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사울 왕의 첫 예배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사울 왕은 사사시대 400년 혼란을 끝내고 이스라엘이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하나님께서 들어 쓰신 인물입니다. 사울은 무려 40년을 통치했습니다. 그 이전에 왕이 없었기 때문에 왕의 제도를 만들어가고, 왕의 역할이 무엇이며, 또 백성이 왕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이 모든 것을 만들어가야 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에 베냐민 족속 기스의 아들인 사울이라는 인물이 사용되었습니다(등용되었다).
어떻게 왕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절차가 없었기 때문에 사울의 경우는 왕이 되는 과정이 복잡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명령하십니다. “내가 내일 밤에 너를 찾으러 사람을 보낼 텐데 바로 네가 그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어라” 하나님이 보내겠다는 사람은 사울인데, 그런데 암나귀를 잃어버려서 종과 함께 암나귀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실패합니다. 그때 마침 사무엘이 라마라는 동네 근처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와 함께한 종이 사울에게 이 마을에 가면 선지자가 있는데, 아마 그 선지자에게 물어보면 나귀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찾아가게 됩니다. 그렇게 찾아갈 때 사무엘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그를 왕으로 기름 부었습니다. 사무엘상 10:1절을 보면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가져다가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 맞추며 이르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의 기업의 지도자로 삼지 아니하셨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세 가지 기적이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 가지 기적이 사무엘상 10장에 하나하나 소개됩니다. 첫 번째 기적은 10:2절을 보면 “네가 오늘 나를 떠나가다가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그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버지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로 말미암아 걱정하여 이르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 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두 사람을 만났는데, 두 사람이 사울에게 이야기하기를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았으니 걱정하지 말라 할 것이고, 오히려 아버지가 아들을 걱정하고 있다고 전해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말씀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두 번째 징조 기적은 거기서 좀 더 가면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날 텐데 그중의 한 사람은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한 사람은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한 사람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있는데(사무엘상 10:3), 그중에 떡을 세 덩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떡 두 덩이를 사울에게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사무엘상 10:4). 말씀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세 번째 이적 징조는 사무엘상 10:5절에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들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 선지자의 무리가 신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사무엘상 10:6절을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네게 임하여 그 무리와 함께 예언할 것이라고 합니다. 말씀한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날 선지자 사무엘이 이야기한 그대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심지어 마지막 기적 사건을 통해서는 성령이 사울에게 임하므로 사울이 새 마음을 가진 새사람이 되고 사울도 선지자이냐는 칭송을 받게 됩니다.
이런 세 가지 기적이 일어날 때 사울에게 두 가지를 부탁합니다. 즉, 이런 세 가지 기적 일어나거든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하는 줄 알고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는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사무엘상 10:7). 이것이 첫 번째 부탁(사명)입니다.
두 번째 부탁은 길갈로 내려가서 사무엘을 이레 동안 기다리라는 명령입니다. 그러면 사무엘이 와서 그와 함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 왕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고 이끌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무엘상 13:1절을 보면 “사울이 왕이 될 때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라고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된 사울은 2년 동안 통치하게 됩니다. 그때 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을 기습 공격해서 그들이 엄청난 혼란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 결과 블레셋이 사울이 왕이 돼서 다스리는 이때 그들을 찍어 눌러놓지 않으면 이스라엘의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확신하고 엄청난 군대를 몰고 쳐들어왔습니다. 사무엘상 13:5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더라”라고 말씀합니다.
병거가 삼만, 마병이 육천 명입니다. 병거가 삼만이라는 것은 병거를 말 두 마리가 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숫자입니다. 부유했던 왕 솔로몬도 병거는 겨우 천사백 개뿐이었습니다(열왕기상 10:26). 병거는 지금 탱크입니다. 이스라엘에는 병거가 제로입니다. 무기도 제대로 없는 가운데 사울은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바로 이 시점이 사울 왕이 사무엘의 명령을 따라서 길갈에서 이레 동안 사무엘을 기다리던 상황입니다. 백성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빠졌습니다. 숨을 수 있는 곳이라면 수풀 속, 바위틈,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웅덩이를 찾아 숨고, 그것도 안 되면 어떤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동쪽, 즉 전쟁 없는 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사무엘상 13:8절을 보면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무엘은 정한 기한대로 오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라는 망할 것 같고 백성은 사기를 잃고 오합지졸 그 자체입니다. 왜 이 중요한 시간에 사무엘은 오지 않았는가? 사울은 불안과 초조함에 빠집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제사합니다. 번제 드리는 것을 강행합니다.
근데 이 상황에서 사울이 붙들어야 했던 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불안과 초조함에 사로잡힌 사울 왕은 자신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번제(“올라”)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왕이 화목제(“슐라밈”)를 바치기 이전에 사무엘이 도착해서 이를 막습니다. 사울은 선지자를 맞으러 나갑니다(10절, 원문대로 직역하면 “축복하러 나갔다”).
제사를 드린 이유가 명확하게 12절에 나옵니다. 11절을 보면 사무엘이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묻습니다. “왕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울이 변명을 쭉 늘어놓습니다. 11절을 보면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을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라고 말씀합니다. 즉, 사울은 자신이 불순종한 행위를, 하게 된 탓을 다른 세 당사자에게 돌립니다. 자신의 병사들은 “흩어졌으며”, 사무엘은 “정해진 시간에 오지 않았고”, 블레셋 족속은 “믹마스에 모였다”라고 합니다. 사울은 “어쩔 수 없이”(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스스로를 강요했다”) 제사를 실행했다고 합니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서 “당신이 정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즉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블레셋을 무찌르려고 번제를 드렸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이 “여호와의 은혜를 구하기” 전에 블레셋 족속이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12절).
사울은 제사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안 듣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더라도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신다는 생각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은혜를 받는 것에 있는가? 복을 받는 것에 있는가? 이것이 사울의 생각입니다. 예배를 안 드리면 은혜를 못 받으니까, 예배를 드리면 은혜를 부어주셔서 블레셋을 무찌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강행했습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에 합당하게 반응하는 일입니다. 예배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도, 찬양, 헌금, 말씀 듣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나는 은혜받는 곳에 가서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릴 거야”라는 말은 예배의 목적이 잘못된 것입니다. 경배가 목적이고 결과는 하나님의 위엄과 임재 앞에 서서 하나님을 찬송, 경배하는데 은혜가 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결과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에 우리는 다만 경배함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알아서 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의 주객이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