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김태완
문장론 외
-취재수첩
오늘은 거대 담론부터 이야기 하지
고트족 남자들이나 쓰는
북방 영웅 서사시의 강한 두운법 어투로
영사실 환등기 침침한 분위기
차단 횡목처럼 잡념 틀어쥔 채
세계적인 추세라는 비유법 등장시켜
죽은 문장 살려 볼까나
마개 비튼 탄산음료처럼 경쾌하게
혹은 굵은 체크무늬 오렌지색 숄처럼 따스하게
몇 번이나 뜨개질 코 빠뜨리지 않게
헌병 대장이나 근위병 수사修辭 대동하거나
서사물 시청자나 들어봄직한 폭군 같은 목소리
빈민가에서는 절대 펼쳐볼 수 없는 양가죽
하드카피로 씌워 놓으면 어떨까
어떨까, 그러면 나의 문장은 독일 연방 의회
바로크 시대나 어울릴 법한 엄격함 배어 있겠지
그렇다면, 막시즘 테제 빌려오듯 후추 듬뿍 친 구라파 맥주
쓸개즙으로 만든 사순절 음식 혹은
보헤미아 사제들이 즐겨 쓰는 낭만 미사체
나치 당원이 그려 넣은 깍두기 수염처럼
미끄덩거리고 맵짭고 메스꺼우며 떨떠름하여
아무나 입에 올릴 수 없는 명문장이 될까
아무렴, 절대 싸구려 신문에서 볼 수 없는 단어로
냉수대 낀 흉어기 철에 쓰는 절절한 표현만 끄집어
목청 좋은 바리톤조차 따라 부를 수 없게
정찰견 시종이 호위하는 공책 위에 올라타
아라비안 램프 문질러 피어나는
그런 문장 쓸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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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촨성 고분군 취재기
- 취재수첩
1
카키색 반바지 입고 떠나는 무덤 답사
시외버스 시동 걸자 가방 속 도시락과 소주병
몸을 비빈다 차창 밖 궁벽한 소읍과 소읍
늘어선 모과나무, 펄펄 끓어 넘치는 수제비
구름을 카메라에 덤벙덤벙 썰어
넣는다 휘장 펄럭이는 고분군 간이 화장실
왁자지껄 참새 떼가 고무신짝 끌 듯
날아간다 출토된 질그릇이랑 주검 수십 기
너덜너덜한 비문 엉거주춤
읽으며 오후를 보낸다 그늘 진
무덤가에 앉아 도시락 먹고 손가락 베개하고
눕기도 한다 고분군 관리가 건네준
자료집과 지신地神에게 무덤 터를 산
지석誌石 탁본 더듬는다
2
소주로 목 축이고 긴 목책너머 무덤 입구로
들어선다 이미 짜부라진 석곽
주검 호위하는 도제 병사의 눈빛
어느덧 흙빛으로 변한 검대 버클
도끼로 으깨진 순장 뼈들 흩어져 있다 손전등
돌리다 비친 벽화엔 사수가 몸채보다 큰
활시위를 당기고 있다
사냥 몰이꾼이 어딘가로 뜀박질
하고 웃통 벗은 농노들
허리 꺾어 땅을 판다 상투 올린 머리가
파뿌리 같다 그 옆 술상을 머리에
인 계집종 몇이 얼씨구절씨구
덩실 춤춘다
언제 왔는지 쓰촨성 성도 출신 늙은 관리는
1호에서 13호 무덤까지 온통 귀족
허식으로 가득하다 혀를 찬다 엉거주춤 구부려
무덤 입구 빠져나오다 어깨에
돌무덤 진 9척 무인과
마주쳤다 악령을 쫓기 위해 세워진
삼지창 양각 사내는 세월에
코가 부서지고 한때는 눈매가 사나웠을 표정도
뭉그러졌다
3
돌아오는 시외버스 안
시끄러운 중국 방언이 왕왕 귓전
울린다 일에 찌든 표정 일그러진
얼굴은 영락없는 내 모습이다 아직도
돌무덤 파는 농노들의 혈거시대는 끝나지
않았을까 취재수첩 여니 수 세기 마개 속에
눌러놓았을 돋을새김 세월이 검댕
먼지 탈탈 털고
있다 시위를 당기던 사수가 활을
내려놓자 온몸 얼음 화살 박힌
새는 살랑대는 바람처럼 날아
오른다 사냥 몰이꾼이 걸음
멈추고 농노들은 고단했던 허리
길게 편다 계집종이 술상
뒤엎고 곤죽이 된 양각 사내는 삼지창
던지며 거름더미 쇠죽처럼 주저
앉는다 고분 속 얼굴들은 늘어지게
한 잠 잤다는 표정이다 해진 세월
겹겹이 덧대어 아무렇게나 기웠던
지하 생활자의 시간을 미련없이
떠나보낸다 더 이상 속절없이 남의
무덤이나 지키는 일 없이
고분 속 먼지처럼 삭힐 것
다 삭혔으니 그만 내버려
달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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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완|1970년 대구 출생으로 2017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르반테스의 기막힌 연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