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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정례법회(3.24)
초벌 : 임도운
완성 : 이경주
솔성요론
2.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
오늘은 솔성요론 2조입니다. 솔성(率性)이란 무엇인가요? (청년: 성품을 거느리는 게 솔성입니다.) 그럼 성품을 거느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또 성품을 못 거느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청년: 마음이 그르고 편협되서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성품은 무엇입니까? 본래 우리 마음 고향자리를 성품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품에는 마음의 원리가 있습니다. 성품의 내용을 보았더니 ‘공원정’이라는 성질도 있고,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내용이 남의 것이 아니라 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면서 내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대로, 내 자식 거느리듯이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물질의 지배를 받거나 성품을 놔두고 다른 욕심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고 있더라. 그러니 본래 주인인 내 성품이 어느 경계에서나 주인으로 나를 거느리고 살자는 것이죠. 내가 주인으로 살자. 성품이 주인으로 살자. 즉, ‘내 본래 마음이 주인으로서 살자’하는 것이 솔성요론의 내용입니다.
여러분 솔성으로 사시나요? 솔성을 하려면 먼저 ‘성품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 성품을 어떻게 평상시에 주인으로 살 수 있을 정도로 지켜내고 힘을 길러낼 것인가?’를 알아야합니다. 그 첫 단계가 견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품이다’고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견성한다고 해도 실제 경계에서는 습관 혹은 업력, 또는 감정으로 처리할 수 있어요. 그래서 그 습관·욕심·관념에 속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이나 관념이나 업력이나 습관이나 욕심으로 내가 내 마음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이것에 속지 않고, 본래 봤던 성품자리를 지켜내고 힘을 길러내는 것이 바로 양성입니다. 견성을 해서 양성을 해야지 힘이 있습니다. 마치 배터리 충전을 해놓은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야 쓰겠죠? 솔(率)을 거느린다는 것도 되지만 쓴다는 것도 됩니다. 성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해, 평소에 배터리를 충전도 안하면, 즉 경계 속에서 단련도 안 해놓으면 어떻게 쓸까요? 쓰지를 못하겠죠. 내 본래 마음,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성품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고 그러면 안 되겠죠. 경계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멈춰서 쓰는 것도 있지만, 평시에 저축삼대력이라 해서 정시에 선도 하고 기도도 하고 단전주도 하고 지켜 냈어야지, 실제 경계에서 올라오는 감정, 선입견, 관념, 온갖 에고의 마음들, 또는 전생에서 닦아온 성격이랑 습성들이 업력이 밀려올 때 과감히 뿌리치고 서원의 힘과 신심의 힘과 함께 참 내 마음자리가 체가 되어서 에너지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몇이냐. 어떻게 해야 견성을 해서 양성을 하고 솔성을 할 것인가 할 때, 솔성의 입장에서 볼 때 첫째가 ‘사람만 믿지 말고 법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두 번째가 바로 오늘 내용입니다. 열 사람은 열 명(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원수(元數) 또는 부정수(不定數)라고 합니다. 이것은 많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럿을 이야기해요. 많은 사람을 열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각자의 생각과 주장, 가르침, 특성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종교가 다양한 이유도 여러 스승이 있어서입니다. 제불조사가 무지 많습니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이 나온 것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문은 얼마 안 되고, 온갖 제불조사의 법문을 모아 놓은 것이 팔 만개인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많은 스승들, 많은 가르침들, 많은 주장들, 많은 생각들, 많은 특성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열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동시에 인연(因緣)인 것입니다. 여러 인연들인 것이죠. 여러 인연들 중에는 선연(善緣)도 있을 것이고, 악연(惡緣)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 강자도, 약자도 있겠죠. 여러 사람이라고 해도 다 여러 사람이 아닙니다. 인연 속에서 이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 원불교 어떻게 만났어요? 딱 봐서 ‘미래의, 새 시대의 주세불이신 원불교가 가장 원만하고 사실적이며 생활 속에 도움이 되고 미래의 주세 종교가 되겠구나.’하고 찾아온 사람 있어요? 결국 열 사람의 소개로 오셨을 것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형님, 언니, 누나, 옆집 아주머니... 누군가 인연이 있어서 만났듯이 여러 인연을 응한 것입니다.
거기에 법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법은, 쉽게 이야기해서 의견, 주장, 가르침으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교법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의견입니다. 여러분들이 결정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묻죠? 우리 교당에서 프로젝터를 선정할 때, 예주 간사한테, 명섭교우한테 물어서, 이왕이면 화면은 밝은데 불필요한 기능은 없고, 렌즈를 오래 쓰는 거. 그러면서 너무 무겁지 않고 가지고 다니기 좋고 A/S를 잘 받을 수 있는 것들을 선택하겠죠. 여러 사람 가운데 그 분야의 지자(智者)가 있을 수 있고 우자(愚者)가 있을 수 있습니다. 범위가 좁을수록 생각의 범위가 좁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설문조사를 할 때 열 명만 가지고 판단을 하면 안 되죠. 최소 1000명 이상, 각각 지역의, 여러 세대의 의견을 수렴해서 정책이나 당, 대선후보의 지지율 같은 조사가 나오죠. 열 사람이라는 것은 좀 더 많은 수의 의견을 객관적으로 수렴해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인연이 없는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 묻지도 못하고, 성격이 소극적인 사람은 묻고 싶어도 질문도 못합니다. 묻는 순간 약자인 것 같고, 내가 아는 것이 맞는 거 같고, 더 잘난 것 같고, 내 경험이 맞는 것 같고... 온갖 생각들이 납니다. 묻는다는 것, 의견을 구한다는 것은 내 것을 먼저 놓는다는 것이죠. 내 것이 있으면 구하지 않죠. 그러니 내 주장, 선입견, 주견은 옆에 두고 구해야겠죠. 이것에는 지자본위하자는 것도 있습니다.
‘응하여’라고 하셨습니다. 넓게 응해,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응해보세요, 의견을 구해보세요. 그러면 그 사람이랑 인연이 됩니다. 응하다 보면 기운이 터지죠. 그리고 화합이 되고 동의를 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물어보지 않아요. 자기의 방식, 생각만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니 같은 종교 안에서도 염불종은 염불만 하고, 선종은 책도 보지 말고 앉아만 있으라고 무식하게 하고 있게 됩니다. 묻질 않아. 여러분은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로 나왔습니다. 다 똑같죠? 그런데 왜 내가 믿는 종교의 사람이외에는 묻지도 말하지도 만나지도 않아야 합니까? 서울대 인문학과 성해영 교수님 있죠? 이분이 강의를 많이 하고 다니시는데 기독교 단체에서는 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기독교 사람은 기독교 사람만 불러요. 예외인 목사님, 이정배 목사님 같은 분들도 있지만, 기독교 방송에서 타종교 불러다 이야기한 적 봤나요? 우리는 원음의 소리라고 해서 이웃종교 불러다 이야기하는데, 그 사람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안해해요. 사도(邪徒)가 와서 우리 신심을 흔들까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러 의견들을 접하다 보면 인연도 넓어지고, 지자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처처불상 사사불공을 실천하게 됩니다. 내 종교 믿는 사람만 부처님이고, 믿을만한 사람이에요? 다른 종교 믿는 사람은 사람도 아니에요? 그건 아니잖아요.
여러 사람의 의견들을 응하는 시스템이 원불교의 공화제도입니다. 사회로 말하면 민주주의입니다. 몇 사람의 의견으로 할 것이 아니라 이왕이면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의견이 많으면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나 절차가 복잡하니까 큰 건들은 대의제도를 통해서 하죠. 박정희 같은 놈들은 이것을 악용했죠. 장충동에서 대의원으로 해서 자기 맘대로 뽑기도 하고. 원불교도 수위단원이 있습니다. 수위단원을 뽑을 때 남자 9명, 여자 9명의 3배수, 남녀 27명을 뽑아요. 이 때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응해서 위원회에서 뽑죠. 그렇게 내놓으면 교도 회장님들, 교무님들의 의견을 통해서 3분의 1을 뽑습니다. 이 분들이 다시 모여서 종법사를 뽑습니다. 일종의 공화제도입니다. 후보 선정할 때 제대로 될까 하는 문제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옛날에는 제왕, 황제, 교황, 장이라고 해서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우리들 마음속에는 이상한 마음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존경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매달리고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동시에 누군가 똑똑한 사람이, 나는 머리 안 아프게 일을 잘 처리했으면, 돈을 줄 테니까, 권한을 줄 테니까 하는 마음이 있어요. 나는 편하게 살고 싶으니까. 그러면 똑똑한 사람 중에 ‘네가 일을 열심히 하니까 권한을 주고 예산을 줄게’ 합니다. 그것에 욕심을 부려서 뛰어 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국가에서는 마음대로 못하게 법으로 투명하게 하도록 제제를 해야 합니다. 서로 감시하게 만들죠. 그래서 입법, 사법, 행정이 서로 견제와 균형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견제와 균형을 하지 않고 독점적인 권한을 주었을 때 온전히 할 수 있는 사람은 지구에 몇 명 안 됩니다. 어떤 인간도 반드시 견제를 당해야 합니다. 서로 상호 견제를 해야 합니다. ‘대종사님 같은 사람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대종사님 같은 분도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종법사 위주로 하면 안 된다. 대중의 의견을 물어서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종교의 시스템도, 선택을 할 때, 제도를 만들 때, 법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30년 만에 헌법을 개헌한다고 하죠. 서로 자기 입장에서 이야기합니다. 역대 대통령들이 대통령되면 개헌한다고 해놓고 되고나선 안했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통령은 하려는 겁니다. 작년에 선거할 때, 지방선거 때 같이 하자고 했는데, 지금 세가 안 좋으니까 버티는 당들이 있어요.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어렵습니다. 국무총리하고 대통령하고 각각 선출해요? 그러면 나라 망합니다. 종법사님께서 교정원장을 지정해야지, 교정원장을 따로 뽑아서 올라요? 그러면 교단 망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모두 주견이 있습니다. 각각 대통령, 국무총리를 뽑으면 따로 행동할 것입니다. 여기서 권한으로 임명한다고 해도 말을 안 듣고 지 뜻대로만 해. 지금 회장을, 단장을 뽑아놔도 지 뜻대로 해. 내가 어지간히 하라고 하지. 위에 지도자를 받들어서 보좌하고 부족한 것이 있으면 채워지고 의견을 내고 수렴해서 뛰어주고 하면 되는데, ‘나’가 들어서 해야겠다는 생각들이 많아요. 대중이 공감하면 하면 되는데 아니여. 열 사람이 응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의견이라도 합력해주지 않아요. 대중은 일단 새로운 건 거부하거든. 그래서 인사를 할 때 언론에 미리 흘립니다. 이게 응하는 방법입니다. 어차피 결정해서 발표 할 것을 미리 흘려놓지 않으면 거부감이 들 수 있습니다. 미리 생각을 해보는 것이죠. 미리 언론에 장관 후보 3명 흘려놓으면 사람들이 한 번 더 생각해보죠. 언론에서 따따부타 하거든. 그렇게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거든. 아무리 좋은 의견도 갑자기 내어 놓으면 거부당하기 쉽게 됩니다. 흡수할 수 있는 마음의 여백, 기운이 연결될 수 있는 시간, 마음속으로 수긍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당에서도 회의를 합니다. 이번에 영산을 가죠? 그러면 ‘프로그램을 어떻게 할 것인가? 식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 식구들이 회의를 하죠. 그리고 그 전에 회장단 회의에 ‘언제 간다, 예산은 얼마다, 차량비는 어떻게 할 것이다’고 회의를 하죠. 어떤 단체나 조직, 가정에서도 회의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불협화음이 생기고 화합하지 않습니다. 좋은 의견이 수용이 안 되죠. 사람들을 손님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회의를 한다는 것은 모두 다 참여해서 주인을 만드는 일입니다. 이번에 간식을 귤을 할 것인지 오렌지를 할 것인지 한라봉을 할 것인지 고민했어요. 귤은 3월 달 되면 말라비틀어진다고 해서 한라봉과 오렌지 중에서 결정하는 회의를 했죠. 그러면 사서 갈 것인가 아니면 거기다 맡길 것인가를 전화해서 물어봤어요. 몇 박스를 할 것이냐. 성현 예비교무에게 물어보니 남녀기숙사에 한 박스씩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러고 생각해보니 영산출장소도 있고, 식당도 있고 마음훈련원도 있네? 수도원도 있고. 그러면 7박스가 됬죠. 그러면 과일이 어디 것이 싱싱하고 좋은가? 이현도 교도 부인이 도매상하니까 거기에 시키려고 하네. 이렇게 공양하나만 하더라도 여러 사람의 의견을 응해서 고민합니다. 함께 참여하고, 다양한 의견이 수용되고, 서로 주인이 되고 서로 나눠서 하나가 됩니다. 일을 몇 시간해서 힘든 것이 아니죠. 일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했냐 해도 외롭게 했느냐, 미움 받으며 했느냐 웃으면서 했느냐에 따라서 피로도가 차이가 나죠.
여기서 보면, 제일 좋은 법. 받아들일 때는 넓게 해서 받아들이고 선택을 할 때는 정선(精選)해라고 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시장에 가서 최소 3군데는 들리라고 하셨습니다. 일이 어두운 사람은 시장에서 가장 처음에 간 곳에서 바로 사죠. 가게 주인들이 그런 사람들을 알아보고 과일 안 팔리는 것, 맛없는 것을 꺼내서 줍니다. 설사 머리가 좋고 경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혼자 결정하게 되면, 독권독한(獨權獨恨)이라 해서, 자기 혼자 권력을 쓰면 나중에 외로워집니다. 옛날 임금도 왕사(王師)가 있고, 회사에서도 이사회 제도가 있고, 때로는 주주들 불러다가 의견 수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함께 나가는 세상이기 때문 인겁니다.
여기서 시중 교우가 예리하게 질문을 했는데, ‘제일 좋은 법으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일 좋은 법이 있습니다. 믿는 것은 타력이지만 믿는 주체, 결정권자는 나입니다.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결정이고 선택입니다. 제일 좋은 법은 나름대로 연구력이 들어가야 합니다. 2조는 연구적 솔성이고 1조는 신앙적 솔성입니다. 제일 좋은 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첫째로 성리(性理)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성리가 빠진 종교는 사도(邪道)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해서 진리가 빠진 것이죠. 우리는 진리적 종교를 신앙하지, 종교적 진리를 신앙하지 않습니다. 종교에서 주장한 진리가 아니라 진리 자체를 신앙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합당하고 성리에 뿌리를 둔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도이자 정법입니다. 그러면서 병진(竝進)의 원리가 들어 있어야 합니다. 삼학, 동정, 이사, 자타가 병진되어 있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안 되겠죠. 우리 원불교 법은 삼학이 병진되어 있습니다. 염불만 해라, 계율만 지켜라, 기도만 해라, 믿기만 해라... 그러지 않습니다. 원만한 법이어야 한다고 하죠. 두루 두루 응해서 원만해야겠죠. 동정(動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動)일 때만 또는 정(靜)일 때만 좋은 게 아니고 동은 동대로 정은 정대로 동과 정이 서로 보탬이 되고 서로의 자료가 되어야 됩니다. 일만해도 안 되고 이치만 밝혀도 안 되는 것이죠. 시험점수는 잘 받는데 설명할 때는 버벅대는 사람이 있고, 글은 잘 쓰는데 사람관계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 모두 원만하지 못한 것이에요. 또 일만 하고 이치는 모르고 반대로 이치는 알고 일을 못한다면 원만하지 못한 것입니다. 법도 같습니다. 자타도 마찬가지입니다. 타력에만 의지해도 안 되고 자력만 강조해도 안 됩니다. 이 세상은 자타가 하나로 묶여져 돌아가고 있습니다. 엄마 뱃속에서 문 열고 나온 사람, 갈 때 관 뚜껑 혼자 덮고 갈사람 있어요? 자·타력이 누구나 병진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좋은 법은 실생활에 활용되는 실용적이어야 합니다. 바로 사실적 도덕인 것이죠. 그 다음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대성에 맞아야 합니다. 법구생폐(法久生弊)라는 말이 있습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사법고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 절에 가서 공부해서 붙었습니다. 지금 그렇게 하면 다 떨어집니다. 시대가 빨라져서 판례가 빨리 빨리 나오니, 최신 판례를 공부하지 않으면 떨어 질 것입니다. 요즘 대입에서도 최근 시사성이 있는 문제를 내잖아요. 그러니 시대성에 맞지 않으면 이제는 안 됩니다. 시대성에 맞는 법이어야 좋은 법인 것이죠. 그다음 제일 좋은 것은 자기한테 맞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좌선을 하라고 하면 잘하고, 어떤 사람은 행선이나 염불이 자신의 체질에 맞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체질에 맞아야 좋은 법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넓게 쓰이는, 널리 도움이 되는 법이어야 합니다. 대종사님이 ‘나는 작은 것을 전부 크게 한다.’고 그러셨어요. 많은 사람이 가져다 쓸 수 있는 법이 좋은 법일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불공, 교화에 활용되는 법이 정말로 좋은 법입니다. 세상을 보다 평화롭게, 세상을 보다 윤기 있게, 보다 평등하게, 보다 기쁘게 서로 돕고 살 수 있 법이 좋은 법일 것입니다.
여기서 ‘믿을 것이요’는 내가 선택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가 백날 말해도 선택은 여러분들이 할 것입니다. 선택을 할 때 항상 최대한 묻고 찾아보아야 합니다. 이것도 중도에 맞아야겠죠. 어떤 사람은 물건을 하나 살 때 1000원을 아끼려고 하루 종일 시간을 투자하고 있어요. 차라리 근처 마트에 가서 1000원 더 주고 사는 게 낫겠죠. 경동시장이 물가가 싸다고 해서 하나 사려고 경동시장 가는 것은 마이너스죠. 그냥 옆 편의점에서 사야지. 산 가격만 비교하고 차비는 생각 안 해. 결국은 최대한 빨리 자기의 서원을 이룰 수 있는 원만한 법이 좋은 법이고, 우리는 그런 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편벽되거나 미신되거나, 자타력 한쪽에 편중되거나 그러면 아니다. 비사실적이어도 곤란하다.
대산종사님께서 이런 법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동의보감이라는 의서가 나올 때에도 하루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많은 생을 통하여 서원을 세우고 소가 되어 풀을 먹어 약성(藥性)을 알아보기도 하고 또 다른 생에는 사람이 되어 약제(藥劑)로 사용해 보고서 써낸 책일 것이다.’ 그렇듯이 원불교의 사은사요 삼학팔조 일원상의 진리는 대종사님께서 그냥 옛다 하고 한번 내어놓은 법이 아닙니다. 대산종사님께서 하시는 신년법문도 그냥 나오지 않습니다. 제가 한번은 대산종사님 방에 들어갔는데 메모지가 벽에 많이 붙어 있어요. 그래서 시자에게 여쭤보았더니, 대산종사님께서 신년 법문을 하거나 대각개교절 법문을 하시려고 할 때 몇 달 전부터 계속 연마하시고, 오는 사람마다 괜찮냐고 물어본다고 했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 ‘세상에 법을 내어놓을 때 하루아침에 내어 놓는 것이 아니고, 수생에 서원을 세우고 진리와 스승에게 줄을 대고 삼천대천 세계에 감응을 받으며 내어놓은 것이 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교법이 그냥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이 ‘대종사님의 이 법은 수만년을 앞선 과학이요 철학이요 종교’라고 말씀하셨어요. 또 너희들이 열심히 공부 안하면 외국인들이 이걸 보고 막 쓰고 역수입할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저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봐요. 미국은 모든 특허나 발명이 많죠. 영어로 다 번역되어있고. 똑똑한 교무님들도 다들 미국에 가십니다. 한국 사람들은 또 직설적으로 묻지 않아요. 의두을 한다고 하면 ‘교무님은 무슨 의두를 연마하세요?’라고 안 해요. ‘교무님은 언제 깨치셨냐?’고 안 묻는다고. 미국 사람들은 교무님은 선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선력을 얻으셨어요?’ ‘언제 얻으셨어요?’ ‘어떻게 얻으셨어요?’ ‘언제 깨치셨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러니 교무님들이 열심히 실질적으로 해야겠죠. 원불교의 좋은 법을 여기서 하지 않으면 나중에 외국인들이 다 가지고 가서 역수입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유교 사상이 중국보다 한국, 일본이 더 잘 되어 있습니다. 불교도 일본이 제일 잘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다행히 대종사님의 일원대도 정법회상을 만났기 때문에, 속았다 치고, 안 난 폭 잡고, 이생에 한번 해보세요. 대종사님께서 한 생 속은 셈치고 믿어보라고 하셨어요. 얼마나 자신 있으면 그렇게 이야기하셨을까요? 질문 받겠습니다.
시자 황직평(黃直平)에게 말씀하시기를 “앞으로 훈련에 중점을 두어야 하겠다. 우리 각자가 먼저 일원주의사상을 확립하고 그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도 훈련시키어 그 사상이 영생을 이어가도록 해야겠다. 일시적인 수단방법이 능숙하다 해도 일원주의 사상에 바탕하지 아니하면 알맹이 없는 껍질이 되고 만다.
대종사님께서 ‘정신 차리지 못하면 외국인들이 와서 먼저 이법을 더 좋아하고 가져가므로 너희들은 차지도 못할 터이니 정신 차려 공부하라. 내 법을 알면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대각하고 하도 좋아서 산을 한 바퀴 돌았는데 너희들이 언제 그렇게 좋은 줄을 알겠느냐. 내 법이 세상에 고루 알려질 때는 지금까지 있던 모든 학문은 다 새로운 개혁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 교리에 정통하라.’하시며 ‘이 좋은 법을 누가 알 것이냐’하고 한탄도 하셨다.
대종사님이나 정산종사님이나 나도 법문을 이 세상에 내놓을 때는 하루아침에 내놓은 것이 아니다. 수없는 생에 서원 세우고 진리와 스승에게 줄을 대고 또 삼천대천(三千大千) 세계의 감응을 받으며 내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법문을 받들때에 쉽게 알아 서는 안 된다. 무서운 훈련의 적공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동의보감(東醫寶鑑)이란 의서(醫書)가 나올 때에도 하루 아침에 나온 것이 아니다. 많은 생을 통하여 서원을 세우고 소가 되어 풀을 먹어 약성(藥性)을 알아보기도 하고 또 다른 생에는 사람이 되어 약제(藥劑)로 사용해 보고서 써낸 책일 것이다.
대종사님 내놓으신 이 법은 수만년을 앞선 과학이요 철학이요 종교학이다. 교리를 연구하고 그 진리를 스스로 각득하여 그 법의 실력을 쌓아야 한다." (54. 6. 11)
- 대산종사법문집 제3집 제4편 訓練, 3. 훈련에 중점 -
청년 4단 노현종
제7 성리품 17장을 보고 이해 안 되는 부분이 있어 질문 드립니다. ‘만법귀일하니 일귀하처요’ 만법귀일에 대해서 쉽게 설명해주십시오.
대종사 봉래 정사에 계시더니 한 사람이 서 중안(徐中安)의 인도로 와서 뵈옵거늘 대종사 물으시기를 “어떠한 말을 듣고 이러한 험로에 들어왔는가.” 그가 사뢰기를 “선생님의 높으신 도덕을 듣고 일차 뵈오러 왔나이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았으니 무슨 원하는 것이 없는가.” 그가 사뢰기를 “저는 항상 진세(塵世)에 있어서 번뇌와 망상으로 잠시도 마음이 바로 잡히지 못하오니 그 마음을 바로잡기가 원이옵니다.”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마음 바로잡는 방법은 먼저 마음의 근본을 깨치고 그 쓰는 곳에 편벽됨이 없게 하는 것이니 그 까닭을 알고자 하거든 이 의두(疑頭)를 연구해 보라.” 하시고 [만법귀일(萬法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라고 써 주시니라.
- 대종경(大宗經) 제7 성리품(性理品) 17장 -
김제원 교무님
먼저 17장 내용을 쉽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부안 변산에 계실 때 서동풍이라는 사람이 김제에서 왔어요. 그랬다가 자기 형제인 서중안을 데리고 와요. 서중안이 또 정세월이라는 부인을 데리고 오죠. 서중안 선생님은 김제에서 한약방을 하는데 직원이 80명이 되는 큰 한약방이었어요. 서중안 선진님은 나중에 익산 불법연구회 토지값을 희사해주셨던 분이에요. 이 서중안 선진님 부인이 직원관리하고, 약재를 관리하고, 손님관리까지 하려고 하니 머리가 아프고 정신이 없어서 대종사님께 질문을 해요. ‘내가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대종사님께서 처음 만났는데 하신 말씀이 ‘그러면 머리 안 아픈 것을 알려주겠다. 만법이 귀일이니, 그 하나가 어디로 들어가는가를 연마해보아라’고 말씀하셨어요. 머리가 아프다고 한 정세월에게 ‘만법귀일 일귀하처’를 연마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 힌트를 주셨어요. ‘저 앞의 산을 봐라. 저기에 계곡이 많은데 저것이 하나로 뭉쳐서 가지 않느냐. 저와 비슷하더라.’고 하셨어요. 우리에게 수많은 번뇌와 생각들이 있는데, 알고 보면 그것이 결국 하나로 간다는 것이죠. 제5식, 제6식, 제7식, 제8식들의 생각들이 나중에 9식 자리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청년 3단 이도심
제가 평소에 지내면서 느꼈던 생각입니다. 계문을 어기는 것이 같았습니다. 계문을 어기는 이런 제가 밉고, 싫다는 감정이 들었는데, 어제 일기를 쓰다가, ‘결국에는 내가 깨우치지 않아서, 그러다보니 자꾸 습관과 업력이 나와서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계속 계문을 어기는 일이 나오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왜 수양을 해야 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이게 ‘내가 내 마음자리를 보지 못해서 그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수양을 하지 못하는 건 제 업력 때문인데, 어떻게 하면 될지, 답이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김제원 교무님
답이 있어요. 죽도록 하면 되는 것이지. 문제는 나와의 관계를 정확히 모르는 것이고, 아직 힘이 안 쌓인 것이고, 원리를 모르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아까 있어지는 것은 이치라고 했죠? 있어지는 것은 소(小) 자리에요. 나태심이 있어지고, 아닌 마음이 나고, 어긴 계문을 또 어기게 되는 것이에요. 내가 본래 못된 놈이라 그런 건 아니에요. 아까 업력의 힘이 강해서 그런 것이지. 만법 중에 업력의 힘이 깊이 들어있어. 이걸 뛰어 넘는, 만법귀일자리를 뛰어 넘고, 그 자리를 수양을 통해서 지켜내야 하는데, 그걸 안하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나한테 자꾸 속는 것이지. 마음의 힘이 없는 것이니까. 경계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깨침이 더딘 것을 두려워해야지. 일어나는 마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경계에 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내가 그 경계를 어떻게 빨리 다시 알아채서 본래 자리를 확인하는 공부를 시켜준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어요. 오히려 경계에 지면 그 경계를 통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거든요.
내가 이걸 하겠다고 하면 내 마음을 정해야지. 아까 소대용 예비교무의 어머니가 와서 ‘원불교를 만난 지 25년째가 되었다. 그동안 거의 무결석 했다. 지금 보성교당에 청소 할 사람이 없는데, 일주일에 한번, 금요일에 항상 교당에 가서 청소를 한다. 금요일에 일이 있으면 목요일에 가서 청소하는데, 그렇게 한지가 10년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본인이 마음을 그렇게 하도록 정하니 어느새 10년이 되었다. 정(定)한 것이 뭐죠? 결정한 거죠. 결정한 것이 무엇이죠? 신(信)이에요. 수양력의 3분의 2는 신에 있어요. 정(定)해버리면 나를 빼앗기려는 그 마음이 3분의 2는 도망가 버려요. 확실하게 정하지 않으니까 할까말까 하는 마음들이 나를 흔들어 버리는 것이죠. 정(定)할 때 비로소 정(靜)해진다. 결정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니까? 예를 들어서, ‘나는 토요일에는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교당에 지각하지 않고 가겠다.’하고 정하면 그냥 가면 되요. 아닌 마음이 나도 ‘그래, 신용을 지키자.’하고 하면 되요. 그렇게 마음을 확실하게 정하지 않았으면, 토요일 갈 때마다. ‘빨래나 할까, 영화나 볼까, 피곤하니 쉴까.’하고 온갖 생각을 해요. 그게 요란함이죠. 정(定)해버린 사람은 그 생각이 없이 그냥 가면 되요. 정하지 않았으니 갈까말까 하는 것이죠. 정하면 되요. 정하면. 결정을 안 한 거에요. 그렇게 결정을 했어도 내가 힘들잖아요. 그렇게 습관의 힘이 없는 사람들은 타력을 입는 거에요. 내가 주변사람들 또는 교무님에게 ‘내가 이렇게 하겠다.’하고 공개하는 것이에요. 또는 일기를 통해 자기가 유념을 잡아 체크하다 보면 어느새 수월해지거든. 생각해봐,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는 사람들 봐봐. 출가한 박여주 예비교무가 국민대 다닐 때, 얘가 집에서 반대하니까 밤 12시 되면 나가서 오토바이 신나게 타고 새벽에 딱 들어갔다가 학교 가서 졸고. 본인이 좋아하고 본인이 하고자 하면 상관없더라. 알면 하게 되어있는데, 알기 전에는 결정을 해라. 그 결정하는 것이 믿는 것이다. 그것이 신심이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첫댓글 와우 감사합니다 경주교우님!
고생하셨어요~
도운,경주교우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