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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전도연,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
전도연이 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현지시각으로 5월27일 오후 7시30분부터 열린 칸영화제 폐막식에서 <밀양>에서 신애 역할을 맡아 열연을 펼쳤던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의 영광을 안은 것이다. 이로써 한국영화계는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이후 20년만에 유력 해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수상자를 보유하게 됐다.
여우주연상 시상자인 알랭 들롱으로부터 상장과 상패를 받은 전도연은 “봉수아”(프랑스어로 ‘굿 이브닝’)라고 말문을 연 뒤 “믿기지 않는다. 훌륭한 감독과 훌륭한 작품에서 열연한 여배우가 많다고 들었는데, 제가 그 여배우들을 대신해서 이 자리에 선 것 같다. 그런 자격과 영광을 주신 칸영화제와 심사위원 여러분께 감사드린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이창동 감독님이 하게 해주셨다. 그리고 송강호 오빠 덕분에 신애라는 인물이 완벽해진 것 같다”며 말을 이었다. 이 순간 무대에 앉아있던 송강호가 일어나 관객들에게 ‘돌발인사’를 했고, 관객들은 따뜻한 박수를 보냈다. 이어서 전도연은 “<밀양>을 이렇게 환영해주신 칸(영화제 관계자) 여러분,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감사합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마무리지었다.
전도연의 수상은 <밀양>의 공식 상영이 이뤄진 5월23일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거의 모든 매체가 <밀양>에 관한 기사를 쓰면서 전도연의 연기를 칭찬했고, 무료신문인 <메트로>는 <밀양> 리뷰에서 “이 영화는 전도연의 놀라운 연기로 우리의 넋을 빼놓는다. 여우주연상은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다”라고 평가했으며, 폐막식 당일에는 전도연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기도 했다. 시상식 직후에 이뤄진 수상자 기자회견에서 전도연은 “해외 영화제 경험은 이번이 처음인데, 세계적인 칸영화제에서 첫 (해외영화제) 경험을 하게 돼 굉장히 영광으로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도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부담이 많이 됐다. 그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내가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저에게 최면을 걸었다. 저 자신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주변 시선도 부담스러워서 계속 숨고만 싶었다. 상을 받게 돼 그 부담(을 주는 말)들이 결국 축하 메시지가 돼서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한다”라고 감격에 겨운 말투로 소감을 밝혔다. 전도연은 “한국에서 (이미) 과한 상을 받아서 개인적으로 상에 대한 욕심은 없었다. 제가 이렇게 이창동 감독님을 통해서 큰 영화제에 오게 될 줄도 몰랐다. 오면서도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다. 감독님도 그렇게 말씀해주셨다. 세계적으로 가장 큰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건, 물론 한국에서도 배우로서 인정해주고 좋은 상도 많이 주셨지만, 배우로서도 그렇게 제 인생에서도 가장 큰 의미가 될 것 같고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2000년] 출판계 원로 조상원(趙相元)씨 별세
← 출판계 원로 조상원씨
2000년 5월 27일 별세한 현암 조상원(87)씨는 반세기 넘게 출판 외길을 걸어온, 출판계의 존경받는 원로였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현암사를 창립, 우리나라 최초의 법령집인 ‘법전’을 출간한 것을 비롯, 지난 50여년 동안 스스로를 ‘책바치’라 부르며 출판 인생을 걸어왔다.
"양서가 아니면 활자화할 수 없다"는 소신으로, 평소 베스트셀러로 돈을 벌면 출판계의 미답지를 개척하는 기획물에 쏟아 부어 후배들의 존경을 받아왔다. 그는 특히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는 미수(米壽)를 앞두고 펴낸 회고록 ‘그래도 길이 있었다’에서 "내가 해온 일은, 조금이나마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반듯하고 좋은 책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한국출판인회의는 1999년, 광복 이후 어려운 환경을 딛고 한국 출판문화에 큰 족적을 남긴 ‘20세기 한국의 출판인’ 중 한사람으로 현암을 꼽았다./조선
[1993년] 남북학자, 발해유적 첫 공동발굴
← 발해유적
남북한의 역사-고고학자들이 러시아 연해주에서 만나, 분단 후 처음으로 잃어버린 우리 민족사 발굴에 함께 참여했다. 이들은 1천년 전 발해 유적지에서 잃어버린 민족사의 고리를 연결해 줄 중요 문화재를 발굴, 첫 개가를 올렸다.
조선일보와 대륙연구소, 문화방송 발해유적 발굴조사단은 1993년 5월 27일 러시아 우스리스크시 교외의 코르사콥카 발해사원에서 불황과 연꽃문양이 새겨진 발해 수막새기와의 완형을 발굴했다. 발굴된 수막새의 문양은 고구려의 수막새 문양을 대표하는 연꽃무늬를 중심으로 한 기하학적 배치를 그대로 전수받고 있어, 발해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발전한 우리민족 국가임을 입증하는 실물 사료가 되고 있다. 발굴조사단은 "9세기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수막새모양은 발해가 고구려의 계통을 이었으며, 또한 통일신라와 친연성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한 발해지역 공동발굴작업으로 기록된 이번 만남은 러시아 극동역사 고고민속학 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남북한 발굴단이 연해주 발해유적지에서 별도 지역을 선정, 발굴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조선
[1985년] 12년 만에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 참석차 북한적십자 대표 서울에 도착
1985년 오늘! 제8차 남북 적십자회담이 나흘 일정으로 서울에서 시작됐다.
1973년 7월 제7차 회담이 있은 지 12년 만이다.
8차 회담의 주요 안건은 이산가족 상봉이다.
남측 수석대표는 대한적십자사 부총재인 이영덕 씨, 북측 대표는 이동률 단장이었다.
양측은 이번 회담에서 이산가족의 쌍방 고향방문과 예술단 교환공연에 합의했다.
북측 대표들은 남측 대표단과 용인 민속촌을 돌아본 뒤 동동주를 마시고 텔레비전 방송사를 방문해 녹화된 이산가족찾기 프로그램을 시청하기도 했다.
석달 뒤인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제9차 남북 적십자회담이 평양에서 열린 데 이어 마침내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이산가족 상봉과 함께 서울예술단과 평양예술단의 교환공연이 성사됐다. /YTN
[1980년] 계엄군 광주 진입
신군부세력이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전국확대조치를 발표하고 민주인사들을 체포 투옥하기 시작하자 광주에서 공수부대의 과잉진압과 이에 반발하는 학생 ·시민 연대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 5월 18일부터 시작된 시민항쟁은 시민자치와 민주주의공동체 구현 등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27일 새벽 2만 5,000명에 달하는 군을 투입한 무력진압에 정부공식 발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내고 막을 내렸다. /naver
[1966년] 일본, 우리 문화재 1,325점을 반환
일본에 빼앗겼던 우리문화재가 1965년 6월에 체결된 ‘한일문화협력협정’에 따라 한국으로 반환됐다. 1905년 이후 망국의 치욕을 안고 남의 땅에 넘어갔던 문화재 1천3백24점은 61년 만인 1966년 5월 27일 김포공항을 통해 돌아왔다. 수리를 위한 삼국신라시대의 칼2점을 제외하한 나머지 문화재들은 43개의 상자에 담겨 이날 오후3시 경복궁 국립박물관에 옮겨졌다. 일반에게는 7월에 공개됐다.
한일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으로 돌아온 문화재는 신라 고구려시대의 도자기가 90건 97점, 고고자료 84건 3백34점, 석조미술품이 2건 3점, 한말에 수집된 도서8백52책 그리고 체신자료 20건 36점들이며 이등박문이 명치천황에게 바친 고려자기 97점도 포함돼있다./조선
[1967년] 경인고속도로 기공
<1967년 5월 27일> 서울∼인천간 경인고속도로가 착공되다. 우리 나라 최초의 고속도로(expressway)인 경인고속도로(연장 24㎞, 4차선)는 20억 원 예산에 3년 계획, 운행 시간을 45분에서 24분으로 단축시켜 연간 3억원을 절약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1969년 7월 21일 개통되었다(1967년 3월에 착공하였다는 주장과 1968년 12월 12일 완성·개통되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확인하지 못하였다). 이후 1969년 한국도로공사법이 제정·공포되고, 1969년 한국도로공사가 설립되었으며, 1969년 12월 29일 언양(彦陽)·울산(蔚山)고속도로(연장 14.3 km, 4차선)가 완공되고, 경부고속도로(연장 428 km, 4차선)는 1968년 2월 1일 기공되어 1970년 7월 7일 준공·개통함으로써 본격적인 고속도로시대로 접어들었다. /Google
[1964년] 인도 초대 총리 네루(Jawaharlal Nehru) 사망
← 자와할랄 네루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전세계 비동맹 운동의 기수였던 자와할랄 네루 전 수상이 1964년 5월 27일 사망했다. 75세였다. 16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에서 식물학과 지질학을 전공한 네루가 변호사 자격을 얻어 인도로 돌아온 때는 1912년, 23세 때였다. 네루는 인도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면서 인도의 현실을 자각, 인도자치획득동맹과 인도국민회의파에 가입해 인도독립을 위해 애써왔다.
인도는 전쟁이 끝나면 인도에 자치를 부여하겠다는 영국의 권유에 1차대전에 참전했으나, 전쟁이 끝나도 영국이 당초 약속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식민지 통치 강화법인 `롤럿 법안`을 제정하자 간디를 지도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불복종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때 네루는 전국을 순회하며 비참한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인도의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독립할 때까지 9차례 9년간의 감옥생활을 한 네루는 마침내 1947년 8월15일 인도가 독립해 공화국이 되자, 신생 공화국의 수상 겸 외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옥중 생활을 하던 중 홀로 된 13세 외동딸 인디라 간디에게 3년 동안 편지를 보냈는데,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세계사와 조국의 독립에 눈을 뜬 그녀 역시 인도 최초의 여성 수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조선
[1963년] 공화당 대통령후보에 박정희 지명
박정희(朴正熙, 1917~1979)는 1961년 5·16군사정변을 주도하고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었고, 1962년 대통령권한대행을 역임, 1963년 육군대장으로 예편하였다.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에 추대되었고, 그해 12월 제5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1967년 재선된 후 장기집권을 위하여 1969년 3선개헌을 통과시켰다. 제3공화국 재임동안 '한·일국교정상화'와 '월남파병문제'를 국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였다. 1972년 국회 및 정당해산을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로써 유신정권인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naver
[1937년] 미국 금문교(Golden Gate Bridge) 개통
← 금문교 전경
1937년 5월 27일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골든게이트를 가로지르는 금문교가 개통됐다. 금문교는 1964년 뉴욕의 베러자노내로스 다리가 생기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
토목기사 스트라우스의 감독아래 1933년 착공하여 이날 개통됐다. 금문교 공사는 빠른 물살, 폭풍과 안개 등으로 많은 어려움 끝에 완공됐다. 6차선의 자동차 전용 현수교인 금문교는 2줄의 케이블에 매달려 길이 2,825m이고, 다리위의 탑의 높이는 227.5m이며, 주탑과 주탑사이의 거리가 1,280m이다. 다리의 중앙부는 해수면으로부터 81m나 되는 높이여서 다리 밑을 대형선박과 비행기도 통과 할 정도이다. 금문교는 붉은색의 교량으로 주위의 경치와 장관을 이뤄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이 되었다./조선
[1934년] 제2회 월드컵(이탈리아) 개막
FIFA 주관 아래 열린 월드컵축구대회로, 16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1934년 5월 27일부터 6월 10일까지 15일간 개최되었다. 원래는 13개국이 개최를 신청하여 스웨덴이 선정되었으나, 경제난으로 경기장 건설이 힘든데다 대공황이 일어나자 반납하였다. 이후 무솔리니 지배하의 이탈리아가 대형경기장 건설과 함께 대회 찹가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제안하자 FIFA는 1932년 스톡홀름총회에서 이탈리아를 개최지로 선정하였다.
대회 참가 신청국이 31개국으로 늘어나자 처음으로 지역예선을 실시하여 16개국이 본선에 진출하였다. 대회는 나폴리·밀라노·로마·피렌체 등 8개도시에서 열렸으며, 제1회대회와는 달리 8개국에 시드를 배정하고 1회전부터 토너먼트로 진행하였다. 우승은 이탈리아가 차지하였고, 체코슬로바키아(지금의 체코)가 준우승, 독일이 3위를 차지하였다. 17개경기가 치러진 이 대회의 총관중은 39만 5000명, 평균관중은 2만 3235명, 총득점은 70점, 경기당 평균득점은 4.1점이다.
월드컵축구대회가 세계적 대회로 자리잡은 대회였으나, 유럽국가들이 남미에서 열린 제1회대회에 참가하는 것을 주저한 데 대한 보복으로 일부 남·북미 국가들은 최고수준의 팀을 보내지 않았다. 또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의 선전무대로 활용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naver
[1927년] 여성운동단체 근우회 창립, 회장 김활란
←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 한국근우회가 2000년 3월 8일 롯데호텔에서 74주년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5월 27일, 일제하 여성이 처한 현실을 타개할 목적으로 여성운동단체 근우회가 창립대회를 열었다. 임시 집행부 초대 회장은 김활란이 맡았다.
민족주의·사회주의 양파로 분열됐던 여성운동세력이 통합을 모색한 것은 3개월 전에 창립된 신간회가 자극제가 됐다. 창립후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뒤따랐지만 이들은 교육의 성차별 철폐, 여성에 대한 봉건적 인습 타파 등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조직을 키워나갔다. 특히 부녀자·아동의 야간작업 및 시간외 작업 금지와 탁아제도 도입 등은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주장이었다. 일본조차 이들을 “조선여성운동의 최고역량을 집중하고 진용을 정비한 최고 권위 있는 여성집단”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해마다 규모가 커져 한때는 전국에 60여개 지회에 회원도 수천명까지 늘어났으나 김활란 퇴진 후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득세하고 광주학생사건으로 다수의 간부가 검거·투옥되면서 침체일로를 걷기 시작했다./조선
[1905년] 러시아 발트함대, 대한해협에서 궤멸
← 진해항에서 발트함대를 기다리는 일본연합함대.
파도 거칠고 안개 자욱했던 1905년 5월27일 새벽, 러시아 발트함대가 접근하고 있다는 급보가 일본 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에게 전해졌다. 동아시아의 패자(覇者)를 가르는 마지막 일전, 전운이 감돌았다.
8개월 전, 중국 뤄순(旅順)을 향해 발트해 탈린을 출항한 발트함대가 대서양을 거쳐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 마다가스카르에 도착한 것은 1905년 1월. 뤄순이 함락됐으니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라는 전갈이 왔다. 한반도에 거의 다다랐을 즈음, 2만8800km나 되는 항해로 연료는 거의 떨어졌고 병사들의 몸도 지쳐있었다. 발트함대는 일본 함대가 진해만에 숨어있는 것도 모르고 블라디보스톡으로 질러가기 위해 폭이 좁은 대한해협을 선택했다. 러시아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야하는 발트함대를 파견한 것은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동아시아를 관할하는 태평양 함대가 있었지만 뤄순과 블라디보스톡으로 나눠져 있는데다 뤄순은 일본 함대에 포위돼 있었고, ‘전함 포템킨’으로 유명한 흑해함대는 국제협정에 묶여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할 수 없었다.
발트함대는 30여척도 넘는 함선으로 편성됐지만 함선은 구식이었고 병사들도 주로 농민들로 구성돼 그야말로 오합지졸이었다. 이에비해 일본은 맹훈련을 거듭하며 다가올 해전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후 1시30분경, 포격전이 시작됐지만 속도ㆍ화력 어느것 하나 일본 함대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침몰 19척에 나포 5척, 4800여명이 전사하고 6100여명이 포로가 됐다. 러시아 짜르체제 붕괴의 서막이었고 신흥 제국주의 국가 일본으로선 자신감을 바탕으로 대륙침략으로 이어지는 짧은 팽창시대의 출발이었다./조선
[1871년] 파리코뮌, 수립 2개월 만에 붕괴
← 파리코뮌
1871년 3월 28일 사상 최초로 노동자 정부를 천명하며 파리에 수립된 파리코뮌이 2개월 만인 5월 27일 마침내 와해됐다. 프로이센군과 결탁한 부르조아 공화파의 정부군이 파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한 5월 21일부터 1주일이 지난 이날 페르라쉬즈 묘지에서 농성중이던 마지막 남은 200여명의 코뮌 수비대는 정부군의 총칼에 쓰러져 갔다.
블랑슈에서는 120명의 여성부대가 끝까지 저항하다 전멸했으며 살아남은 수비대도 전원 총살당했다. 마지막 '피의 일주일' 동안 발생한 사망자수는 3만에 달했고 5만명이 체포됐다. 레닌은 코뮌을 가리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낭만적 질풍노도 시대가 맞이한 찬란한 절정이었다"고 평했다./조선
[1819년] 미국의 작가·강연자 하우(Howe, Julia Ward) 출생
1819. 5. 27 미국 뉴욕 시~1910. 10. 17 로드아일랜드 뉴포트.
〈군가 Battle Hymn〉로 가장 유명하다. 1843년 개혁가이며 맹인들을 가르치는 교사였던 보스턴 출신인 새뮤얼 그리들리 하우와 결혼했다. 민요 〈존 브라운의 시체 John Brown's Body〉 곡조에 맞추어 지은 〈군가〉는 1862년 2월 〈애틀랜틱 먼슬리 The Atlantic Monthly〉에 처음 발표되었다. 남북전쟁 때 남편을 잃은 여자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것을 가슴 아파한 그녀는 여성들도 교육·직업·경제 분야에서 동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앞장섰다. 여행기·전기·극·시를 썼으며 동요도 작곡했다./브리태니커
[1756년] 바이에른의 첫번째 왕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출생
Maximilian Ⅳ Joseph라고도 함.
1756. 5. 27 팔츠 만하임~1825. 10. 13 뮌헨.
바이에른의 비텔스바흐 가문 출신 선제후(1799~1806), 바이에른의 첫번째 왕(1806~25).
나폴레옹과 동맹함으로써 왕관을 얻었으며 여기저기 흩어져 제대로 행정이 이루어지지 않던 바이에른 공국 영토를 통합해 근대국가로 탈바꿈시켰다. 팔츠츠바이브뤼켄의 프리드리히 미하엘 공(公)의 2번째 아들로 1777년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알자스에서 프랑스 연대에 복무하면서, 프랑스와의 친선관계를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관계는 평생 지속되었다. 1795년 형의 뒤를 이어 츠바이브뤼켄 공작이 되었을 때 프랑스는 이미 그의 공령(公領)을 점령하고 있었다. 한편 1799년 바이에른과 팔츠의 선제후였던 카를 테오도르가 죽자 그는 막시밀리안 4세 요제프로서 비텔스바흐 가문의 모든 영토를 물려받았다. 이 영토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에 점령되어 있었으며 넓은 지역에 걸쳐 분산되어 제대로 통치되고 있지 않은 상태였지만, 이 새로운 선제후는 능력있는 장관 몽줄라의 백작 막시밀리안의 도움으로 바이에른을 효율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국가로 탈바꿈시켰다.
그는 프랑스와 벌어진 전쟁(1799)에 참여하라는 오스트리아의 압력을 받았으나 1801년 프랑스와 단독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그는 라인 강 서쪽의 영토를 공식적으로 건네주었지만 다른 지역의 영토로 보상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바이에른 영토를 거듭 합병하려던 오스트리아를 믿지 않은 그는 10여 년 동안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굳게 지켜나갔다. 1803년 뷔르츠부르크·밤베르크·프라이징·아우크스부르크와 그밖의 땅을 받았고 1805년에는 안스바흐를 얻었으며, 1806년 1월 1일 막시밀리안 1세로서 스스로 바이에른 왕이 되었다. 그는 나폴레옹이 후원했던 독일제후들의 동맹체인 라인 연방에 가입했고, 나폴레옹 전쟁 때 프랑스를 도와 오스트리아(1805), 프로이센과 러시아(1806~07), 오스트리아(1809)와 벌인 전투에 참전한 공로로 서부 오스트리아 대부분의 땅을 손에 넣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때는 3만 명의 바이에른군을 파견했으나, 프랑스가 패배한 뒤에는 영토 유지를 보장받는 대가로 오스트리아와의 동맹관계로 돌아섰다. 그는 1814년과 1816년 서부 오스트리아 지역을 되돌려주고 라인 강 서쪽 유역의 꽤 큰 영토를 받았다. 평화가 회복되자(1815), 막시밀리안은 통치기구를 개편했다. 그는 뒤에 루트비히 1세가 된 아들의 주장에 따라 몽줄라를 해임했으며, 이미 1808년에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채택한 바이에른에 1818년 양원제 의회 마련을 규정한 새로운 헌장을 승인했다. 이러한 조치로 바이에른 왕국은 그의 남은 통치기간 동안 독일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국가가 되었다./브리태니커
[1703년] ‘러시아의 영원한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시(市) 탄생
상트 페테르부르크(구 레닌그라드)는 1703년 5월 27일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가 스웨덴 침략을 막기 위해 도시를 건설한 것이 시초가 됐다.
표트르 대제는 스웨덴과의 전쟁 승리 후 발트해 진출을 위해 1712년 제정(帝政)러시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서구 문명을 도입, 여느 유럽도시 못지않은 아름다운 도시로 변모했다.
1917년 사회주의 혁명 이후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91년 러시아 민주화 과정에서 다시 ‘상트 페테르부르크’라는 원래 지명을 되찾았다. 레닌 혁명 다음 해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겼지만 시민들은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러시아의 영원한 수도’로 기억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이 900일 동안 도시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바람에 80만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처절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조선
[1564년] 프랑스 종교개혁가 칼뱅(Calvin, Jean) 사망
← 프랑스 종교 개혁가 장 칼뱅의 초상화.
1509. 7. 10 프랑스 피카르디 노와용~1564. 5. 27 제네바.
프랑스의 종교개혁가 장 칼뱅이 1564년 5월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55세로 사망했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그의 유지에 따라 무덤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다만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추모객들을 위해 단지 ‘J.C’라는 약자만 새겨놓았을 뿐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난 칼뱅은 사제를 지망하기 위해 처음에는 신학과 스콜라 철학을 공부했으나, 부친의 강권에 오를레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이때까지만해도 그는 중세의 여느 부르조아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귀족이었다. 부친이 사망하자 종교개혁운동에 본격 나선 그에게 최초의 시련이 닥쳐온 것은 24세 때인 1533년이었다. 절친한 친구였던 니콜라스 콥의 이름으로 발표된 한 연설이 문제가 된 것이다. 에라스무스와 루터를 인용한 이단적 강연의 초고를 썼다는 혐의로 그에게 체포명령이 떨어졌다.
바젤에서 숨어 지내던 중 교회를 초기 사도 시대의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려놓을 것을 다짐하는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며 로마 가톨릭과 결별했다. 그는 박해와 도피로 점철된 시절을 보내다가 제네바로 초빙돼 그곳에서 프로테스탄트의 이념을 본격적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칼뱅은 제도적으로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폐지하고 예배를 설교중심으로 바꾸었으며, 교회 안에 목사 교사 장로 집사 등 4개의 직무를 정하고 목사와 장로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도록 했다. 칼뱅의 사상은 제네바에서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프랑스의 위그노파, 네덜란드의 고이센파, 스코틀랜드의 장로파, 잉글랜드의 청교도 등 여러 파를 탄생시켰다./조선
그밖에
2007 허광수 삼양 인터내셔날 회장 홍석현 중앙읿조 회장과 사돈
2005 국보 1호인 숭례문 주변에 조성된 숭례문광장 준공
2005 한국 슬로바키아 정상회담
2005 한,중,일 중앙은행 총재 통화스와프 계약체결식
2005 김용덕 신임 건설교통부 차관 취임식
2004 호세 모리뉴 감독의 FC 포르투,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서 우승
2003 러, 상트 페테르부르크시(市) 창건 300주년
1999 새 플라스틱 주민증 갱신
1991 한국-체코 체육교류협정 체결
1990 세자르 가비리아 콜롬비아 대통령으로 당선
1988 평화의 댐 1단계 준공
1988 전자현미경 발명한 독일의 전기공학자 루스카 사망
1988 미국상원, 중거리 핵미사일 폐기협정 비준
1987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결성
1987 미국-베트남, 관계정상화 합의
1981 정부 한국선원의 베트남 기항 허용
1979 이집트-이스라엘 국경개방 선언
1976 레소토왕국의 레아부아 조나탄 수상 방한
1974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내란 예비음모-내란 선동 등의 혐의로 인혁당 재건위 관련자 기소(2차 인혁당 사건)
1973 소련, 한국인에 첫 입국 허가
1971 축구 골키퍼 레프 야신 은퇴
1969 티우 월남대통령 방한
1968 일본 전공투 결성
1968 제1차 한국-미국 국방장관 회담 워싱턴서 개최
1966 민주사회당 창당준비확대대회에서 서민호대표 김일성과 면담용의 표명(6.3구속)
1961 최고회의 비상계엄 해제하고 경비계엄 선포
1961 부흥부를 건설부로 개칭
1960 터키 육군의 무혈쿠데타 성공
1959 서울 등 비상계엄 해제
1958 미국 군표 갱신
1952 파리서 구주방위공동체 조약 조인
1949 칠레, 대한민국 승인
1946 군정법령 70호 인신매매 금지령 공포
1941 독일 최대 전함 ‘비스마르크호’ 연합군에 의해 침몰
1938 스톡홀름서 북구 5개국 중립조약 조인
1933 시카고 만국박람회 개막
1923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 출생
1917 한강 인도교(구교) 기공식
1911 미국의 제38대 부통령(1965-1969) 험프리 출생
1910 세균학 의학자 로베르트 코흐 사망
1906 의병해산조칙 내림
1885 벨기에의 독립을 가져다준 1830년 벨기에 혁명의 지도자 로지에 사망
1883 미국 브루클린 다리 개통
1840 이탈리아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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