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에게 옥의 가치는 단순한 희소성과 아름다움을 초월하는 것으로, 그 상징성은 대단했기 때문에 청淸나라의 건륭제는 옥을 가공하는 명장들에게도 벼슬을 줄 정도였다.
우리나라도 옥에 대한 선호도와 경외감은 중국보다는 덜 하지만 역사가 오래 되었다.
특히 신라 시대는 옥으로 만든 제품은 신성한 영험이 있다고 여겨진 모양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의 3대 보물이 등장하는데, 황룡사 장륙존상과 황룡사 구층탑, 그리고 579년 진평왕이 하늘로부터 받은 옥玉으로 장식된 허리띠다. 진평왕의 옥대 외에도, 신문왕이 동해의 용에게서 받았다는 흑옥대에 대한 기록도 보인다고 한다.
신神으로부터 받았다는 진평왕의 옥대는 신라가 망할 때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쳐졌는데, 길이가 10척(3미터)이며 62개의 옥장식이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옥대는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귀한 물건일 뿐 아니라, 적병을 이 옥대로 물리쳤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두려움의 대상이 될 정도로 신비하고 영험한 기운을 가진 도구였다.
《 동의보감 》에서는 옥을 갈아서 복용하면 체내 노폐물을 배출시켜 주고, 장수하게 되며, 폐장 기능을 윤활하게 해주면서도 소화계통에 효과가 있고, 특히 가슴이 답답할 때 좋다는 등 옥을 대단한 약재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옥을 몸에 지니고 다니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믿어, 임신한 왕비들은 늘 옥을 가까이 했었다.
하지만 고려 시대에까지는 옥에 대한 장식과 생산이 활발했지만 조선조에 들어 와서는 이런 경향이 쇠퇴하게 된다. 그 이유는 금, 은과 더불어 옥이 명나라가 조선에게 줄기차게 요구했던 공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알다시피 은銀은 명 시대부터 중국의 기본 화폐 단위이어서 명의 사절들은 조선에 오면 극심하게 뇌물이나 공물로서 금은金銀과 옥玉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조선은 이런 시달림에 아예 금광, 은광을 폐광시키고 생산을 중지하기도 했었다. 옥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는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에 왔던 명明나라 장군들과 관리들은 조선에서의 옥 채굴에 관심을 기울여, 전쟁 중에도 옥을 캐내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여러 이유를 내세워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옥을 캐어 얻은 경제적 이익보다, 나라와 백성의 고통이 더 컸기 때문이었다.
조선 옥의 최대 소비처는 당연히 중국이었지만, 조선은 중국과 정상적인 무역 거래로 이익을 얻어낼 능력이 없었다. 옥 생산량이 늘면 조공품의 양만 늘어나게 되므로, 금은광 등과 마찬가지로 개발을 억제해 저들의 요구를 줄이는 것이 차라리 나았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옥의 채굴을 중단하지는 않았지만, 극히 제한적으로만 생산하고 왕실을 중심으로 일부 계층에서만 사용하였다. 따라서 중국에서처럼 다양한 옥기 공예품들이 만들어지는 문화는 발달하지 못했다.
이것은 유교적인 정책으로 인한 사치의 근절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춘천지역에서도 옥이 산출된다. 그러나 옥 이야기의 서두에 말했듯이 이것은 보석으로 가치가 있는 비취 종류의 경옥이 아니고 네프라이트라는 연옥 종류이다.
춘천 연옥은 비취 같이 짙은 녹색의 결코 화려한 색은 아니다. 담녹색계열의 은은한 색은 부드러운 질감을 가졌다.
witpo
옥으로 만든 장식품, 출토물.
옥 중에 보석이라 할 수 있는 비취의 원석
춘천 연옥으로 만든 팔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