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즈
그후 미주는 승우를 만나지 않았다. 몇 번 전화가 걸려 왔다.
바쁘다는 핑계를 세 번째 댔을 때 승우는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잔뜩 화가 났는지 자꾸만 그러면 나 확 다른 여자에게 장가가 버린다.
하고 말한 뒤 퉁퉁 부은 침묵을 지켰다.
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생각 잘했어.
대학 때 너 좋다고 목매던 여학생들 좀 많았니?
키 크지 잘생겼지. 집안 좋지. 실력 좋지. 인간성 좋지. 5관왕이다. 애 완벽해.
지금도 네 주변에 해바리기하는 여자들 엄청 많을걸.
너무 고르지 말고 후딱 가. 장가갈 나이잖아.
갈 거다. 정말?
그래 장가가면 그 즉시 내가 너 만나 준다.
지난번에 술 엄청 빚졌으니까 술도 맘껏 사 줄게.
그러니까 제발 어서 가기나 해.
정말 말 안 통하네. 도대체 내가 왜 안 된다는 거야?
글쎄 넌 안 돼.
어딜 날 넘봐 넘볼 걸 넘봐야지! 감히 20대가 30대를!
그 말에 승우는 뒤늦게 되새김질한 모양으로 킬킬거렸고 미주는 피식 웃고 말았다.
드물게 투정을 부렸어도 건강하게 잘 지내 라는 그의 인사말은 언제나처럼 다감했고 깍듯했다.
전화를 끊고 미주는 창문을 열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녀석 장가를 가겠다고? 어이구 이젠 패를 까놓고 덤비기로 작정한 모양이네.
지가 나한테 그런 말로 협박할 군번이야! 세월 좋아졌다. 동생 같은 녀석이!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러나 창 밖 서울의 비 오는 밤 하늘 아래
누군가 울고 있는 것 같아 미주는 자꾸만 밭은 기침을 토했다.
1994년 8월 17일
승우와 술을 마시고 심하게 취했던 그날 이후로,
미주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매일 밤 그가 연출하는 음악 프로 그램를 들었다.
러닝 타임 두 시간 중 한 시간은 담당자가 곡을 선곡해서 틀었고
한 시간은 청취자가 보낸 편지나 엽서 팩스의 사연을 선별해서 신청된 곡을 들려주는 방식이었다.
한밤의 팝세계 가 진행되는 동안 승우의 목소리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선곡되는 노래와 사연은 그의 손끝이 내는 맛이었다. 깨끗한 블루 빛에 맑고도 슬픈.
그러나 아름다움과 미소를 끝내 잃지 않는 따스한 사연과 팝송이 흘러 나왔다.
우연히 만나 같이 복권을 긁은 뒤부터 미주는 승우가 자신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매일 하나씩 뜬다는 것을 눈치챘다.
승우가 진행자에게 넘겨주는 사연들 속에
자신이 쓴 글을 남몰래 하나씩 집어 넣은 것이었다.
귀여운 술고래에게. 안목 바다 백사장에서. 캐나다 밴쿠버 토리박스를 아는 이에게.
길을 잃어버린 아이. 케저러로부터. 여자 왈패 감독 나와라. 보고 싶다 CDS 전임 회장! 응답 바란다.
산부인과 의사 친구를 둔 서른 살에게. 식으로 미주만이 사연 발신자를 알 수 있는 글들이었다.
사연의 대부분은 아주 코믹했지만 그 속에는 한결같이 사랑이었다.
미주가 4학년 때 승우를 포함한 CDS 주요 멤버들은 밴쿠버 단편 영화제에 참가했었다.
그 때 길을 잃은 케저러라는 일곱 살짜리 사내애을 발견하고
미주와 승우가 경찰에게 안내해 준 적이 있었다.
오래 전 일을 추억의 상자에서 끄집어 내 한마당 개그로 만들어 띄운 사연이
캐나다 밴쿠버.........나 길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것들이었다.
미주는 깔깔대고 웃다가 승우와 함께 보냈던 지난 시간들이 새삼 애틋하게 그리워졌다.
승우가 방송으로 한밤에 실어 보내는 메시지는 종종 미주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최근 한 영화사에서 각색을 의뢰해 와 선금을 받고 일하는 것 외에는
되는 일도 앞으로 될 일도 없어 보였다.
마음 같아선 직접 쓴 시나리오로 연출을 맡아 한 번 크게 영화판을 놀래킬 작품을 뽑아낼 자신도 있건만,
도무지 진전되는 게 없었다. 서랍이나 충무로의 캐비닛 속에서 썩는 자신의 시나리오들과 함께
미주 자신도 폭폭 썩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울의 도심을 훅훅 찌개 만드는 이 열대야 처럼.
미주는 창문을 열고 냉커피를 만들어 홀짝이면서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에 몸을 적셨다.
헨리 맨시니의 “Moon River"가 흐르다가 멎었다.
진행자가 갑자기 호들갑스레 떠들기 시작했다.
앗! 좀 괴상?......... 아니 특별한 사연 하나가 도착해 있었군요?
네 사연이 언뜻 보기에 프로포즈 같은데..........
상대가 현재 라디오를 듣고 있는지 아닌지조차도 모른다고 하니
과연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띄운 이는..........쿡쿡쿡 재밌군요.
네. 복권 긁은 사내 이고 받는 사람은 아흡 번 전화해도
한 번도 만나 주지 않는 여자, 라도 되어 있습니다.
글쎄요........ 이 친구, 요즘 매일같이 여러 이름으로 사연을 보내고 음악 신청을 하는 친구 같은데...........
복권을 긁는다면 백수? 요즘 같은 세상에 백수를 만나주는 여자는 흔치 않는 법이죠.
수신자. 발신자가 좀 코믹하긴 하지만 담긴 사연이 보기 드물게 간절해서
연출자님께서 채택하신 모양입니다.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나는 매일 온전히 당신의 그리움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오늘도 어제도 엊그제도 나는 매일 당신이 사는 집 근처에서
서성거리며 하루 해를 보내고 왔습니다.
당신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를 벌써 석 달이 넘어갑니다.
사람들은 내게 말할지 모릅니다. 어리석다고 그렇게 할 일이 없느냐고,
아니 당신까지 그렇게 말할지 모르겠지만 내 삶이 살아 있는 시간은 당신과 함께할 때뿐입니다.
나만의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 집 근처에서 일고여덟 시간을 서성이며 기다리면
당신을 겨우 한두 번 볼 수 있습니다. 집에서 일하다가 슬리퍼를 신고 필요한 것을 사 가지고
돌아가거나 어딘가로 외출하는 시간입니다. 바보처럼 숨어 버린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행복에 겨워 돌아옵니다.
내가 당신 앞에 나서거나 더 이상 전화하기를 주저하는 것은
나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부담을 느낄까봐 두려워해서입니다.
지금 이순간도 나는 이 글이 당신을 불편하게 만들까 두렵습니다.
나는 당신을 은혜하고 고외하며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쉼 없이 눈물이 흐릅니다.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내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나는 당신의 향기로 이미 눈 멀고 귀 멀어 버렸습니다.
당신이 내게 지상에 살아 있는 유일한 한 사람의 여자가 된 지 이미8년이 되었습니다.
당신이 주는 무심함이 내게는 참기 힘든 가혹함이었지만 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습니다.
10년을 채우고 20년도 채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급하게 내 마음을 온전히 바치는 것은
내가 미력하나만 당신을 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끝없이 추구해야 할 일이 있고 열정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 혼자보다는 두 사람이 함께한다면 당신이 꿈꾸는 세계를
조금 더 빨리 이루리라고 믿습니다. 나는 당신의 일을 사랑하며
당신이 일하는 모습까지 더 없이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탁입니다. 나를 남자로 받아 주십시오.
당신이 지금 라디오를 듣고 있는지 이미 잠들었는지.
일에 열중하는지. 어는 것 하나 알지 못하지만 나는 틀림없이
내 간절한 마음이 당신에게 전달되리라고 믿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처음이지 마지막으로 키스를 했던 바닷가에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본다면 당신은 내 마음이 그때 그곳에
이미 영원히 붙박여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나의 사랑은 어느 누구라 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내 사랑은 절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만 뿌리를 박고 살 수 있는 한 그루 나무이니까요.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사연을 들으며 미주는 감전된 듯 부르르 떨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이젠 더 이상 부인할 수도 버티기도 힘들었다.
아...........승우가 내 반쪽이었구나!
아 그가 진정 내 잃어버린 반쪽이었구나!
오랜 세월 저토록 일관되게 간절하다면 그는 업적의 시간을 헤쳐 온
내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3년이란 찰나의 시간을 늦게 도착한 것뿐이었다.
다리에 힘이 빠진 미주는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젠 자신을 속이기에 지쳤다는 의미였다.
이제는 그가 걸어오는 방향을 향해 자신도 똑바로 걸어가 마주 서야 한다는 것.
그런 가운데서도 미주의 마음속에선 망설임과 떨림이 수없이 명멸했고 교차했다.
미주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이 되자 미주는 차를 몰고 강릉을 향해 출발했다.
바닷가에서 서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본다면 당신은
내 마음이 그때 그곳에 이미 영원히 붙박여 있음을 알게 될 겁니다.
하는 구절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네 시간이 조금 더 못되어 미주는
경포대 옆 안목 백사장에 도착했다. 바캉스 시즌이었지만 아침인 데다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곳이어서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바다에서 걸어온 안개가 방파제 쪽 해변에 늘어선 텐트를 감싸고 있을 뿐.
해무를 빨아들이는 블루 빛의 바다는 예전과 변함없이
붉은 태양 아래 수평선을 그어놓고 그 아래 잔잔하게 누워 있었다.
미주는 떨리는 가슴으로 승우가 말했던 그 소나무 앞으로 다가갔다.
아름드리 해송 줄기 한 면에는 이런 글씨가 조각되어 있었다.
미주야! 사랑해! 영원히!
미주는 손가락으로 그 글씨를 쓸어 내렸다.
이렇게 될 것을 왜 그토록 오래 그를 힘들게 했던 것일까.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이니 선후배니 하는 가시적인 장벽이 아니라 그는 남자. 나는 여자.
그리고 서로 깊이 사랑한다는 것이었는데, 참으로 어리석었어.
미주는 가슴이 너무나 아파서 두 손으로 가슴을 싸안고 비틀거리며 백사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와 처음으로 입맞춤을 했던 그날 CDS 일행은 동이 트자마자 강릉 역을 향해 출발했었다.
두꺼운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내고 플래시를 비추면서 나무 속살에
이렇게 많은 글씨를 정교하게 팠다면 승우는 밤새 나무와 씨름을 했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에 타고 있는동안 미주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었다.
아니, 오히려 승우보란 듯이 성호 선배와 팔짱을 끼고 장난을 치며 놀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깊은 한숨과 함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미주는 바다를 마주한 채 몇 시간이고
하염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미주의 마음은 승우에게 한 여자로 완전히 변해 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 4시.
미주는 우체국으로 가서 한밤의 팝세계 앞으로 띄울 사연을 쓰기 시작했다.
승우라고 썼다가. 씨 자를 붙여 승우 씨! 하고 썼다가 지우고
다시 승우에게로 썼다가 승우 씨에게로 바꿨다가 또다시 지웠다.
호칭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 스며 있는지 미주는 새삼 놀라고 있었다.
한참 동안 망설이던 미주는 결국 적당한 호칭 하나를 찾아냈다.
한밤의 팝세계 담당 프로듀서님께
17일 밤 방송됐던 프로포즈 사연을 들은 청취자입니다. 제가 그 당사자입니다.
복권 긁은 사내에게 전해 주십시오. 저는 이미 그 사람을 남자로 받아들었다고요.
저는 지금 그 해송이 있는 바닷가로 내려와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연락이 닿는 대로 이곳으로 내려와 달라고 전해 주십시오.
제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요. 부탁합니다.
국화꽃 여자 드림.
첫댓글 고맙게 잘읽었읍니다~! 지난10여년전으로 돌아간 느낌이네요!!이소설을 읽던 시절이 행복햇던 시절이거든요!!
소설방을 사랑해주시는 미혜님 이 글을 읽으시며 행복한 시절의 좋은 기억을 떠올릴수 있다니 제게도 더 없이 소중한 보람으로 다가오네요...지금처럼 늘 행복하세요*^^*
"사랑에는 국경도 나이도 없다"고 했지요...멋있는 프로포즈였고 멋있는 프로포즈에대한 답인것 같네요
한편의 아름다운 장편 사랑시를 읽어 가는것 같아요...물안게님 좋은 소설 선별해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