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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80년입니다. 소장님은 ‘역사주권을 회복해야 진정한 광복이다’라고 말해왔는데요. 어떤 뜻인가요?
대한민국의 몸은 1945년 8월 15일에 해방되었지만 정신은, 즉 역사관은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우리 역사를 왜곡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관이 아직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사편수회 회장은 총독부 2인자 정무총감이었죠. 일본이 태평양 전쟁 말기에 연료가 없어서 소나무 송진까지 사용하던 시기에도, 조선사편수회 예산은 단 10원도 깎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패전하더라도 언제든 다시 조선을 점령하기 위해 한국인의 역사관을 바꿔놔야겠다는 장기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히도 해방 이후 미군정은 친일파를 중용했고 역사학계도 친일 사학자가 장악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까지 식민사관이 정설처럼 군림하고, 학교에서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을 배울 기회조차 없습니다. 대부분의 역사책은 서론에는 식민사학을 비판해도, 본론과 결론에는 중화 사대주의와 친일 식민사학 관점이 수두룩합니다.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와의 투쟁”이라고 했습니다. 주체적 역사관을 세울 때 진정한 ‘역사주권’이 실현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역사가였다’고 강조해왔죠.
독립운동가들은 두 전선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하나는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한 ‘영토전쟁’, 또 하나는 역사 해석을 둘러싼 ‘역사전쟁’입니다. 한 손엔 총을, 한 손엔 붓을 들고 싸웠죠. 일본에 나라가 망하자, 독립운동가들은 그 이유를 깊이 천착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민족이 보였고,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보였습니다. 학식이 높은 유학자였던 홍암 나철과 무원 김교헌은 1909년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했죠. 대종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정신적 기반이자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습니다.
또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역사왜곡에 맞서, 특히 고대사를 중심으로 역사회복에 나섰습니다. 단군조선부터 삼국시대까지 역사를 다룬 『조선상고사』를 쓴 단재 신채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2대 대통령이자 『한국통사』를 쓴 백암 박은식,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초대 부통령 성재 이시영, 『한국독립사』를 쓴 희산 김승학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역사학자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세계에서도 독특한 한국의 특이성이기도 합니다.
일제의 역사왜곡, 대표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일본은 1870년대 메이지 시대 때부터 ‘조선 침략을 정당화하는 역사관을 만들자’는 발상을 했습니다.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왜 패배했는가, 무기는 있으나 역사관이 없었기 때문이라며 ‘정한론’(征韓論)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한은 ‘삼한’(三韓), 마한·진한·변한을 뜻합니다. 일본 극우의 교과서인 『일본서기』라는 역사조작서에는 ‘야마토왜의 신공황후가 삼한을 정벌했고 가야에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즉, ‘일본의 조선 점령은 옛 영토의 수복’이라는 것이 정한론의 요체입니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은 역사의 자연스런 귀결이라는 것이고요.
식민사관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우리 역사의 시간을 축소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리 역사의 공간을 축소하는 것입니다. 시간을 축소하기 위해 가장 먼저 ‘단군은 가짜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만듭니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건국 시기를 늦추려는 거죠. 다음으로 공간을 축소한다는 건 ‘반도사관’을 가리킵니다. 우리 역사 무대에서 대륙을 자르고, 해양을 자르고, 반도로 한정해 가두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반도 북쪽에 중국 한나라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낙랑 평양설’을, 반도 남쪽에는 야마토왜의 식민지인 임나가 있었다는 ‘임나 가야설’을 주장합니다. 고려·조선의 강역(나라와 나라의 경계)도 반도 내로 축소했고요. 그러나 『한서』, 『후한서』 등 중국의 고대 사료는 낙랑군이 고대 요동(중국 하북성 동북 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임나 가야설은 『일본서기』 외에 근거 사료가 없습니다. 고려·조선의 실제 북방 강역(서쪽은 중국의 요령성 심양 남부, 동북쪽은 두만강 북쪽 700리)은 『고려사』 『태종·세종실록』 『세종실록지리지』 등 우리의 사료와 중국의 『명사』 등에 명백히 나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강단사학은 고려 북방 강역이 함경남도 원산까지라는 일본인들의 역사왜곡을 추종하고, 우리 민족이 시조도 없고 고대부터 반도에 갇힌 식민지였다는 학설들을 고수하는 현실입니다.
우리 역사의 강역을 아는 것은 왜 지금도 중요한가요?
한국 고대사는 첨예한 현대사이기도 합니다. 중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고대사를 자국 중심으로 왜곡해 한국의 영토주권과 민족정체성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영역 내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는 중국사”라고 조작하고 있죠. 2002년부터 5년간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로 둔갑시키는 동북공정을 진행했는데, 유사시 북한 강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동북공정에는 큰 모순이 있습니다.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가 중국 한족의 시조 ‘화하족’이 아닌 한민족의 시조인 ‘동이족’의 국가였다는 거죠. 20세기에 유적 발굴을 통해, 요하문명의 홍산문화(서기전 4500년~ 3000년 산동반도 및 황하 유역 하류, 동이족東夷族의 한 갈래인 조이족鳥夷族 문화) 등 중국 땅의 가장 오래된 문명도 동이족의 것임이 드러났고요. 하지만 2017년 시진핑 중국 주석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을 때에도 한국 역사학계는 항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이 최우선 한 ‘단군 지우기’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우리는 학교에서 단군을 신화라고 배우죠. 하지만 고려 후기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조선 초기 『동국통감』은 서기전 23세기에 단군이 조선을 건국했다고 서술합니다. 고려와 조선 때까지 단군 제사를 모셨고, 단군이 개국시조라는 사실은 동아시아에서도 상식이었습니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조선 사신에게 준 시에 ‘단군이 조선을 연 후 몇 번의 왕조가 들어섰느냐’ 묻는 구절이 있죠. 그러다 중화 사대주의 속에 점차 묻혔던 단군을 대종교가 다시 부흥시켰습니다. ‘우리 민족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고조선의 천손 사상과 함께요.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3.1 선언문에도 “처음 환국이 창립된 이래 단군·부여·삼한·삼국·고려·조선 및 대한민국을 거쳐 5천 년의 국가주권은 한민족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나옵니다. 독립운동가들 역사관의 중심에 단군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던 것입니다.
일본은 단군부터 몰아내야 조선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대표적인 식민사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가 「단군고」를 쓴 때가 1894년입니다. 이 해에 전라도 고부에서 전봉준을 필두로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했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청나라 군사를 빌려 동학군을 진압하고자 했습니다. 앞서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청이 파병하면 일본도 파병한다’는 천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이 청군보다 먼저 조선에 진주했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조선 점령을 기정사실화하고, 단군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는 일제가 한국을 점령한 1910년 「단군의 설화에 대하여」에서 단군이 가짜라고 주장, 1929년 또 다른 글 「단군고」에서는 “조선인 사이에 단군 숭배가 급격히 번성했고 단군을 조상신으로 삼는 대종교 교도들이 생겨났다”며 경계했습니다. 그리고 대종교는 엄청난 탄압을 받았죠.
한국 강단사학은 일본 식민사학의 주장대로 위만 조선(단군조선-기자조선에 이어, 서기전 194년 연나라 출신 위만이 왕위를 찬탈해 집권한 때부터 한나라에 멸망한 서기전 108년까지의 조선)부터를 역사로 인정해 단군조선의 역사를 말살했습니다. 고조선의 강역에 대해서도 일본 식민사학을 따라 평안남도 일대라고 주장하다가, 근래 만주는 물론 하북성·내몽골 일대에서 고조선 유물이 쏟아지자 요녕성 요하까지였다고 수정하는 추세입니다. 고조선이 서기전 23세기부터 서기전 1세기까지 광대한 제국이었다는 것은 점차 역사적 사실로 공유되고 있습니다.
식민사관은 크게 두 가지로
‘단군 부정’을 통해
우리 역사의 시간을 축소,
‘반도 사관’을 통해
우리 역사의 공간을 축소
하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의 역사관은 어떻게 삭제되었습니까?
해방 후 역사학파는 세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민족사학, 또 하나는 맑스주의에 기반한 사회경제사학. 이 두 부류는 항일 세력이었죠. 마지막 부류는 조선사편수회 출신 식민사학자들이었습니다. 중요한 사건으로 1946년 북한이 남한에 파견원을 보내 역사학자들을 대거 초청한 일이 있습니다. 종합대학교와 조선력사편찬위원회를 만들어 주체적 시각으로 역사 연구를 하자고요. 여기에 응한 사회경제사학자 백남운, 박시형, 전석담, 김석형 등이 북한 역사학계의 기초가 됐습니다.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정인보, 안재홍 등 민족사학자들까지 납북되면서 결국 남한에는 식민사학자들만 남게 됐죠.
1945년 8월 15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를 보통 ‘해방 공간’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미군정이 중용한 친일 매국 세력이 기득권을 형성한 비극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때 역사학계를 장악한 조선사편수회 출신 식민사학자가 이병도와 신석호입니다. 이병도는 서울대를 장악하고 교육부 장관까지 역임하며 국사학계의 태두로 군림했습니다. 신석호는 고려대와 국사편찬위원회를 장악했고요. 주요 대학 역사학과, 관련 국가기관, 중등국사 교원양성소, 언론 등은 물론 전 사회적으로 막강한 카르텔을 구축해 식민사관을 대한민국의 주류 사관으로 만들었습니다.
윤석열 정권 때 친일 매국 식민사관이 문제였죠.
윤석열 정권 당시 역사 관련 기관은 모조리 뉴라이트 인사로 채워졌습니다. 허동현 국사편찬위원장·김주성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은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 편찬 주역이었고, 김낙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은 일제식민지근대화론자, 박지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은 “일본에 사과를 그만 강요하자”고 했고, 김형석 독립기념관장은 “친일 인사들의 명예 회복”을 말했죠.
뉴라이트 식민사학의 기승은 일본 극우 세력이 침투한 결과입니다. 일본 전범 극우파인 사사카와 료이치가 만든 ‘사사카와 재단’은 1995년 한일수교 30주년을 맞아 거액의 자금을 한국 대학에 뿌렸는데, 그중 하나가 연세대에 약 100억 원을 출자해 만든 ‘아시아연구기금’입니다. 고려대는 약 100만 달러를 지원받아 ‘사사카와 영리더 장학금’을 만들었고요. 안병직·이영훈 두 서울대 교수는 ‘도요타 재단’의 연구비를 받아 일제 지배로 인해 한국이 전후 근대화를 이뤘다는 ‘식민지근대화론’을 설파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비 유학생 유치로 친일 인사를 양성했고요. 과거사 사과에 대해 “중요한 것은 일본의 마음”이라던 김태효 前국가안보실 1차장이 나카소네상 수상자(2009)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일본 극우의 아버지이자 일본 수상 최초로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한 인물이죠. 나카소네상 1회 수상자(2005) 박철희 前서울대 국제학연구소장은 윤석열 정권의 주일대사였습니다.
식민사학에 진보와 보수가 없다고 하였는데요.
뉴라이트 세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겉과 속이 같은 뉴라이트, 겉과 속이 다른 뉴라이트입니다. 후자는 근현대사에서는 진보사학으로 비춰지지만, 고대사에서는 식민사관을 옹호합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8~2015년 국고 47억 원을 들여 80여 명의 역사학자가 한·중·일 역사지도를 그리는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북한 땅에 한사군을 그려넣고 독도는 삭제했죠. 논란 끝에 중단됐는데, 문재인 정권이 임명한 김도형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이 2018년에 사업 재개를 선언해 충격을 안겼습니다. 결국 시민들이 적극 시위에 나서 막아냈죠.
또 광주·전남·전북 3개 시도가 24억 원을 들여 2018~2022년에 추진한 『전라도 천년사』는 전라도를 야마토왜의 식민지로 서술해 발간이 중단됐습니다. 2021년 문화재청은 가야 고분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신청하면서 임나일본부설(야마토왜가 369년 가야를 점령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식민통치기관을 설치해 562년까지 지배했다는 설)과 관련된 지명을 사용해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 역시 시민들의 노력으로 유네스코 기록을 수정했습니다. 이같이 막대한 국고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 역사를 왜곡하면, 시민들이 직접 나서 그 잘못을 바로 잡는 일이 비일비재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전 세계에서 거의 유일합니다.
우수한 독립군 지휘관을 다수 배출한 만주 신흥무관학교. ⓒ국가보훈부
1945년 8월 16일, 마포형무소에서 석방된 독립운동가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
독립운동가들은 민주공화정을 세운 주역이기도 하죠.
1910년 망국 직후 명문가인 우당 이회영의 여섯 형제 일가는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망명했습니다. 석주 이상룡, 백하 김대락 일가 등도 만주로 갔죠. 이상룡 선생은 압록강을 건너며 “이 머리는 차라리 자를 수 있지만 / 이 무릎 꿇어 종이 될 수는 없도다”라는 시를 읊었습니다. 만주에서 항일투쟁의 기틀을 마련키로 한 이들은 일본을 내쫓고 난 뒤 “다시 세울 나라는 민주공화국이다”라며,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라는 사상의 혁명적 전환을 이뤄냅니다. 그리고 1911년 4월 유하현의 대고산에 모여 군중대회를 연 뒤 자치기구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했고, 신흥무관학교를 만들어 미래 독립군을 양성했습니다.
경학사 사장이 된 이상룡 선생은 “정부의 규모는 자치가 명분이고 삼권분립은 문명국을 따른 것”이라고 했습니다. 광복 후 수립할 새나라의 체제로 민주공화국을 지향했음을 보여주죠. 그리고 경학사 구성원 대다수가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대한민국임시헌장 제1조 또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시합니다. 우리는 일제에 맞서 독립을 외치다 통계도 없이 죽어간 20여만 명의 피의 대가로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입니다. 하지만 친일 매국 세력은 ‘1948년 건국절’을 주장하며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해왔습니다. 1945~1948년 미군정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를 숙청한 친일 매국 세력을 ‘건국 공신’으로 만들기 위한 수작이죠.
식민사관 청산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역사교과서부터 전면 다시 써야 합니다. 광복 80년이 되도록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이 조작한 내용을 가르치는 나라는 정상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헌법 조문에 맞는 교과서로 독립운동가들의 주체적인 역사관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전국역사단체협의회가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재명 대통령 후보 10대 공약 중 하나가 “학교 역사교육 강화 및 역사연구기관 운영의 정상화”였고요. 이재명 대통령은 “친일하면 3대가 흥하고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친일하면 3대가 흥하는 대표적인 분야가 역사학계입니다. 친일·반통일·분단의 역사학이 계속 주류의 위치를 차지할지 그 갈림길에 있습니다.
꼭 계승해야 할 한민족 전통의 정신 사상이 있다면요?
고조선의 개국 사상인 홍익인간 재세이화(弘益人間 在世理化)는 위대한 정신입니다.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라. 세상의 이치대로 다스리라’는 뜻이죠. 개국 사상은 보통 민족우열과 제국주의를 표방합니다. 그런데 고조선은 우수한 문화로 자발적 교화를 끌어내고, 더불어 잘 살게 하고, 법치 이전에 이치를 말했습니다. 이런 사상을 독립운동가들이 계승했고요.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론』에서 우리가 거꾸로 일본을 지배하겠다고 하지 않고 항구적 평화를 꿈꿨습니다. 백범 김구도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고 했고요.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현 시대에 더 유효한 사상입니다. 외국학자들도 ‘갈등과 전쟁으로 점철된 세계를 치유할 사상’이라며 놀라워하죠. 홍익인간 재세이화는 세계의 정신문명을 선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광복 80년, 역사학자로서 전하고 싶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 역사에 자부심을 갖길 바랍니다.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짧은 시간 내에 경제적 근대화와 정치적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했고, 문화적으로도 세계 일류에 다다랐잖아요. 그런데 역사관에 관한 한 대한민국은 1945년 8월 14일에 머물러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올바른 역사관을 국민 보편의 역사관으로 수립하는 그 길에, 우리 모두가 주체가 되어 진정한 광복의 아침이 밝아오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