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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1-3 하나님이 야곱에게
기온의 변화가 심해지면 노약자나 유아들은 입맛을 잃고 기력이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럴 때마다 젊은 사람들은 혼자 잘 난 체 해서 식사를 밖에서 홀로 해결하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즐겨먹는 영적인 식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구역과 주일학교며 성경학교, 선교회를 두신 목적이 그런데 있습니다. 모이기를 독려해야 합니다. 함께 먹고 마시면서 이 길을 같이 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르신 말씀, 곧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서 단을 쌓으라 명하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하나님 말씀에 그의 가족과 함께 신속하게 응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 본문 1절 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라는 매우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는 야곱이 최후 곤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적절한 시기에 구해 주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렇게 모세는 하나님께서 한번 포용하신 자기 교회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을 한 개인 속에서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조하신 절차를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에게 즉시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를 과도한 슬픔과 걱정으로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극한 곤경에 이를 때까지 위로를 연기하셔서 그에게 인내를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의 처지는 그때에 극도로 비참하였습니다. 사면팔방 모든 것이 그에게 분노해서 주변 열방의 수만큼 많은 죽음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위험을 깨닫지 못할 만큼 우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의 반 주검이 된 그를 부활의 방식으로 회복시키실 때까지 걱정에 시달리게 하시며 환난과 고통을 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과 또 이와 유사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가 아주 잠자고 있는 듯이 보일 때조차 우리 구원을 감시하고 계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모세는 야곱이 얼마나 오랫동안 불안 가운데서 떨고 있었는지 말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호와께서 그를 이렇게 소생시키시기까지 그가 아주 크게 곤경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문맥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소생시킨 주요 치료제가 ‘여호와께서 이르셨다’ 는 표현 속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적으로 그를 다른 곳으로 옮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즉각 모든 위험에서 그를 멀리 떼 놓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그에게 손을 뻗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모든 자의 흉포한 마음을 억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셨다면 아무도 그를 해칠 마음을 품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환란과 고통의 한복판에 그대로 두십니다. 모세는 무익하게 이 점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최대의 위로를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침을 받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셨을 때, 그분이 우리에게 잘 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자답게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는 것은 우리 생활의 주요 과업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 가운데로 통과하는 것도 주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밖에도 야곱이 본 이 이상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야곱은 이 이상으로 하나님이 자기 구원이시라는 사실을 참으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말씀으로 미리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돌릴 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깨닫는데 느리고 둔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추가되지 않는 한 단지 경험만으로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은총을 증명하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소유했던 그런 믿음은 말씀으로부터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때 누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를 유심히 살펴야 합니다.
2. 본문 1절 후반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입니다.
1) 자기 종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으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본래 품으신 계획입니다.
그런데도 그분께서는 자기 종을 조소거리로 만드시는 것처럼 나타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곱과 같은 경우에는 즉시 이런 반대가 제기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여호와여 주께서는 진실로 내게 올라 가라고 명하십니다만 모든 길이 다 막혀 있나이다. 이는 내 아들들이 그런 불을 질렀으므로 나는 어떤 은신처에 숨더라도 안전할 수가 없음이로소이다. 나는 감히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가 없나이다. 만일 내가 큰 무리를 이끌고 내 진영을 이동하기 시작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겠나이까? 나의 이동으로 나는 새로운 원한을 불러 일으키지 않겠나이까?”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야곱의 신앙은 오히려 이런 방식으로 완전히 증명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 자기 여행길에 인도자와 수호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허리띠에 둘러메고 신적 은총을 의지하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더욱이 여호와께서는 자기 뜻대로 이루어져야 할 것을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약속을 추가하심으로써 자기 종을 격려하십니다. 그러니까 1절 후반은 명령과 약속이 같이 있어서 종합적으로 위로와 격려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에 야곱이 자기 형을 피해 황망히 도주할 때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자기가 바로 그 때 나타난 하나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상기시키십니다. 이 말씀 가운데에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단도 바로 그 지점을 가리킵니다. 제단은 신적으로 지정된 감사의 표징입니다. 야곱도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 칭송하고 감사 드리기 위해 그리로 안전히 오게 될 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느 곳보다 벧엘을 택하셔서 자기 성소로 지정하십니다. 야곱은 그곳을 보기만 해도 두려움을 쫓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영광이 거기서 나타났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에게 은혜를 감사하라고 권면 하십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모든 신자에게 인자하시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이것은 신자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에 빚진 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일평생 동안에 그 은총에 감사하고 찬송하는데 힘쓰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 이제 오늘날에도 우리는 본문 1절에서 큰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수하여 환난을 만나게 된 성도를 결단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은 세겜에 거주하는 것(33:18) 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거기 거주하다가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34장).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그에게 나타나셔서 “벧엘로 올라가” 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야곱이 거기 올라가야 할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그곳에 임하셨고 거기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그곳에서 하나님께 그가 서원 하였던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28:20-22). 혹 그는 그 사실을 잊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그에게 임하셔서 명령도 하시고 약속도 하심으로써 야곱이 다시 기억하여 그의 임무를 준행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명하신 일은 신속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서 명령받고 약속한 것을 지키는 일은 신자가 급히 서둘러야 할 의무입니다.
3. 본문 2절 상반은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입니다.
여기에는 야곱이 신속하게 순종한 사실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필요한 행동에 대해 의심하지도 논란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명령을 받은 대로 재빨리 여행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물건들을 정리할 뿐만 아니라 자기 집을 우상으로부터 깨끗이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우시기를 소원한다면, 어떤 식으로든지 그분을 우리에게서 분리시키는 모든 방해물은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라헬이 했던 도둑질이 어떤 결과에 도달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라헬은 자기 아비를 미신으로부터 끌어내려고 바라기는커녕 도리어 그의 과오를 따랐습니다 그녀는 이 해독을 자신이 지녔을 뿐만 아니라 온 가족에게 확산시켰습니다.이렇게 해서 그 신성한 가정은 극히 악한 폐풍에 물들었습니다. 여기서는 또 불경건하고 악한 예배에 대한 인간 성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순수한 신앙이 전수되어 온 야곱의 가정이 이처럼 우상을 꽉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야곱 또한 이 악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그는 자기 아내의 영향력 아래 있어서 어느 정도 그것을 묵인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가정이 우상으로부터 입은 폐해를 은연중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우상을 ‘이방신’ 이라고 부름으로써 그 자신과 나머지 식구를 다 정죄합니다. 그가 오직 한 분 하나님께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면 이런 구별이 나오겠습니까? 여기서는 암암리에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세상 다른 모든 신과 비교가 이루어집니다. 세상은 악하게도 자신을 위해 신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참 신이 누구인지를 결정할 권리와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자신을 아브라함에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야곱은 자기 태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상에게 대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기 집에 우상을 허용해 들였습니다. 이제 야곱은 그것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참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빛나는 곳이면 어디서나 하나님께 대한 참 지식과 배치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축출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배치되는 것을 스스로 날조하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기 아내의 달콤한 말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잠들어 버렸을 것입니다. 또 육신의 부주의로 의무 이행을 소홀히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상호 권징에 실패한 경우일 수 있습니다. 그런 미적거림이 우상주의를 지금까지 키워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야곱은 위험을 의식하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는 각성해서 하나님 예배에 보다 순수하고 열성적인 인물이 됩니다. 거룩한 족장에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면 우리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우리는 번영의 시기에는 세상 방식으로 안일에 빠지는 일을 두려워해야 만 합니다. 반면에 어느 때든지 만약 그런 동면과 태만이 몰래 우리에게 침입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의 징계를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계는 우리를 각성시키고 자극하여 태만으로 지은 과오를 부지런히 숙청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자는 여기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집이 우상으로 오염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 성소로 간주하십니다.
야곱은 우상 숭배자와 섞여 살았습니다. 또 그의 아내는 우상숭배 애호자가 되어서 그의 품에 안겨 잠을 잤습니다. 그렇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제사를 항상 열납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용서를 허락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큰 자비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의 과오는 그대로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큰 자비를 태만에 대한 탈출구로 남용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야곱이 이들 미신을 시인하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예배가 점차적으로 몰락하지 않은 것은 야곱의 덕분이 아니었습니다. 라헬에게서 시작된 부패는 보다 널리 퍼지기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사례는 이와 똑같은 일을 가르쳐 줍니다. 경건한 교사들이 진리 주장에 아무리 애쓰며 수고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가 세상에서 득세하는 일은 드물며 일반 백성 사이에는 미신이 상존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런 미신이 위장되는 경우에는 그 폐해가 커서 전체 사회를 지배할 때까지 계속 만연하게 됩니다.
오늘날 카톨릭교에 스며든 많은 미신도 이와 같이 소중히 간직되어 영향력을 얻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 신앙이 목사의 나태와 침묵에 의해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악의 시초부터 담대히 항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지도자들끼리의 상호 권징이 필요합니다. 또 일반 신자들이라도 항상 진리를 먹고사는 자들답게 겸비한 자세로 항거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4. 본문 2절 하반은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입니다.
1) 이 부분은 외면적인 회개와 고백에 대한 권면입니다.
야곱의 소원은 앞서 스스로를 더럽혔던 자기 가족이 의복을 바꿈으로써 그들의 새로운 청결을 증명합니다.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후에 모세가 그들에게 장신구를 떼내라고 명령한 것도 동일한 의도를 갖습니다. 단지 그 사례에서 다른 점을 관찰한다면 백성이 자기들의 장식품을 제거하고 나서 초라한 복장으로 자기 죄를 슬피 고백했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집에서는 옷을 바꾸었습니다. 이는 더럽혀진 그들이기에 새 사람으로서 나아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 외형적 의식으로 우상숭배자로 하여금 자기들의 죄가 얼마나 큰 악이었는지를 깨닫게 하려는 의도는 동일하였습니다. 비록 회개가 내적 미덕이며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해도 이 의식은 꼭 필요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인간은 여러 가지 막대기로 자극을 받아야 자기들의 죄 때문에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그 결과 그 죄악을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내적으로 자기 죄를 반성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공공연하게 선언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5. 본문 3절은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입니다.
이런 점을 종합하면 2-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의 집을 청결히 하라는 명령은 분명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게서는 야곱에게 단을 세우라는 명령은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께 완전히 복종하기 위하여 모든 장해를 제거하는데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구조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을 때 이 일을 행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일치한 행동을 촉구합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는 자기와 함께 한 권속들에게 세 가지 부탁을 하였습니다.
(1) 이방 신상을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2) 자신을 정결케 하라고 하였습니다.
(3) 그리고 의복을 바꾸라 고 하였습니다.
“의복을 바꾸어” 입는 것 같은 것은 회개의 본질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회개를 공적으로 단행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회개가 하나님 앞에 철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야곱은 여기서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을 이유도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환난을 당했을 때에 그의 기도를 “응답하시며”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내게 응답하시며” 란 말씀은 그의 서원 기도(28:20-22)를 들어주셨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셨는데도 우리가 모르는 체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섭섭케 하는 악한 행동이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50편에서도 이 사실이 반복되면서 강조되고 있습니다(시50:14-15, 22-23).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택하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롬8:28-30). 우리 또한 주께서 우리를 택하여 부르신 줄 알고 주를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서 나타나야 할 열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