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부천재활요양병원 원문보기 글쓴이: 이언석
1883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 모리스 런(Morris Run)이라는 탄광도시에서 출생하였다.
1883년 펜실베니아 주, 티오가 카운티라는 탄광촌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산골 마을에 대한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연과 책을 접하게 해준 어머니와 과학과 기술, 토목 공학 등 실리적 삶을 경험하게 해준 할아버지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고 말한다.
할아버지 윈필드 스코트 니어링(Winfield Scott Nearing)은 광산기술자였으며 모리스 런 탄광회사의 감독관으로 일하였기 때문에 지역 유지로 권한과 지배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 루이스 니어링Louis Nearing)도 탄광기술자로 일하였으며 1882년 미니 재브리스키(Minnie Zabriskie)와 결혼하여 3남 3녀를 두었고 스코트 니어링이 장남이었다.
할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뉴욕에 나가 브렌티노 책방에 들러 몇상자 씩 책을 사와 저녁에는 늘 서재에서 독서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어린 아이를 위한 어른의 배려가 돋보이는 가정 환경이었으며, 동서고금을 아울러서 그러한 환경에서 자란 어린이가 논리적인 두뇌를 지니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그는 자서전을 통하여 유복하게 자라 원칙을 신봉하고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구던 한 젊은이가 미국의 기성 사회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비판을 가하면서 보수적 급진주의자고 변화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
아동 노동이 집중적으로 행해지던 석탄광산, 유리 공장, 기계 공장, 직물 공장을 접촉하면서 사회의 체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교사의 길을 걸으면서 끊임 없이 사회의 부조리를 파헤쳤고, 무수한 강연을 통하여 문제를 제기했다고 한다.
니어링의 부모는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군인이 되기를 바랬지만 목회자기 되기위해 수사학교에 등록하였다. 하지만 부패한 기독교가 환멸을 느끼게되었고 자신들의 유일신만을 받아들이고 지구상의 대부분인 이교도를 배척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니어링은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였다. 1901년 펜실베니아 대학교에 진학하여 법률을 공부하였고 1902년 워튼(Wharton) 대학으로 옮겨 금융 경제학을 전공했다. 당시 워튼 대학의 학장이었던 패튼(Simon Nelson Patten) 교수를 만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자신이 바라는 인생의 진로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패튼은 당시 미국을 대표하는 경제학자였으며 보호무역주의자로 소비와 분배에 관한 균형잡힌 지식을 가진 인물이었다. 니어링은 패튼의 가르침을 받고 진보적인 경제학과 사회과학을 전공했으며 사상적으로는 역사학파로 분류되었고 그는 대학 교수가 되었다. 소수의 부자에게만 기회가 독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회 조정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또한 니어링은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일뿐만아니라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와야 사회경제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생산과 소비보다 분배에 비중을 두었고 1915년 미국사회학 저널에 소득과 분배를 분석한 '소득의 근거(The Way of Income)'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니어링은 사회주의의 공동체적인 장점을 인정하였지만 국가가 자본을 통제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폭넓은 수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미국이 세계1차대전에 참전하자 거대한 광기(The great Madness)라는 책을 출간하며 미국의 참전을 비판하였으며 반전주의자로 활동하였다. 또한 석유가 세계전쟁의 불씨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였으며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모멸적 차별을 비판하였고 무분별한 자본주의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스콧 니어링의 가치관은 당시 미국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는 교수직에서 물러나야만 했고 미국정부의 조사를 받았으며 공산주의 스파이로 몰려 결국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재판에서 무죄를 판결받았지만 니어링은 정치활동을 통해 자신의 가치관을 실현하기 위해 사회당에 가입하여 1918년 선거에 나섰다가 낙선하였다. 그는 전쟁을 반대하고 미국의 상업자본과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였고 노동문제에 관해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며 강연활동을 하였다.
1915년에서 35년까지 20년 동안 일년에 4백 여회 강연을 다녔다니, 주 평균 8-10회가량의 강연을 소화하는 생활을 했으며 강연과 해외 학술 여행 그리고 저술 활동을 통하여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하여 그는 평화주의자, 채식주의자, 사회주의자가 되어 버렸다고 회고한다.
첫째 우리 스스로 우주의 일부분임과 동시에 모든 현상 세계의 생명도 우주의 중요한 일부분이므로,
우주 안의 다른 생명체도 존중 해야 할 것이므로, 생명을 존중래랴 하기에 평화주의자가 되었다고 한다.
둘째 생명이 인간에게 중요한 만큼 우주적 조화의 일부분인 다른 생명체들의 생명도 중요하다고 믿어 채식주의를 택했으며, 채식주의를 충실히 실행한다면 다른 살아 있는 생물들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끼칠 것이며 또 생명의 조화를 어지럽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셋째 사회주의자가 된 것은 공동체 전체가 필요로 하는 일은 공동체가 소유하고 관리해야 하고, 이 모든 것이 인민을 위해 운영 되어야 하며 막대한 이윤이 개인에게 돌아 가는 자본 주의는 청산되어야 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능한 자신의 숙명에 순응하며 동료들에게 똑 같은 기회가 돌아가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참된 목표라고 생각하며, 협동을 사회적인 사고와 행동의 중심에 두고 경쟁을 협동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사회주의라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독서와 경험 토론과 사유의 결과,
더 나은 사회를 향하는 길이 진보라고 믿으며 자유주의를 '상한 갈대'라 보아 타도의 세상으로 삼은 것이
그 인생을 점철하는 사상이라고 보면 될 것같다.
기질에 따라 사람을 나누자면 안락한 사람을 열망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결단과 투쟁으로 이어지는 힘겨운 삶 속에서 희열을 느끼는 사람들,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안락한 삶을 사는 사람은 쾌락을 우선하여 매사를 생각한다.
각각의 세대는 제 몫만큼의 모험가와 활동가들 근면하고 끈질기며, 때로는 위험한 행동가들을 만들어 낸다.
이들은 안온한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기꺼이 산을 오르거나 도시를 재건하거나 달나라로 간다.
이들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줄곧 힘겨운 노력을 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이들은 새벽에 일어나 끊임없이 활동을 하며 밤에는 도서관이나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낸다.
어떤 위험이나 방해물도 이들을 단념시키지는 못한다.
나는 늘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운명을 같이해 왔다.
나는 인생을 즐기거나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의지해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일을 하기 위해,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힘닿는 데까지 열심히 일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개인생활과 집단 생활 속에서 구체화하려는 뜨거운 노력이 몸과 마음을 발달시킨다고 생각한다.
인간 문화의 유구한 흐름에 깊이와 폭을 넓혀온 힘이 지금 문화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이 힘은 장차 인간의 문화를 한 차원 높은 단계에 올려놓을 것이다.
[스콧니어링 자서전 서문중에서]
Scott Nearing - The making of a Radical
[출처] Scott Nearing - The making of a Radical |작성자 밀레
니어링은 산업자본주의가 인간 삶을 공허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보았으며 이를 극복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기위해서는 단순한 생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단순한 삶을 위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선택하였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그의 이런 사회활동으로 주변의 견제와 감시가 심해지면서 가족들도 니어링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스콧 니어링은 버몬트 주(州)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홀로 정착하여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삶을 살기로 했다.
생의 후반기로 접어든 니어링은 스무 살 연하의 매력적인 여성 헬렌 노드(지금은 헬렌 니어링으로 더 잘 알려진)를 만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처음에는 버몬트에서 그리고 후에는 메인에서 그들은 농사를 지으며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했고 겨울에 농장이 얼어붙어 농사를 지을 수 없으면 여행을 떠나고 강연을 하고 저술을 하며 지냈다.
1932년 부인과 함께 현금 300달러에 저당권 800달어을 설정하여 농장을 사서 손수 집을 짓고, 처음에는 단풍 나무 시럽을 생산하며 생계를 유지해 간다.
그는 소유욕을 억제하고, 상호 원조를 실천하며 살았으며,
1) 물질에 대한 탐욕에 물든 인간들을 괴롭히는 권력,
2) 다른 사람보다 출세하고싶은 충동과 관련된 조급함과 시끄러움,
3) 부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에 수반되는 근심과 두려움,
4) 많은 사람이 몰려 드는 복잡함과 혼란 등
네가지의 해악에서 벗어 난 생활을 영위하는데 성공했다고 스스로 평가한다.
자급농을 하며 건강을 유지하였으며 비결은
가축을 사육하지 않아, 치즈 버터를 위시한 축산물을 거의 이용하지 않았으며,
먹는 음식의 50%가량은 과일과 과일 주스로, 35%는 채소로, 10%는 지방, 5%는 단백질을 섭취하는 식생활로 고담백 식사를 벗어났으며,
술 담배, 커피나 차, 청량 음료등을 피하는 것으로 경제 원칙으로 삼았다.
시골에서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적은 비용으로 몸과 마음에 이로운 방식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여 보여 준 것이다.
"타자기보다 펜으로 글을 쓰고, 자전거를 타는 것보다 걷고, 발을 땅에 대고 내 주변의 일들을 관찰하고 기록할 수 있도록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좋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고체, 액체, 공기, 햇빛, 방열 같은 생존 환경의 요소들을 섭취함으로써 유지되어, 이런 산물을 섭취하면 인간 유기체는 별 문제 없이 유지 되어지는 것이다"
금식, 소박한 식사, 운동, 휴식은 수명을 조절하거나 생명을 최대한 활용하는 길이며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고 의사를 멀리하는 생활을 하라고 권고한다.
안락한 생활의 보장을 멀리하고 굳이 힘든 세상에 몸을 던진 것은 나름의 경제적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 중압감은 다음의 세가지를 염두에 두고 풀어 나갔다.
첫제, 지출을 최소한 줄일 것이며, 수입의 일부를 노후 생활을 위해 적립할 것이며,
그리고 자기가 먹을 것은 직접 재배해서 만들어 먹고,
빨래, 집짓기, 수선, 수리도 손수하고, 병을 치료하기 위한 비용을 피하기 위해 건강을 유지해야 하고,
집세, 이자, 세금 같은 고정 비용을 늘리지 않고, 예비비를 적립해 위급한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즉 최소한의 에너지와 돈을 지출하면서 최대한의 행복을 이끌어 내는 경제의 기본을 실천한 것이다.
절약을 위한 계획 경제, 전쟁 없는 세상, 파괴적인 도구를 대량생산하지 않는 세상, 우리의 몸이나 땅을 독으로 물들이지 않는 유기농법,
신체적, 정서적, 정신적, 제도적 차원에서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인식할 것,
문명의 유혹과 천박함을 간파하고 자존심과 품위를 지키며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간다는 삶의 방식.
경제가 자급자족에 가까워질수록 의존적 생활로 퇴보할 위험이 적어지며,
인간이 자연의 리듬에 가깝게 살면 살수록 안정감과 평온, 삶과의 일체감은 커진다.
자연의 리듬은 발육과 성장을 자극하고 대지에 든든하게 결합시킨다.
시골 생활이야말로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는 것이다.
급진 주의자로서 부유한 생활을 영위한 사람도 많았으며,
당시 소비 지상주의의 사회에서 '스콧 니어링' 식 지출의 황금율은 반대에 부딪쳤고 스스로 사회의 적이 되었으니,
실로 이를 실천으로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누구나 할 것이다.
"나는 인생을 즐기거나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지해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일을 하기 위해 그것도 있는 힘을 다해 일을 하기 이해 이땅에 태어 났다."
고 말하며 노등을 통한 생계유지만이 기생생활의 때를 벗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그 이후의 삶은 우리에게까지 잘 알려진 이른바 '웰빙 well-being'의 실현이다.
1932년 버몬트로 이사한 두 사람은 생계를 위한 4시간의 육체노동, 4시간의 지적 활동, 4시간의 친목활동으로 이뤄진 조화롭고 단순한 삶을 실천한다. 두 사람은 자연 속에서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동시에 저서를 쓰는 미래의 자연주의 지식인의 모습을 제시한다.
그들의 '웰빙'의 시작은 사실 경제적인 어려움이 큰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장기적인 시각으로 보면 도시는 삶을 유지하기에 너무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더 이상 가르칠 교단도 없고 저서를 출판해줄 곳도 없는 스콧 니어링에겐 어쩌면 선택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단순한 생계수단에서 그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그들에게 건강한 육체와 함께 일관성 있는 깊은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함께 한 50여 년간 두 사람은 변함없이 그 철학을 지켜냈고, 발전시켰으며, 책으로 펴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된다.
그는 인생의 가장 절정에 이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지극히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철저한 채식주의와 검약이 몸에 밴 그는 백 살이 되는 생일을 즈음해 지상에서의 자신의 임무를 마감하고 스스로 곡기를 끊었던 것이다. 그것은 은둔과 노동 절제와 겸손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분명한 원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맞이할 수 있는 그런 죽음이었다. 그는 1백년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가장 완전하고 조화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다.
1983년 8월 24일 100세가 되던 해, 스콧 니어링은 부인 헬렌 니어링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그렇게 그의 죽음은 '웰다잉 well-dieing'으로 마무리된다. 아타깝게 사고로 죽지 않았다면 헬렌 역시 100세를 넘길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자신이 살아온 1백 년의 시간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으로 의미있고 충만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 사람이었다.
더 이상 자기 몫의 짐을 운반 할 수 없고, 자신을 돌볼 수 없을 때,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하여 마지막 죽음의 순간이 찾아오면 죽음의 과정이 다음과 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를....
1.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서 죽기를 바란다
2. 어떠한 의사도 주위에 없기를 바란다
3. 의학은 죽음에 무지한 것 같다
4. 죽음이 임박 했을 때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 있었으면 한다
5.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마시는 것을 끊고자 한다
6. 어떠한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7. 어떤 식으로든 종교인이 장례를 주관해서는 안 된다.
8. 화장을 한 뒤 재를 거두어 나무 밑에 뿌려주기를 바란다.
9. 나는 죽음이 진행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느끼고 싶다.
10.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 없다.
11.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빠르고 조용히 죽고 싶다.
12. 주사, 심장충격, 강제급식, 산소주입,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13. 내가 죽어가는 자리에 참여한 사람들은 슬픔에 잠길 필요가 없고 오히려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 위엄, 기쁨과 평화를 갖추고 죽음의 경험을 함께하기 바란다.
14. 나는 온힘을 다해 삶을 살았으므로 기쁘게 또 희망찬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15. 죽음은 다른 세계로 옮겨 가는 것 혹은 깨어남이다. 삶의 다양한 전개와 마찬가지로 죽음 여기 우리는 흔쾌히 받아드려야 한다.
16. 이제 거의 다 왔다. 내가 원하기만 하면 해방될 가능성이 있다.
17. 더 이상 의식을 먹지 않겠다. 기쁘게 살았으니 기쁘게 가리라. 나는 내 의대로 떠나리라.
18.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마음에 따스함을 간직해라. 그러면 위대한 혼이 언제나 이제 무엇이고 붙잡을 필요가 없어 몸이 가도록 그냥 두세요,
19. 썰물처럼 흘러가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당신 몫을 다 했군요,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세요, 빛으로 나아가세요, 천천히... 천천히...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