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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녹번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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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성지 스크랩 [믿음의 고향(故鄕)을 찾아] 마산교구 / 문산 성당
이안드레아 추천 0 조회 6 12.07.27 15:5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마산교구 / 문산 성당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는 동서양의 조화

 

 

 

문산(文山) 본당은 마산교구 소속 본당으로

1905년 9월 22일 마산(현 완월동) 본당 관할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주보는 예수 성심이다.

설립 당시에는 소촌(召村) 본당이었으나,

1913년 무렵부터 현재의 본당명으로 개칭되었다.

 

전사 및 공소 시대

지금의 진주 · 함안 지역에 천주교 신앙의 전파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60년대 초였다.

그 후 경상도 지역을 전담하던 리델(Ridel, 李福明) 신부와 함께 1865년경

거제도를 방문한 함안(咸安) 출신의

 구한선(타대오)이 이듬해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일어나면서

 매를 맞아 순교하였는데, 진주 문산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바로 박해 전 구한선에 의해서였다.

이곳의 신자 집단은 박해 후 다시 교우촌으로 재건되었으며,

1883년에는 로베르(Robert, 金保祿) 신부의 방문으로

소촌(召村, 현 진양군 문산면 소문리)에 공소가 설립되었다.

 

소촌 공소는 그 후 조조(Jozeau, 趙得夏) 신부가 1890년 초에

 부산 절영도(絶影島)에 정착하면서 부산 본당(정식 명칭은 초량 본당) 소속이 되었다가,

 1899년 6월 부산 본당 3대 주임 타케(Taquet, 嚴宅基) 신부가

 진주(晋州) 본당을 설립하면서 이 본당 관할이 되었다.

당시 진주 본당 신자수는 1,054명이었는데,

그중에 소촌 공소 신자수가 156명으로 가장 많았다.

그 후 타케 신부는 1900년 6월 29일 개항장으로 장래가 유망한

 마산포(馬山浦)로 가서 마산 본당을 설립하였고,

소촌 공소는 다시 이 본당 소속이 되었다.

타케 신부는 마산에 정착한 지 1년 10개월 만인

1902년 4월 20일에 제주도로 전임되었고,

대신 제주도에 있던 무세(Mousset, 文濟萬) 신부가

같은 날 마산 본당 2대 주임으로 임명되었다.

 

 

본당 설립과 초기 현황

1904년 무렵 소촌 공소 신자수는 160명에 달하였다.

 이에 무세 신부는

 본당 분할을 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요청하였고,

 뮈텔 주교는 이 건의를 받아들여

 새로 입국한 줄리앙(M. Julien, 權裕良) 마리오 신부를

 1905년 9월 22일자로 무세 신부의 보좌로 임명하였다.

그에 앞서 무세 신부는 이미 마산 본당 관할 중에서

소촌 지역을 분리하여 새로 본당을 설립할 생각을 갖고 있었으므로

 줄리앙 신부의 임명은 곧 소촌 본당의 설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마산에 도착한 줄리앙 신부는 즉시 소촌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이듬해 1월에 가서야 삼곡리(三谷里)에

초가 세 채를 매입하고 임시 성당으로 삼게 되었다.

 그리고 새 성당 부지를 물색한 끝에 1907년 소문리의

 현 성당 부지 2,400평과 조선 시대 때 찰방 관서(察訪官署)였던

기와집 10여 채를 매입하고 성당 공사를 시작하였으며,

1908년 9월 29일 새 성당을 완공하고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줄리앙 신부는 1909년 봄에 부산 본당으로 전임되고,

김명제(金命濟) 베드로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는데,

그는 부임 이듬해 전교 및 지역 계몽 사업의 일환으로

 배명학교(培命學校, 1926년 폐교)를 설립하였다.

학교 명성이 널리 알려져 멀리 통영, 거제, 사천, 곤양, 함안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었으며,

1915년에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긍련회(矜憐會)를,

그 이듬해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하였다.

 

 

이때까지 성당은

 찰방 관서 건물을 보수해서 사용하고 있었는데,

 400여 년 된 노후 건물이라 더 이상의 보수가 어려워짐에 따라

 3대 김양홍(金洋洪) 스테파노 신부 재임시인 1923년 11월 23일

 기와집 성당을 신축하였으며,

기존의 배명학교와 유치원, 신자들의 사랑방을 중수 개축하였다.

 

1923년에 신축된 성당은 정면 6칸에 우측면 4칸, 좌측면이 3칸으로 된

 장축형 평면의 전통 한옥 양식이었다.

당시만 해도 건축용 목재나 기와를 구하기 어려워

경남 고성의 어느 사찰을 헐어내고 나온 자재를 이용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중앙 통로 양쪽으로 건물을 지지하는

 13개의 원형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기둥에 사용할 만한 긴 목재가 부족했던 탓인지

어떤 것은 짧은 목재기둥을 장부맞춤으로 연결해 길이를 연장했다.

연결부는 구멍을 파서 나무쐐기를 박아 고정했는데

 투박한 모양새와는 다르게 아주 탄탄한 구조를 갖고 있다.

 

1920년대 문산 본당은

 경남 및 전남 지역의 관할 공소만 무려 97개소에 달해

 공소 순회 기간만 7개월 이상이 소요되었으므로

공소 담당 전교 회장을 따로 임명하여 사목의 효율화를 도모하였고,

무의탁 행려노인들을 위한 고조원(孤助院)을 설립하여

 지역 복지 사업에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1928년경 본당 단체로는 전교회, 성모 부인회, 공교 소년회(公敎少年會),

 호상계(護喪契), 가톨릭 오시(五時) 품꾼회 등이 있었다.

 

이어 5대 김영제(金永濟) 요한 신부 재임시인

1932년 5월 29일에는 3천여 명이 참가한

진주 지역 최초의 성체 거동을 문산 본당에서 거행하였으며,

교세가 계속 증가함에 따라 1935년 8월 22일에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하여

1937년 5월 6일 성당과 사제관 · 수녀원을 건립하고

 기존의 한옥 성당은 유치원 강당으로 이용했다.

새 성당은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과 벽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한 서양식 건물로 10m × 37m의

 긴 장축형 평면으로 세워졌다.

정면에 뾰족한 종탑을 세운 성당은

 19세기 고딕 부활(Gothic Revival)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형태적 특징을 갖고 있다.

서양식 건축양식을

 당시 여건에 맞춰 재해석해 설계 시공한 점이 돋보인다.

 

그 무렵 김영제 신부는

 타본당보다 수도 성소자가 많음을 확인하고 1937년 4월 8일

 본당 내에

성모 성심원(聖母聖心院, 1957년경 한국 순교 복자 수녀회에 합병)을 설립하였다.

 이후 김영제 신부가 함안 등 몇몇 본당을 거쳐 밀양 본당에 부임하자,

1951년 회원들도 밀양 본당 내로 본원을 옮겨 사목활동을 도왔다.

한편, 1950년부터 10년 간 본당 신부가 일곱 번이나 교체되자

 공동체 역시 분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 와중에 배급받은 전후(戰後) 구호물자의 처리 과정에서

관리 체계의 허술로 본당 내에 불신 풍조가 만연하면서 1957년 3-1959년 3월과

 1960년-1964년 1월 사이 신부 부재의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

다행히 이 기간 동안 옥봉동(玉峯洞) 본당의 주포니(C. Giupponi, 콘스탄시오) 신부와

 사천(泗川) 본당의 라우리올라(G. Lauriola, 굴리엘모) 신부가

 격주로 성무를 집행함으로써 어려운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64년 1월 본당에 부임한 박정일(朴正一) 미카엘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를 중심으로 본당 내 단체들을 재정비하여

 근 15년 만에 본당을 정상화하였다.

이후 문산 본당에서는 1970년대 프로테스탄트와의 교환 순회 집회를 통해

 교회 일치 운동에 앞장섰고,

1980년대에는 주일학교에 과감히 투자하였으며,

주일학교 교사 및 학생 연수, 신용 협동조합 강습 등을 통한

 끊임없는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1990년에는 성모 동산을 마련하고 요셉상을 안치하는 등

 성당 안팎의 조경 사업에 힘썼으며,

1994년 11월 25일에는 소화유치원을 완공하고 옛 유치원 건물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자수가 줄고, 신자층도 점차

 노령화되어 가는 추세에 있어 현재 본당 공동체 분위기 쇄신을 위한

 사목에 주력하고 있다.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문산 본당은

 설립 100주년을 앞두고 몇 차례 보수 공사를 시행했다.

 옛 한옥 성당은 서양식 새 성당이 건립된 후 유치원으로 사용되다가

1995년 강당으로 개ㆍ보수하면서 원래의 마룻바닥을 화강석 바닥재로 교체했다.

 또한 사제관을 개축하고 주방 건물을 신축하며 성당 지붕과 제대 등을 보수하여

 2002년 3월 10일 축복식을 가졌다.

또한 문산 본당의 한옥 양식과 고딕 양식의 두 성당은

 동서양 건축양식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두 가지 양식의 성당이 공존함으로써

 우리나라 성당 건축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2년 5월 3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되었다.

 

2004년 2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옛 한옥 성당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진행하여

 오랜 세월 풍상에 부식된 일부 목재와 기와를 교체하였다.

 이어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묘역 단장과 사봉 공소 신축 봉헌(2005년 4월 3일),

 유치원을 증축, 100년사 발간 준비 등의 기념사업을 벌여

 2005년 5월 5일 서부 경남 복음화의 산실이 되어온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였다.

 

또한 문산 본당은 2009년 12월 27일

 성당 내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옛 제대를 복원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새 제대는 벽을 향해 미사를 봉헌하던 당시 제대를 본래대로 복구한 것으로

현재 감실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재청의 지원으로 성당 천장과 벽, 바닥 등도

가능한 원자재와 건축 기법을 보존한 상태로 복구하고 성가대석을 대폭 수리하였다.

2011년에는 성당 내부와 외벽보강 등 2차 보수공사를 진행하고 있고,

옛 한옥 성당은 향후 본당 역사관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출처 : 김성희, 한국가톨릭대사전 제5권과 관련 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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