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훈련을 받고 와서 완전히 뻗었다. 육체보다는 정신적 힘듦이 컸다. 그동안 잘 쓰지 않던 뇌 근육을 썼던 까닭이다. 우선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상대의 감정을 알아차린다는 건 우리가 살아오면서 가장 경계했던 것들이다. 감정에 휩싸이지 마라. 가난한 나라에서 자식들 먹여 살리기 힘들었던 부모 세대에게 감정을 알아준다는 건 사치나 다름없었다. 그런 삶의 태도를 유산으로 물려받고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아야 했던 우리 세대 또한 그러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눈은 점점 짐승의 눈이 되고 있었다. 순간을 포착해 상대를 물어뜯어야 했으니 마음을 드러내는 눈빛이 온전했을 리 없다.
엄청난 스트레스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누구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 몸은 활화산이 되고 있었다. 활화산이 터져 용암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분노와 화다. 분노와 화는 결국 나를 좀 알아봐달라는 강력한 신호다.
그런 와중에 만난 감수성 훈련. 훈련을 받으면서 알았다. 나와 같은 분노와 화가 상대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늘 나 먼저였다. 무엇인가를 요구하고 그것이 성사되기를 바랐다. 상대를 탓하기에 바빴다. 왜냐하면 내 분노와 화가 더 아프고 중요했으니까.
나만이 아니었다. 너도 그랬고 그도 그랬다. 감수성 훈련은 나를 요구하기에 앞서 너와 그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주면 그도 자연스럽게 나를 알아준다는 것을 배우는 학습 과정이다. 그래서 이 훈련은 철저하게 상대 중심 대화로 이뤄진다.
그러다 보니 첫날은 정말 서툴고 낯설다. 촉진자의 반응조차 과장된 느낌이다. 그런데 둘째 날이 되고, 셋째 날이 되니 우리 수강생들이 그렇게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 몸에는 남의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는 재능이 내재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감정과 마음도 스스로 알아차리게 된다. 이쯤 되면 매우 고급스런 대화가 이루진다. 상대를 감정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 욕구를 인정한다. 그 뒤에 아주 자신의 얘기를 덧붙이는 것이다.
정말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 몸에 내재돼 있어도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았기에 꺼내 쓰려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는 것, 이로 인해 며칠이 지나면 ‘감정 따위’까지는 아니어도 원래 살던 모습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한 달 후 공부'가 있다. 또 '마음챙김 공부'도 있다. 이 공부를 빠지면 재능을 강점으로 만들 수 있는 3일 간의 훈련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한 달 후 공부’를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감정과 욕구를 알아차리기를 장착한 내 발걸음에 깜짝 놀란 공기들이 양 옆으로 비켜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