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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것이세월뿐이랴]2
[2] 제목 :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제 2 부
미니시리즈 "흐르는 것이 세월뿐이랴" 제 2 부
$#1. 아버지의 집, 대문 앞 (아침)
아버지와 정수, 아버지의 출근길을 배웅하는 묵골댁.
묵골댁 (아버지의 양복에 붙은 실밥을 떼주며) 안사람이 없으니 고마
티가 나네. 걱정마소. 재취하면 안 되겠나.
아버지 (웃고) 이 나이에요.
묵골댁 동상 나가 어때서?
너무 속 끓이지 마소.
계집 갈라선 건 흉 잡히도 사나는 흉 될 것 없네...
아버지 .... 일찍 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정수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와 정수, 간다.
묵골댁, 안쓰러운 눈으로 아버지의 뒷모습을 본다.
$#2. 골프장, 사무실
창 밖으로 툭 터진 골프장 전경 보인다.
직원들 소파에 앉거나, 자신의 책상에 앉아 빈둥거리는..
아버지,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결재서류들과 한쪽에 놓인 우편물들을 점검한다.
착잡한 표정이다.
직원2 미스 김, 우리 커피 한잔 마시자.
여직원2 싫어요, 마시고 싶은 이 대리님이 타 드세요.
직원3 그러지 말구 미스 김이 한 잔 타줘. (직원2 가르키며) 저 친구
가 타 주는 걸 어떻게 마시냐.
직원1 손님 없다구 빈둥 거리지 말고 일들 좀 해라.
오늘 사장님 나오셨더라.
정리해고, 명예퇴직 이런 단어 몰라?
직원2 말을 해도 꼭 살벌하게 하네, 한다 해, 일. (제자리로)
아버지, 우편물 중 한 장을 들어보고, 표정이 어두워진다.
이때, 여직원1, 다가온다.
여직원 부장님. 로비에 손님 와 계십니다.
아버지 (보고)...
$#3. 동, 로비
호화롭게 꾸며진 클럽 하우스 로비.
한쪽에 안내데스크.
다른 쪽에는 골프용품을 파는 매장이 있다.
말끔한 양복 차림에 어딘지 건들건들한 인상에 기영,
골프용품점 앞에서 진열해 놓은 골프채 이것저것 꺼내 휘둘러본다.
퍼터를 꺼내, 퍼팅하는 흉내를 내본다.
판매 여직원, 그런 기영이가 못마땅한지 새초롬한 표정이다.
기영 이거 세리박 선수가 쓰는 거 밪지.
여직원 ....
기영 (손바닥에 놓고 턱턱 튀겨보다) 여자들 쓰는 거라 그런가, 좀
가볍네. 세리박 선수나 나나, 살집 무게는 얼추 비슷할 텐데....
기영, 몇 번 퍼팅 흉내를 낸다.
아버지, 로비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기영 (아버지를 발견하고) 외삼촌!
아버지 (돌아본다)
$#4. 클럽 하우스 식당 안
아버지와 기영, 마주 앉아있다.
아버지, 담배 피우고,
기영, 땀 흘리며, 며칠 굶은 사람처럼 열심히 밥을 먹는다.
아버지 그래, 요샌 어디가 있냐?
기영 뭐, 동창 녀석들 한테도 며칠씩 있고, 호텔에도 있고, 대중 없
죠.
아버지 집에는?
기영 빚쟁이들이 눈이 뻘개서 진치고 있는데, 갈 수가 있나요?
아버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내민다)
기영 이게 뭡니까?
아버지 읽어봐라.
'보증 채무이행 최고장'이라 적힌 문서다.
기영 (읽다, 확 구겨버린다) 미친놈들, 내가 그 동안 갖다 바친 이자
가 얼만데...
아버지 (인상을 찡그린다)
기영 (눈치보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외삼촌한테까지야 피핼 주
겠어요?
아버지 방법은 있는 거냐?
기영 그 동안 깔아둔 거 회수만 해도 외삼촌 거는 해결됩니다.
아버지 (답답한 표정으로 조카를 본다)
기영 (국물을 훌훌 마시며) 어! 시원하다. 속이 확 풀리네.
$#5. 클럽 하우스 앞
아버지와 기영, 걸어나온다.
아버지 집에 어머니 와 계신다.
기영 (표정이 무거워진다)...
아버지 말씀은 안 하셔도 걱정이 많이 되실 게다.
기영 (기가 죽어) 저, 왔었다는 얘기하지 마세요. 이번 고비라도 넘
기면, 그때 제가 연락 드릴게요.
아버지 ...어쨋거나, 소식은 전하고 지내라. 너 하나 믿고 지내시는 어
머니 생각을 해야지.
기영 ...
$#6. 정희의 집, 안방
어머니와 묵골댁, 앉아있다.
묵골댁 자네 이 카는 거 아이다.
어머니 ...제가 뭘요.
묵골댁 딸 키우는 에미가 어디 그리 지 맘대로 보따릴 사노? 가시나
들이 뭘 보고 배우겠노? 보따리 싸는 거, 것도 버릇 된다.
문 열리고.
정희, 쟁반에 쥬스, 과일 가지고 나온다.
묵골댁 정희야. 퍼득, 니 어무이 가방 싸라.
정희 (어머니를 본다)
어머니 고모! 왜 이러세요. 그러신다구 해결 될 일 아니죠.
묵골댁 (어머니를 빤히 보다) 자네. 혹시 딴 사내 봤나?
어머니 (기가 막혀 웃는다) 딴 사내요? 내 복에 무슨... 하나 있는 사
내도 징글징글헌데...
묵골댁 그거 아니믄 드가자.
기집 바람난 거 아니믄 짐 쌀 일이 어디있노.
무슨 문젠지 (두손 딱 치면서) 마주 앉아 해결해야제. 이기 뭐
하는 짓이고.
정희, 뭐 하노?
니 어무이 짐 꾸리라는데!
$#7. 동 집, 거실
정희, 어정쩡하게 붙박이 장 앞에서 어머니의 옷 꺼낸다.
묵골댁, 마구다지로 트렁크에 옷을 넣는다.
어머니, 트렁크 확 잡아채며.
어머니 이러지 마시라니까요!
묵골댁 (주춤하다) 이유가 뭐꼬?
어머니 ...
묵골댁 우리 기영이 때문이가?
어머니 아니라고는 말 못하겠네요.
묵골댁 동상집, 우리 집, 다 합쳐 아들내미라고는 달랑 기영이 하나다.
막말로 자네나 동상이나 죽으면 무덤 살펴줄 게 뉜데? 그깐
돈 몇푼 갖고 너무 그카지 마라.
어머니 난 화장할 거니까 묻어줄 필요 없어요.
고모.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요.
정희아버지나 나나, 할 만큼 했죠.
고모부 돌아가시구, 기영이 공부시켜, 취직시켜, 장가 보내.
정희 엄마!
어머니 내 말이 틀렸니? 니 아부지란 사람, 니네들 월사금 내는 건 뒤
로 미뤄두 기영이 등록금 한 번 늦춰 본 일 없다.
묵골댁 이제 본심 나오는구마. 이제껏 그말 하고 잡아서 우찌 참았는
고? 그게 그리 아깝더나? 동생댁?
어머니 아까워서 미치겠습디다. 한치 건너 두치라는데...
자기 딸들 안 돌보고, 조카 뒷바라지에 등골이 휘는데 그게 그
럼 안 억울해요.
묵골대 (분연히 일어선다) 그래 그 나이에 돈다발 싸안고 을매나 호강
하나 볼란다. 네 자네 올매나 잘 먹고 잘 사는지 두고 볼끼다.
(현관쪽으로)
정희 (따라 나가며) 고모! 고모!
어머니 (언짢아서 묵골댁을 돌아도 보지 않는다)
$#8. 아버지의 집, 마당
빨랫줄에서 생선을 몇마리 걷는 묵골댁.
마당에 서 있는 정희.
묵골댁 세상에 돈이 제일인 거 같제? 니 에미 아직 젊다. 더 살아보라
캐라. 서방 그늘 없이 살아지나.
정희 고모, 이제 저 갈게요. 원정이 올 시간 돼서요.
묵골댁 잠깐 앉아봐라.
$#9. 마루
묵골댁, 마루 끝에 걸터앉아 보자기에 마른 생선을 싼다.
그 앞에 앉아있는 정희.
정희 맛있겠네요.
묵골댁 하모. 이건 기름 치고 구워먹기 아깝다.
솥에 김 팍-올리서 미나리랑 지단 착착 끼미해 폭 쪄라.
전에 보니 김서방 잘 먹더라.
정희 ...예. 고모,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마세요.
엄마, 지금 너무 속상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묵골댁 (한숨) 니 어무이 마음 돌리라. 그 나이에 갈라서는 게 말이나
되나?
정희 ...
묵골댁 희야 니가 이집 맏이 아이가? 니 에미 마음을 누가 잡겠노?
니가 잡아야제.
원래 서방보다 자식이 무서운 벱이다. 알겄나?
정희 ...예
$#10. 병원 진료실
정박사, 자신의 자리에 앉아있고, 맞은 편에 아버지, 뒤쪽에 태준과 간호사 서
있다.
아버지, 신경 쓰이는 듯 태준, 한 번 보고,
태준, 미소지으며 목례한다.
아버지, 얼결에 목례하고 정박사를 본다.
정박 보호자 분은 같이 안 오셨습니까?
아버지 (씁쓸하게) 이 나이에 보호자라니요.
정박사 한시가 급합니다, 선생님. 생각보다 전이가 빨라서요.
이런 일 일수록 가족들의 도움이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 ...
$#11. 동, 복도
아버지와 함께 걷는 태준.
아버지를 모시는 듯한 자세로
아버지 (의아하게 태준을 본다)
태준 절 모르시겠습니까?
아버지 ... 글쎄요...
태준 저, 태준입니다.
아버지 (벼락같이 놀라는)
$#12. 태준의 방
소파에 마주 앉아있는 아버지와 태준.
책상 위에 태준의 명패 놓여있다.
'내과 전문의, 의학박사 김태준.'
아버지 (명패를 보고)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자랑스러워 하셨겠군.
태준 다, 선생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선생님이 안 계셨다면, 어
떻게 제가 공부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아버지 학교 마치고, 미국에 유학간다는 이야길 들은 것 같았는데, 그
게 벌써, 10년이 훨 넘었구만.
태준 돌아온지 얼마 안 됐습니다.
학교병원에서 오라고 오래 전부터 이야기가 있어서요.
아버지 (웃으며) 어쨋든 반갑네. 살다보니 이렇게도 만나지는군.
태준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간 마음은 있어도... 찾아가 뵙지 않아
도, 언제고 한번쯤 뵐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웃으며 고개 끄덕인다)
태준 미국에 가기 전 사시던 동네까지는 두어번 간 일이 있습니다.
아버지 그랬나?
태준 (안타까운 눈빛으로) 하필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뵙다니요.
아버지 ...(착잡한)
$#13. 정민의 학교, 전경
늦가을의 쓸쓸한 교정.
학생들 별로 없는 텅 빈 분위기
$#14. 준일의 교수실
준일과 최조교, 소피에 마주 앉아있다.
최조교 아무래도 어른께서 말슴해 주시는 게 좋을 듯 싶어서요. 부탁
드립니다. 선생님.
준일 (웃고) 진심인가?
최조교 네.
준일 (최조교를 한 번 보고, 수화기를 들고 버튼 누른다) 정민이냐?
$#15. 학과 사무실
정민, 전화 받고 있다.
정민 예. 선생님. (사이) 저녁에요? (반갑게) 그럼요. 뭐 사주실 건데
요?
정민, 메모지에 적는다.
$#16. 학교, 레슨실
여학생1, 클라리넷 연주하고 있고,
준일, 창가에 서 있다.
준일, 여학생1을 바라보는데,
cut in 고등학생 정도의 정민, 양가래로 머리를 땋고 클라리넷을 불고 있다.
여학생1, 실수한 듯 클라리넷에서 듣기싫은 고음이 삑- 나오고,
준일, 정신 차린 듯 여학생1을 본다.
여학생1 (챙피한 듯 웃고) 죄송해요. 처음부터 다시 갈게요.
$#17. 레스토랑 (저녁)
분위기 좋은 창가 좌석에 정민과 준일, 마주 앉아있다.
정민 (들떠서) 선생님하고 이런데 오는 거 굉장히 오래 됐어요. 그
죠?
준일 (고개 끄덕이고) 그렇구나.
정민 오늘 무슨 날이에요? 선생님 생신두 아니구, 제 생일두 아니
고, 무슨 날이에요?
입구에서 최조교 들어온다.
준일 (손들고) 여길세.
(시간경과)
세사람 앞에 찻잔 놓여있다.
준일 (웃으며 최조교에게 정민을 가리키며) 여긴 내가 중학교 때부
터 인연을 맺고 십수년간 봐왔던 박정민양. (정민에게 최조교
를 가르키며) 이 친구는 학부시절부터 내가 가리킨 친구로 훌
륭한 음악가가 될 자질과 성품을 갖춘 최창섭군.
정민 (웃으며) 뭐하시는 거예요. 선생님.
준일 최조교가 낮에 날 찾아와 부탁을 하더군.
정민이를 사귀고 싶은데, 진지하게 어른을 통해서 절차를 갖추
고 싶다고 말야.
정민 (놀라 최조교를 본다)
최조교 (면구스러운 듯 머리 긁적이고)
준일 그런 최군 태도가 요즘 보기 드물다 싶고, 마음에 들어서 말야
기꺼이 자리를 마련했네. 잘 해보게. 잘 되면 술 한잔 사고.
(시계 보고) 난 그만 약속이 있어서 (일어선다)
정민 ...
최조교 (일어선다) 선생님. 식사 하시구 가세요.
준일 저녁 약속이야. 앉게. 나올 거 없어.
정민, 입구 쪽으로 가는 준일의 뒷모습을 서운한 듯 본다.
$#18. 일식집 (저녁)
준일과 이교수, 나란히 앉아있다.
테이블에 회와 술 놓여있고.
준일, 생각에 잠겨 술을 비운다.
이교수 (잔 내밀며) 저도 한 잔 주세요.
준일 아 예. (술 따른다)
이교수 언짢은 일 있으세요?
준일 아닙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이교수 (한 잔 마시고) 선생님, 재혼 안 하세요?
준일 예?
이교수 (장난스럽게) 남자들은 와이프 떠나면, 석 달 안에 재혼한다면
서요? 사모님, 그렇게 세상 떠나신 지 칠, 팔년 됐지요?
준일 그만 하시지요. (언짢은 표정)
이교수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 있으세요?
준일 ...
이교수 혹시, 박조교를 마음에 두고 계세요?
준일 (정색하고 화낸다) 이선생님! 지난번 강릉에서 일을 제가 누차
말씀드렸을텐데요.
이교수 뭐 그런 걸 갖구 화를 다 내세요.
그냥 한 번 여쭤보고 싶었어요. 선생님이 잠시 중학교에서 교
편 잡으실 때 만났던 제자라 정이 각별하신 것 같아서요.
준일 그런 얘긴 그만했음 좋겠습니다.
이교수 그러죠 뭐, 그럼 그냥 술이나 마실까요.
준일, 자작해서 술을 마신다.
이교수, 그런 준일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 보고.
$#19. 레스토랑 (저녁)
정민과 최조교, 앉아있다.
음식 접시 테이블에 놓여있고.
최조교 야, 이거 상당히 쑥스러운데, 그지?
정민 (웃고. 장난스럽게) 그러게 쑥스러울 짓을 왜 해.
최조교 (진지하게) 나, 다음 학기에 유학 가려 한다, 이태리로 같이 가
지 않을래? 결혼해서.
정민 (놀란 눈으로 최조교를 본다)
$#20. 준일의 교수실 (밤)
준일, 창 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준일, 문득 시계를 보고 웃옷을 집어들고 나온다.
전등 스위치 끄고.
$#21. 복도 (밤)
준일, 계단 쪽으로 걸어가려다 문득 레슨실을 보면, 레슨실에 불이 켜져있다.
$#22. 레슨실 (밤)
정민, 피아노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생각에 잠겨있다.
문, 열리는 소리에 정민, 문 쪽을 보면 준일의 모습 드러난다.
정민, 말없이 일어난다.
서로를 보는 두 사람.
$#23. 학교 주차장 (밤)
정민과 준일, 준일의 차 쪽으로 걸어온다.
준일 늦었다. 집까지 데려다 주마.
정민 ...
$#24. 달리는 준일의 차 안 (밤)
운전하는 준일, 그 옆 조수석에 정민.
각자 생각에 잠겨있다.
준일 어느 쪽으로 가니?
정민, 그 소리에 창 밖을 보면 아버지의 통근버스가 서는 집 앞 거리다.
정민, 그대로 있고, 거리를 지나친다.
$#25. 국도 (밤)
서울 외곽의 국도.
호텔과 음식점들의 네온사인이 밝혀져 있다.
준일E 정민이 이사갔니? 이렇게 멀어서야 학교 오가기 힘들겠구나.
$#26. 준일의 차 안 (밤)
정민 저기 세워주세요.
준일, 밖을 보면, 주택가 없는 공터다.
차 세우고, 정민을 본다.
정민 괜한짓 하셨어요.
준일 (보면)
정민 저 따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준일 그래? 정말 내가 괜한 짓을 했구나.
정민 선생님.
준일 (보고)
정민 (짧게 한숨짓고, 결심한 듯) ... 저 선생님 사랑해요.
준일 (놀라고, 시선을 돌린다)
$#27. 국도 (밤)
준일의 차, 유리창 안으로 두 사람이 보인다.
그 위로 비가 투덕이며 떨어지기 시작한다.
$#28. 준일의 차 안 (밤)
정민 늘 생각했었어요. 어떻게 말씀 드릴까. 첫눈 오는 날. 아님. 화
창한 봄날, 선생님 기분 좋은 날, 아니면, 늦도록 레슨실에 혼
자 계실 때..., 강릉 그 바닷가에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말
씀 드릴까...
준일 정민아.
정민 오늘같이 이렇게 느닷없이 말씀 드리고 싶진 않았어요. 11년이
에요. 그 동안 줄곧 선생님만 봐 왔어요.
준일 내가 처음 정민일 만난 게 학교 음악실이었지?
정민 ...
준일 그땐 정민이, 바싹 자른 단발머릴 했었어.
다른 학생들은 다 머리 길게 기르고 다녔는데 말야.
정민 ...
준일 아이가 없어서 그런가? 날 따르는 정민이가 귀여웠지. 나는 지
금까지 정민일 딸처럼 여겼었어.
정민이 같은 딸이 하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말야.
정민 (웃고) 거짓말이에요.
준일 정민아.
정민 선생님이 절 딸처럼 생각한다구요.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걸
몰랐다구요?
아뇨. 사람 감정이 그렇게 일방적인가요?
전 선생님이 절 사랑한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그게 아버지가 딸한테 보내는 사랑이라구요?
...전 바보가 아니에요. 선생님.
준일 ...다 큰 줄 알았는데, 정민이, 아직 어리구나.
학교 선생님을 좋아하는 건 철부지 사춘기 때나 하는 거야. 늦
었다. 그만 가자. (변속기에 손을 가져간다)
정민, 준일의 그 손을 잡는다.
준일, 돌아보면
정민,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린다.
$#29. 국도 (밤)
비가 떨어진다.
준일의 차, 본넷이 열려있다.
움직이는 와이퍼, 안으로 조수석에 앉아있는 정민 보인다.
준일, 지나가는 차를 세우려 하지만, 차량 그냥 지나쳐 간다.
$#30. 준일의 차 안 (밤)
와이퍼가 빗물을 밀어낸다.
정민, 국도변의 준일의 모습을 지켜본다.
앞쪽의 승용차 한 대 서 있고, 승용차의 열린 유리창 앞에서 운전자와 말하는
준일의 모습 보인다.
준일, 다시 자신의 차 쪽으로 다가온다.
정민이 앉아있는 조수석의 차 문 열린다.
준일 (앞에 서 있는 차 쪽 한 번 보고) 서울까지 널 태워주실 거다.
정민 (꼼짝 않고 앉아) 이러셔도 소용없어요.
준일 정민아!
정민 선생님, 전 가지 않아요.
정민, 완강하게 버티고 앉아있고,
준일, 난감한 표정으로 그런 정민을 본다.
$#31. 아버지의 집, 마당 (밤)
정수, 화장실에 갔다 나온다.
화장실의 불 꺼지고, 마루 쪽으로 가는데 아버지의 소리 들린다.
아버지E 누구냐? 정민이냐?
정수 (잠시 망설이다) 언니 자. 아빠.
$#32. 안방 (밤)
불꺼진 방 안.
아버지, 생각에 잠겨 누워있다.
$#33. 마당 (밤)
조심스럽게 대문 아래 쇠빗장을 열어 놓는 정수.
살금살금 마루쪽으로 다가간다.
신발장에서 마루쪽으로 다가간다.
신발장에서 정민의 구두를 꺼내 댓돌 위에 놓는 정수.
정수, 휴 한숨 쉬고, 안방 쪽을 본다.
$#34. 호텔 객실의 복도 (밤)
정민과 굳은 표정의 준일, 걸어온다.
준일, 한 객실 문 앞에 멈춰선다.
준일 (들고있는 키를 정민에게 내밀며) 자.
정민 ...(받지 않는)
준일 (키로 객실 문 열어주고) 편히 쉬어라.
준일, 대꾸 없이 뚜벅뚜벅 옆 객실로 간다.
정민, 방으로 들어가는 준일의 모습을 지켜보고 서 있다.
$#34-1. 호텔 객실 (밤)
준일, 셔츠 차림으로 창가 테이블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잇다.
테이블에 1-2개의 빈 미니 양주병 놓여있다.
준일, 복잡한 표정으로 얼음을 채워 술 마시는.
E 띵똥-띵똥- (벨소리)
준일, 문쪽을 본다.
정민임을 짐작하는 듯 그대로 앉아있다.
E 띵똥-띵똥- (벨소리)
준일 어쩔 수 없다는 듯 일어나, 문쪽으로 간다.
준일, 체어풀고 문 열면, 복도에 피자 상자를 들고 있는 정민.
준일, 말없이 정민을 보면,
정민 (홀짝 웃으며 장난스레) 긴긴 겨울밤. 잠도 안 오실테고(주머
니에서 트럼프 꺼내 흔들며) 쨘! 진나믹해요. 우리.
$#34-2. 동, 호텔객실 (시간경과)
E 정민의 웃음소리
테이블에 피자 상자 열려져 있다.
몇조각 남은.
준일과 정민, 바닥에 앉아 트럼프를 하고 있다.
정민 제로! (번호와 무늬 맞혀 카드 내려놓고) 선생님 꺼 봐요.
준일 (무늬외 숫자 맞춰 몇 개 내려놓고, 웃으며) 4장 남았다.
정민 그러면... 58점이니까 (메모장에 연필로 점수 계산해 보고) 5천
팔백 원 저한테 주셔야 되요. (트럼프 모으면)
준일 (시계 한 번 보고) 늦었는데 그만 건너가야지.
정민 (트럼프 섞으며) 한 박스만 더 해요. 잠도 안 오는데요. 뭐.
준일 그만하자. (카드를 섞는 것을 제지하려고 정민의 손을 잡는다.
정민 (쳐다본다)
준일 (멈칫, 어색해서 손을 놓는다)
정민 (준일의 눈을 바라보며) 여자가 제일 무안할 때가 언젠지 아세
요? 마음먹구 남자한테 데이트 신청했다가 거절 당했을 때.
정민, 준일의 손에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을 얹는다.
준일, 정민을 바라보는 눈빛이 흔들린다.
준일, 정민의 손을 잡고 잡아 다닌다.
정민, 다가온다.
준일의 격정적인 눈빛으로 정민을 바라본다.
정민, 살며시 눈을 감는다.
준일, 키스하려는 듯 정민 쪽으로 몸을 숙인다.
준일, 정민을 바라보다 표정 일그러진다.
준일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지른다) 나가!
정민 (놀라 눈을 뜬다)...
준일 어서! 이제 그만 네 방으로 가란 말이다!
정민, 무안한 듯 일어나 문쪽으로 간다.
정민 여자가 제일 불쌍할 때가 언젠지 아세요? 사랑하는 남자한테
요 여자로 안 보이는 여자예요, 선생님.
정민, 문 열고 나간다.
준일, 털썩 의자에 주저 앉는다.
$#34-3. 호텔 프론트 (새벽)
준일, 안내 여직원(20대에게) 계산하는.
준일 7시쯤 되면, 옆방에 모닝콜 좀 해 주십시오.
여직원 예. (하다가 컴퓨터 모니터보고) 그 방 손님 체크아웃 하셨는
데요.
준일 네?
여직원 3시 조금 넘어서 체크아웃 하셨습니다.
준일 ...
$#35. 아버지의 집, 전경 (밤/새벽)
어둠에 쌓였던 집이 서서히 가지색 미명으로 바뀐다.
$#36. 마당 (새벽)
아버지, 긴 나무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다.
문 열리고,
정민,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아버지 이제 오냐?
정민 (보고,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아버지...
아버지 학교 일이 바쁘냐?
정민 ...예.
아버지 ...세태가 많이 달라졌지. 요새 젊은 아이들 개방적이고, 자유분
방하고, 그래도 정민아, (하는데)
정민 저도 요즘 아이예요.
아버지 (가슴이 덜컥해서 보는)
정민 아버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마음에 거리끼는 일은 하지
않아요.
아버지 ...그래. 피곤할 텐데 쉬어라.
정민 죄송해요.
정민, 마루 쪽으로 간다.
딸의 뒷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염려스러운 얼굴.
$#37. 정희의 집, 주방
정희, 설거지를 하고 있다.
어머니, 채반에 담긴 묵골댁이 준 도미, 뒤집는다.
어머니 못 줘도 한 마리에 오만 원은 줬을 게다.
천 석 살림도 입 호사는 못 당한다더니..
니 고모부 그 큰 살림, 아마 다 먹어 없앴을 게다.
돈두 없는 할망구가 씀씀이는 헤퍼서.
정희 엄마두 참.
어머니 거진 다 말랐다.
하루만 더 바람 쐬주고, 나중에 냉동실에 싸 넣어라.
김서방 오면 해주게.
잘 먹을 거다.
정희 네...
어머니, 나간다.
정희, 생선을 만지던 손길을 떨군다.
$#38. 성수의 오피스텔 로비
정희, 잠시 망설이다.
경비원이 있는 안내대 쪽으로 걸어온다.
정희 이것 좀 맡길게요. (안내대에 쇼핑백 올려놓으며) 1307호에 좀
전해 주세요.
경비 알겠습니다.
정희 (목례하고 돌아서는데)
경비 잠깐요. 직접 올라가세요.
정희 (보면)
경비 (키를 꺼내놓고) 아침에 맡기신 겁니다.
손님 오시면 드리라구요.
정희 (의아하게 열쇠를 본다)
$#39. 오피스텔
사방에 늘어진 옷가지들과 사진들, 컵라면 용기로 어지러운 실내.
정희의 발에 걸리는 사진 필림.
정희, 꼼꼼히 집안을 둘러보면, 사진첩과 사진용 뷰박스, 슬라이들 필림 등 사진
에 필요한 물건들이 널려있다.
정희, 낯선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본다.
(시간경과)
말끔히 정리된 실내.
정희, 가스레인지에서 김 오르고 있는 찜기.
정희, 냉장고에 쇼핑백에 담아온 밑반찬들을 차곡차곡 넣는다.
$#40. 오피스텔 로비
영주, 세련된 차림에 카메라백 매고 있다.
영주 이상하네. 열쇠 맡겨 둔다고 했는데요?
경비 (서랍 뒤지며) 몇호라구요?
영주 1307호요.
경비 (곤혹스레) 벌써 드렸는데... 올라가 보세요. 나오시는 거 못 봤
으니까 아직 계실 겁니다.
영주 (의아한 표정이다)
$#41. 동, 복도
영주, 또박또박 걸어간다.
성수의 집 앞 가까이 가면, 문 열리고 정희, 쓰레기 봉지 들고 나온다.
정희, 쓰레기 봉지 현관 앞에 놓고 키로 문 잠근다.
영주, 의아한 듯 보다 정희를 알아보고 놀란다.
정희, 돌아서 영주 쪽으로 걸어온다.
영주, 비켜서고, 시선 돌린다.
정희, 영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쓰레기 봉지 들고 걸어간다.
영주, 그런 정희의 뒷모습을 살짝 고개 돌려 바라본다.
$#42. 복덕방 (오후)
허름한 동네 복덕방.
어머니, 복덕방 주인 (남, 50대)과 마주앉아 있다.
어머니 신경 좀 써주세요.
주인 통 경기가 있어야지...
매물만 쏟아지지 보러오는 사람이 당최 없어요.
어머니 그러게 부탁 드려요.
아무래두 신경 써주시면 낫죠.
주인 (일어서며) 어디 한 번 가서 봅시다.
내 눈으로 봐야 손님한테 뭐라 설명을 하지.
$#43. 아버지의 집, 마당
부엌을 들여다보고 있는 복덕방 주인.
그 옆에 어머니.
마루에 앉아있는 정수와, 댓돌 위에 서있는 묵골댁.
주인 (마당으로 내려와 둘러보며) 옛날 집이네요.
아직껏 이런 집이 있고.
어머니 좋잖아요. 터 네모반듯하니 넓고, 남향이구. 어디 빌라 올릴 사
람으루 좀 알아 봐줘요.
주인 (고개 끄덕이고) 잘 보고 갑니다. (돌아서서 대문 쪽으로)
어머니 잘 부탁드려요.
주인, 대문 닫고 나간다.
$#44. 마루
묵골댁, 화가 나서 씰룩거린다.
어머니, 마루 끝에 앉아있고,
정수, 마당에서 양말 빤다.
묵골댁 그렇게 자네 맘대루 해두 되나?
대주가 시퍼렇게 눈뜨고 있는데...
어머니 내 집 갖고 제 맘대루 하지. 그럼 누구 맘대루 해요?
묵골댁 자네 집이라꼬?
어머니 모르셨어요? 제 명의로 된 제 집이에요.
묵골댁 (잠시 말문이 막힌다) 여자 혼자, 무신 힘으로 집을 산다 말이
고? 동상이 벌어다 줬으니까 샀겄제.
어머니 누가 뭘 벌어다 줘요? 그 알량한 월급에 나 결혼하고 이날 이
때껏, 그 사람은 고모하고, 조카 뒷바라지로 세월 보낸 사람이
에요.
묵골댁 (어깃장을 놓는다) 그래도 대주 덕에 먹고 자고 안 했나?
어머니 그러믄 나는요? 박씨네 집에 들어와 평생 밥해 먹여, 깨끗이
입혀.... 남의 집 파출부 일을 해두 먹여는 주죠.
이거 하나는 아세요.
나는 내 밥 먹고, 그 사람은 자기 밥 먹고.
묵골댁 아구 무시버라. 갈라스믄 다 이런기가. 니꺼 내꺼 셈이 마 똑
부러지는구마.
어머니 셈이 똑 부러지면 지금까지 이러고 살았겠어요.
벌써 애저녁에 갈라섰겠죠?
착실한 남자라구, 벌어논 것도 많다구 고모 저 그렇게 꼬드기
셨죠? 처녀 때.
묵골댁 내 말 그른 거 있나? 착실한 것도 맞고, 월급도 많았고...
어머니 왜요? 딴 여자 있다는 소리도 안 하구, 고모네 뒤치다꺼리 하
느라 먹고살기 어렵단 말씀도 안 하셨잖아요!
묵골댁 자네! 헤어졌음은 헤어진 게지. 시방 나하고 척진 일 있나? 와
이카노?
어머니 고모가 먼저 시작하셨잖아요.
문 열리고, 아버지 나온다.
아버지 그만 하게. 누님한테 무슨 말 버릇인가. (엄한 눈으로 어머니
를 본다)
어머니 (찔끔해서, 혼잣말) 없는 줄 알았더니...
쉬는 날이네요.
묵골댁 동상! 이 사람 하는 말 쫌 들어보소.
아버지 누님두 그만 하세요.
묵골댁 동상!
아버지 (신발 신으며) 정수야.
정수 예.
아버지 아빠랑 바람 쐬러 가자.
$#45. 마당
어머니 그럴 거 없어요. 내가 갈 테니까. 정수야. 문 잠궈라.
아버지 ...
어머니, 먼저 앞서서 대문 족으로 대문 열리고,
태준, 들어온다.
어머니 (기겁하구) 아! 놀래라!
태준 죄송합니다.
아니, 뭐 죄송까지야. 집 보러 오셨어요?
태준 박민식 선생님 댁이죠?
어머니 그런데요.
태준 선생님 좀 뵈러 왔습니다.
아버지, 태준의 소리에 댓돌에서 내려와 본다.
눈이 마주치는 태준과 아버지.
$#46. 안방
아버지, 어머니, 태준, 묵골댁 앉아있다.
태준 (묵골댁에게) 그대로 시네요.
한눈에 알아 뵙겠습니다.
아버지 (난처한 표정이다) 그래? 내는 생각이 안 나는데, 자넨 누고?
태준 잘 모르실 겁니다. 세월이 많이 지났지요. 저, 태준입니다. 왜
어머님 만나러 몇 번 오셨지요? 집에.
묵골댁 어무이가 뉜데?
태준 정자 혜자 선자 쓰시는 분이십니다.
어머니 (놀라서 입이 벌어진다. 놀라 태준이 보고)
묵골댁 누구라꼬? 대구에 살던 정혜선씨 아들입니다.
묵골댁 세상에. 이기, 이기 무신 일이고.
묵골댁, 어머니의 눈치를 살핀다.
어머니, 아버지를 쏘아보다 벌떡 일어난다.
$#47. 마당
어머니, 생그란 표정으로 신발 신고 나온다.
정수, 빨래줄이 양말을 넌다.
어머니 (딸을 보다) 너, 엄마 따라 갈래?
정수 ...
어머니 싫음 말구. 엄마 간다.
정수 ...
어머니 (정수의 등짝을 한 대 후려치며) 기집애가 지 애비 닮아서 살
가운 맛이라고는 손톱의 때만큼도 없어 가지고 어느집 딸년이
이렇게 지 에미를 소 닭 보듯이 하니?
문 잠궈!
$#48. 안방
아버지와 태준, 묵골댁.
태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망설이는데,
아버지, 일어서서 옷걸이대에 걸린 점버를 꺼낸다.
아버지 나가세.
태준 선생님.
아버지 나가서 술이나 한잔하지.
묵골댁 술은, 무신.
내 금시 저녁 안 칠 테니 밥이나 묵지.
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먼저 나간다.
$#49. 술집(저녁)
시장 안 순대국집.
아버지와 태준, 앉아 있다.
테이블에 순대국 두 그릇이 놓여있다.
주인여자, 소주 한병과 잔 두 개를 가져와 턱 놓는다.
아버지, 술병을 들어 태준의 잔에 놓는다.
아버지 (술병 건네며) 자. 나도 한잔 주게.
태준 선생님.
아버지 괜찮네.
태준 드시지 마세요. 더구나 독한 술이라 해롭습니다.
아버지 (잔 들어 따르라는 시늉) 이거 한잔 안 마신다고 내가 얼마나
더 살겠는가? 한 백수는 살겠나? 이거 백수는 너무 과하고, 이
순까지라도 산다면 내 안 마시지.
태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 잔 따른다)
아버지 고맙네. (태준을 보고) 살다보니 내 이렇게 자네한테 술잔을
다 받아 보는군. 자 한잔하게.
태준 선생님.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늦지 않았다...
태준 수술하십시오. 선생님.
아버지 솔직하게 말해보게. 내가 수술하면 살 확률이 얼마나 되겠나?
태준 ...(망설이는) 그건 누구도 정확히 말씀 드릴 순 없습니다. 생명
을 앞에 두고 어떻게 확률로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선생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아버지 (쓸쓸한) 별 희망이 없는 거군.
태준 선생님.
아버지 이 나이쯤 되고 보니 말이야. 하나둘 주위에 쓰러지는 사람들
이 생기지.
자네 앞에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네만, 살다보니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거더군. 나라고 더 살고 싶지 않겠나...
(술 마시고)
남은 시간 병원에서 보내기도 싫고...
태준 선생님!
아버지 자네도 보지 않았나? 나 그렇게 넉넉지 않게 사네. 자식들도
어리고... 내겐 돌봐야 할 식구들이 있어서 말야...
태준 제가 있질 않습니까? 선생님께 은혜를 입은 제가 있질 않습니
까?
아버지 나는 자네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없네. 할 일을 했을 뿐이지.
아버지, 잔을 비운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보는 태준.
$#50. 거리 (저녁)
술에 취한 아버지, 태준에게 기대 걷고 있다.
아버지 죄 받는 모양이야...
태준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 아니야. 자네 어머니에게도, 우리 애들 엄마한테도 지은 죄가
많아서, 그 값을 치르나 보네. (비틀거리는)
태준 선생님. (팔을 꼭 잡는)
$#51. 아버지의 집, 안방 (저녁)
캄캄한 방안
아버지, 술에 취해 곤히 자고 있다.
$#52. 마루 (저녁)
태준과 정민, 묵골댁 앉아있다.
정수의 방문 조금 열리고, 정수 밖을 내다 보고 있다.
태준 (결심한 듯) 선생님은 지금 암을 앓고 계십니다.
정민 네?
묵골댁 뭐라꼬? 암?
이기, 이기 무슨 말이고?
내가 늙어가 귀가 어두분가?
야야 다시 한 번 말해 보거라.
니 시방 암이라 캤나?
태준 한시가 급합니다. 입원하셔야 해요.
정민, 멍한 표정으로 태준을 본다.
$#53. 성수의 오피스텔, 주차장 (저녁)
성수의 차 들어온다.
주차하고,
성수, 차에서 내리고.
성수, 걸어가면, 빵- 클락숀 소리와 쏟아지는 헤드라이트 불빛.
성수, 눈부셔 보면, 차 문 열리고, 영주 내린다.
$#54. 오피스텔 (저녁)
어두운 실내.
현관문 열리고 성수와 영주, 들어온다.
성수 들어와서 기다리라니까. 자료 찾을 거 있다며?
영주 홀애비 사는 집, 퀴퀴하니 질식할까봐.
성수 (웃고)
성수, 거실 불 켠다.
실내, 눈부시게 깨끗이 정돈 돼있다.
오디오 위에는 수반이 꽂꽂이 되있다.
성수, 놀라서 사방을 훑어본다.
$#55. 동, 주방 (저녁)
식탁에 밥상 잘 차려져 있다.
한가운데 도미찜 있고, 반찬까지.
성수, 전기밥솥에서 밥 퍼서 식탁에 놓고
영주, 거실 앉은뱅이 책상에 놓인 뷰박스에 사진필림 올려놓고, 확대렌즈로 들
여다 보고 있다.
성수, 냉장고 열어보면 가득차 있는 반찬들.
놀라고...
성수 밥 먹자.
영주 그래. (뷰박스에 불끄고)
영주, 식탁 의자에 앉는다.
영주 황홀한 밥상이다. 우리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나 받아보던 상
인데.
성수 (앉으며) 내가 좋아하는 도미찜까지.
오영주. 나 감동 받았다.
영주 난 아니야.
성수 그럼 너 말구 누구?
영주 글세. 우렁이각시라도 한 마리 키우나 보지?
서방님 진지 드세요.
물통 뒤져봐. 혹시 우렁이 있나.
성수 쑥스럽냐? 딴소리는.
어쨋든 먹자. 어서 먹어.
영주 성수씨부터 먹어.
성수 어이구, 오늘 왜 이러셔.
영주 글세. 성수씨부터 먹어야 될 것 같아.
미안해서.
성수 (반찬 먹는다)
영주 사람 미각이라는 게 우습다.
나, 파리 가 있던 6년 동안 집에서 먹던 음식, 한국 음식,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우리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먹었
어. 근데 말야 혀가 소리를 지르는 거야!
그래. 바로 이맛이야.
성수 ? (의아한)
영주 둔하긴. 아직도 모르겠어?
나 아까 정희씨 봤어.
성수 (놀란다)
$#56. 정희의 집, 거실 (밤)
정희와 원정, 소파에 앉아 실뜨기 하고 있다.
정희 (하품하며) 그만하고 자야지.
원정 (따라 하품하며) 엄마는?
정희 엄만, 할머니 기다려야지.
띵똥- 벨 소리 난다.
정희 열렸어요. 엄마! (실뜨기 마저 하고) 자, 끝났다. 이제 자.
원정 (벌떡 일어선다) 아빠!
정희, 그 소리에 놀라 돌아보면, 성수다.
원정, 달려가 성수의 다리를 안는다.
원정 아빠. 아빠! (좋아서 펄쩍 펄쩍 뛴다)
정희 여보!
성수 (정희를 싸늘하게 쳐다보고, 원정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자, 엄
마랑 아빠랑 할 얘기가 있으니까 그만 들어가서 자. 응. 착하
지.
(시간 경과)
성수, 서서 벽면에 걸린 자신의 결혼사진을 본다.
정희, 원정이 방에서 나온다.
성수 (벽을 본 채) 당신이란 여자 정말 질리는군.
정희 여보!
성수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땠을까?
남편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데, 아직도 이런 걸 걸어 놓나?
정희 여보.
성수 이제 그만 하자. 나 돌아오지 않아. 모르겠니?
정희 목소리 낮춰요. 원정이 깨요.
성수 그래. 늘 그런 식이지.
남이 우리 부부를 어떻게 볼까? 부모님이 우리를 어떻게 볼
까? 그게 두려워서 당신은 이혼을 못하는 거 아닌가?
정희 (기가 막혀) 제가 당신 집에 갔다 온 거 때문에 그러세요?
성수 벌써 9개월이야. 그런 형식적인 절차 하나 넘기가 그렇게 힘든
가?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날 놓아줘!!
성수, 사나운 시선으로 정희를 노려보다, 뒤돌아서 현관 쪽으로 간다.
정희 여보!
성수 (현관 쪽으로 가고)
정희 그렇게 자기 감정만 소중해요! 난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줄 알
아요!
여보!
성수 (그대로 나가고, 현관문 닫힌다)
$#57. 아파트 앞 (밤)
성수, 나가는데, 어머니, 맞은 편에서 온다.
어머니 (반갑게) 김서방!
성수 (못 듣고 지나치는데)
어머니 김서방!
성수 (그제서야 본다)...
어머니 나, 마중 나온 건가?
그래 일은 다 끝났나?
성수 ...
어머니 (팔을 잡고) 어서 들어가세. 피곤할 텐데 뭐하러 나왔나.
성수, 어머니에게 끌려가다시피 가다가 팔을 빼낸다.
성수 죄송합니다. 그만 들어가 주무십시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인가?
성수 ...원정이 엄마한테 들으세요.
성수, 목례하고 돌아서고, 어머니,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그런 사위의 뒷모습을
멀거니 보며, 연거퍼 "김서방"을 부른다.
$#58. 정희의 집, 거실 (밤)
정희, 소파에 앉아있다.
어머니 (맞은편에 앉으며) 어떻게 된 거냐?
정희 ...오셨어요?
어머니 대체 무슨 일이야?
정희 ...
어머니 싸웠냐?
정희 아뇨.
어머니 너희 땐 우리랑 다르지. 처음부터 서루 좋아해서 연애해서 결
혼들 하지 않았니? 우리 때도 그랬음 좋았을 걸. 그랬다면 이
그럭 티그럭 한평생 비끄덕 거릴 일도 없고, 얼마나 좋으니.
정희 엄마.
어머니 (딸을 보고) 정희야. 살아보니 부부싸움 칼로 물 베기란 말, 다
거짓말이더라. (자기 감정에 젖어) 외려 남보다 더 골이 파지
구, 벤 손가락 간장에 담근 것처럼 아리고, 쓰리고...
부부사이에 골은 그냥 두면 안 된다.
정희 ...
어머니 (쓸쓸한 어조로) 다정하게 살아. 지나고 보면 청춘이 아깝고
세월이 아깝다.
정희 ...(눈물이 나려하자, 시선을 먼데 고정시키고, 눈을 깜빡거린
다)
$#59. 아버지의 집, 마당 (밤)
아버지, 목이 마른 듯 밖으로 나온다.
부엌에서 나오던 정민, 아버지를 본다.
울은 듯 정민의 눈이 빨갛다.
정민 아버지...
아버지 어, 그래. 물 좀 다오.
정민 (떨리는) 네...
아버지 왜 그러니? 무슨 일 있니?
정민 아버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 (웃으며) 무슨 소리야, 그게? 뭐가 죄송해.
정민 (아버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흐느낀다) 아버지... 몰랐어
요. 이렇게 편찮으신 줄은... 죄송해요. (흑흑) 아버지.
아버지 ! (놀라고)
E 묵골댁의 울음소리 터져 나온다.
$#60. 정수의 방 (밤)
불 꺼져 있다.
마루의 불빛이 새어 들어온다.
묵골댁, 넋을 놓고 앉아 소리 내서 운다.
정수, 묵골댁을 보다 슬며시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
$#61. 마당 (밤)
아버지, 정수의 방 쪽을 보고, 정민을 한 번 보고, 식구들이 자신의 병을 안다는
것을 안다.
아버지, 우는 정민의 등을 두드려준다.
$#62. 마루 (아침)
아버지, 출근 차림으로 나온다.
묵골댁 그 몸으루 어딜 간다구? 몸 있구 돈 있지. 출근이란. 가당키나
하나.
아버지 괜찮습니다.
묵골댁 괜찮다니. 오장에 골병이 들었는데. 괜찮다니.
정민 아버지. 저 하고 같이 병원에 가요. 네?
정수 ...
아버지 (딸들을 잠시 본다. 화나고, 착잡하고, 어색한 심정이다. 무뚝
뚝하게) 다녀오마.
아버지, 마당으로 내려서고, 정수 눈치보다 뒤따라간다.
정민 아버지. (따라 나가고)
묵골댁 동상! 동상!
$#63. 장독대 (아침)
묵골댁, 장독을 닦으며, 한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다가오는 정민.
정민 고모. 학교 갔다 올게요.
묵골댁 (돌아보고) 이런 일이 있을라꼬 장 맛이 변했나 부다.
정민 (입을 꼭 다물고 있다)
묵골댁 아홉수가 무섭다카디. 니 아부지가 올해 쉰아홉이다. 아나?
정민 ...
묵골댁 진주 봉사가 올해 우환있을 수라 카두만. 시상에 이기 무신 일
이고.
정민 (눈물이 글썽한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모. 빨리 올게요.
묵골댁 (한숨)
$#64. 거리 (아침)
아버지, 화난 사람처럼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걷는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따르는 정수.
아버지 (멈춰서서, 돌아본다)
정수 (그 자리에 서서 슬픈 눈으로 아버지를 본다)
아버지 이리 와.
정수 (다가온다)
아버지 (손 내밀며) 손.
정수 (아버지의 손을 잡는다)
부녀, 손을 꼭 잡고 걸어간다.
$#65. 정류장 (아침)
말없이 서 있는 아버지와 정수.
정수, 풀 죽은 채 서 있다.
아버지 정수 방학 이제 금방이지?
정수 (고개 끄덕인다)
아버지 정수 방학하면 아버지랑 단 둘이 저어기 바닷가에 낚시하러
갈까?
정수 낚시?
아버지 그래. (아득한 시선이 된다) 저어기 삼천포에 가자. 진주에서
버스 타고 가면 되지.
옛날에 아버지가 살던 집이 있어. 할아버지가 배타고 고기 잡
으러 나가시면 말이다.
할머니랑 아버지랑 매일 바닷가에 나가서 기다리고 했었는데...
정수 ...
아버지 정수야 우리 거기 가서 살까?
아버지랑 둘이서.
아버지는 고기 잡고, 우리 정수는 학교 다니고.
아버지는 거기서 살고 싶다.
우리 정수 커서 착한 사람한테 시집 보내고, 아버진 정수네 집
에 고기도 잡아 주고.
정수가 아이 낳으면, 배도 태워주고. (아득한 눈빛으로) 참 편
할 텐데...
정수 거짓말.
아버지 (꿈에서 깨어난 눈빛으로)
정수 거짓말!
아버지 정수야.
정수 나도 다 안단 말야. 아버진... 아버진 그때까지 못 살잖아!
정수, 아버지를 쳐다보다 감정이 격해져서, 뛰어간다.
아버지, 그런 정수의 뒷모습을 보며 정수를 부른다.
정수의 뒤로 겨울 하늘이 깨질 것처럼 투명하다.
제 2 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