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대원군 하야 후 고종이 친정하면서 일본과 미국 등과 수교하고 서양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여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한 반대 운동이 양반 유생층이 전개한 위정척사 운동이다.
정부가 추진한 개화 정책들의 내용은,
① 서양 문물 수용 및 개혁 추진을 위해 통리기무아문 및 12사 설치
② 수신사 파견(1880) - 김홍집, 일본, “조선책략”반입
③ 조사시찰단 파견(1881) - 박정양, 일본, 일본의 근대화 시찰
④ 영선사 파견(1881) - 김윤식, 청(텐진), 근대 서양식 무기 제조 기술 배움, 귀국 후 기기 창 설립
⑤ 별기군 창설(1881) - 신식 군대, 일본인 교관 초빙
⑥ 보빙사 파견(1883) - 민영익, 서광범, 유길준 등 미국 수교 후 파견 일부는 남아서 유학
2) 위정척사 운동
양반, 유생층들이 성리학 및 성리학으로 만들어진 조선 사회를 바람직한 사회로 서양으로부터 이를 지켜야 한다면서 정부의 문호 개방 및 개화 정책 추진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함.
시기별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과정은,
① 1860년대는 이항로, 기정진 등이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 정책을 지지하며, 서양 세력의 접근 및 화친 제의를 배척하고 싸워야한다는 상소를 올림
② 1870년대는 최익현이 대표적, 강화도 조약 체결에 맞서 왜양일체론이라는 상소로 조약 체결에 극렬히 반대함
③ 1880년대는 김홍집이 반입한 조선책략 및 미국과의 수교,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한 반대로 영남 만인소(이만손)를 올림
④ 1890년대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 되면서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도 상소보다는 직접 칼을 들고 무장해서 저항하는 의병운동으로 발전함.
3) 임오군란(1882)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면서, 기존 구식 군대는 축소된다. 여기에 국가 재정 여건이 좋지 않아 구식 군인들에게는 급료도 제 때에 지급되지 않았다.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점점 커져갔다. 정부에서 구식 군인들의 밀린 급료를 주기로 한 날, 구식 군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였다. 밀린 급료를 지급하면서 쌀에 모래 등이 섞여 있었다.
구식 군인들은 무장하여 급료를 지급한 정부의 관리들을 찾아가 무참히 살해하였다. 별기군의 일본인 교관도 살해한다. 자신들의 차별 대우 원인이 민비를 중심으로 한 개화 정권의 문호개방과 개화정책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민비까지 공격하려 하였다. 일본 공사관도 공격한다. 공사관을 공격할 때는 서울의 민중들까지 가세하였다. 개항 이후 일본과의 통상으로 쌀값이 폭등하고, 상공업자들이 피해를 많이 본 것에 대한 불만이 함께 폭발하였다.
고종이 사태 수습을 위해 대원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대원군이 재집권하게 된다. 대원군은 개화 정책들을 전면 폐지하고 구식 군인들의 불만을 달래는데 성공한다.
민비 세력들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청군이 출병하여 군란을 일으킨 구식 군인들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체포한다. 결국 대원군은 죄인으로 청나라에 압송되고, 민비 세력들이 다시 집권하게 되면서 군란은 끝이 난다.
군란 이후 일본과는 제물포 조약이 체결된다.
일본 교관의 피살과 일본 공사관이 공격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가 일본 피해에 대해 배상을 하기로 약속하고, 일본은 자국 공사관을 경비할 군대를 우리나라, 서울에 주둔하는 것을 허락받는다. 제국주의 군대의 서울 주둔, 조선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더욱 가속화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정부는 또한 청과도 근대적인 통상조약을 체결한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라는 조약이다. 정부를 군란으로부터 구해 준 청이기에,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특혜를 부여할 수밖에 없었다. 청나라 상인에게 서울 등 내륙 진출권을 허용한다. 이전까지 외국 상인들은 모두 개항장의 거류지 내에서만 통상을 하고 있었다. 청 상인에게 부여된 내륙 진출권은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외국 상인들에게도 확대 적용된다. 우리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주게 된다.
4) 갑신정변(1884)
집권 민비 일파(온건개화파)의 친청 사대 외교에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가 크게 분개한다.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의 대립
온건 개화파
급진 개화파
친청 사대 외교 지속
청의 양무운동처럼 개혁하자
서양의 과학 기술만 수용하여 개혁
-동도서기론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조공 폐지, 친청 사대외교 청산 – 자주국가
일본의 메이지유신처럼 개혁하자.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모두 개혁하자 – 문명개화론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마침 1884년 청나라가 프랑스와의 전쟁(청프전쟁-베트남 지배권을 두고 청과 프랑스가 전쟁)으로 조선에 주둔한 청군의 일부를 철수함. 이를 기회로 생각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킨 후 청나라가 개입하면 일본의 지원을 약속받고 ,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민비 정권의 고관들을 제거하는 정변을 일으키고, 고종을 자신들이 보호하면서 새로운 정권 수립을 선포함.
예상대로 청국이 급진 개화 정권을 공격하게 되고, 약속했던 일본이 대응하여 청일전쟁이 일어나야 하지만, 약속을 어기고 일본이 대응하지 않았다. 결국 개화 정권은 청군에게 진압된다. 김옥균, 박영효 등은 일본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피신한다.
정변 실패 후, 일본과 청나라는 텐진 조약을 체결한다. 청일전쟁 직전까지 간 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두 나라는 조선에 주둔한 양국 군대를 철수하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만약 조선에 한 나라가 출병할 때는 그 사실을 반드시 상대국에게 통보하여 공동으로 출병할 수 있도록 약속한 것이 텐진 조약이다.
조선과 일본은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일본 공사관 신축 비용을 우리 정부가 부담하는 등 갑신정변으로 피해를 본 일본에게 우리 정부가 배상할 것을 약속한다.
급진 개화파가 만들려고 했던 국가의 모습, 개혁 구상을 살펴보자.
*갑신정변 14개조 개혁 정강 중 중요 내용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빠른 시일 내에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 평등권을 제정하고....
3. 지조법을 개혁하여....
12. 모든 국가 재정은 호조에서 관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급진 개화파는 청과의 사대 관계를 끊고 자주 국가를 건설하고, 신분제를 폐지한 평등한 사회를 만들려 했다. 또한 국왕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내각 중심의 정치, 입헌 군주제를 지향했다. 자주적이며 평등한 근대(입헌군주) 국가 건설이 이들의 목표였다.
우리 역사가 가야 할 방향이었지만, 일본을 끌어들인 점, 민중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점 등의 한계를 가졌다. 만약에 개혁 정강 안에 농민들에게 토지를 균등하게 나누어 주겠다라는 내용이 포함됐다면, 또한 일본이 아니라 자신들을 지지하는 민중들과 함께 했다면....혁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갑신정변의 실패는 우리 역사를 근대로 만들 주체들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안타깝다. 청과의 사대 관계를 단절하고 자주적이며 평등한 근대 국가를 건설해 갈 주체들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만큼 자주적 근대 국가 건설이 늦어지게 된다.
5) 갑신정변 이후 거문도 사건과 중립화론
갑신정변 이후 정부는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교섭을 추진하여, 조러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다(1884). 이를 기회로 러시아는 조선에서 세력을 확대하려 한다.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이 대응한다. 남해 거문도를 영국이 불법으로 점령하고 러시아의 남하 정책을 견제하였다. 거문도 사건이라 한다(1885).
이와 같이(기존 청일의 대립에 러시아, 영국까지 가세) 조선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대립 심해지자, 독일의 외교관 부들러와 개화파 인물인 유길준은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한다.
조선의 안전이 어느 특정한 강대국의 보장만으로는 이루어지 않으며, 강대국 모두가 보장하는 중립화를 이룰 때에만 가능하다고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