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진년을 보내며/靑石 전성훈
늘 세밑이 되면 하는 말이지만 참 세월이 빠르다. 칠십 고개를 넘어서니 한 해, 두 해가 갈수록 더욱더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용띠해 갑진년을 맞으며 우리 사회가 서로 인정하고 함께 사는 모습을 꿈꾸었는데 세상이 하도 어처구니없는 모양으로 굴러가니 마음이 심란하다. 연말에 들어서 썩어빠진 정치판에 너무나 황당한 일이 생겨 세상이 어수선한 채 난리법석을 치르고 있다. 세상 걱정에 불안과 근심이 밀물처럼 닥쳐와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낸 친구와 나눈 한잔 술에 무심한 세월의 흐름처럼 눈 녹듯이 사라지고 가슴에 회한을 남기는 게 별로 없다.
하루를 살든 백년을 살든 인간의 삶은 이 생각이 저 생각을 붙잡고 또 다른 생각에 쫓기면서 일상을 맞이하게 마련이다. 그렇게 자신이 가야 할 길의 수레바퀴를 다람쥐같이 쳇바퀴를 돌리고 땀을 흘리며 간다. 세상은 내 생각처럼 돌아가는 게 아니므로 너무 속 끓이고 안달하면서 총총걸음으로 아등바등할 이유가 없다. 사바세계의 악취 속에서도 진흙탕에 피는 연꽃처럼 따스함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이 있어서 이 세상은 살아갈 만하다.
올해를 맞이하며 빌었던 크고 작은 소원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해 저무는 강가 갈대밭의 차가운 바람같이 내 곁을 스쳐 지나간 삶의 뒷모습을 되돌아본다. 무엇보다도 건강이 소중한 일이기에 건강부터 살펴본다. 1월 말 몇십 년 만에 상당한 비용을 내고 대형 병원에서 종합 건강 검진을 받았다. 검진 결과 우려할 할 일은 없지만, 내과 의사 처방에 따라 고혈압약에 이어 고지혈증과 심부전 치료제를 복용하기 시작하였다. 의사는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을 당할 수도 있다고 은근히 겁을 주었다. 그 탓에 식탁 위에는 통풍약을 포함하여 볼품없는 노년의 상징인 약봉지가 하나 가득하다.
20년 전부터 안구건조증으로 동네 안과에 다니고 있는데, 3월 초순 건조증약 처방받으려고 갔더니 평소와 다르게 검사를 하자고 한다. 한동안 검사를 하더니, 오른쪽 눈에 망막 전막증이 진행 중이라며 그대로 놔두면 시력을 잃을 수 있다고 안과 전문병원에 가보라고 한다. “망막 전막은 사물이 휘어져 보이는 질환으로, 증상은 망막 전막의 두께와 망막 혈관의 뒤틀림 정도에 따라 달라지고, 물체의 상이 찌그러져 보이거나 시력의 저하를 유발하며 일반적으로 진행 속도가 빠르지 않다.”고 한다. 각종 병의원이 밀집한 노원역 부근 안과 전문병원에서 검사하였더니, 지금은 우려할 만한 수준이 아니므로, 진행 상태를 지켜보다가 수술을 하자고 한다. 분기별로 검사를 하였고 새해 1월 말경에 다시 검사할 예정이다.
귀가 어두워서 보청기를 끼기 시작한 지 2년이 넘는다. 보청기를 끼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가면 온갖 소리가 다 들려 소음이 심하고 불편하다. 보청기를 끼어도 낮은 소리와 높은 소리는 잘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끼고 다닌다. 그렇게 좋았던 시력도 세월 따라 노안으로 나빠졌지만 돋보기를 사용하면 글을 읽고 쓰는 데는 큰 불편함이 없다. 옛말처럼 이제는 세상일에 적당히 보고 듣고 말하라는 자연의 가르침에 따라서 살아가는 때가 된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형제 또는 친구나 지인이 하늘로 떠나면 가슴에 커다란 멍이 들 수밖에 없다. 9월 초순 동갑인 30년 지기 성당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듣고 허망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7월 말에 만났을 때도 특별히 아픈 곳이 없었는데, 뭐가 그리도 급해 황망히 갔는지 모르겠다. 살아있다는 게 뭔지, ‘있을 때 잘해라’라는 객쩍은 소리가 오늘따라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불가의 가르침처럼 그야말로 제행무상(諸行無常)이다.
서럽고 가슴 아린 일이 있으면 기쁘고 즐거운 일도 있는 법이거늘, 도봉문화원 인문학 기행에 참가하여 우리나라 여러 곳을 다녔다. 우리나라 역사의 고도(古都)를 찾아서라는 표제에 따라, 세종시, 익산, 고령, 김해, 공주, 단양에 가보았다. 도봉문인협회 문학기행으로 충남 부여 신동엽 시인 문학관을 둘러보면서 잠시나마 시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런가 하면 친구들과 서해안에서 동해안으로 국토횡단 여행을, 같은 곳에서 해가 지고 뜨는 고장인 충남 왜목마을과 수덕사를 찾았다. 옛 직장 동료들과 일본 땅끝마을이 있는 가고시마에도 다녀왔다. 더하여 손자녀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에서 캠핑카 숙박을 하면서 손자녀들과 추억을 쌓기도 했다.
올해도 책을 가까이하며 지낸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책을 사는 게 부담되어 도봉문화정보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는다. 한 달 평균 10여 권을 읽는 편이다.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내며 치매 예방을 위한 뇌 훈련에 도움이 돼서 감사하다. 십 년의 약속으로 매주 한 편의 수필을 쓰고 시를 짓는 일은 미룰 수 없는 숙제이자, 내 삶을 윤택하게 하는 기쁨이고 즐거움이다. 덕분에 봄이 무르익은 5월에 두 번째 시집 ‘기다리는 마음’을 출간하여 보람을 느낀다.
새해 2025 을사년 뱀띠해, 복을 많이 지어 여러분 주위에 나누어 주세요. 여러분 가정에 하느님 은총과 부처님의 가피가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202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