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백제역사에서 통상시기가 아닌 백제의 최대위기의 시기에 이 3명이 등장한것 또한 이상하지 않을 수 없어 여러사서를 찾아본 결과 그 내부에는 부여씨가 아닌 모씨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모용씨의 고구려 침공으로 인한 고국원왕의 고행과 근초고왕에 의한 사망에 복수의 칼을 간 고구려의 한반도 침공과 백제 개로왕가의 절멸의 시기에 구원투수가 나타났다.
바로 문주왕,삼근왕,동성왕 세사람이다.
특히 동성왕이 경우 신라와 결혼동맹을 맺어 백제의 남진에 대항하였고 산동 역성(청주)에서 북위와 대회전을 치루고 승리했다. 중국에사서에 등장하는 모든 전쟁사에는 공격루트와 일시가 기술되어있지만 이전쟁에서는 없다.
소위말하는 대륙백제군의 발생과 이동루트와 소멸단계가 기술되어있지 않고 결론만 <남제서>에 등장한다. 이같은 이유는 백제군사가 한반도나 왜 또는 발해만에서 이동하지 않고 중원에 있었던것을 의미한다.
齊氏擅東夏其王隆亦通使焉.
북제가 동하를 다스렸는데 그왕 륭 또한 사신을 보내 통교했다.
<북제서>를 찾아보니 북제가 동하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있어 동하의 근원을 삼국지및 진서에서 찾아보았다. 동하東夏의 정체는 하나라의 후예인 하족을 뜻하고 특히 중원과 산동지역에 살고있던 민족이이어서 동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는 결론을 얻었다.
특히 서진의 강성시기에 부여족인 백제를 제외한 민족의 해외이동을 금하여 발이 묶이자 그들이 부여백제족에 편입되어 염업과 해운업을 영위하고 대륙밖으로 항해 할 수 있었다.
일본으로 넘어간 부여씨 백제왕가는 이들과 연맹하고 세사람을 차례로 대륙백제왕에 앉히게 된것으로 추정한다. 동성왕의 경우 전공이 뛰어나서 대륙의 지방왕 작호를 남제에 요청하고 아울러 한반도 중서부에 대한 지배권도 인정한다.
이 모든것이 일본으로 건너간 곤지와 무령왕계의 부여씨 권력에 의해 움직인것이다. 그 권력의 중심엔 백제의 왕비생산족인 8대귀족이 자리잡고 있었고 무령왕이 등장하기전까지 이들은 귀족 진씨와 해씨에 의해 모두 처결된다.
쉽게 말하면 이 3모씨왕은 백제의 부여씨에 귀속된 하족의 모용선비로 백제의 용병왕이었던 것이다. <북사>를 집필한 이연수가 읊조린 백제에서 쓴다는 하어는 이들이 산동에서 쓰던 언어였다.
이들이 후대에 수나라와 당나라와 관계있는 선비족으로 이어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2020.5.18.
첫댓글 역사의 수수께끼를 찾는 실마리가 될 것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