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호동왕자. 호동왕자는 낙랑공주와 연관되어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호동왕자는 낙랑공주를 꾀어내어 낙랑을 멸망시키는 데 일등공신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은 석연치 않는 부분이 있다. 호동왕자의 어머니는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이었지만 나이만으로 본다면 그가 장자였던 같다. 그런 그가 낙랑평정후 갑자기 죽었다. 그것도 이유같지 않은 이유였다. 자신이 모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해명을 하게 되면 왕에게 근심거리를 주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자결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분명 유교적행동이다. 나는 이 기록을 유교적관점으로서 신라인들에 의해 조작한 것이나, 신라인들이 아닌 고구려인들에게 조작되었다면 이 문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호동의 죽음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기로 보자
《15년 겨울 11월 왕의 아들 호동이 자살하였다. 호동은 왕의 둘째왕비인 갈사왕의 손녀 소생이었다. 그의 얼굴모양이 아름답고 곱게 생겨서 왕이 매우 귀여워하였기 때문에 호동이라고 불렀다. 맏왕비는 호동이 종통을 빼앗아 태자가 될까 염려하여 왕에게 참소하여 말하기를 “호동은 나를 무례하게 대접하여 간통하려는 위험이 있다”하니, 왕이 말하기를
“너는 호동이 다른 사람의 소생이라하여 미워하느냐?”하였다. 맏왕비는 왕이 자기의 말을 믿지 않음을 알고 화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여 그만 울면서 말하였다.
“청컨대 대왕께서 가만히 비켜보소서. 만약 이런 일이 없다면 내 자신이 벌을 받겠습니다” 이 때에는 왕이 호동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에게 죄를 주려 하였다. 누가 호동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왜 자신을 해명하지 않는가?”하니 호동이 대답하기를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미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왕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하고 곧 칼을 물고 엎어져 죽었다.(冬十一月, 王子好童自殺. 好童, 王之次妃曷思王孫女所生也. 顔容美麗, 王甚愛之, 故名好童.元妃恐奪嫡爲太子, 乃讒於王曰: "好童不以禮待妾, 殆欲亂乎." 王曰: "若以他兒憎疾乎?" 妃知王不信, 恐禍將及, 乃涕泣而告曰: "請大王密候, 若無此事, 妾自伏罪." 於是, 大王不能不疑, 將罪之. 或謂好童曰: "子何不自釋乎?" 答曰: "我若釋之, 是顯母之惡, 貽王之憂, 可謂孝乎?" 乃伏劍而死.)》
이 기록을 살펴보면 호동은 대단한 효자이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유교학자인 김부식또한 사소한일에 목숨을 버렸다고 비판하였다. 유교학자입장에서 봐도 이 죽음은 너무나도 사소한 것이다.
단지 왕에게 질책을 받았다고 죽는다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며, 호동의 죽음을 미화함으로서 단순사건으로 만들어 보겠다는 편찬자의 생각이 들어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이 기록은 분명 후대에 다시 쓰여진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썼을까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분명 김부식은 이 기록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호동의 죽음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 신라인들이 윤색한 것일까? 신라인의 입장에서는 그럴 하등의 이유가 없다. 호동이 어떻게 죽었든 말든 신라인에게 그것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 한가지 이것은 고구려인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고 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러면 누가 무슨 목적으로 호동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이런 식으로 남겼는가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호동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는 호동의 아버지인 대무신왕부터 보아야 할 것이다. 어쨌든 호동을 죽게 만든 것은 대무신왕이기 때문이다.
대무신왕은 그 정체부터 불분명하다. 본기 즉위년을 보면 그는 다물국왕 송양의 딸 송씨의 아들이다. 라고 그의 출신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송씨는 그가 태어나기 딱 20년전에 이미 세상을 하직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대무신왕의 어머니는 송씨가 아니다. 유리명왕조에 등장하는 후비와 여왕은 송씨와 치희 그리고 화희밖에 없다. 여기서에 송씨는 대무신왕이 태어나기 20년전에 죽었기 때문에 제외를 시키면 치희와 화희만 남는다.
만약 대무신왕이 화희의 아들이었다고 한다면, 화희의 아들이라고 분명하게 기록했을 것이다. 화희의 가문인 골천은 당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대무신왕이 화희의 아들이었다고 한다면 적는데 무리는 없었을 것으로 본다. 화희도 아니라면 치희일까? 치희또한 대무신왕이 태어나기 20년전에 쫓겨났다. 물론 그 후 사사로이 만났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겠지만 쫓겨나는 것도 바라만보던 왕이 사사로이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며 유리명왕3년에 골천에 또다른 궁을 지었다는 것으로 볼 때 그는 골천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한 동안은 골천의 궁에서 지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치희를 사사로이 만났다는 생각도 잘못된 것이라 보인다.
여기서 나는 대무신왕 출신에 대한 두 가지 가능성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째는, 대무신왕은 유리명왕의 아들이 맞다. 하지만 어머니는 미천한 출신이기 때문에 밝히기 꺼려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미천한 출신의 어머니 때문에 그는 뒷받침을 해줄수 있는 세력이 약했고 법적으로만이라도 이미 죽었던 송씨의 아들이라 하여 유리명왕의 서자가 아닌 적자임을 내세웠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대의 기록인 동천왕 즉위년에는 어머니가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주통촌의 사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미천한 가문이기 때문에 가문에 대한 이야기도 성에 대한 기록도 없다. 기록이 없다기 보단 아마 성씨자체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한 쪽은 적고 한 쪽은 적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물론 대무신왕대의 정치적 상황과 동천왕시절 정치적 상황은 엄연히 틀리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비교하는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나는 대무신왕의 나이를 조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대무신왕은 6세에 부여의 사신을 맞아 호통을 쳤으며 10세에는 직접 전장에 나아가 싸워 공을 세웠고 11세에는 태자가 되었으며 16세때 왕에 등극하였다.
16세와 11세때의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6살의 나이로 남의 사신에게 호통을 친다거나 10살의 나이로 전장에 나갔다는 것은 조작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대무신왕이 단순히 미천한 가문 출신의 왕자이기 때문에 어머니를 송씨라고 했다면 나이를 조작할 이유가 없다. 나이를 조작했다는 것은 대무신왕이 유리명왕의 아들임을 내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즉 두 번째 가능성인 다른계열의 사람으로 유리명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왕위에 오른 것도 무력을 동원한 것이다. 라는 가정이다. 대무신왕이 유리명왕과는 또 다른 계열의 인물이며 무력으로 올랐다고 가정할 시에는 그가 정통성 확보를 위해 유리명왕의 아들이었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나이를 조작했다거나 이미 죽고 없었던 송씨를 끌어들여 어머니라고 한 기록들이 다 충족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무신왕의 출신에 대해 정확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유리명왕과는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나의 이 가정을 따라 대무신왕조의 일들을 따져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될 것이다.
대무신왕은 왕위에 오른지 3년만에 부여에 대한 정벌을 단행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부여와 고구려는 적대관계였기 때문에 대무신왕의 부여에 대한 공격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으나 중요한 것은 부여정벌 자체가 아닌 친정을 단행하였다는 것이다. 부여가 큰 적이기 때문에 왕이 직접나아갔을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앞의 가정과 연결해 본다면 단순한 전쟁이 아닌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다고 볼 수도 있는 문제이다. 정통성이 없는 왕은 전쟁을 통해 공을 세워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것들을 역사에서는 종종볼수 있는 장면이다. 정통성이 부족한 대무신왕으로서는 고구려에게 가장 큰 적이며 해가 되는 부여를 공격하여 자신이 공을 세움으로서 정통성을 확보한다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부여와의 전쟁에서 어느정도 성과를 보인 대무신왕에게 삼국사기는 “나라 사람들이 왕의 성덕과 정의에 감동하여 모두 국가사업에 몸을 바치기로 다했다.” 하여 대무신왕이 정통성 확보에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면 과연 고구려의 모든 사람들이 대무신왕에 대해 복종을 하게 된 것일까? 우리는 이에 대해서 대무신왕 15년 기록을 살펴보아야 한다. 대무신왕 15년에 비류부장이었던 구도, 일구, 분구가 사사로이 백성들의 재물을 약탈한다고 하여 그들을 내쫓았다고 한다. 물론 이 기록은 단순사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과연 단순사건일까? 나는 이 사건과 더불어 호동의 죽음이 단순사건에 그치지 않고 대무신왕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가정을 세워본다. 물론 이것은 가정일 뿐이다.
즉 대무신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불순분자들과 왕권과의 대립을 대무신왕이후 사가들이 이 사건을 구도, 일구, 분구의 횡포로 무마시켜 버렸던 것은 아닐까...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 이후 호동과의 관계 때문이다. 호동은 낙랑공주를 이용해 낙랑을 멸망시켰다. 물론 낙랑을 쳐 멸망시켰다는 기록은 대무신왕 20년에 있지만 나는 이 낙랑과 15년의 낙랑과는 별개의 존재로 본다. 왜냐하면 왕이 항복했다는 것이 그 나라의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왕이 항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항거하다가 20년에 멸망을 했다고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접기로 하고, 낙랑을 멸망시키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두말할 필요없이 호동왕자였다. 호동왕자에 대한 세력은 커졌을 것이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많이 생겼을 것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점이다.
본래 비정상적으로 왕위에 오른 왕은 더욱 권력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낙랑을 멸망시키고 세력이 커지던 호동은 정통성결여의 대무신왕입장에서는 당연히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은 호동의 효심으로 죽었다고 하기 때문에 사건의 정확한 전말은 밝힐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호동이 그런 사소한 이유로 죽은 것이 아니라 대무신왕의 권력에로의 집착으로 인한 권력다툼으로 인해 생겨난 비극이었다고 볼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왕의 권력에로의 집착과 불안은 대무신왕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유리명왕 또한 쿠데타 혹은 그와 비슷한 절차를 통해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 추측되는 왕이다. 유리명왕과 해명과의 관계또한 대무신왕과 호동과의 관계를 보는 듯하며 유리명왕이 해명의 세력이 커지게 되는 것을 우려하여 죽인 것처럼, 대무신왕또한 호동의 낙랑정벌후 커지는 세력을 막기 위해 호동을 죽인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1750여년후 조선의 영조와 사도세자를 떠오르게 한다. 즉, 호동의 자살사건은 대무신왕의 정통성확보라는 점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