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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성인 이야기] 보살핌이 절실한 이들의 수호성인
자선활동의 수호성인, 성 빈첸시오 드 폴(축일 9월 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은 16세기 말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신학을 공부하고 20세 때(1600년) 사제품을 받은 성인은 어느 부인에게 기부금을 받으러 갔다가 돌아오는 배에서 해적에게 붙잡혀서 노예로 팔려갔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그를 가톨릭 신앙으로 인도하고 종살이에서 풀려났다. 프랑스로 돌아온 성인은 종살이하던 시절에 겪은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았다. 그리하여 뜻있는 이들의 조언, 권유, 협조를 받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 한편으로 자신의 소명을 깨달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자신을 봉헌하기로 스스로 서원했다.
본당 사제로 일하면서는 본당 단위의 ‘애덕회’를 조직하여 본당 신자들과 함께 가난한 가정을 돕는 일에 힘썼다. 또한 어느 귀족 가문의 전담 사제로 일하면서는 그 귀족이 관할하는 배에서 노를 젓는 선원(죄수)들의 처우를 개선했고, 그들을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을 세웠으며 영성적인 도움도 주었다. 그리고 시골의 가난한 농민들을 복음화하기 위한 ‘선교 사제회’도 설립했다. ‘라자로의 집’이라는 나환자 병원에서 생활한 까닭에 ‘라자로회’라 불리게 된 이 선교회의 사제들은 농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펼쳐나갔고, 농민들의 일이 많아지는 농번기에는 파리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며 수도 생활에 전념했다. 성인은 또한 고아원을 세워 고아들을 돌보았고, 북아프리카의 그리스도인 노예들이 풀려나도록 도왔으며,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을 위한 구호사업도 펼쳤다.
한편, 성인은 남편과 사별한 뒤 가난한 이들을 위해 봉사하던 과부를 알게 되어 그에게 시골 본당의 애덕회들을 방문하고 격려하는 일을 맡겼다. 그리고 이 과부와 그의 주변 상류층 부인들의 협조에 힘입어 ‘애덕 부인회’를 설립했다. 그들은 병원을 찾아 환자들을 돌보고 버림받은 아이들을 보살폈다. 이러한 봉사 활동을 계속해서 이어갈 수녀회가 필요하다고 본 성인은 ‘애덕의 수녀회’를 설립하고 이 과부를 초대 원장으로 임명했다. 이 과부가 바로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리약이고, 이 수녀회가 오늘날의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 사랑의 딸회’다.
이렇듯 가난한 이들을 보살피는 데서 자신의 소명을 찾고 인간의 고통과 비참함을 줄이는 데에 생애를 바친 성인은 오늘날에도 각종 자선 활동과 이러한 활동들을 펼치는 모든 단체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장애인들의 수호성인, 성 세르불로(축일 12월 23일)
6세기의 성 세르불로는 어려서부터 손발이 마비된 장애인이었다. 똑바로 설 수도 없었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일 수도 없었으며, 손을 입으로 가져갈 수도 없었다. 어머니와 형제들은 성인을 로마의 성 클레멘스 성당 문 앞에 데려다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했다. 성인은 이런 고통과 치욕을 겸손과 인내로 참아내며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자신의 성화를 위해 힘썼다. 글을 읽지 못하던 성인은 경건한 이에게 성경을 읽어 달라고 부탁해 하느님의 말씀들을 들으며 마음에 새겼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가와 감사 기도를 노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성인은 자기에게 희사하는 사람들에게 찬미가며 시편을 노래로 들려주었고, 사람들은 성인의 노래를 ‘천국에서 들리는 신비로운 음악’으로 들었다. 그런가 하면 성인은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뺀 모든 것을 더 궁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성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은 590년경에 선종한 성인을 두고, 부잣집 문 앞에 있던 라자로에 비교하며(루카 16,19-31 참조) 고통 중에 살았으나 늘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누어주었기에 천사들의 노래를 들으며 천국의 영광으로 들어갔다고, 성인의 이러한 생애는 건강하고 부유하지만 선을 행하지 않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고 칭송했다. 이때부터 성인은 장애인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아 왔다.
노숙인들의 수호성인,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축일 4월 16일)
성 베네딕토 요셉 라브르는 18세기에 이탈리아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인은 여러 차례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했으나, 성격이 너무 신중하다거나 또는 건강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수도 성소가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 성인은 로마 순례에 나서 기도하고 구걸하며 맨발로 걸어서 갔다. 그리고 서유럽의 여러 성지들도 순례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성인은 어디를 가든 맨발로 걸어 다녔고, 밤이면 노천이나 건물의 처마 아래에서 묵었다. 누더기 옷을 입고 지저분한 몸으로 문전 걸식을 하면서도 약간의 돈이라도 생기면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 성인은 말을 적게 하는 대신에 기도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사람들의 냉대마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말년에 로마에서 낮에는 성당에서 기도와 성체조배를 바치고, 밤에는 콜로세움에서 새우잠을 자며 지내던 성인은 성주간 수요일에 성당에서 성체를 조배한 뒤 어느 푸주한의 집에서 선종했다.
무소유를 실천한 순례자요 ‘새로운 프란치스코’인 성인의 삶은 세상에서 잊히거나 묻혀버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성인을 일컬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된 그리스의 살로이와 러시아의 유로디비에 견줄 만한 높고 훌륭한 성덕을 쌓은 이라고 평가했다. 40시간 성체조배 신심의 전파자이기도 한 성인은 노숙인의 수호성인으로서 공경을 받는다.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의 수호성인, 성 로코(축일 8월 16일)
[수호성인 이야기] 감정 피해자들을 돕는 수호성인들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의 아니게 절망 또는 좌절, 배신, 질투, 무고라는 감정상의 또는 정서상의 부정적인 행태들을 겪기도 하고, 그로 인해 힘겨워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리고 교회에는 이러한 감정적 폐해를 겪는 피해자가 이를 잘 극복하도록 돕는 성인들이 있다.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는 성녀 리타(축일 5월 22일)를 기억해요
성녀 리타는 14세기 말에 이탈리아 중부의 카시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던 성녀는 부모의 뜻에 따라 12살에 강제로 결혼했다. 성격이 난폭하여 어린 아내에게 학대와 폭행을 일삼던 남편은 어떤 사람과 싸우다가 살해되었다. 그리고 두 자녀는 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성녀는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지냈다.
그러는 한편, 마음에 두었던 어느 수도회에 입회 신청서를 세 차례나 냈지만 기혼자였다는 이유로, 가정생활이 화목하거나 행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러나 성녀는 포기하지 않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에서 밤새워 기도하던 성녀가 문득 수녀원 기도방으로 옮겨져 기도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튿날 아침에 성녀를 발견한 수녀원에서는 하느님의 뜻이라 여겨 성녀의 입회를 허락했다.
이후로 성녀는 선종할 때까지 지난날의 삶을 반성하며 자신처럼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고행하고 기도하는 데 전념했다. 성녀는 여러 차례 환시를 체험했고, 죽기 15년 전에는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처럼 머리에 상처가 생겼다. 이 상처는 죽을 때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그리고 선종 후에도 성녀의 유해는 부패하지 않았고 이마의 상처도 그대로 있었다고 한다.
불우한 처지에서도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하느님을 향한 굳은 믿음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지낸 성녀는 좌절하고 실망한 사람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배신감으로 괴로울 땐 성녀 풀케리아 아우구스타(축일 9월 10일)를 기억해요
성녀 풀케리아 아우구스타는 4세기 말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딸로 태어났다. 그런데 9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2살 아래의 어린 동생이 황제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리고 15살 때 제국의 원로원은 성녀를 황후나 영예로운 여성에게 내리던 칭호인 ‘아우구스타’라 부르기로 결의했고, 이로써 성녀는 황제의 섭정이 되었다. 진즉에 동정녀로 살기로 서원한 성녀는 동생의 성장과 교육을 위하여 헌신했고, 그러다 보니 궁중의 분위기가 마치 수도원처럼 바뀌었다고 한다.
성녀가 섭정 역할을 수행한 지 7년 되는 해에 결혼한 동생 황제는 자신의 아내에게도 아우구스타 칭호를 부여했다. 그리고 황제의 누이인 성녀와 아내인 올케 사이에는 알력이 생겼다. 올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이던 네스토리우스의 이단을 지지함으로써 정통 교회를 옹호하던 성녀를 배신했다. 그리하여 성녀는 궁중에서 쫓겨났다. 그런데 이번에는 올케가 황제에게 불충했다는 이유로 유배를 갔고, 성녀는 궁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른 뒤 황제가 사냥을 하던 중 말에서 떨어져 세상을 등졌다. 이에 성녀는 황녀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성녀는 나라를 다스리는 한편, 가톨릭을 지지하고 옹호하며 교회, 구호소, 병원들을 세워 그리스도교의 정신과 사랑을 실천했다. 그리고 451년에 열린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그리스도 단성설’이라는 이단이 단죄되도록 힘썼다.
가까운 이에게 배신을 당했으나 이를 믿음으로 극복하고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한 성녀는 배신을 당해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질투 때문에 마음 아플 땐 성녀 헤드비지스(축일 7월 17일)를 기억해요
성녀 헤드비지스는 14세기에 옛 헝가리와 폴란드 왕국에서 왕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성녀는 아직 아기였던 두, 세 살 무렵 오스트리아 왕국의 한 공작과 정략결혼을 약속하고 한동안 비엔나에 가서 지냈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뒤 맏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성녀는 13살에 왕국을 이끌어갈 새로운 후계자로 지목되었다. 성녀는 여왕 자리에 오르면서 오스트리아 공작과의 약혼을 포기하기로 했다. 오직 조국 폴란드와 그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맡겨진 하느님의 뜻이라 여기고 그에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귀족인 야기엘로 대공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두 나라가 하나로 통합되고 거의 400년 동안 평화로운 동맹을 유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교도였던 야기엘로는 성녀와 결혼하면서 자신과 전 리투아니아 백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대로 리투아니아는 신앙심 깊은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야기엘로는 또한 두 나라가 통합된 뒤 자신의 이름도 폴란드의 라디슬라우스 2세로 바꾸었다. 한편, 성녀는 라디슬라우스의 개종을 도왔고, 앓는 이들과 가난한 이들에게 선을 베풀며 살았다. 그리고 아기를 출산하는 도중에 숨을 거두었다.
라디슬라우스는 본래 자기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에도 과민하게 신경 쓸 정도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고집불통에다 걸핏하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라디슬라우스를 어질고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시킨 것은 성녀의 믿음과 신심이었다.
고집불통이 남편의 질투심마저 가라앉힌 성녀는 질투의 대상이 되어 마음 아픈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억울하게 무고당하면 성 도미니코 사비오(축일 3월 9일)를 기억해요
성 도미니코 사비오는 19세기 중반에 이탈리아 토리노 가까운 곳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10자녀 가운데 하나로 태어났다. 그리고 5살 때부터 미사 복사를 했고, 7살 때 첫영성체를 했으며, 어려서부터 사제가 되고자 했다.
본당신부의 추천으로 마침 청소년 사목을 준비 중이던 성 요한 보스코 신부와 연결되었고, 12살 때 토리노에 있는 종합기숙학교에 입학했다. 성인이 되려는 열망이 넘쳤던 도미니코 사비오는 여러 가지 특이한 고행을 하고자 했다. 그러나 성 요한 보스코의 지도를 따라 특이한 고행보다는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해나가는 데서 성화의 길을 찾았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몹시 추운 어느 겨울날, 같은 반 친구 2명이 교실의 난로에 눈덩이와 쓰레기를 가득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때마침 교실에 들어온 선생님에게 도미니코 사비오가 그런 나쁜 짓을 했노라고 거짓 고자질을 했다. 도미니코 사비오는 모든 반 친구가 보는 앞에서 벌을 서면서도 두 개구쟁이 친구들이 한 짓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 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느냐는 물음에 도미니코는 사비오는 이렇게 대답했다. 온갖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면서도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신 주 예수님을 본받고 싶어서 그랬노라고 말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굳이 자신의 결백을 내세우려 하지 않을 만큼 나이에 비해 성덕이 출중했던 성인은 억울하게 무고를 당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성 로코는 14세기에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연안에서 태어났다. 자녀가 없던 부모의 간절한 기도 끝에 태어난 성인은 신심 깊은 부모 슬하에서 자랐으나 스무 살 무렵에 부모를 잇달아 여의었다. 지방 장관을 지낸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도 있었지만, 성인은 이를 포기하고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다음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마침 이탈리아에서는 흑사병이 창궐했고, 성인은 지나는 곳마다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보살피며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에서도 또한 병원을 찾아가 전쟁과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돌보았다. 성인이 십자성호를 긋고 기도한 다음 아픈 부위에 손을 대면 상처가 낫고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많은 사람이 소문을 듣고 성인에게 몰려들었고, 성인을 그들을 물리치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성인 자신이 흑사병에 걸렸는데, 도움을 받던 마을 사람들은 매몰차게 성인을 쫓아냈다. 인적이 드문 숲으로 피해 가서 목숨을 연명하던 성인은 어렵사리 병이 나은 뒤에 다시 자신을 쫓아낸 마을로 돌아가서 앓는 이들을 보살폈다.
그 뒤 성인은 힘들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병으로 생긴 상처와 남루한 행색을 본 고향 사람들은 그가 전임 장관의 아들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오히려 당시 전쟁 중이던 이웃 나라에서 순례자로 변장시켜 보낸 간첩이라는 누명을 씌워 5년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끝내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고 수감생활을 하던 성인은 끝내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그제야 비로소 성인을 알아보았다.
성인은 무엇보다도 치유의 은사를 베푸는 사람으로 유명했고, 특히 흑사병이나 다른 몹쓸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큰 공경을 받아 왔다.
[수호성인 이야기] 대중형보다 생활밀착형인 수호성인들
우리네 삶에는 그다지 보편적이거나 대중적인 관심사 영역은 아니지만, 좀 더 삶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부문도 있다. 그리고 교회에는 그러한 부문에서 각별한 기능을 하는 성인들이 있다. 이를테면 청소년, 가출인, 여행자들을 위한 수호성인들이다.
청소년과 신학생의 수호자 성 가브리엘 포센티(축일 2월 27일)
성 가브리엘 포센티는 19세기에 이탈리아 아시시의 부유하고 신심 깊은 가정에서 13남매 중 11번째로 태어났다. 4살 때 어머니를 잃고 큰누나 밑에서 자라던 중에 그 누나마저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성인은 성격이 차분하고 사려 깊으며 착하고 붙임성 있는 아이로 성장했다. 또한 지성적이고 능력이 뛰어나며 문학과 예술에도 놀라운 재능을 보이는 아이였다. 그 위에 신앙심과 성모님을 향한 신심,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사랑까지 갖춘 아이였다.
25세 때 예수 고난회에 입회하여 수도 생활을 시작한 성인은 첫 서약을 하면서 ‘성모 통고의 가브리엘’이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때부터 평범한 일상을 통해서 완덕을 얻고자 특별한 노력을 하며 살았다. 사소하고 자칫 따분할 수도 있는 삶에서도 기꺼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에 완벽하게 따르는 것이라 여기며 지냈다. 밝은 성품, 기도하는 정신, 다른 이들에 대한 배려, 규칙 엄수, 육체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을 닮고자 하는 열망이 성인의 일상에서 빛을 발했고, 그리하여 길지 않은 수도 생활에서도 높은 덕의 경지에 이르렀다.
성인은 6년 남짓 수도 생활을 하면서 사제의 길을 가기 위한 준비 또한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건강이 나빠졌고, 결국 31세 되던 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성인의 무덤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다. 나중에 역시 성인이 된 젬마 갈가니가 성인의 무덤을 방문하여 전구를 청하며 기도함으로써 치유되는 일도 있었다.
교회는 품행이 올바르고 신심이 돈독한 젊은이의 이상적인 모범이었던 성인을 청소년, 그리고 수도회 수련자들과 신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는 가톨릭 활동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한다.
가출 청소년들의 수호자 성녀 알로디아(축일 10월 22일)
성녀 알로디아와 성녀 누닐로 자매는 에스파냐에서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슬람의 탄압이 대대적으로 벌어지던 9세기에 이슬람교도 아버지와 그리스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잘 키웠다. 그런데 아버지가 죽은 뒤 어머니가 재혼한 사람이 또한 이슬람교를 믿는 남자였다. 새아버지는 의붓딸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며 학대했다. 진즉에 동정녀로서 하느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기 원해서 결혼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성녀와 언니 누닐로는 새아버지의 학대와 탄압을 피해 같은 신앙을 가진 사촌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의붓아버지는 두 자매의 가출을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자매는 체포되었다. 그리고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참수형을 당한 뒤, 자매의 시신은 짐승들이 뜯어 먹도록 내버려졌다고 한다. 그런데 신비로운 빛이 나타나서 짐승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시신을 보호했다. 결국 두 자매의 시신은 어느 우물에 안치되었다. 그때부터 그 우물의 물은 치유의 능력을 지닌 것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의붓아버지의 학대와 탄압을 피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성녀는 본의 아니게 집을 떠난 이들, 특히 가출 청소년들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여행하는 이들의 수호자 성 크리스토포로(축일 7월 25일)
3세기경의 인물로 추정되는 성 크리스토포로는 로마 황제 데키우스의 박해 때 쇠몽둥이 매질을 당하고, 화형을 받고, 화살을 몇 차례나 맞고도 죽지 않아, 결국 참수형으로 순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성모 마리아께 기도해 얻은 아들이라는 성인은 기골이 장대하고 힘센 청년으로 성장하자, 세상에서 가장 힘세고 용감한 사람을 주인으로 섬기겠노라 다짐하고 주인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에 악마가 십자가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느 은수자에게서 그리스도께 충성하라는 권고를 듣고 세례를 받았다.
그 뒤 성인은 자신의 신체적 이점을 살려서 물살이 거센 강에서 사람들이 무사히 건너도록 돕는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면서도 언젠가 자기보다 힘센 사람이 나타나면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아이를 어깨에 메고 강을 건너는데, 그 아이가 점점 무거워지더니 끝내는 힘이 달려서 강을 건널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당황하여 고개를 갸웃거리는 성인에게 그 아이가 말했다. “너는 지금 온 세상을 짊어지고 있다. 나는 네가 찾아 마지않던 세상의 창조주이며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를 어깨에 메고 간다’라는 뜻의 이름을 가졌고, 험한 강을 건너는 길손들이 안전하게 건너도록 돕는 삶을 산 성인은 교회에서 여행자와 자동차 운전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는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번개가 치고 폭풍이 불거나 전염병이 돌 때면 성인의 이름을 부르며 무사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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