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하 9:27~37)
'돌아와서 전하니 예후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 (36절)
하나님을 철저히 배신하고
온갖 죄악을 저질렀으며, 우상을 전파한
아합 가문에 대한 하나님의 진멸 약속이 이어진다.
이 일을 북이스라엘의 왕, 예후가 담당한다.
유다왕 아하시야,
가장 악랄했던 태후 이세벨이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이세별은 죽임 이후에 동물에 의해
육신이 갈기갈기 찢긴다.
그 본문을 읽을 때,
어쩔 수 없이 '잔인하다.'라는 감정이 맨 먼저 올라왔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에 대해서
냉철하게 생각해 보니 여러 가지가 떠올랐다.
어차피 이후가 보장되지 않는 육신이라면
점잖게 처리되는 죽음이나 혹은 잔인하게 처리되는 죽음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세상에서의 부나 권력으로
멋지고 값 비싼 관에 안치되거나
화려한 세레머니로 장례를 치른다 해도
무엇이 달라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저렇게 잔인한 죽임을 의도하신 것은
남은 자들에게 어떠한 깨우침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진리를 극구 부인한 인생,
그들의 죽음 이후는 저렇게 비참한 것이라고.
오히려 죽음 이후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은 협박자도, 테러리스트도 아니다.
썩어 없어질 육신의 죽음보다,
그 이후의 영원한 세계 속에서 처할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경고하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어쩌면 '일상'이 가장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어제 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마치 하나님의 성육신을 보듯 했던
귀한 아버지가 온 몸과 인생을 바쳐서 행했던 사랑은,
전쟁과 차별, 죽음의 공포에서 사랑하는 아들의 '일상'을 지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양정환, 귀한 영혼이 중한 질병 속에서도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 거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일상, 그의 일상과 가족과 친지의 일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일상은 다른 말로 '평화' '여호와 살롬'이겠죠?
일상에서 조금씩 다투기도 하고, 시기 질투하기도 합니다.
걱정도 하고 갈등도 합니다. 욕심도 내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일상을 깨뜨릴 정도가 아니라면
너무나 사랑스러운 일들임을 새삼스럽게 깨닫습니다.
하나님! 일상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양정환의 일상, 이항주 집사님의 일상, 목원들의 일상,
저의 지체들의 일상, 가족의 일상, 단국대 학생들의 일상,
이 시간 여러가지 고통과 질병으로 위기에 처해 있는 이들의 일상,
전쟁과 기근, 공포로 떨고 있는 이들, 북한의 영혼들까지
영혼들의 일상을 지켜 주옵소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평강, 샬롬이 꺼지지 않게 해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