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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코틀랜드 더프타운에 위치한 윌리엄 그란트의 오크통 창고. 윌리엄 그란트는 세계적 싱글몰트 위스키인 글렌피딕을 생산하는 위스키 회사다. |
스코틀랜드인에게 “위스키는 어떻게 마셔야 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면 전문가나 애호가 모두 “얼음은 넣지 말라”는 말과 함께 “상온의 물을 타서 마시라”고 대답한다. 물을 타서 마셔 보니 정말 위스키가 달다는 느낌을 처음 받아 봤다. 스코틀랜드인은 위스키에 얼음을 넣으면 향기가 갇혀 뿜어 나오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위스키도 코냑처럼 잔을 손바닥으로 감싸고 마시면 체온 때문에 데워진 위스키의 향기가 열려서 나온다고 했다. 얼마만큼의 물을 섞어야 제맛이 나느냐에 대해서는 모두들 의견이 달랐다. 글렌피딕의 고든 회장은 ‘10~20%’라고 했는데 빨간 코의 싱글몰트 애호가 스코틀랜드인은 “30%는 되어야 한다”고 했다. 어떤 인터넷 전문가는 ‘50%’가 정답이라고 주장했다. 결론은 자신이 좋아하는 싱글몰트를 가지고 여러 번 시험을 거쳐 자신만의 농도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이다.
싱글몰트를 블렌딩해서 마셔 보라는 권유도 받았다. 다양한 싱글몰트를 어느 정도 섭렵하고 나면 자신이 좋아하는 싱글몰트를 컬렉션해 놓고 이것저것 조금씩 섞어 먹어 보라고 했다. 다양한 조합이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내고 자신 만의 제조법을 개발하면 주위에 자랑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싱글몰트뿐만 아니라 그레인이나 블렌디드를 섞어서 먹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모든 위스키들이 조합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주의도 주었다. 그래서 새로운 블렌딩을 시도해 볼 때는 아주 조심스럽게 한다고 했다. 스코틀랜드인은 위스키로 칵테일해 마시는 방법도 다양하게 시도해 보라고 권한다. 위스키 칵테일 음료로는 콜라, 레모네이드, 코코넛 워터, 심지어는 녹차까지도 등장한다.
이제 블렌디드 위스키에 대한 얘기를 좀 해보자. 사실 위스키 블렌딩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와인도 사실 일부 블렌딩을 한다. 위스키와는 달리 물이 한 방울도 안 들어가지만 일부 와인은 맛을 개선하고자 다른 와인과 섞기도 하고, 심지어는 다른 와이너리의 와인과도 섞어서 병입을 해 출하한다. 이건 비밀이 아니다.) 1860년대에 에든버러의 앤드루 어셔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의 성공으로 인해 스카치 위스키가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위스키 블렌딩은 맛을 더 개선하기 위한 최선의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워낙 맛이나 향기가 약한 싱글몰트의 판매와 원가절감을 위해 좋은 원액과 섞어서 ‘적당한 가격과 적당한 맛’의 대량 소비용 위스키를 궁여지책으로 만든 게 시작이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아주 오래된 기술에 따라 블렌딩 마스터라 불리는 수십 년의 경험을 가진 최고의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보통 10~50종류의 몰트 위스키에 2~3종류의 그레인 위스키를 혼합해서 만든다. 그 비율은 몰트 30~40%, 그레인 60~70%이고 몰트의 비율이 높아지면 고급이 된다. 자세한 비율과 몰트의 종류들은 각 회사마다 주요 기밀 중의 하나이다. 블렌딩의 원료인 몰트와 그레인 회사도 어느 블렌딩 위스키 회사가 자신들의 고객인지 밝히기를 꺼린다. 물론 블렌딩 회사도 마찬가지로 어디서 얼마를 사 왔는지를 절대 공개하지 않는다.
위스키가 모든 다른 위스키와 잘 섞이는 것은 아니다. 섞으면 되레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많다. 색깔과 냄새가 좋은 원액을 다른 원액과 섞어 보면 다른 원액의 영향으로 원래의 색깔이나 향, 혹은 맛이 변하는 수가 많다고 한다. 선남선녀끼리 만나 어떻게 연애를 하고 어떻게 결혼을 하는지가 개인마다 상황마다 시대마다 다르듯이 신(神)도 결과를 먼저 알 수 없는 게 위스키 블렌딩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이다. 아무리 조건이 좋은 남녀가 주위의 온갖 축복을 받고 최고급 호텔에서 수억원을 들여서 결혼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할 수 있듯이 위스키끼리의 결혼(실제 ‘결혼(marry)’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이라 부르는 위스키 블렌딩도 인간사와 똑같다는 것이다.
글렌피딕 블렌딩 마스터 이안 밀라는 자신의 직업을 “축구팀 감독과 같다”고 표현했다. 모든 선수가 기술만 좋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싱싱하게 강한 맛과 냄새가 좋은 원액들만 섞어도 안 된다는 게 그의 말이다. 다른 선수들과 잘 협조하는 이름 없는 선수와, 기술은 좋으나 개성이 강한 선수, 그리고 나이가 들어 비록 기력은 떨어졌으나 큰 형님 같은 노장 선수들이 모두 잘 조화되어야 좋은 축구팀이 나오듯이 블렌딩 위스키도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수많은 테스트를 통해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블렌딩 위스키 제조법을 만들어 간다는 설명이었다.
블렌딩을 어렵게 만드는 변수는 한둘이 아니다. 예컨대 보리의 작황에 따라 원액들의 맛과 향이 달라지기도 하고 변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숙성 중 기후 변화로 인해 양조장의 수익이 달라진다. 날씨가 따뜻하면 공기 중으로 날아가는 ‘천사의 몫(Angel’s Share)’이 늘어나 저장 위스키의 양이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또 동일한 숙성 기간에도 불구하고 맛과 냄새가 달라질 수도 있다. 결국 블렌딩을 할 때마다 맛과 향기를 유지하기 위해 값비싼 원액을 더 넣기도 하고, 같은 기간의 숙성에도 불구하고 숙성의 도가 달라져서 한 해를 더 묵히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수년을 더 숙성시키는 경우도 왕왕 있다. 같은 양조장의 오크통 속에 있는 위스키도 통마다 맛이 달라 통 속의 원액을 혼합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블렌딩 위스키를 생산하지 않는 싱글몰트 위스키 양조장에도 맛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몰트 마스터라 불리는 블렌딩 마스터가 있기 마련이다. 결국 양조장에서 일괄적인 공정을 통해 만들어 내는 위스키지만 가양주(家釀酒)와 마찬가지로 만들 때마다 달라져 블렌딩 마스터의 골치를 썩힌다.
블렌딩 마스터는 싱글몰트를 섞어서 블렌딩 위스키를 만들 때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큰일 중 하나다. 심지어는 며칠 밤을 새고 블렌딩을 해도 맛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경우도 많다. 고민하고 잠도 설치다가 이웃의 마스터를 불러 상의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외부의 전문가를 불러서 해결하는 수도 있다. 각 양조장마다의 말 못할 비밀이 있는 것이다.
블렌딩 마스터들은 새로운 원액이 들어오면 항상 원액을 테스트한다. 기존 방식대로 제조하기 전 다른 원액과 혼합해서 제조를 해본 후에 같은 결과를 나타내야 새로운 원액을 섞어서 대량생산에 들어간다. 매년 맛이 변해도 개성이 되지 흠이 안 되는 와인과 달리 블렌디드 위스키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맛의 일관성이다. ‘선수’들이 아무리 바뀌고 조합이 달라져도 맛이 같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이름으로 팔아서는 안 된다. 가끔 도저히 같은 맛을 만들 수 없을 때는 눈물을 머금고 제값을 못 받더라도 새로운 이름으로 위스키를 시장에 내놓는 수가 있다.
제각각인 싱글몰트 위스키의 맛 때문에 블렌딩에 골머리를 앓는 양조장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싱글 배럴’, 즉 오크통별로 싱글몰트를 판매할 수 있으면 이런 문제는 아주 쉽게 해결된다. 싱글몰트가 든 각 오크통마다 따로 번호를 붙여 병입을 해서 판매하면 된다. 소비자는 병마다 다른 색깔과 맛과 향기를 맛보게 되어 신비롭다는 평을 한다. 뚜껑을 열 때마다 다른 느낌의 위스키를 대한다는 기대에 흥분하기까지 한다는 평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물론 같은 번호가 붙은 싱글배럴 위스키는 양이 적어 찾기가 정말 어렵다. 대개 미국 위스키 회사들이 싱글배럴을 많이 생산하지만 스카치에서는 발베니 브랜드가 유명하다. 워낙 소량이 나오기 때문에 금방 매진이 된다. 인터넷에 프리미엄이 붙어서 유통되기도 한다.
싱글배럴은 당연히 싱글몰트이다. 병의 레이블에는 오크통에 넣어진 날짜와 병입 날짜, 그리고 오크통 번호가 인쇄되어 있다. 병 일련번호는 일일이 펜으로 쓴다. 병의 바깥에는 ‘한 오크통에서 350병 이상이 생산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싱글배럴 애호가들이 그냥 싱글몰트 애호가들보다 더 몰트 애호가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싱글배럴 가격이 일반 블렌디드 위스키에 비하면 좀 비싸긴 하지만 한번 맛을 들여 볼 만하다. 싱글배럴 위스키를 구비해 놓고 친지들을 초청해 내용을 설명하면서 대접하면 뭔가 있어 보이고 독특한 취미를 가진 듯한 호사가로 비칠 수 있다.
하나 더 특이한 위스키 종류를 보자. 싱글 개스킷 스트랭스(gasket strength) 혹은 개스킷 프루프(proof) 싱글몰트 위스키라는 것도 있다. 거의 모든 위스키가 도수 40도 정도로 맞추기 위해 병입하기 전 물을 탄다(diluted). 그러나 개스킷 스트랭스는 오크통에서 바로 담은 것을 말한다. 대개 60~65도 정도이다. 같은 도수의 보드카를 마셔 본 경험으로는 목을 넘어갈 때 거의 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가끔 싱글몰트 전문회사들은 이런 싱글몰트로 ‘개스킷 스트랭스 에디션’이라는 특별 브랜드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한다.(현재의 기술로는 위스키 알코올 도수를 94.8%까지 만들 수 있다.) 독주를 좋아하는 한국인 애주가들이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한 위스키이다.
영국 와인주류조합(WSTA) 조사 보고서에 국제주류시장연구소(IWSR)의 2013년 통계가 실렸다. 거기에 보면 한국의 위스키 수입량은 750mL 12병을 한 박스로 해서 13만3098박스이다. 이는 중국·러시아·인도·미국 다음의 순위다. 세계 5위의 기록이다. 일본이 12만3768박스로 6위이다. 그러나 국민 1인당 소비량을 보면 한국이 연간 24.5L로 세계 최고이다. 독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러시아가 16.5L로 2위이다. 자신들이 만든 보드카를 마시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소주를 안 마시는가? 일본은 10위 안에 보이지도 않고 위스키의 본고장인 영국은 1인당 4.4L밖에 안 된다. 위스키의 본고장도 한국의 6분의 1에 불과하다. 결국 한국인 한 명당 1년에 750mL 위스키 32병을 마신다는 계산이다. 미성년자를 빼면 성인, 특히 남자 한 명당 몇 병이나 마시는지 누가 한번 계산해 보면 좋겠다. 믿을 수 없어서 숫자를 놓고 한참을 확인할 정도로 놀라운 통계이다. 개인적으로 ‘스코틀랜드 최고 부자’라는 피터 고든 회장이 한국 방문객을 칙사 대접하는 이유를 알 만도 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국인의 술 문화와 관련해 한마디만 더 하자. 스코틀랜드를 비롯한 영국 어느 펍에서나 한국인의 호기를 보여주고 그들의 기를 죽이려면 카운터에 가서 위스키 한 병을 통째로 시키면 된다. “얼마냐”고 물으면 계산이 바로 안 나온다. 심지어는 “안 판다”는 대답을 들었다는 한국인도 봤다. 스코틀랜드 여행 중 시골 동네 펍에서 한 잔 마실 때마다 카운터로 가서 돈 주고 마시다 보니 귀찮고 감질이 나서 아예 병으로 달라고 했더니 한참을 쳐다보다 안 판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얼마를 받을지 몰라서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계산에 밝았던 그 한국인이 “한 병에서 싱글 몇 잔이 나오느냐”고 물은 뒤(30잔 나온다) 한 잔 가격(3파운드)으로 전체(90파운드)를 계산해 주고 거기서 20%를 깎아 그것도 현금으로 지불(72파운드)했다고 한다. 병을 들고 멍해서 쳐다보는 펍 주인을 뒤로하고 자리로 돌아와 일행들과 마셨다는 무용담이다. 영국 펍에서 알코올중독자의 기준은 ‘더블을 두 잔 연거푸 마신다’이다. 위스키를 병째로 사는 일은 아마 그 펍이 생기고 처음이었을 듯싶다.
이제 위스키를 이르는 낭만적인 묘사 몇 개만 하고 끝내자!
‘위스키가 잔으로 부어지는, 부드러운 음악 같은 소리가 만드는 막간(幕間) 휴식’-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리너’에서
‘위스키는 물로 된 햇빛이다’-조지 버나드 쇼
‘정말 고요하다. 거리낌 없는 듯한 고요, 여기서 3마일 밖에서 어느 누군가가 위스키 온 더 록을 마시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는 고요’-셔먼 알렉시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mcate=M1002&nNewsNumb=20150216658&nidx=166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