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사첨족(畵蛇添足); 곁가지 주제 설교자가 자기 설교를 교인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 주기 바라듯이 글 쓰는 사람도 자기 글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공감해 주기를 바란다. 그런데 설교자가 교인들의 귓맛과 타협하여 설교를 하면 안 되듯이 글 쓰는 사람도 읽어 줄 사람을 늘리기 위해 그들의 비위에 맞춰 글을 써서는 안 된다. 다행히도 필자는 교인들의 귓맛에 맞는 설교를 하려 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잘하려는 노력은 했다. 그런데 목사가 설교를 잘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하고, 따라서 잘하려 하는 노력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여기에 ‘솔직히’라는 말이 들어가 있으니 독자들로서는 이 단어가 제자리를 잘못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이에는 이유가 있다. 필자는 ‘잘하려는’의 ‘잘’에 ‘폼 나게’라는 의미도 포함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설교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나 목사답지 못하고 의젓잖은 목사인가. 의젓잖은 것은 그뿐이 아니다. 목사인 주제에 별 볼 일도 없는 문장 나부랭이를 글이라고 쓰면서도 독자들의 입맛에 맞는 소재를 고르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그런데 <당당뉴스>에 올린 글도 몇 편인가 쌓이다 보니 독자 분들이 선호하는 내용 또한 어떤 것인지를 대충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대통령까지 해 먹은 사람이 초호화생활을 하면서도 2십 몇 만 원밖에 없다고 엄살을 부리거나, 목사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교인들의 마음에 드는 내용을 찾아 설교를 하거나, 또는 글 쓰는 사람이 독자를 늘리려고 그들의 비위나 맞추려 하는 일을 가리켜 거지같다고 한다. 거지가 따로 있겠는가. 거지같은 짓을 하거나 거지같은 마음을 품으면 거지이다. 이야기가 한참이나 곁길로 흐르고 말았는데, 필자가 여기에서 하고 싶은 말은 이 글의 내용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안 쓰면 될 게 아니냐고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쓰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읽는 사람이 많건 적건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라면 써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 곁길로 흐른 말이 길어진 김에 한 마디만 더하고 싶다. 이 서론에 해당되는 부분을 문재(文才) 없음의 증명이라 생각하고, 아니면 주제에 곁가지가 하나 더 나 있는 것 정도로 이해해 주었으면 하고 바랄뿐이다. 요즘 들어 필자는 나이가 많다는 것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들 때가 더러 있다. 욕심만 해도 젊었을 때는 이런저런 것들이 얽혀 내려놓기가 어려웠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이 작아지다 보니 상대적으로이기는 하지만 내려놓기가 쉬워졌음을 느끼는 일이 많다. 죽어 하나님을 뵈올 날이 가까워지다 보니 사람들보다 하나님 쪽으로 더 많은 관심이 가게 되는 것도 나이 많아지며 받게 된 은총이다. 사람의 눈보다 하나님의 눈을 더 많이 의식하게 되었다면 이 또한 크고 큰 은총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면서도 독자들의 귓맛에 맞는 내용을 써서 읽는 사람을 늘리고자 하는 유혹 같은 것도 쉬이 지나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이 얼마나 가슴 벅차도록 감사한 말씀인가. 용이 아니라 미꾸라지로라도 살 수만 있으면 좋겠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이 있다. 그런데 옛날에는 이것이 가난에 찌들고 남들의 힘에 짓밟혀 삶이 고달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게 그야말로 옛일이 되고 말았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어야 건강한 사회인데 지금은 재력이 됐건 권력이 됐건 세습되고 있어 그럴 수 없다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전북대학교 강준만 교수가 최근 <개천에서 용 나면 안 된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그는 이 책에서 미꾸라지가 용이 된다는 이론을 앞세워 극소수의 용이 모든 것을 독식하는 승자독식주의에 면죄부를 부여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며 그 극소수의 용이 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희생을 치렀지만 대부분은 용이 되지 못한 채 좌절과 패배감을 맛봐야 했다고 성토한다. 개천에서 난 용들이 자기를 배출한 개천을 돌보기는커녕 되레 죽이는 데에 앞장섰다고도 말한다. 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옛날의 가난을 숙명처럼 안고 살았던 농어촌 사람들이나 도시의 빈민들은 동네에서 뉘 집 자식인가가 공부를 잘하여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라도 들어가면 ‘개천에서 용 났다’고 부러운 눈길을 보냈다. 그들에게는 공무원이나 학교선생, 회사원 같은 직업도 미꾸라지가 아닌 용으로 보였던 것이다. 찢어지게 가난하거나 보잘것없는 부모 밑에서 조금이라도 성공한 자식이 나와도 ‘개천에서 용 났다’고 했다. 칠칠맞아 보이던 사람이 적잖은 돈을 벌거나 사회적 지위가 좀 높아지면 ‘미꾸라지가 용 됐다’고도 했다. 그런 중에도 어쩌다, 정말이지 어쩌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도 사시나 행시 등의 합격을 통해 하늘을 나는 용다운 용이 나오기도 했다. 옛날에는 그런 것들이 가능했다. 그러니 삶은 고달파도 희망이 있었다. 열심히 하다보면 지금보단 나아지리라는 희망이 있었기에 행복하다 할 수 있었다. 장래를 내다보며 공부하는 청소년들과 취직을 준비하는 청년들의 눈동자는 희망으로 빛났다. 그러나 이제 개천에서는 하늘을 나는 용은커녕 미꾸라지 티만 벗은 그런 용도 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지금의 청년들은 부모의 뒷받침 없인 그 정도의 용도 되기가 힘이 든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자기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가능했던 것인데, 고학을 해서라도 가능했던 것인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부와 권력이 세습 아니면 내 것으로 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가리켜 ‘현대판 음서제(蔭敍制)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고 있다. 음서제가 무엇인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상류층 자녀가 과거를 보지 않고도 관직에 올라 자손대대로 기득권을 누리게 했던 제도 아닌가. 참으로 가슴 답답한 일이다. 그렇다고 죽을 수는 없는 일, 젊은이들은 얼굴이 누렇게 뜨도록 이를 악물고 공부한다. 취업준비라기 보다 죽지 않고 살아남으려 치는 몸부림이라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눈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고 두려움과 절망의 그림자만이 흐느적거리고 있다. 그들은 이제 용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 백수만을 면하길 바란다. 그런데 이조차도 나은 편이다. 아무리 해 봐도 절망뿐이라는 현실은 그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포기라는 절벽으로 밀어 떨어뜨린 것이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오더니 거기에 인간관계와 내 집 마련을 더해 ‘오포세대’가 나왔고, 그도 모자라 이제 취업과 희망까지 더한 ‘칠포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처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는 그냥 된 것이 아니다. 본래부터 있던 용이건 개천에서 새로 난 용이건 그들은 자신들의 영역에 다른 사람들이 발을 들여놓는 것을 절대로 용납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용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모조리 제거하려 든다. 개천으로 조금 흐르는 물줄기조차 틀어막아 용이 나지 못하도록 한다. 이제 이를 국민 개개인으로선 어떻게도 할 수 있는 단계를 지나쳐 버렸다. 나라가, 정부가 해결해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그들에게도 맡길 수 없다는 데에 우리의 고민과 아픔이 있다. 그들 역시 용인 이상 팔이 안으로 굽으려는 속성을 지니기 쉬운 것이다. 부자 감세에 서민 증세가 무엇보다도 좋은 증거이다. 가진 자들이 더 가지면 그들이 먹고 남는 부스러기라도 못 가진 자들이 주워 먹을 수 있지 않느냐(낙수효과)는 이론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지금의 가진 자들은 그 부스러기 하나도 남기지 않고 말끔히 쓸어 자기 입에 털어 넣는다. 그러나 나라 일을 하는 용이라고 다 그 같은 정책을 펴려 하진 않을 것이다. 개천에 물을 조금일지라도 더 흐르도록 하려는 용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용들을 누가 뽑는가. 국민이, 바로 내가 뽑는다. 그러니 그놈이 그놈이라 해서는 안 된다. 단 몇 퍼센트일지라도 차이가 나는 게 인간이다.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의 ‘서봄’을 현실에선 볼 수 없을까 SBS의 <풍문으로 들었소>라고 하는 월화드라마가 얼마 전에 종영되었다. 부와 권력의 세습으로 제왕적 특권을 누리는 대한민국 초일류 상류층의 색다른 갑질 이야기다. 갑의 단순한 갑질이 아니라 갑을의 공생을 통해 지능적으로 이루어진 갑질이다. 갑질은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 한정호를 정점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그는 최고만을 지향하는 선대(先代) 덕분에 먹고 입고 배우는 등의 모든 것 또한 최고로만 누렸다. 그리고 자기의 아들과 딸에게도 최고의 것만을 제공해 오고 있다. 그의 가정에 아직 솜털도 덜 가신 18살의 서봄이라는 며느리가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그들의 최고 행진은 언제까지나 계속되었을 것이다. 서봄 그녀는 서울 한복판인데도 재개발이 예정되어 있는 낙후지역에 집을 둔 그저 그렇고 그런 집안의 딸로 고3이었다. 성적도 성격도 좋은 데에다가 아는 것도 잡다하게 많아 친구들 간에 인기도 높았다. 뛰어난 영어실력 덕분으로 영어토론캠프에 참가해 동갑내기 한인상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않았다면 평범하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삶을 엮어 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한인상은 법무법인 ‘한송’의 대표 한정호의 아들이었으나 서봄은 그러한 그에 대해 알지 못했다. 캠프의 해산 날, 그것만으로 그치려 했던 키스는 두 사람을 달궈 막다른 데에까지 가게 했고, 그것은 하나의 새로운 생명을 잉태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서봄은 한송가에 들어가 출산을 했고 결국 며느리로 받아들여졌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시부모도 그녀의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총애까지 하게 되었다. 서봄은 점차로 한송가의 귀족적 분위기에 익숙해 가며 그 단맛에 빠져들고 있었다. 집에서 부리는 사람들을 다루는 데에도 자타가 공인하는 귀부인인 시어머니 연희를 능가하는 면이 있었다. 그녀는 그런 데에도 탁월한 유전자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유전자의 기운을 누를만한 맑은 영혼의 힘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기가 시부모보다 더 큰 괴물이 될 것이라는 자기진단을 하게 된 것이다. 서봄의 동갑내기 남편 한인상은 인큐베이터에서 만들어진 수재였다. 완벽한 이론의 아버지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기품 넘치는 어머니는 넘을 수 없는 산이요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그 산과 강 앞에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싫은 기색 한 번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맑고 자유로운 영혼의 서봄과 함께 지내면서부터 비로소 자기는 새장에 갇혀 있으면서도 행복하다 느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봄은 그런 인상과 함께 집에서 부리고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시부모 정호와 연희는 그런 서봄을 억눌러 회유하려 하지만 듣지 않았다. 결국 배부른 괴물보다 배고픈 사람의 길을 택해 친정으로 돌아오고 만다. 그런데 끝내는 한송가에서 부리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 서봄 주위로 모여 오고, 남편 인상도 자기가 물려받을 그 막대한 재산을 포기한 채 집을 나와 가난과 함께이지만 화목하고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처가의 서봄에게로 돌아온다. 법무법인 ‘한송’의 핵심 멤버들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서봄 주위의 코딱지만한 변호사 사무실로 모여들어 새로운 꿈으로 은은한 행복을 엮어 간다. 현실성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이런 내용의 드라마이지만 시청률은 꽤 높은 편이었다고 한다. 필자도 재미있게 보았다. 힘 있는 괴물이 되기보다 배가 고플지라도 사람이 되겠다며, 조그마한 몸짓만으로도 용이 되어 날 수 있는 거대한 강을 버리고 본래의 개천으로 돌아온 서봄에게서 대리만족을 느낀 것이리라. 이 TV 드라마 <풍문으로 들었소>는 실현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현실성 제로의 이야기지만, 서봄으로 인한 주위의 변화를 뺀 한송가의 이야기는 그대로 이 땅의 현실이다. 이 땅에는 법무법인 ‘한송’의 한정호 같은 숫한 특권층이 재산과 권력을 세습하는 가운데 개천을 황폐시켜 용이 나기는커녕 미꾸라지도 살 수 없도록 하고 있다. 지금의 나도 갑질하는 갑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를 ‘갑질’하는 ‘갑’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세상에는 ‘갑’과 ‘을’의 두 종류의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병’도 있고 ‘정’도 있다. 아니 세상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계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런데 그 많은 계층 중 상대보다 한 계단만 높아도 나는 ‘갑’일 수 있다. 그리고 A와 B 양자 사이의 갑을관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필자가 사는 아파트에서는 몇 달 만에 한 번씩 지하주차장의 물청소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차들을 지상주차장으로 옮겨 놓는다. 그럴 때면 지상주차장은 주차전쟁을 방불케 한다. 주차라인 밖에도 주차가 허용되지만 그래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날이라고 다르지 않았으나 필자에겐 운이 따랐다. 자리가 하나 눈에 띄어 주차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운도 그때까지로, 아직 젊은 아파트 관리소 직원이 다른 차들의 통행에 지장이 된다며 다른 곳으로 옮기라 했다. 필자가 보기로는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하도 강경하게 말해서 차를 아파트 밖 이면도로로 옮겨 놓았다. 그런데 돌아오다 보니 그 관리소 직원이 수신호로 안내까지 하며 차 하나를 그 자리에 세우게 했다. 젊은 여자 한 분이 내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어찌된 일이냐 묻는 필자의 말에 관리소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며 잠깐 아기를 데리러 간 것이라 했다. 필자는 그렇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얼마 후 외출하며 보니 그 차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오후의 귀가 때는 지하 주차장의 청소가 끝났는지 주차라인 밖의 차들이 거의 옮겨져 있었으나 그 차는 그때까지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아파트 관리소 직원이 주민에게 있어 갑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방금 말한 직원도 자기가 필자에게 한 짓을 갑질로는 생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공사판에 투입된 대형트럭 기사들이 업주들의 갑질에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은 어제오늘일이 아니다. 4대강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을 때는 그것이 여론을 들끓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 도로상에서는 그들이 난폭운전으로 무법자가 되어 다른 차들을 위협하는 갑질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사업주들로부터의 갑질을 당하고만 사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인 이상 사람은 누구나 갑질을 하는 장본인일 수 있다. 필자도 그렇고 독자 여러분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갑질을 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대한항공의 땅콩회항 사건 같은 명백한 갑질까지도 그것을 자행했던 당사자는 정상적인 업무의 일환쯤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함으로 우리는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일본에 가 보라. 자기네가 가해자라고는 죽어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들은 전쟁의 피해자일 뿐이다. 참으로 우스운 사람들이요, 아전인수식 사고의 달인들이다. 그들의 뇌리엔 36년 동안의 갑질은, 갑질 중에서도 최악의 갑질은 온데간데없고 패전으로 인한 피해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런 것들까지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그러지 않고 쪽발이들이나 하는 짓이니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비웃고 만다면, 그리고 용들만을 갑질하는 주범으로 생각한다면 나도 그들과 똑 같은 우를 범하기 쉽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지금의 나도 갑질하는 갑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이 땅에서의 갑질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개천에서 용이 나는 세상도 요원해지기만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