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18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11. 선악과, 대물림을 믿습니다. 》
시 51:5
〈 나는 착한데 세상이 악하다 〉
“성선설이 옳아, 성악설이 옳아?”
아마도 초등학교 고학년 무렵입니다. 성악설, 성선설을 처음 접했습니다.
그때 나름대로 생각을 꽤 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모름지기 대화에는 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초등학생 수준에서 “나는 성악설이 옳다고 봐!” 하면, “나에게도 악이 있거든!”이 됩니다.
“나는 성선설이 옳다고 생각해!” 하면, “나는 착하거든!” 이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동안 성선설 지지자가 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다른 친구의 악을 경험하게 됩니다. 아무리 봐도 악입니다.
그때부터 성선설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성악설로 기울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이 다 내 마음 같지는 않아!”라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사람이 다 너처럼 순수한 줄 알아? 정신 차려 이 친구야!”
어느 순간, “나는 착하고, 세상은 악하다”라는 확증편향이 심중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렇게 고착된 가치관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 꽤 많습니다.
주관적 입장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살다 보면, ‘강한 자 앞에서는 수그리고, 약한 자에게는 강한 자’가 됩니다.
약삭빠른 처세술을 재빠르게 익힙니다. 좋게 이야기하면 서민이고 민초입니다.
☞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할 필요가 절실합니다.
‘나는 착한데, 세상이 악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이들도 나름대로 자기는 착하다고 확신할 것 아닌가?’
‘세상에 “나는 악인이야”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까?’ ~ 그런 사람 없습니다.
세상에 흔하고 흔한 것이 사기꾼들입니다.
그런데 “나는 사기꾼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는 한 명도 없습니다.
요즘 “먹튀”라는 말이 있습니다. 먹고 튀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나는 먹고 튀었습니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와 그들 사이, 뚜렷한 경계가 있을까요? 나는 은근슬쩍 가로챈 적이 없나요?
☞ 나와 악인 사이 경계가 없음을 깨달을 때, 자신을 객관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내가 틀릴 수 있고, 내가 악인일 수도 있다 〉
최근 제가 어떤 사람과 만나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변에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언을 해 주었습니다.
“그 사람은 청년시절부터 모든 책임을, 철저히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슬며시 약속을 취소하고 만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지면, 그 책임을 자신에게서부터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이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습니까? ~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반면에 모든 일의 책임이 자기에게는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제나 전적으로 남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균형이 필요합니다.
모든 일은 누구 한 사람 때문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복합적입니다.
타인에게 책임이 있음을 안다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균형입니다.
살아가는 동안 이 균형이 잘 유지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될까요?
그리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은 감정의 동물이다.” 이런 말을 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이성으로 균형을 잡고 하루하루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평생 악하게만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평생 선하게만 사는 사람도 없습니다.
말이 좋아 “법 없이도 살 사람”이지 속내를 들여다보면 내남없이 놀놀합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살다 보면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기도 합니다. 솔직한 고백입니다.
평생 안인들의 꾀를 따르기만 하는 사람도 없고, 죄인들의 길에만 서는 사람도 없습니다.
파스칼이 “사람은 흔들리는 갈대”라고 한 이유도 거기 있을 것입니다.
☞ 성악설도 틀리고 성선설도 틀렸습니다. 무엇이 옳습니까?
〈 인간 발달 5단계 〉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5가지의 “발달 시기”를 거칩니다.
첫 번째 “자기 생존 시기”
생존을 위한 잣대가 자기 자신입니다.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배부름, 불편함과 편안함, 갓 태어난 아이는 여기에 반응합니다.
춥거나 더우면 웁니다. 배고파도 울고, 어딘가 못마땅하면 웁니다.
우는 것이 생존을 위한 절대 신호입니다. 부모는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키웁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이 신생아 “자신의 본능적인 반응”입니다.
두 번째 “자기 소유 시기”
“내 것”을 확인하는 시기입니다.
장난감을 비롯하여 자기 맘에 드는 것은 “내 것”으로 소유하려는 강한 욕구를 드러냅니다.
“내 것”의 기준 역시 “자기”입니다. 자기 맘에 드는 것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자 합니다.
세 번째 “자기 확인 시기”
내 맘에 드는 것 모두가 “내 것”이 아님을 알면서 시작되는 발달기입니다.
철이 들면서, 좋은 것이라고 해서 모두가 내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내 것이고 어떤 것이 내 것이 아닌가를 분별해야 합니다.
이때부터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기 확인기”입니다.
네 번째 “자기 확장 시기”
자기의 소유에 한계가 있음을 절감하고, 어떻게 해야 자기 소유를 확장할지를 고민합니다.
자기 것을 확장하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단계입니다.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발달단계입니다.
다섯 번째 “자기 상실 시기”
자기의 소유가 점차 사라짐을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주변에서 자기를 지지하던 이들의 떠남을 경험하면서 시작됩니다.
점점 홀로 되고 종국에는 자신도 상실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절감하는 단계입니다.
①생존 시기 ②소유 시기 ③확인 시기 ④ 확장 시기 ⑤ 상실 시기
☞ 우리의 인생, 우리의 인생 싸이클입니다. 단계마다 “자기”가 접두사로 붙습니다.
〈 자기로 살아가는 인생 _ 自己中心 〉
인생이 이렇게 5가지 ‘시기’를 거치는데, ‘시기’를 ‘단계’로 바꾸어도 무방합니다.
① 생존 단계 ② 소유 단계 ③ 확인 단계 ④ 확장 단계 ⑤ 상실 단계
인생을 이렇게 다섯 단계로 제가 나누어봤습니다.
삶의 발달단계 이론은 더러 있습니다.
유명한 단계론이 있지만 저는 이렇게 분류해 봤습니다.
제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각 단계 앞에 ‘자기’라는 단어를 붙였다는 것입니다.
①자기 생존단계 ②자기 소유단계 ③자기 확인단계 ④자기 확장단계 ⑤자기 상실단계
사람은 철저히 ‘자기’가 중심이라는 뜻입니다.
① 내가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춥고 배고프면 울어야 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으앙~”하고 울어야 합니다. 생존입니다.
② 내 것이 있어야 삽니다.
내 것을 위하여 목숨까지 걸어야 합니다. 소유입니다.
③ 세상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지는 못함을 알게 됩니다.
내가 무언가를 갖기 위하여는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④ 내가 충분히 가지기 위하여 내가 커져야 합니다.
손이 커져야 하고 배포도 커져야 합니다. 확장입니다.
⑤ 내가 언제까지나 확장할 수 없음을 깨닫는 시기가 옵니다.
하나하나 내려놓아야 합니다. 상실입니다.
삶의 5가지 시기, 인생의 5가지 단계를 나눠봤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입니다. ‘자기’입니다.
당연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럼 세상을 내가 살지, 남이 내 인생을 살아줍니까?”
맞습니다. 틀리지 않습니다. “내 인생 내가 삽니다. 내가 살고 내가 책임집니다.”
핵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나’ ‘자신’ ‘자기’ 인생은 철저히 ‘자기중심’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은 ‘이기주의’와 통합니다. 같은 말입니다.
인류 역사는 이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인간의 한계’입니다.
☞ 제가 분류한 인간 발달 5단계는 ‘인간의 한계’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 사람의 한계 _ 악 〉
‘인간의 한계’에 착안하여 사람의 일생, 다섯 단계 혹은 다섯 시기로 나누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한계’를 주목할 차례입니다.
사람이 똑똑하고 잘난 것 같지만, 사람들에게는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이 뛰어넘지 못하는 한계는 무엇입니까?
☞ 시내를 건너다보면 물 속에 사는 물고기를 발견합니다.
물 속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헤엄치면서 자유자재로 돌아다닙니다.
우리는 물 속에서 매우 부자연스럽지만, 물고기는 물 속에서 얼마나 빠르게 움직입니까?
물 속에서 유유자적 생존하는 물고기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물 밖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 고기가 물 밖으로 나오면 죽습니다.
이것이 물고기의 한계입니다.
사람에게도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의 한계는 ‘자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물고기는 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사람은 자기(自己)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 손톱 밑에 든 가시가, 이웃집 노인네 죽음보다 더 아픕니다.
내 고뿔 감기가 아내의 갱년기 고통보다 훨씬 더 고통스럽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사람은 자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 남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가져와 똑같이 아파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치명적 한계입니다.
사촌이 땅 사면 배가 아파요, 한 다리가 천리이고, 남의 행복이 나의 불행입니다.
물 속의 물고기는 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이 한계이지만, 사람의 한계는 매우 악합니다.
☞ 에고이즘, 이기주의가 한계입니다. 이 한계는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한계는 자기의 행복으로 기뻐하기보다, 타인의 불행으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사람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까?
☞ 선악과를 따 먹으면서부터 이렇게 되었습니다.
선악과 이후 인간의 일생은,
① 생존단계 ② 소유단계 ③ 확인단계 ④ 확장단계 ⑤ 상실단계를 거치게 되었습니다.
☞ 더욱이 안타까운 것은 ‘자기 중심’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산다는 것입니다.
〈 사람의 속성, 성경이 밝힌다 〉
제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성악설 성선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사람이 날 때부터 선하냐, 아니면 악하냐?” 이 질문은 출발이 잘못되었습니다.
이렇게 선과 악, 둘로 나누려는 것은 잘못 꿴 첫단추입니다.
성선설과 성악설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어떻게 접근해야 합니까?
사람은 선과 악에 대하여 자신이 결정하겠다는 고집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선과 악을 자신이 판단합니다.
내가 춥고 배고프고 불편한 것은 악입니다.
내가 따뜻하고 배부르고 편안하면 그것이 선입니다. 그렇게 “자기 생존기”를 통과합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자신이 판단하는 동물이 사람입니다.”
①자기 생존기 ②자기 소유기 ③자기 확인기 ④자기 확장기 ⑤자기 상실기
단계마다 “자기울타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평생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죽는 줄로 압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 인간의 한계, 자기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선악과 후유증입니다.
세상을 분석하고, 사람을 분석하는 데, 철학과 사상을 들이댑니다.
이는 잘못입니다. 세상과 사람을 분석하려면 성경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사람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누구냐를 바라보아야 정확합니다.
사람의 한계, 인생의 한계는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아십니까?
“사람이 저마다 선과 악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사람의 한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 《 11. 선악과, 대물림을 믿습니다. 》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다윗이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를 모독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선악과 죄악 중에서 잉태하고 태어난다는 뜻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면, ‘자기’ 밖으로 뛰쳐나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보이고 주님과 맞닥뜨리고, 성령의 임재를 고백하게 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