 나’에 나온 글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고향 영덕이 자기에게 특별한 것 네 가지를 주었다고 말한다. 첫째, 영덕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토양을 주었다고 한다. 열악한 교육 환경이기 때문에 더 분발할 동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둘째, 여러 사람과 잘 어울려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본다. 가족, 친족, 종가, 외가, 진외가가 가까이 살아 웃어른들을 존경하고 잘 섬길 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좁은 지역사회 학교이기 때문에 학우들과는 더 친밀한 관계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셋째, 집단에 대한 강한 소속감을 갖고 당당하게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전통적 집안의 일원임에 긍지를 가지고 “집안의 얼굴에 먹칠을 하지 말자”는 각오로 당당하게 되었다는 얘기다. 넷째, 고향은 우리에게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긴 안목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아름다운 산천을 주었다고 한다. (‘고향 영덕이 특별히 우리에게 준 것’)
저자는 많은 아름다움과 혜택을 안겨준 고향이 인구 격감으로 행정 단위로서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는 걸 안타까워한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고향을 지속 가능한 고장으로 만들기 위한 제언을 하고, 전문 학자들이 참여한 ‘영덕학’의 정립을 주창하고 있다.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필자는 김인현 교수의 두 번째 수필집 (Miscellany Collection)을 읽고 서평이라기보다는, 독후감에 가까운 글을 쓰면서 끝으로 한 가지 아쉬움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신의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기억과 생각과 의견을 폭포수 같이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자유 민주 공화체가 처한 심각한 정체적 위기에 대한 고뇌나 성찰의 흔적은 보여 주지 않고 있다. 그의 다음 글을 기대해 본다.(202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