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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묵상글 들 (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 내 사랑이 자라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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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내 사랑이 자라려면
성탄절 전 한 수녀님께서 고백성사를 보시며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사랑이 자라 하느님 사랑처럼 될까요?
어떻게 하면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까요?
기도를 열심히 하면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될까요?
이에 저는 저의 경험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되 사랑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 욕심 채워달라는 욕심 기도가 아니라
이웃의 치유와 구원을 위한 사랑 기도 말입니다.
다음으로 하느님 사랑을 배우는 묵상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하느님 사랑에 머물고 그럼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전이 되는 관상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느님 사랑을 배우고,
하느님 사랑으로 나의 사랑이 충만케 되면
이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데 이 마지막 실천을 빼먹으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해도 사랑이 자라지 않고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 요한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계명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저는 매일 여기 콩나물 국밥집 영업을 봉사자들과 함께
기도로 시작하는데 매일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 사랑을 저희에게 부어주시어 당신 사랑으로
충만케 하시고 그 사랑을 이 식당을 통하여 나눔으로써
당신의 복음이 이 지역 사회에 널리 전파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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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성탄 팔부 축제 제5일 입니다. 오늘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치르시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사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죄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었던 이 모세의 율법규정을 지키지 않으셔도 되셨지만, 굳이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려고 율법의 지배를 받으셨습니다.
이를 사도 바오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가 차자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시어 율법 아래 놓이게 하 셨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이들을 속량하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되게 하는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갈라4,4-5)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루카 2,28) 노래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이러한 눈은 관상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십자가의 예수님을 마주보고 있었던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마 신비를 바라보는 눈을 가졌기에 독수리 복음사가라 불리는 요한의 눈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눈은 그가 쓴 오늘 <제1독서>에서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되는’(1요한 2,3) 눈으로 관상의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하늘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독수리는 날개 짓을 하지 않고도 하늘을 유유자적합니다. 바람을 타고 있는 까닭입니다. 독수리는 유유자적하는 펼쳐진 날개도 아름답지만, 사실 독수리의 진짜 아름다운 곳은 눈입니다. 독수리는 시력이 5.0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멀리 높은 곳에서도 환히 본다고 합니다.
저는 고성에 있을 때, 독수리 돌보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산속에 추락하여 있는 독수리를 발견하여 가슴에 품고 산을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눈을 보았습니다. 얼마나 맑고 흠 없이 영롱했던지, 자신도 모르게 빨려 들어가 버리는 나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 눈을 바라보는 이는 결코 매료당하지는 않고는 못 배실 것입니다. 그토록 맑은 눈을 보면, 그 눈동자 안에서 홀연히 자신의 참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눈이 맑아지고 신비를 바라보는 영의 눈이 열릴 것입니다. ‘어린 아기에게서 구원을 보는’ 시메온의 눈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그의 눈이 되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30)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반대를 받는 표징”(루카 2,34)
주님!
반대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비난 받고 모욕당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게 하소서.
미움 받을 용기를 주소서.
욕먹지 않으려 불의에 타협하지도 말게 하소서.
당신 때문에 기꺼이 반대 받을 줄을 알게 하소서.
나쁜 사람으로 취급당할 줄을 알게 하소서.
반대와 고통 속에서도 사랑할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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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빛을 알아보는 은혜를 청해야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악한 사람도 그렇다고 완전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못돼 보이고 자기는 완전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요한3,19).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셨지만, 그분을 환영하기까지는 너무도 오랜 세월과 많은 고통이 따랐습니다.
시메온이 예언한 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기도 하셨고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이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겪게 되는 적대감으로 인해 마리아의 마음도 또한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며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마침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한눈에 예수님을 알아봤습니다. 기다림이 컸으니 그를 알아본 것은 당연합니다. 기다림의 열매를 품에 안았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예수님을 두 팔에 안고 하느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시메온은 끝까지 기다렸고 마침내 모든 것을 이루었고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도 매사에 참고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빛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지녀야겠습니다. 일상을 빛으로 살고 결코 빛으로 오신 주님을 거부하는 일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파견하신 메시아이시며 모든 나라를 비추는 빛이십니다. 이는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 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한의 첫째 편지에 보면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1요한 2,9-11)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빛이신 주님은 이웃사랑을 통해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성모님께서 영혼이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냈듯이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의 인내와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빛을 알아보는 은혜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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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데리고 성전으로 가서 하느님께 봉헌한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봉헌은, 아기는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이니 먼저 하느님께 봉헌하고자 하는 유다인들의 전통(탈출 13,2)에 따른 것이기도 했거니와, 더욱이 요셉과 마리아에게 태어나신 예수 아기는 성령께서 잉태시켜 주신 이상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예수 아기의 부모가 지닌 이러한 봉헌 의식은 나자렛 성가정의 침묵으로 이어졌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메시아를 잉태하리라는 전갈을 들었을 때부터 마리아께서는 이 전갈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루카 1,29), 요셉 역시 정혼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였으니 주저하지 말고 그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알려주는 천사의 전갈을 들을 후부터(마태 1,21-22) 도대체 이 아기가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 부부는 짐승들의 우리 동굴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았을 때에 목동들이 찾아와 경배하며 천사들이 전해준 말을 들었을 때에도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습니다(루카 2,19). 또한 느닷없이 멀리 동방에서 박사들이 세 명씩이나 찾아와서 귀한 예물을 내 놓고 아기에게 경배를 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마태 2,11) 더더욱 아기의 정체와 운명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 부부가 구세주가 되실 자신들의 아기를 위해서 바친 희생은 평생 동정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보여준 이 침묵의 삶과 평생 동정의 봉헌은 하느님의 신비스러운 영감과 훌륭한 가르침을 들으려는 마음의 자세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날 부부 사랑의 결실로 선사받은 소중한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부모들에게도 마음의 준비와 영적인 묵상, 그리고 내적 생활과 공동 희생을 통해서 하느님 홀로 은밀히 보시는 기도의 필요성과 가치를 가르쳐 주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무수한 만남 중에서 유독 생명에 봉사하는 유일한 만남이 혼인이고, 혼인한 부부들이 자녀를 낳음으로써 이루는 가정이야말로 하느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자녀의 탄생과 양육 과정에서 겪는 하느님의 손길에 대해서 부모들은 나자렛의 부모가 보여준 이 위대한 침묵을 본받아 자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적인 묵상을 나누며 그리고 각자 내적 생활로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부부가 공동으로 바치고 있는 희생에 대해서 그 의미를 늘 공유하고 확인해야 합니다. 각 가정에 태어난 자녀들의 존재는 그 부부에게 보여주신 하느님의 개입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운명은 어린 시절에 부모들이 하느님과 자녀들에게 대해 가지는 영적인 태도에 의해 결정적으로 좌우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생명과 공동체에 깃든 하느님의 개입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 문맹은 많은 가정을 위기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려면, 우리는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기른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녀를 길러야 합니다. 우리가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것이고(1요한 2,4), 그분의 계명을 실천해야할 첫 번째 대상은 바로 자기 자녀들입니다. 자녀들에게 깃들여 있는 하느님의 사랑과 계획을 알아보고자 침묵 속에서 하느님과 대화하고, 그 대화에서 알아들은 대로 자녀를 존엄한 존재로 기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될 것입니다(1요한 2,5). 그렇게 되면 그 가정은 하느님의 빛 속에 머무르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만일 세속적인 방식으로만 자녀를 대한다면, 그 가정은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1요한 2,11).
여기서 우리는 “나자렛 가정이야말로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배울 수 있는 복음의 학교”(성 바오로 6세)임을 상기해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보여준, 소박하고 겸손하며 아름다운 가정생활 자체가 무릇 가정이란 어떠해야 하는지를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계시였습니다. 심오하고 은밀한 나자렛 가정의 그 계시가 지니고 있는 귀한 의미를 보고 듣고 묵상하며 실천함으로써 아기에게 영적 감수성을 전해준 바를 오늘날의 부부들도 배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로 한다면 자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 느끼는 것을 배울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렇게 하여 얻어진 영적 감수성은 한평생 그 자녀들로 하여금 하느님과의 내적 관계를 지속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가톨릭 가정에서 유아세례를 시켜야 하는 이유이고, 그 후에는 부모만이 자녀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기도와 사랑으로 영적 체험을 시켜 주어야 하는 까닭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 가정 성화 주간에 요셉과 마리아 부부가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성전에서 봉헌한 오늘 복음 말씀을 들으셨으니, 이 말씀에 따라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하느님께 대한 영적 감수성을 길러주어야 할 나침반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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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아는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부동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특히 요즘 아파트 가격이 계속 오르는데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라는 어떤 분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에 한 분은 지금이라도 빨리 사야 한다고 말하고, 또 다른 분은 이제 오를 만큼 올라서 곧 폭락할 것이라며 절대 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둘 다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는데, 과연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까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 두 분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까지 부동산으로 이득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의 경험은 모두 망한 것뿐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세상 안에는 너무 많은 말이 있습니다. 이 말 중에 진실은 얼마나 될까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말을 무조건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 특히 사람들이 존경했던 종교지도자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맞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올바르게 판단할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 의지하며 판단해야 해야 합니다. 오류를 줄이고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시메온은 예루살렘에 사는 열심한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를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라고 전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예언자’로 알려진 유명인사였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구세주를 기다렸고 마침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과 그 부모를 보고 감격과 기쁨이 넘쳐흘러서 찬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0)
오래전에 자녀를 시장에서 잃어버린 어떤 부모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잃어버린 자녀를 딱 한 번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시더군요. 시메온은 4천 년 동안 기다렸던 구세주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달리, 갓난아기의 모습만 봐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평생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우리 먼저 그 구원에 걸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롭고 독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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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답을 찾는 여정이 아니다. 질문하는 여행이다(브라이언 그레이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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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진다.
한 그룹은 중병을 앓는 아이에게 희망을 주는 편지를 쓰게 했고, 다른 그룹은 라틴어 문장이 가득한 페이지에 철자 ‘이(e)’를 표시하게 했습니다.
같은 시간에 과제를 마친 뒤에 자신의 시간이 얼마나 풍족했는지를 알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누군가를 위해 시간을 내어 준 참가자들이 그렇지 않은 참가자들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말했으며, 풍요로운(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남에게 자기 시간을 내어주었을 때, 우리는 마음의 풍요로움도 함께 느끼게 됩니다. 결코 시간 낭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많이 사용하고 의미 있게도 보낼 수 있게 됩니다.
행복은 시간을 남에게 할애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내 시간만을 만들어나갈 때 우리는 시간이 없다는 말과 함께 어렵고 힘든 시간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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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림 특강으로 버지니아의 성 정 바오로 성당엘 다녀왔습니다. 가는 길에 버지니아에 있는 마리아 성지와 성 요한바오로 2세 기념관엘 들렀습니다. 대림 특강은 교우들을 위한 것이었다면 성지순례는 주님의 성탄을 준비하는 제게는 좋은 피정이었습니다. 마리아 성지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많았습니다. 천장의 돔에는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공생활, 삼위일체, 성령강림, 예수님의 재림을 주제로 한 모자이크가 있었습니다. 대성당에는 작은 경당들이 있었고, 그 경당은 각 나라에서 봉헌하였습니다. 아프리카에서 봉헌한 성모님과 예수님은 흑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경당은 노예로 팔려온 아프리카 흑인들이 타고 왔던 배의 모습으로 되었습니다. 경당에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왔던 흑인들의 역사가 담담하게 조각되어 있었습니다. 마리아 성지에서 5분 거리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기념관도 좋았습니다. 버지니아에 가시면 마리아 성지와 성 요한 바오로 2세 기념관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제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묵주기도의 신비와 그 신비에 연관된 구약의 사건에 대한 모자이크였습니다. 환희의 신비 1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함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모세가 떨기나무 아래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듯이, 모세는 ‘나는 있는 바로 그분’이라는 하느님을 받아들입니다. 환희의 신비 2단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함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계약의 궤를 들고 가는 사제들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듯이, 마리아의 태중에는 하느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바로 그분을 알아보고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축복하였습니다. 환희의 신비 3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으심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이사야 예언자가 왕에게 예언하는 장면이 묘사됩니다. 동정녀가 아이를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는 예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환의의 신비 4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 드림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사건 중에는 한나가 사무엘을 성전에 봉헌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환희의 신비 5단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음을 묵상합니다. 구약의 장면에서는 다니엘이 위험에 빠진 수산나를 늙은 노인들의 함정에서 구해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지혜가 날라 커지고 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묵주기도의 신비를 구약의 사건들과 함께 묵상하니 더욱 좋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분 중에 한분인 링컨 대통령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청년시절, 덕망 높은 노인과 가을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때 무수한 별똥이 떨어져내려 두려워했더니 노인이 내게 말했습니다. 저 무수한 두려움을 바라보지 말고 더 높은 데서 반짝이는 별들을 보게나.” 죽음은 언젠가는 꼭 오고 맙니다. 세상 종말도 언젠가는 오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은 그 위에 있는 구원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시메온의 평생 희망은 메시아를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분의 희망이야말로 행복한 죽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희망의 힘으로 살았고 그 희망의 성취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반면에 세상 모든 영예를 얻었던 솔로몬은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설교자의 말이다. 헛되고 헛되다,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헛되다. 세상만사 헛되다. 사람이 하늘 아래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으랴!”(전도 1,1-3)
세상 것들을 희망하면 결국 절망과 허무만 남지만 시메온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것’에 희망을 두면 세상 시련을 이겨 낼 힘을 줍니다. 본당에서 실시하는 교육, 피정이면 언제나 일찍 오셔서 자리를 지켜 주시는 어르신들, 새벽미사에 참례하시는 어르신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르신들을 기억하시고, 사랑하실 것입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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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의 사랑, 정주의 수행, 정주의 축복
- 한결같은 삶 -
며칠전 사랑하는 도반, “빛(Lumen)” 수녀로부터 뜻밖의 친필 성탄 카드 받고 기뻤습니다.
-“공경하옵는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의 오심을 축하드려요. 강생의 신비가 어찌 아니 기쁘겠습니까? 나의 공덕과 관계없이 사랑이며 자비인 것을!! 근래 저는 분도 계간지 겨울호에 나온 신부님 글을 읽었습니다. 한결같으신 우리 신부님! 신부님이 계셔서 하느님도 흐뭇해 하실 것입니다. 건강하시고 행복한 노수도자의 삶, 잘 즐기시길 빌며. Sr Lumen”-
제 가장 선호하고 소망하는 삶이 한결같은 정주의 삶입니다. 계속되는 코로나 감염병 시대가 더욱 관상의 깊이, 삶의 깊이를 추구하는 정주의 영성을 찾게 합니다. 정주의 사랑, 정주의 수행, 정주의 축복입니다. 한결같은 정주의 삶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정주의 시메온 예언자를 묵상하며 저와 연관되어 즉시 떠오른 강론 제목입니다.
나이 70을 훌쩍 넘었지만 노老수도자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습니다.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지요. 하루하루가 영원이요, 정신은 열정은 여전히 하느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이란 생각입니다.
-“밖으로는 산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안으로는 강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밖으로는 산, 안으로은 강을 살아가는 정주의 수도자들입니다. 산山과 강江의 영성이 바로 정주의 영성이요 다음 제 좌우명시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언제나 그 자리에
불암산이 되어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환대歡待하며 살았습니다.
있음 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행복한 산이 되어 살았습니다.
이제 오랜 연륜과 더불어
내적으로는 장대長大한
하느님의 살아있는 산맥山脈이 되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바다를 향해 흐르는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는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계속 하느님 사랑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바로 여기 수도원에서 33년동안 ‘산과 강’의 정주의 영성을 살아가는 제가 그러하고, 오늘 복음의 정주의 예언자 예루살렘 성전의 시메온이 그러합니다. 다음 시메온에 대한 묘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주님께 대한 신망애信望愛의 결정체가 정주 영성입니다. 정주의 축복을 상징하는 듯, 성령께서 늘 시메온 위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주님을 기다리는 희망이 있어 한결같은 기쁨의 정주입니다. 마침내 오매불망 기다리던 주님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두 팔에 받아 안고 감격에 벅차 찬미가를 부르는 시메온입니다. 말 그대로 정주 축복의 절정입니다. 우리 가톨릭 교회 수도자들은 장구한 세월 하루하루를 마치며 끝기도 말미에 시메온과 함께 이 아름다운 찬미가를 바친후 복된 죽음과도 같은 잠자리에 듭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요,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영광의 빛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정주의 축복을 능가하는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고忍苦의 세월이 지나 때가 되자 성령의 은총으로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아기 예수님을 만나 가슴에 안고 환대하며 기뻐하는 시메온입니다. 흡사 인동초忍冬草와 같은 정주의 삶을 살았던 시메온이요, 더불어 생각나는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전 대통령입니다.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의 내용은 순전히 시메온에 대한 주석처럼 생각됩니다. 사랑의 계명 준수를 역설하는 사랑의 사도 요한입니다. 그대로 정주의 사랑과 직결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어둠이 지나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사랑의 빛, 그리스도의 빛입니다. 그러니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진리의 빛, 생명의 빛, 사랑의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빛 속에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루하루 한결같이 제 삶의 자리에서 삶의 중심인 주님 안에 깊이 믿음의 뿌리를 내리며 내적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계명은 단 하나입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15,12)
주님은 우리 모두 한결같은 정주의 사랑, 정주의 수행, 정주의 축복으로 당신을 닮아 사랑의 대가大家, 사랑의 달인達人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이것이 정주 영성의 궁극 목표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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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32)
'봉헌의 의미!'
맏배, 곧 첫아들은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주님께 봉헌됩니다.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메온이 성전에서 주님께 봉헌되시는 아기 예수님을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시메온의 노래(루카2,29-35)'는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예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시메온은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음을 노래하면서, 그러나 모든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2,34-35)
시메온의 이 예언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근본 이유이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인 죽음'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1요한2,3-4.6)
우리를 위해 죽으러 오신 '주님의 성탄'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너를 위해 '죽는 사랑'을 합시다!
서로가 나의 형제를 미워하지 말고 진심으로 '사랑합시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시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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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마리아와 요셉은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하고
첫아들을 주님께 봉헌하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출산한 여인은 사십 일 동안 불결한 사람으로 간주되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일년생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를 제물로 바쳐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만
다시 정결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맏배는 하느님의 것이요 주님을
섬겨야 하기에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이집트인들의 맏배를 치실 때 자기의
맏배들을 죽음에서 구해 주신 것을 기억하고,
그 후손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레위인들은 첫아들을 사제로 봉헌하여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은 맏아들을 봉헌하는 대신에
다섯 세켈(20데나리온)의 돈을 성전에 바쳤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합니다.
그 아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 가장 소중한 열정,
가장 소중한 사람, 가장 소중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처럼 이렇게 소중한 것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그러나 온전한 봉헌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들어 알기는 하지만,
그래도 쉽게 놓을 수 없습니다.
그리 쉽다면 우리는 나약한 인간이 아닐 것이고,
아마도 그것이 소중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매달립니다.
“제가 하나밖에 없는 아들마저 바치고서
홀로 어찌하란 말씀입니까? 이것마저 없으면
저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엎드려 통곡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내드릴 터이니 제 아들만 제게 남겨 주십시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하느님과 씨름한 뒤에야 비로소
애착에서 벗어나 평화 속에 하느님과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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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알아봄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봉헌하신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체를 받아 모시듯이 예수님께서는 할례를 받으시고 나서 제단으로 나가신다. 율법은 “씨를 받아”(레위 12,2 칠십인 역) 아이를 낳은 여인은 부정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정 기간이 지난 뒤에, 낳은 자식과 함께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쳐야 깨끗해진다고 한다. 이 율법과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23절)는 율법을 따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난하여 “일년생 어린양”도 아니고 “작은 집짐승 하나도 마련할 힘이 없는”(레위 5,7) 처지였기에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제물은 몸의 순결과 영의 은총,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진짜 제물이었다. 산비둘기는 순결을, 집비둘기는 은총을 나타낸다.
노인인 시메온과 한나는 깊은 신심을 고백하며 주님을 맞았다. 그들은 아직 아기인 그분을 보고서도, 위대한 신성을 지니신 분임을 알아보았다. 이 두 사람은 오랫동안 주님을 기다려 왔고 그분이 오시자마자 신심 깊은 행실이란 두 팔과 꾸밈없는 믿음인 목소리로 그분을 찬미할 준비가 되어있는 모든 남녀 백성들을 나타낸다.
의인 시메온은 그분을 마음으로 보고 아기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동정녀에게서 태어난 하느님의 아들을 품에 안고 기도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29-30절) 구원은 먼 훗날 죽은 다음이 아니라, 지금 현재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모두 구원을 이렇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기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쓰러지게 하고 믿는 다른 민족들은 일어나게 하실 분이다.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34절) 십자가가 바로 그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믿지 않는 자들이 그분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조롱했기 때문이다. 구세주의 모든 것이 반대를 받고 있다. 처녀가 어머니라는 사실이 ‘반대를 받는 표징’이다. 그리스도는 여인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마르키온파가 있으며 에비온파는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속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35절) 마리아의 영혼을 꿰찌르는 칼은 그의 슬픔을 가리킨다. 마리아는 당신의 평생 아드님 때문에 많은 고통을 겪으셨다. 그리고 아드님께서 수난을 당하실 때 모두 겪으셨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아드님이 죄인으로 몰려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어머니의 가슴은 칼에 꿰찔리듯 아마 그 이상으로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드러낼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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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 30)
산고(産苦)의
고통 뒤에
찾아오는
구원의 빛이다.
구원의 빛은
언제나
구체적이다.
구원을 본 사람은
구원을
구체화시키는
사람이다.
공허한
일상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는
구체적인
일상의
빛이 된다.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이라는 무게를
피해 갈 수는
없다.
일상은 구원을
향해 있듯
구원은
일상이 되어
이미 일상 안에
들어와 있다.
일상을
반죽하면
감사와 기쁨으로
변한다.
일상의 관계를
구원의 빛 앞에
내려놓는다.
내려놓기에
열리게 되는
일상의 신비이다.
내어놓기 싫은
일상도 이제
내어놓는다.
구원이란
우리의
일상을
내어놓는
내어놓음의
빛이다.
내어놓는
우리 일상의
그 자리에
성탄이 있다.
일상이 있기에
구원이 있고
구원이 있기에
우리들
일상이 있다.
일상의
고통 뒤에
만나게되는
구원의 빛이다.
일상으로
드러나는
구원을 본다.
하느님께서
우리
일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일상의 빛이며
일상의 영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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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시메온의 예언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그들은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루카 2,22-24).”
산모가 정결례를 거행하는 것과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 자체는
유대인들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실천하는 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경우에는 특별한 일입니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고 거룩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셨기 때문에 정결례를 거행할 필요가 없고,
또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하느님께 봉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정결례를 거행하고, 예수님을 봉헌한 것은
율법 준수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는데도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으신 것도, 또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니까 성전 세를 바칠 의무가
없는데도 바치신 것도(마태 17,24-27)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정결례 제물은 ‘어린양 한 마리와 비둘기 한 마리’입니다(레위 12,6).
그러나 양 한 마리를 바칠 힘이 없는 사람은,
즉 가난한 사람은 ‘비둘기 두 마리’를 바쳐도 됩니다(레위 12,8).
성모님이 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것은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나 딸을 주님께 봉헌하는 부모의 심정을 생각해 봅니다.
그 일이 누구에게나 그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일까?
아닙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들이나 딸을 주님께 봉헌하면서 기뻐하고,
영광스러운 일로 생각합니다.
주님께 아들이나 딸을 봉헌하는 것은 ‘빼앗기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고통스러워하고 힘들어하고 슬퍼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부족한 것이고,
봉헌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28-35)”
예수님에 대한 시메온의 예언은,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면서 했던 말을(루카 1,32-33) 다시 확인해 준 ‘증언’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한 말과 시메온의 예언은, 뜻은 같은데 표현에 차이가 있습니다.
시메온의 예언을 보면 ‘모든 민족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가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
즉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 구원은 국적, 민족, 남녀, 신분, 인종 차별이 없는 ‘보편적인 구원’입니다.
(아마도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예수님을 이스라엘만을 위한 메시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들’을 위한 메시아라는 시메온의 말을 듣고 놀라게 됩니다.)
시메온이 성모님에게 한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또 성모님이 겪게 될 고통을 예언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고,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다.”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면 예수님을 믿은 사람의 수는 적었고,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정해졌습니다.’ 라는 말은, 그렇게 되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거부한다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만일에 모든 사람이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를 받아들여서 회개하고,
또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받아들여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모든 사람이 빠짐없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한 자들의 범죄입니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속죄 제물로 바치신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라는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때문에 성모님이 겪게 될 극심한 고통을 예언한 말입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라는 말은,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할 사람이 구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언’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확정된 미래를 미리 말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는 일입니다.
확정된 미래도 없고, 바꿀 수 없는 운명도 없습니다.
미래도, 운명도 다 우리가 선택하고 만들어 갑니다.
성경에 자주 나오는 멸망 예언들, 또 묵시록에 나오는 재앙 예언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따라서 심판, 재앙, 멸망은,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니네베에 가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예언했습니다(요나 3,4).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모두 회개했고(요나 3,5-9), 그 모습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고(요나 3,10), 그래서 니네베에서는
아무 일도 안 일어났고, 요나는 거짓 예언을 한 셈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이 변덕스러운 분이어서 그렇게 된 것일까?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처음에 “회개하지 않으면 사십 일 뒤에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고 선포하라고 시키셨을 텐데,
요나가 자기 마음대로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을 생략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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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의 회상과 감사
“그리스도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십니다.”(루카 2,32)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주님께 바칩니다. 이로써 하느님 친히 사람의 손에 자신을 맡기시고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가난하여 비둘기를 정결례 예물로 바칩니다(2,24). 예수님께서는 성전봉헌을 통해 속죄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위해 주님께 성별된 것입니다.
시메온은 이스라엘을 ‘위로해주실’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기에 죽기 전에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2,25-26).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을 두려워함으로써 얻어지는 지혜 속에 살았습니다. 그는 가난 속에 사랑으로 우리의 삶에 끼어드신 예수님을 알아보고 찬양합니다(2,28).
시메온은 예수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이스라엘에게는 영광”(2,32)이 되심을 노해합니다. 전 생애에 걸쳐 기다려온 구원을 본 의로운 종, 시메온은 구세주를 알아보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합니다(2,29). 구원받은 모든 이들의 표본인 시메온은 우리가 걸어야 할 신앙의 여정과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가난한 나자렛 가정의 봉헌 속에 만민의 빛으로 오신 분을 맞아들이며 살 수 있을까요? 빛이신 주님을 맞아들이려면 빛 가운데 머무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겠지요. 의로운 삶이란 사랑을 위해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말하고 주님께서 사셨던 목숨을 내어주는 희생과 봉헌의 삶을 뜻합니다.
또한 시메온처럼 ‘독실해야’ 할 것입니다. 독실하다는 것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위해 충실하고 헌신적이며 항구한 삶의 자세를 지니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성령의 이끄심에 맡기는 ‘거룩한 위탁’의 자세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나를 앞세우는 성급함이나 교만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나아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자는 거짓말쟁이이며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1요한 2,4). 하느님의 말씀에 청종(聽從)하여 그분의 뜻을 실천하면 그 사람 안에서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며 그분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2,5).
우리 모두 주님 성탄의 기쁨을 온 세상에 선포할 소명이 있습니다. 주님의 구유가 되어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고(2,6), 빛으로 오신 분 안에 머무르기 위하여 그 누구도 배척하지 않고 사랑해야겠습니다(2,10). 사랑하지 않은 채 어둠 속에 헤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아야겠지요(2,11).
오늘도 늘그막까지 오직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의롭고 독실하게 살았던 시메온을 본받고, 말씀을 청종하고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주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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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과분하게도 피조물인 한 인간이 자신의 두 눈으로 탄생하신 메시아, 거룩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직접 뵙는 영광이 몇몇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말마디 그대로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은총을 입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인간의 눈으로 직접 뵈옵는 천국의 행복한 상태, 한 신앙인으로서 지복직관처럼 더 큰 은총과 축복은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강조합니다. 지금 당장은 불가능할지라도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지복직관의 은총이 다가올 것임을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코린토 1서 13장 12절)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그토록 은혜로운 지복직관의 선물이 살아생전 주어지기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 몇 명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 나자렛의 이웃들, 그리고 예루살렘의 의인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시메온이 그랬습니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시메온이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뵌 타이밍도 기가 막혔습니다. 그는 얼마나 경건하고 충실한 신앙인이었던지 성령께서 항상 그의 머리 위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하루는 시메온이 성령의 은총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가던 중 그토록 염원하던 지복직관의 은총을 입습니다.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전으로 들어온 것을 시메온이 발견한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메시아 하느님, 아기 예수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은 시메온은 목이 메어 말을 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평생소원이었던 지복직관을 만끽한 시메온은 이제 더 이상 소원도 없게 되었습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정수리로부터 시작해서 발끝까지 관통하는 크신 주님 은총에 시메온의 입이 열립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에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복음 2장 29~30절)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메온이 누렸던 ‘살아생전 지복직관’이 우리에게도 불가능이 아닙니다. 부당한 죄인인 우리에게 ‘살아생전 지복직관’ 그게 가당하기나 하겠냐는 의문이 들지만,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다행스럽게도 너무나 가까운 곳에 열쇠가 있습니다. 바로 매일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입니다. 은혜롭게도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빵과 포도주의 기적 안에서,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 때마다 우리가 영하는 빵과 포도주,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매일의 성체는 우리 안에 매일 현존하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간절한 바람의 표현입니다.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고 싶어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겨운 바람의 표현이 영성체입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좀 더 잘 준비하고, 좀 더 마음을 비우고 깨끗이 한 후, 지극정성으로 영성체를 할 때 우리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경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거룩한 영성체를 통해 우주의 창조주 그 크신 하느님께서 이 좁디좁은 죄인의 몸 안으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때로 죄로 얼룩지고 때로 비참한 우리 몸이 지극히 거룩하신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이 내 육신이 예수님께서 머무시고 사시는 지성소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한한 우리 인생이지만 은혜롭게도 성체성사를 통해 영원성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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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주님은 어떤 사람을 관상기도의 은총으로 부르시는가?
오늘 복음에서 아기 예수님은 성전에 봉헌되시고 이때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고 기쁨에 넘칩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시메온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이유는 ‘성령’께서 그 사람 위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가 주님을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려주셨고 결국,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 메시아를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에서 가장 높은 ‘관상’의 단계에 도달한 것입니다.
기도의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입니다.
이 중에서 관상기도는 소리기도와 묵상기도를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마지막에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기도입니다.
관상기도에서는 소리기도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고 묵상기도에서 정신적으로도 함께 계신다고 믿어지던 그리스도를 실제로 만나서 마음의 큰 변화를 체험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은총이 기도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지는 않고 오늘 시메온처럼 성령의 도움으로 인생에서
오직 그분을 만나는 것만이 의미가 있고 또 그분께서 반드시 만나주신다는 믿음을 성장시킨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포스베리의 역발상’이란 소리를 들어보셨습니까? 현재 육상 높이뛰기 선수들은 모두 배가 하늘로 향한 채 뒤로
바를 넘습니다.
이른바 ‘배면뛰기’ 자세입니다.
하지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미국의 한 선수가 이 자세를 처음 선보이기 전까지는 아무도 생각지도 못했던 자세였습니다.
그전까지는 다들 바를 앞 또는 옆으로 장대를 넘었습니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당시 21살의 미국 선수 딕 포스베리가 배면뛰기를 처음 시도했고,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배면뛰기는 현재 ‘포스베리 플롭(fosbury flop)’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포스베리 플롭은 지금도 스포츠사에서 역발상의 백미로 꼽히고 있고, 스포츠계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으로 불릴 정도입니다.
포스베리는 높이 뛰기 선수였지만 배면뛰기를 하기 전까지는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희박한 실력이었습니다.
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그는 분명히 이 한계를 극복할 방법이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다 뜀틀 공중제비돌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고 영감을 받습니다.
그리고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뒤로 뛰기를 연습합니다.
어느 각도에서 어떻게 뛰어야 가장 좋은지의 수 없는 과정을 통해 기록이 향상되었고 올림픽 대표로 발탁되었으며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올림픽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례는 현재 수영 자유형과 배영에서 발로 턴을 하는 동작인 ‘플립 턴’의 발견에서도 이어집니다.
아돌프 키예프 선수는 100야드(91.44m) 배영 경기에서 누구도 불가능하다는 마의 1분 벽을 깨고 싶었습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결과 물속에서 회전하여 발로 터치를 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고 1935년 배영 100야드 경기에서 59.8초로 마의 1분 벽을 돌파합니다.
그리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배형 100m에서 기록한 1분 05초 9는 이후 20년 동안 깨지지 않았습니다.
바라고 믿으면 분명히 만나게 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서기 위해 극단적으로 자신을 몰아붙이면 반드시 만나는 해답이 있는데, 그리스도도 그렇게 만나게 됩니다.
희망과 믿음이 있다면 그 양 날개로 사랑이 있는 곳까지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 단 하나만을 바라는 완전한 ‘희망’과 또 그렇게 희망하는 이에게 반드시 그분은 만나주신다는 ‘믿음’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시메온에게 그런 희망과 믿음을 ‘성령’께서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령께서는 왜 누구에게 그런 희망을 주고 누구에게는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이는 진정으로 ‘원하고’ 어떤 이는 원하는 척만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 그리스도를 만나기를 원해야 성령께서 이끌어주십니다.
목동들이나 동방박사들도 메시아의 탄생을 그렇게 원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천사와 별로 그들을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끄신 것입니다.
관상기도를 아주 잘 표현한 영화가 있는데 이란의 마지드 마지디 감독의 ‘천국의 빛깔’(The color of Paradise)입니다.
아름다운 이란 북부의 자연이 특히 돋보였던 이 영화의 주인공 소년 무하마드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에게 손가락의 감각으로 세상 사물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말해주는 아저씨에게 그는 눈물을 흘리며 그가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저씨도 알잖아요.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내가 시각장애인이기에 모두 내게서 도망가요. 볼 수만 있다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일반 학교에 다니고 싶어요. 그렇지만 나는 맹인학교에 다녀야 해요.
내가 원하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에요.
우리 선생님은 우리가 볼 수 없기에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대요.
근데 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를 소경으로 태어나게 해서 당신을 보지 못하게 했을까요?
선생님은 말했어요.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시고 저는 그분을 느낄 수 있대요.
저의 손가락의 감각을 통해서요.
그래서 저는 손을 여기저기 뻗는 거예요.
하느님을 만질 수 있을 때까지요.
그리고 그분에게 나의 마음속 비밀까지도 다 털어놓을 수 있도록요.”
아이가 원하는 것은 손의 감촉으로 나무의 질감을 느껴서 그것들을 생존을 위한 일거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분명 손을 뻗다 보면 주님을 만질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그는 새의 지저귐을 듣습니다.
직감적으로 새끼 새가 둥지에서 떨어졌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더듬더듬 나뭇잎들을 손으로 뒤집니다.
자칫 새끼가 다칠 수 있으니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입니다.
고양이가 다가옵니다.
그는 새끼 새를 고양이에게 빼앗길 수 없어서 솔방울을 들어 고양이 울음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던집니다.
이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위해 제물을 준비하고 그것들을 노리는 새들을 쫓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그렇게 작은 새 한 마리를 발견합니다.
무하마드는 새끼 새를 자신 윗도리 앞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새소리가 나는 나무를 찾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로 기어오릅니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우 힘겹게 기어오릅니다.
그리고 둥지를 찾아 새끼 새를 넣어줍니다.
그리고 고마워하는 새들의 소리를 듣습니다.
무하마드는 미소를 짓습니다. ‘사랑’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만나기를 원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분만을 만나려는 바램과 그분을 반드시 만날 수 있기에 나의 더듬거리는 손짓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과 희망만이 결국엔 우리를 한 완전한 실체인 사랑이신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이끕니다.
관상에서의 그분과 만남은 한 인간이나 혹은 생각이나 관념이 아닌 한 온전한 사랑의 실체와의 만남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가 “목마르다!”라는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목마른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으로 보이게 된 것과 같습니다.
또한, 김하종 신부가 한 냄새나는 가난한 아저씨를 안았을 때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라는 소리를 들은 것과 같습니다.
나의 존재가 완전히 그리스도로 변하여 모든 사람 안에서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입니다.
이런 시각의 변화로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함부로 대할 수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처럼 우리도 그분을 만나기만을 원하고 그분의 자비만을 원하며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분명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무엇보다 이 희망과 믿음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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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성탄 팔일 축제 제 5 일-묵상과 기도
주님성탄에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심을 경축합니다.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에서 해방되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하느님의 당신 인간을 위한 자애와 사랑을 드러셨습니다. 세상에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성탄 대축일 전야부터 주님 세례 축일까지 성탄시기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계명, 곧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분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된다. 그것으로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그분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리스도의 길은 빛의 길이며 그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길이다. 하였습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루살렘 성전의 아기 예수님의 봉헌을 알리고 있습니다. 성전에서 예언자 시메온은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보았다. 이는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 마련하신 것으로, 민족들에게 계시의 빛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다. 예수 아기가 이스라엘 사람들을 쓰러지게도, 일어나게도하며 반대의 표징이 된다.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의 영혼은 꿰찔리고,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난다. 고 예언하였습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되돌아봅니다. 나와 이웃, 그들과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그리고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1요한 2,3-11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주님의 율법에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고 기록된 대로 한 것이다.
그들은 또한 주님의 율법에서 “산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집비둘기 두 마리를”바치라고 명령한 대로 제물을 바쳤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시메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였는데, 성령께서 그 위에 머물러 계셨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
그가 성령에 이끌려 성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기에 관한 율법의 관례를 준수하려고 부모가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들어오자,
그는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이렇게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아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기를 두고 하는 이 말에 놀라워하였다.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22-35
실천
하느님의 계시의 빛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그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은 어둠과 상관이 없습니다. 빛속에 있는 이, 그리스도의 빛을 알고 있는 이들은 진리의 계명을 따릅니다. 그 계명은 '사랑'입니다. 빛속에 있는 이는 형제를사랑합니다.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빛이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있으며,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빛으로 새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님은 시메온의 말대로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냅니다.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는 것은 '사랑'이 기준입니다. 그가 사랑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계시의 빛의 드러남 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계시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 그 사랑을 통하여 온 세상을 충만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계시의 빛이신 주님을 따라, 그 사랑을 실천하고 그것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올립니다.
마침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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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229.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김 로마노 형제님.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제1독서(1요한2,3~11)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온 옛 계명입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3-10)
'계명'으로 번역된 '엔톨라스'(entollas)의 원형 '엔톨레'(entole)는 구약에서 하느님이 주신 율법 중에 하느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도덕적 규례'들을 뜻하는 것으로 '십계명'이 대표적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키다'에 해당하는 '테로멘'(teromen)의 원형 '테레오'(tereo)는 '시선을 '고정시키다', '준행하다'라는 뜻이다.
하느님이 주신 명령에 자신의 시선을 고정하여 철저하게 준행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을 알고 있음'(3)과 '나는 그분을 안다'(4)에 나오는 '안다'는 동사 '기노스코'(ginosko)는 단순히 지식적 차원의 앎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관계성 속에서 참된 체험으로 아는 것을 말한다. 본래 체험적이고 관계적인 앎을 의미하는 동사이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5)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단순히 사실에 대한 판단과 지식적 인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까지 나가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본문에 '완성된다'는 단어 '테텔레이오타이'(tetelleiotai)의 원형 '텔레이오오'(teleioo)는 지속적인 성장과 발전의 의미를 포함한 개념으로서 '완전하게 하다', '성취하다'라는 뜻이다.
하느님께 대한 자녀들의 사랑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과 복종을 통해서 점진적으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온 옛 계명입니다.'(7)
저자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예컨대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 등에도 이미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요한 복음 13장 34절에 다시 강조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즉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유대적 노선과 그리스도교적 노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정통적인 교훈이라는 것이다.
초대 교회 영지주의 이단 중 한 사람인 마르시온(Marsion)은 구약의 하느님과 신약의 하느님을 날카롭게 분리시켜 구약의 하느님은 분노와 증오에 사로잡혀 잔인한 짓을 일삼는 저열한 신인 반면에, 신약의 하느님은 그리스도에게 임한 영으로서 자비롭고 은혜가 풍성하고 사랑으로 다스리는 우등한 신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런 마르시온에게 있어 '서로 사랑하라'는 개념이 구약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마르시온의 그런 주장이 비성경적이고, 자신이 지금 권면하는 계명이 오래된 정통 신앙을 따른 것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새 계명'(엔톨렌 카이넨; entolen kainen)(8)이란 말은 요한복음 13장 34절의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라는 말씀을 염두에 두었기에 나온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은 구약의 레위기 19장 18절과 같은 맥락에서는 새 계명이 아니지만, 레위기 19장 18절에 없는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한다'(마태5,44)라는 사상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족례때 당신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가리옷과 십자가의 길에서 다 도망간 사도들의 발을 닦아 주시며, 몸소 자신의 교훈을 실천해 보였다는 차원에서는 새 계명인 것이다.
그리고 8절 이하에 나오는 '어두움'으로 번역된 '스코티아'(skotia)는 '흑암'(darkness)을 뜻하는 단어로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으로부터 가려진 상태, 빛이 없는 혼돈과 절망의 상태를 의미한다.
반면 '빛'으로 번역된 '포스'(phos)는 하느님의 진리 및 생명을 의미한다. 이것은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신 십자가상 구속사업을 의미한다.
저자는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된 사랑의 계명을 알지 못하던 시간을 어두움에 비유하고,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이 계명의 의미를 알게 된 사실을 참 빛이 비친 것에 비유하고 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9)의 표현은 요한복음 12장 46절에도 나오는데, 빛의 비추심을 받는 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사랑의 순종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 자녀의 거룩한 성품을 말하는데, 빛이 되신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로서 그리스도의 성품을 삶으로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9절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에서 '미워하다'로 번역된 '미손'(mison)의 원형 '미세오'(miseo)는 '싫어하다','증오하다'라는 뜻으로써 형제에 대하여 깊은 증오심을 품고 적대적으로 행동하거나 용서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형제'로 번역된 '아델폰'(adelphon)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된 교회 내 구성원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빛 가운데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한 자로서 마땅히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이러한 형제의 사랑의 실천이 없는 자는 아직까지 어두움에 속한 자요, 하느님의 사랑을 알지도 못하고 그 사랑 안에 머무르지 못하는 자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이 없습니다.'(10)
10절의 '걸림돌'로 번역된 '스칸달론'(skandalon)을 '덫', '올무', '거리낌'으로도 번역된다.
이 단어의 동사형인 '스칸달리조'(skandalizo)는 '올무를 놓아 걸려 넘어지게 하다', '실족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그안에 걸려 넘어질 요소가 전혀 없음을 보여준다.
낮에 다니는 자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밤이라 할지라도, 빛과 같이 동행하는 자는 걸려 넘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빛이 그가 걸어가고 있는 길을 밝히 비추어 주어 발의 걸려 넘어짐을 막아주고, 지속적으로 걸어가야 할 길의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10절이 형제를 사랑하는 자에게 임한 축복을 보여 준다면, 11절은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게 임한 불행을 보여준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 속에서 진리의 길을 알지 못해 방황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자신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인데, 여기서 '눈'은 비유적으로 '판단력'을 가리키며, '멀게 하였음'은 '시력을 잃다', '정확하게 보지 못하다'는 뜻으로 문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를 가리킨다.
실례로 어두움 가운데 잠시 머무는 것은 시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오래 머물게 되면 점차적으로 시력을 잃어 마침내는 소경이 될 수도 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항상 어두움 가운데 있게 되고, 또한 그 가운데서 움직이게 되어 머지 않아 영적 시력을 잃고 멸망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인간에게 명하신 계명의 절반이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실패자는 이미 자기 인생의 반을 실패한 자이다.
12월 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하느님의 계명은 도덕과 윤리의 인간들의 계명이 아닙니다. 구원의 새 계명이 나타났습니다.
(1요한2,3-11)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 하느님의 계명 안에 예수님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 계명은 진리인 것이고 하느님의 계명은 예수님께서 진리라는 것이다.
앞 2절 2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예수님이시다.
(요한3,16) 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 우리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생명(구원)의 진리인 것이고 계명인 것이다.
(요한14,6)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예수님께서 구원의 진리이심을 믿지 않는 것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은 도덕과 윤리의 인간들의 계명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늘 조심해야한다.
(티토1,14) 14 유다인(사람)들의 신화, 그리고 진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의 계명에 정신을 팔지 않게 하십시오.
그리고 지킨다는 것, 행위를 말씀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 계명을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마음 밖으로 흘리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하는 그 지킴인 것이다.
(야고1,25)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십자가)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 말씀을 지키는 것, 간직한다는 것은 또한 믿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인 말씀, 곧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길을 구원의 진리의 계명으로 지키면(믿고 전하면) 인간의 지각으로 알 수 없는 당신 아드님을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내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 사랑을 믿는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
6 그분 안에 머무른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 당신의 말(뜻)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뜻)만 전하셨다. 일만 하셨다. 우리 또한 우리의 말, 일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예수님의 말씀만 진리로 믿고 말해야한다. 곧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구원의 진리로 전해서 이웃이 하늘의 대속, 그 진리의 용서를 깨닫고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그것이 이웃 사랑이며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
= 예수님처럼 내 생각과 뜻을 버리고(죽이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다른 이를 살리는 그 삶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7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지녀 온 옛 계명입니다. 이 옛 계명은 여러분이 들은 그 말씀입니다. 8ㄱ 그러면서도 내가 여러분에게 써 보내는 것은 새 계명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도 또 여러분에게도 참된 사실입니다.
= 구약의 모든 계명이 새 계명이었다는 것이다. 아담이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계명으로 받은 것을 치우시고 새 계명을 주셨다는 것이다. 곧 아담이 뱀의 유혹으로 선악의 열매(계명)를 먹고, 스스로 지킨 그 열심히 만들어 입은 옷은 죄를 덮을 수가 없어 벗기시고(치우시고) 하느님께서 친히 당신의 열심히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시어 죄(수치)를 덮으신 그 하느님의 사랑인 어린양의 죽음이 새 계명인 것이다.
인간의 열심, 의로움, 그 계명이 아닌 하느님의 열심, 대속의 그 의로우심으로 얻는 구원, 그것이 새 계명인 것이다. 그렇게 새 계명은 옛적부터 있었던 것이고 그 새 계명을 오늘 다시 말씀하시는 것이다.
8ㄷ어둠이 지나가고 이미 참빛이 비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어둠의 계명을 대속하시고 생명의 계명, 그 빛이 오셨다는 것이다.
(요한1,4-5) 4 그분(말씀, 예수)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세상)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세상)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 구원의 빛이신 그리스도, 그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는 용서는, 믿는 이는 누구나 다 얻는 용서다. 나와 너가 함께 받는 것이다. 그 진리를 믿는다면 형제를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속의 죽음, 그 용서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워한다면, 뱀의 유혹인 선악의 법, 그 도덕과 윤리의 세상의 법, 그 어둠속에 있다는 것이다.
10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은 빛 속에 머무르고, 그에게는 걸림돌(어둠)이 없습니다.
=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형제에게 주는 사람은, 세상의 법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1코린4,3-4참조) 그러나 하느님의 계명을 인간의 계명으로 지켜 버리면,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구원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1고린1,23) 23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그리스도는 유다인들 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 그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에게서는 가식(假飾)이 아닌 인간적 사랑과 진실된 기도가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11 그러나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께서 그릇되다 하신 세상의 논리로, 세상으로 형제를 판단하고 미워한다면(요한16,8참조) 그 세상의 법, 어둠이 눈을 멀게 해 구원의 길을 잃게 된다. (그것이 제사와 윤리의 율법이다.)
구원이라는 신앙의 목적도 잊고, 세상과 율법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6,23)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 그래서 구원의 그 하늘의 의로움을 깨닫는 신앙이 아닌, 인간의 뜻, 욕망을 위한 자기 의로움의 신앙에 열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곳에는 용서, 구원이 없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로마10,2-3) 2 나는 그들에 관하여 증언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위한 열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에 바탕을 두지 않은 열성입니다. 3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알지 못한 채 자기의 의로움을 내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느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하느님의 계약, 계명(할례)을 자신들의 복수(뜻)에 이용한,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로 저주를 받았던 그 선조의 후예로 구원이 없는 죽음이 늘 두려웠던 시메온, 그가 새 계명이신 아기 예수를 그리스도(구원자)로 깨닫고 마음에 품어 구원의 희망으로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듯이 주님! 당신의 새 계명, 그 구원의 말씀에 저희를 의탁합니다. 어둠의 법에 묶여 살지 않게 받아주소서~ 아멘!!!
성탄 팔일 축제 내 제5일 복음(루카2,22~35)
시메온은 그들을 축복하고 나서, 아기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34~35)
시메온이 축복하는 대상을 '그들', 즉 요셉과 마리아로 밝히고 있다. 당시 시메온은 아기 예수님을 꽤 오랫동안 안고 있었으며, 깊은 관심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에, 예수님께 대하여 축복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러운 듯 하지만, 시메온은 자신이 감히 구세주 예수님을 축복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 부모들만을 축복했다고 본다.
이제 아기 예수님의 부모를 향해 시작된 시메온의 축복은 곧 마리아에게로 이어진다. 이것은 아마도 마리아가 요셉보다 더 깊은 영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거나, 예수님으로 인해 직접적인 고통을 받는 당사자가 마리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요셉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즈음에 일찍 죽은 것으로 전해지며, 마리아는 그 이후까지 살아 예수님께 대한 온갖 비방과 더불어 십자가 처형까지 목격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많은 사람들'로 번역된 '폴론'(pollon; many)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향력의 지대함과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쓰러지게도 하고'로 번역된 '프토신'(ptosin; falling)의 기본형은 '프토시스'(ptosis)이며, 그 뜻은 '무너짐', '넘어짐'을 뜻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어지게 될 자들은 교만하여 꼿꼿이 서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구세주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비참하게 넘어질 것이다.
반면에 '일어나게도 하며'로 번역된 '아나스타신'(anastasin; rising)의 기본형 '아나스타시스'(anastasis)는 '일어서다'를 의미하는 동사 '아니스테미'(anistemi)의 명사형으로 '일어섬'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의 비참한 죄의 상태(예레17,9)로 인해 절망하여 넘어져 있던 자들은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일어설 것이다.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루카 복음 2장 12절에서도 나오지만, 예수님 자신은 '표징'(sign)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표징이 되기 위해서 '정해지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반대를 받는'으로 번역된 '안틸레고메논'(antilegomenon; which will be spoken against)는 '반대'를 뜻하는 '안티'(anti)와 '말하다'를 뜻하는 '레고'(lego)의 합성어로서 '반대하여 말하다', '적대적으로 말하다'는 의미이다.
특히 여기서는 수동태 현재 분사로 쓰여 '적대적인 말을 듣는', '비방을 받는' 이라는 뜻이며, 이 상태가 예수님께는 항상 현재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항상 반대를 받으신 예수님의 공생활을 생각해볼 때, 이러한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와 비방의 최고 절정은 인류 구속을 위한 성혈의 제단인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자 되심을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표징이었지만, 그를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멸망'의 표징인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여기서 '칼'로 번역된 '롬파이아'(romphaia; a sword)는 전쟁 때 살상용으로 사용되는 '큰 칼', '긴 창'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여기서 비유적으로 영혼을 가득 채운 '큰 고통'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당신의 피'로 번역된 '수 ~아우테스'(sou ~autes; your own)는 고통을 당하게 될 대상을 강조하는 표현이며, 직역하면 '너 여자 자신의' 이다.
마리아의 영혼에 칼에 찔린 듯한 아픔이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루카 복음 2장 34절 후반절을 염두에 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마음속 생각까지도 다 드러내 단죄하며,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 배척과 수난과 죽임을 당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아들의 그러한 모습을 지켜보는 어머니의 마음은 영혼을 뒤흔들 듯한 고통으로 가득하게 될 것이 예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볼 때도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이 땅에서 수난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세사의 섭리 안에서 이미 계획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여기서 '생각'으로 번역된 '디알로 기스모이'(dialogismoi; the thoughts)는 '마음속의 궁리', '뒤틀어진 생각'등을 의미하는 '디알로기스모스'(dialogismos)의 복수이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대체로 부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루카5,22; 6,8).
여기서도 이 단어를 사용해 장차 예수님께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실제로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내실 것이 예언되고 있다(마태23,25~27; 마르7,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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