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당 이분희
포덕71년(1930) 경북 청송 출생
부산시 여성회지부 고문
부산시여성회장
동원포 여성회 고문
선도사, 순회교사
"나는 천도교 잊어서는
안되는 사람"
내가 국민학교 졸업 맡아가 집안 일을 돕고 있었는데, 옆집에 친척이 하나 살았어요.
내가 열일곱 살 때 그 집에 놀러갔어요. 그런데 그 집에 저녁 때 가니까
아지매 되는 친척 어른이 물을 한 가득 떠 놓고 마루에 앉아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봤거든요.
그 모습이 내 맘에 탁 와 닿는 거라. 너무 좋다, 조용하고, 근데 그 집에가 천도교를 믿었어요.
아홉 시 기도식이었는 모양이라.
그 때 내가 마음에 탁 와 닿았고.
친정 어머니는 유교식으론가 불교식으론가 편찮으면 물을 떠놓고
뭐라고 애기하면서 이렇게 빌고 이래 하시고, 또 편찮으시면 점쟁이 있는데 가 물어가
"야, 저녁에 뭐 준비해 놓으면 사람이 와서 할 것이다".
그라믄 저녁에 와 가 띠 두르고 이래 하는 게,
내 엄마 지마는 그게 못마땅해서 나이 들면서 차츰 그걸 알았거든요.
그래, 친적집이 기도 드리는 게 마음에 와 닿더니만, 열여덟 살 되던 해 몇 군데에서 중매가 들어왔는데, 그 친척 아지매가 나를 증매를 했어요. 친정 조카였는데, 그기 바로 청암장 김현철 도정이거든.
친정 조카인데 중매를 해가, 그렇게 내가 좋다고 생각하니 한울님이 천도교 믿는 집으로 보내줬어요.
그게 참 인연인가. 종교도 내가 너무 좋다 그러니까,
그 때 한 일곱 군데 중매가 들어와도 다른 데 다 안 되고 이 분이 하신 천도교인 집에 가게 된 기라.
그게 참 한울님 조환가부다 싶으더라고.
내가 그래서 시집 가니까니 시조모님이 "야야, 우리집은 천 도교라 카는 종교를 믿는다." 하는데 전혀 나는 모르지.
그런데 "예" 카고 있었드마는 새벽, 저녁에는 온가족이 둘러앉아 가지고 꼭 청수를 모시고.
그때는 집례 하는 분도 따로 안 계시고 시조모님이
"야들아, 청수 모셨다, 다 오너라." 이라몬 다 모여지는 기라.
이래가 청수 모시고.
그때부터 천도교는 이렇게 물을 떠 놓고 기도하는 종교구나, 싶었는데 그때는 전혀 몰랐거든요.
그래가 시집에 하는 거 보니 모든 게 종교 의식이 다 하나하 나 우리 친정하고는 다른 데가 있어요.
아침 저녁 청수 모시고 기도 드리고 시조부님이 시아버지한테 명령하시믄 시아버지가 자기 아들딸한테 명령하시고 그대로 순종해서 집안이 다 편안 하게 지내가고,
걸인이 와도 밥 돌라카믄 먹던 밥 갖다 척 덮어 주는 예가 없고 시조모님 때부터 인내천 사상을 실천했는가.
걸인이 오면 밖에서 잡숫는 상이 따로 있었어요.
수저도 따로 있고. 그릇도 따로 딱 갖최놓고.
오면 뜨신 국 새로 뜨고 밥이라도 새로 뜬 밥으로 채려가 잡숫고 가라고,
그렇게 대접하는기 좀 다르더라구요, 보통 집하고
시어머니는 밥할 때 항상 따로 큰 바가지같은 걸로 쌀을 이래 딱 뜨는 큰 단지가 따로 있어. .
그기 성미 단지라 ·
인자 식구수 대로 성미를 다 뜨시고 큰 주걱을 딱 걸쳐놓고 식고를 하시는거,
그걸 내 하나하나 배왔어요. 뭔가 우리 집하고 다르구나.
그래, 식고를 딱 하시고 참 우리 시조모님이 얼마나 지극하게 하셨는지
영부꺼정 자기 손수로 해 갖고 손자나 누가 아프면 주문 외워 해 가지고 마시고
그렇게 하실 정도로.
웃대 우리 시조부님은 태암 선생님이신데, 어디 기록에 다 남아 있습니다.
삼일운동 때 우이동에서 수련도 하시고 그랬다 하대.
우리 시조모님은 지윤당님이시고. 근데 시부모님은 교회 잘 안 나가시고.
왜냐하면 자녀분들 여덟 명하고 너무 살기가 급하고 독립운동 할 때
시조부님이 밭하고 재산을 팔아가 총부에 성금을 내시고 했는가 보대요.
어려운 살림에 그리 하고나니 너무 쪼달려 살기가 바뻐 교회 나갈 시간도 없으시고.
우리 시어머니도 교인집 댁에서 모시고 온 며느리고.
시아버지도 우리 시조부님 시조모님이 너무 열심히 하시니까
두 집 다 교인 분들끼리 모두 그리 해가 결혼을 하셔가 팔남매 나시고 그런 거라.
그래서 내가 그때부텀 천도교를 믿으시는 거 보이,
첨 봤던 그대로 맘이 와 닿고 좋다 싶어서 뭐가 있을낀데 싶었는데 경전이 있더라고요
근데 우리 시아버지는 교회는 안 나가셔도 항상 낮에 경전을 읽으시더라구.
아 나도 경전을 한번 보자. 그때는 얄삽한 경전이었어요 두툼 안 하고.
그거를 읽으시고 우리 시숙하고 경전 말씀을 둘이 나누시고, 그래 천도교 가장 이 참 좋구나 싶고, 그 집이 참 열심히 살아왔구나 싶대요
우리 청암장이 공부하다가 육이오 사변 때 학도병으로 군대 가셨거든요.
일 년하고 삼 개월 소식이 끊겼거든. 하, 이젠 전사했다꼬, 죽었다꼬. 온 동네에서도 이라믄 죽었지.
소식이 이래 끊어졌는데 어째 살아오노. 어데 가서 죽었다, 그래, .
우리 가족들은 전사 통지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고.
그리 해도 가족들은 언젠가 올 거라는 가느다란 믿음이 있어 갖고 언젠가는 오겠지,
이라면서 항상 기도는 안 놓쳤어요.
우리 시댁 어른들 만큼 시조모님 지극하신 정성은 말도 몬 하고요.
그래, 참 기도한 덕분인가 하루는 내가 꿈을 꾸니
하늘에서 비행기가 우리 마당에 막 이래 돌아다니는 기라 .
그래 , 내 이 굵직한 실로 끝에 병을 하나 딱 묵았는데 ,
그 비행기에서 실로 딱 이어가 병 끝이 마당에 딱 떨어지는 거야 ·
그래 내 생각에 이상하다, 꿈이 이상하다, 분명히 내가 하늘에서 명줄이 내려오는가. 실로 병 끝에 딱 달아가 우리 마당에 딱 떨어지는데 이게 분명히 남편이 오는 꿈이다, 이렇게 생각이 딱 되대 ,
직감에 그 꿈 꾸고 3일만에 대구 육군본부에 와가 있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야 말로 우리 가족 동네 큰 잔치가 열렸어요 ·
손자 죽었다꼬 한 사람이 소식이 왔단다, 이렇게 돼서 동네 사람들 죽었다고 생각했지,
온니는 생각은 아무도 안 했어요.
그랬는데 참 지극 한 정성이 닿았는가 본인도 올라고 막 노력도 했겠죠마는
내가 화악산에 수련 갔을 때 이신환성이 탁 오드라고.
현송을 하는데 내 입에서 크게 "이신환성" 이라고 외치면서 귀로 막 벼락겉이 와 닿아.
그래서 이신환성을 좀 알아야 될 낀데 했는데,
그 이튼날 총부 집행부에서 온 기라. 근데 박충남 씨 있지예, 그분이 아침 수련 때 이신환성 그걸 설명을 딱 해 주시드라꼬.
총부에 중앙위원으로 여성회 2박 3일 강도회 갔을 때 또 귀에 뭐라 카나 하믄
"잠시도 맘을 늦추지 말라." 이기 내 귀에 딱 들어오더라구.
그래서 아, 이거는 도정님한테 물어봐야 되겠다 싶어 물어보이,
당신은 천도교에서 떠나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고, 절대로 천도교를 잊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고 하시대.
그래, 나는 안 그래도 천도교는 죽을 때까지 할라 했는데,
내가 좋으니까 모든 진리나 이치가 나한테 맞는 종교라, 천도교가.
그래서 한울님이 처녀 때 천도교 믿는 집으로 보내가 이렇게 열심히 내 딴에는 청수 안 빠지고 한다꼬 하고 있고,
심고는 항상 내 자식들이 가족들이 친척들이 전부 천도교에서 이탈 안 되든 좋겠다 싶어 항상 지켜 주고 싶은 그기 욕심이오.
■구술일 :포덕 145(2004년) 3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