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왜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했을까? 이는 예수 운동에 참여한 이들 대부분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열성의 바리새인 사울로 하여금 박해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예수 제자들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을 받아들였고 인종을 떠나 서로 어울리며 식사했기 때문이다.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바울은 예수님처럼 곳곳을 돌아다녔다. 대략 2만 킬로미터를 이동했고,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다. 예수가 농촌을 중심으로 움직였다면 바울은 도시들을 찾아다녔다. 바울은 재정적 후원자에게 매이기를 거부하고 육체노동을 선택했다. 고대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육체노동은 천시되었다. 예수 공동체는 부유한 이들의 공동체가 아니었고, 대다수 구성원은 빈곤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로마가 제국을 운영하던 방식인 '후원자 체제'는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삶을 더 어렵게 했다. 로마에 부역하며 권력과 부를 누리던 이들에게 로마의 통치는 평화와 안정의 시대였다.
한동안 유럽에서 '고린도'라는 말은 늘 성적 쾌락 및 유흥과 결부되었다. 자신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수사학이 발달한 도시였고, 올림픽과 같은 대규모 운동경기가 펼쳐진 곳이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조롱받는 곳이었다. 종교가 인간의 욕망으로 얼룩져 있음을 알아차린 현명한 사람들이 철학으로 불리는 지혜를 찾았던 곳(스토아학파, 에피쿠로스학파)이다. 바울은 그곳에서 죄와 악의 지배를 읽었다.
하나님의 뜻은 이 시대의 풍조, 기적과 지혜의 추구와 다르다. 분별해야 할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복음이었다.(142)
교회에 해당하는 헬라어'에클레시아'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온전한 시민권을 가진 시민들의 모임을 가리켰다. 헬라 도시에 사는 시민들은 도시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 발언하고 토론을 제안할 권리를 가졌는데, 에클레시아는 정치적, 사법적 결론을 내릴 때 모이는 자발적 모임이었다. (147) 강한 결속력을 가진 에클레시아는 가족의 언어를 사용했다.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전통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신분 계급사회였던 시기에 사용되었으니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언행일치와 살신성인에서 구한다.(빌레몬서에서)
빌레몬(주인)과 오네시모(종)의 관계를 형제 관계로 발전시킨 바울의 모습은 한국 기독교사에서도 나타난다. 조덕삼(1867~1919)과 이자익(1882~1961)의 관계다. 주인이었던 조덕삼은 하인으로 데리고 있었던 금산교회 장로 이자익을 극진히 모셨다.
가부장제는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숨은 이념적 질서였다. 이에 따라 여성은 로마에서 공식 직책을 맡지 못했다.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가 되기 전, 기독교를 체계화된 종교로 발전시키고자 했던 이들은 로마의 가부장 체제를 모델로 삼았다. 그러면서 여성은 기독교의 지도적 위치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이후 기독교의 역사에서 공식 직책을 가진 여성 지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