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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캘리그라피창작협회
교직원연수교육 특강 자료
문학과 캘리그라피
석야 신웅순 (시인․평론가·서예가, 중부대 명예교수)
1.들어가기
문학은 자신의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다. 범박하게 말한다면 인생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문학(언어예술)=인생 표현
캘리그라피는 글씨나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 좁게는 ‘서예’를, 넓게는 활자 이외의 모든 ‘서체’를 이르는 말이다.
‘글자를 아름답게 쓰는 기술’은 ‘언어를 무엇으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언어는 도구와 방법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표현된 기술이 바로 서예, 서체이다.
서예,서체=캘리그라피=언어+도구+방법
도구는 문방사우 외 주변의 그 어떤 것도 재료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도구로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자신만의 기술을 필요로 한다. 언어 예술에서 캘리 예술로 이동할 때 자신만의 개성, 감성, 창조성 등이 발휘된다.
도구
언어예술 → 캘리예술
방법
2. 전통서예와 캘리그라피
한 때는 전통 서예와 캘리그라피에 대해 혼선을 빚어왔던 것은 사실이다. 한국캘리그라피 창작협회에서 전통서예와 캘리그라피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캘리그라피를 접할 때 전통서예의 장점을 차용하여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멋진 캘리 그라피라는 새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는 누구나 황홀하게 고민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통서예의 난해함과 현대인들의 바쁜 일상으로 인하여 전통서예의 학습을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시나브로 모필에 대한 기본적 표현능력을 기르고 독서를 통한 상상력 심화는 필요한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인용문에서 기본적 표현 능력과 독서를 통한 상상력 심화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전통서예를 후자는 캘리그라피에 방점을 둘 수 있을 것 같다. 캘리그라피를 접할 때 전통서예의 기초에 캘리그라피의 상상력이 가해져야한다는 말일 것이다.
캘리그라피를 좋아하는 첫번째 이유는 감성적 조형에 있다.단어나 문장이 가지고 있 는 의미를 살려 감성에 호소하며 표현한다는 점이 캘리그라피의 가장 큰 특성이다. 감 성의 극대화를 위해 때로는 회화나 디자인과 접목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전통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창조성에는 공통적이나 전통서예는 심미성에 캘리그라피는 감성 쪽에 호소하는 면이 더 크다. 전통서예는 클래식, 세미클래식 쪽이라면 캘리그라피는 트롯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전통서예는 오랜 임서 끝에 다양한 서체와 이론을 습득한 후에야 비로소 창작을 할 수 있지만 캘리그라피는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나 다 그 멋과 맛을 알고 쉽게 접하며 즐길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전통서예와 캘리그라피는 순수예술이지만 캘리그라피는 여기에 하나 더해 생활예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대중성 면에서 보면 순수예술에서 또 하나의 장르로 갈리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캘리그라피는 전통서예보다는 그 범위가 훨씬 넓고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다.
전통서예=순수예술
캘리그라피=순수예술+생활예술
3. 캘리그라피의 근원
캘리그라피의 근원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대 그림글자나 상형문자, 갑골문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글자 모양이 글자의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백터상형문자백터재료
위 상형문자는 한자가 형성되기까지의 발전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상형문자나 갑골문자는 캘리그라퍼들에게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준다. 글자의 원형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구성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글씨라고 해도 글씨나 그림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캘리그라피의 맛이 없고 격이 떨어진다. 캘리그라피에는 흔히 글씨나 그림에 코드가 숨겨져 있다. 이는 언어의 의미와 글씨·그림의 구성에서 비롯된다. 이 때 작가의 감성, 방법이나 기술 등이 십분 발휘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캘리그라피는 언어의 의미에다 감성을 불어넣는 또 다른 차원의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1차는 글의 의미이고 2차는 글의 의미에 감성을 싣는 작업이다. 말하자면 문학이라는 의미에 글씨라는 감성의 옷을 입혀 아름다운 캘리그라피를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 때 문자의 원형인 상형문자나 갑골문자 등을 적잖게 활용하기도 한다.
생활예술이라 해서 순수예술이 아니고 순수예술이라 해서 생활예술이 아니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무게 중심이 어디로 기울어져 있느냐의 문제이지 경계를 지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이다.
캘리그라피-순수예술
생활예술
4. 추사체「잔서완석루 殘書頑石樓)」의 예
사람들은 캘리그라피가 흔히 근래에 생긴 것으로 알고 있다. 캘리그라피는 사실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다만 그 용어를 근래에 와 사용했고 그것을 또 다른 대중적인 예술로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지 않았나 생각된다.
캘리그라피의 원조를 추사체에서 찾아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추사체에는 그 시대와 작가의 코드가 숨겨져 있고 글씨 자체가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어 지금의 캘리그라피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추사체는 본문과 협서 그리고 낙관으로 되어 있다. 추사의 낙관은 당시 시대와 개인과의 관계들이 숨겨져 있어 글씨의 뜻을 이해하는데 적잖한 도움을 주고 있다. 추사의 명호는 삼사여백개로 당시 추사의 심리를 읽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추사의「잔서완석루」는 캘리그라피의 방향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적절한 자료라 생각된다.
추사의「잔서완석루 殘書頑石樓)」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강상시절의 작품이다.
흔히「잔서완석루」는 추사의 운필법이 집약된 명작 중의 명작이라고 불리운다. 임창순 선생은 이 작품의 구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글씨에는 전서․예서․해서․행서의 필법이 다 갖추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경쾌한 운필이 아니라 오히려 중후한 멋을 풍긴다. 글씨 전체의 구도를 보면 위쪽은 가로획을 살려 가지런함을 나타냈고,아랫쪽은 여러 가지 형태의 세로획을 들쭉날쭉하게 써서, 고 르지 않지만 전체의 조화는 잘 이루어져 있다. 이런 구도는 일찍이 다른 서예가들이 상 상조차 할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이다.
유홍준은 빨래줄에 걸린 옷가지들이 축축 늘어진듯한 분방한 리듬이 있으며 중후하면서도 호쾌하고 멋스러우면서 기발한 구성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위 공간은 같은 위치로, 아래 공간은 제멋대로 앉혔다. 직선과 곡선이 적절히 배합된 전·예·해·행·초서가 섞인 자유분방한 글씨이다. 기괴한 것 같고 기괴하지 않지도 않고, 글씨 같고 그림 같기도 한, 회화미까지 승화시킨 작품으로 당시 시대와 자신을 하나의 상징으로 구축한 명품이다.
낙관은 ‘삼십육구주인 三十六鷗主人’으로 되어 있다.
강희진은『추사 김정희』‘삼십육구주인’의 명호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주역에서 이 9를 경계하기를 나서지도 말고, 벌리지도 말고, 대들지도 말기를 권한다. 부중부정 不中不正하여 더 나갈 바가 없으니 나아가면 뉘우침만 남는다.9는 이런 항룡 의 수로 늙은 용은 힘을 쓸 수 없는 의미로 회한을 나타냄으로써 여기서는 자조적인 자 신의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강제된 은퇴에 대한 역설이다.
‘잔서’는 ‘남아있는 글씨’, ‘완석’은 ‘고집스러운 돌’을 말한다. 추사 연구가들은 「잔서완석루」를 ‘희미한 글씨가 고집스럽게 남아있는, 돌이 있는 누각 또는 고비의 파편을 모아둔 서재’ 쯤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성현은 추사 글씨에서 정치인으로서 추사 코드로 읽어 내고 있다. 그는 “추사는 정적의 눈을 피하기 위한 장치로 작품 하나하나, 작품 속 구석구석까지 번득이는 코드들로 채워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추사의 서화작품에는 정적의 눈을 피해 세도정치를 비판하고 그의 개혁 사상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 유배에서 풀려난 추사는 예산에서 피폐한 가산을 정리하고 지금의 용산에 작은 거처를 마련했다. 멀리 노량진이 보이고 한강을 유유이 떠도는 갈매기들이 보이는 누추하지만 여유로운 곳이다. 그러나 추사는 낚시를 즐기고 갈매기들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한가한 노인이 아니었다. 추사는「잔서완석루」에서 한 시대의 아픔과 자신의 회한을 깊숙히 숨겨놓았던 것이다.
추사 글씨는 자유분방하다. 「판전」같은 천진함이 있는가하면 「불이선란」의 화제나 초의 스님에게 쓴 편지 같은 짓궂음도 있다. 글씨 하나 하나에 메시지와 코드들을 명호와 함께 숨겨두고 있다. 글씨 같은 그림, 그림 같은 글씨와 상형문자도 있다. 세한도에서는 지금의 댓글 같은 글이나 시들도 달려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 스타이도 하다.
추사의 글씨는 전체가 하나의 상징으로 되어 있어 그것은 추사의 글씨와 그림 그리고 명호를 함께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추사의 계산무진
추사의 ‘계산무진’은 68세 전후의 만년 작품으로 계산(溪山) 김수근에게 써 준 글이다. “계산은 끝이 없다”라는 뜻으로 추사의 작품 중 균형미가 탁월하고 조형성이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다.
계산무진(谿山無盡)을 적으며 시내 계(谿는 溪의 이체자)자는 전서법과 팔분예서법을 합쳐서 썼다. 뫼 산(山) 자는 파격적으로 위쪽으로 올려붙여 여백을 확보했다. 2줄로 쓴 무진(無盡)의 복잡 함과 뫼 산자의 단순함이 균형미까지 확보한 탁월한, 추사 김정희 (1786~1856)의 작품이다
캘리그라피의 전범을 추사체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거와 현대는 분명 시대가 다르다. 다르지 않는 것이 있다. 예술이다. 이백과 두보의 시, 윤선도나 황진이 시조 작품들이 현대의 작품들보다 격이 낮다고 볼 수 있을까? 섹스피어나 톨스토이의 작품이 지금의 ‘토지’나 ‘아리랑’보다 낮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아니다. 예술은 보편성과 항구성을 갖고 있어 그래서 그것이 명작으로 남는 것이다. 캘리그라피가 대중적이라해서 격이 낮다고 볼 수는 없다. 추사의 작품처럼 현대의 캘리그라피도 명작으로 충분히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캘리그라피가 하나의 예술 분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이상 캘리그라피는 순수예술이건 생활예술이건 예술의 본질을 벗어나 존재할 수는 없다. 이미 대중적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어야하는 캘리그라피의 존재 이유가 되었다.
5. 현대 캘리그라피, 문자 그림
2012년 한글서예 멋전 출품작, 전명옥의 문자그림「한마음」
필자가 담헌의 문자그림을 보고 평설한 글이다.
나무인 줄 알았다. 꽃나무인 줄 알았다. 갓핀 매화 같기도 하고 갓핀 살구꽃 같기도 하다. 담헌의 ‘한 마음’ 글씨. 자음, 모음으로 그루터기도 만들고 줄기도 만들고 꽃도 잎 도 만들었다. 단순한 한글 글자가 작가의 손을 거치면 한폭의 그림으로 무한한 상상력 을 자극하고 있다. 한글의 우수성이 새삼 놀랍기만 하다.
한문의 문자 그림은 더러 있어도 한글의 문자 그림은 흔치 않다. 한글이 단순해 보통의 창작으로는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예술이 그래서 위대하다.
담헌의 작품은 독자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한참을 뜯어보아야 리트머스 시험지 같이 서서히 글자의 의미가 드러난다. 자음과 모음을 맞춰보는 쏠쏠한 재미도 있고 여백에 이야기를 채워보는 즐거움도 있다.
우리는 한마음으로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작가는 그런 의미에서「한마음」이 우리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조금은 난해하지만 평거 김선기 작품을 감상해 보도록한다.
2013년 제 25 회 대전광역시 미술대전 초대작가에 출품작.
평거,김선기 작 「허주(虛舟).」
작가의 작품 변이다.
세상을 살면서 과욕으로 인한 화를 불러 일으키는 일들이 많음이 안타까워 욕심을 버리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살아간다는 것은 강물 위에 떠 있는 한 척 배일지 모르겠다. 세로로 된 글자가 ‘허(虛)자요 가로로 된 글자가 상형문자 ’주(舟)’자이다. 돛도 닻도 용총도 없는 그야말로 빈배, ‘허주이다. 상형문자 배 ‘주(舟)자에다 오른쪽에 빌 ‘허자를 세우고 무게에 맞게 왼쪽에 작가의 ‘낙관을 앉혔다. 신묘하게도 빈배가 균형을 이루었다. 비바람이 불어도 뒤집어지지 않을 것 같다.
또 하나 숨은 코드가 있다. 오른쪽으로 180도 기울이면 허주가 전복된다. 뒤집어진 ‘虛’자를 세로로 읽으면 한글 '허주'로 읽혀진다. 전복된 배 또한 허주이다. 제대로 있어도 ‘虛舟’요 뒤집어졌어도 ‘허주’이다.
작가는 일그러진 우리 삶의 모습을 허주로 표현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려운 일이 닥쳐도 욕심을 버리라는 준엄한 메시지일지도 모르겠다. 제대로 된 빈배도, 전복된 빈배도 결국 허주이니 말이다.
돛, 용총, 닻도 없는 빈 배, 이 허주. 우리 삶의 부운일편, 행운유수의 여유이리라. 바쁜 현대인들에게 많은 생각을 해주게 하는 작품이다.
6. 문학과 캘리그라피
이제 시(문학)와 서화가 결합된 캘리그라피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파도를 거부하면 섬이 아니지
고독하고 외롭지만
언제나 좌절을 모르고
우뚝 서있는 섬
그러기에 섬이라 부르겠지
나의
섬
그리고
너의
섬
뿌리끼리는 서로 통하는
섬과 섬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지만
서로에 대한 확신을 하는 것은
땅 속으로는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 수월 권상호의 「섬」
2012년 대한민국미술서예부문 특별초대전작 수월 권상호의 「섬」
많은 시인들이 ‘섬’을 노래했다. 같은 섬을 노래했어도 같이 노래한 섬은 없다. ‘나의/ 섬/ 너의/ 섬/ 뿌리끼리는 서로 통하는/섬과 섬’. 그렇다. 세상에 그 어떤 섬도 뿌리로 연결되지 않은 섬은 없다. 수월은 그것은 믿음 때문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도 그렇고 미워하는 사람도 그렇다.
수월의 시․서와 함께 먼 바다에 떠있는 두서너 개의 섬. 외로운 듯, 그리운 듯,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외면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수월의 시선은 여기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의식 세계를 보고 있다. 의식은 바다 위에 보이는 작은 섬들이다. 무의식은 물 속에 잠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뿌리, 땅덩어리들이다. 우리가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바다 속에 묻혀있는 거대한 뿌리를 읽어낼 수 있을까. 수월은 이를 '믿음'이라는 말로 끌어내고 있다.
수월의 시․서․화는 자연스럽다. 글 따로, 글씨 따로, 그림 따로가 흔한 일인데 시․서․화가 하나이다.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한글의 소풍』전 박혁남의 작품 「꿈을 위하여」
글빛 박혁남의 시·서·화가 결합된 캘리그라피이다.
중앙에 날개를 활짝 편 채 날아오르는 학. 오른쪽 하단의 낙관 글씨, 왼쪽 하단 아랫 부분의 ‘맑고 밝은’ 직사각형 조각보 유인. 왼쪽에는「당신 축제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있다.
어제는 가고 오늘은 당신의 정원에 장미꽃 만발하였습니다. 햇살 들이치는 당신의 정오 씻기 운 하늘처럼 가벼운 날개로 푸른 꿈을 노래하여요. 거침없이 자유롭게 꿈처럼 날아오세요, 당신
의 축제에
- 박혁남의 「꿈을 위하여」
글씨가 모르는 곳에 그림이 있고, 그림이 모르는 곳에 글이 있고, 글이 모르는 곳에 글씨가 있다. 이런 여백이 캘리그라피의 멋과 맛을 내준다. 시‧서‧화가 따로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옛선비들은 이렇게 시‧서‧화로 사람들과 소통을 했다. 오늘날에인들 무엇이 다르랴.
졸작 필자의 시와 캘리그라피이다.
석야 신웅순의 「아내 5」
초겨울 외딴집에 불빛이 반짝인다
누구의 한 생애가
거기까지 와 있을까
산너머 풍경 소리가
들려오는 그쯤일까
- 석야 신웅순의「아내 5」
초겨울 외딴집은 물론 아내를 말한다. 아내는 언제나 기다리는 불빛이다. 그 옛날 내 어머니가 내 아내에게 물려준 그리움이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우리의 생애가 어디까지 와 있을까 자문자답해 본다. 산너머 풍경 소리가 들려오는 그 쯤, 거기까지 온 외딴집이다.
풍경의 ‘풍’자의 ‘ㅜ’를 길게 늘이어뜨리고 물고기 대신 ‘경’자를 달았다. 바람 불면 ‘땡그렁.땡그렁’ 소리가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리 표현해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일깨워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언어라는 문학의 의미에 글씨와 그림을 얹혀 또 하나의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캘리그라피이다. 어찌보면 글씨와 그림이 의미를 한계지울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글씨와 그림으로 인해 문학(시) 이외의 또 다른 의미를 생산해 낼 수도 있다. 캘리그라피는 짧은 문구로도 언제나 새롭고도 효율적인 메시지를 창조, 전달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예술이기도 하다.
7. 나가며
문학과 캘리그라피는 서로가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문학 없이 그림만으로도 메시지를 표현할 수는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 추상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문학과 글씨가 있어 구체적인 의미가 작성되고 메시지가 생성된다. 캘리그라피가 문학 없이는 존재하기가 어려운 또 하나의 운명이자 숙명이기도 하다.
세상의 삶이 전부가 텍스트이며 캘리그라피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이 인생의 표현이라면 캘리그라피도 결국 인생 표현에 다름 아니다.
궁극적으로 문학과 캘리그라피는 예술을 지향할 수 밖에 없다. 캘리그라피가 생활, 상업 예술이라해도, 전달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해도 예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미지, 감성이 우리 삶 자체를 지배하고 있고 또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은 자체만으로도 지상 최고의 고급 예술이다. 천지인을 본떠 만든 모음, 발성기관을 본떠 만든 자음의 자형들이 단순하나 단순 속에서도 천지의 조화와 천지의 기운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이것이 한글이다.
한글 자체만으로도 최고급 디자인이나 여기에 캘리그라피라는 금빛옷을 입혀 줌으로써 한국 문화 창달에 큰 몫이 되고 있다. 캘리그라피는 바로 우리말 우리글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또 하나의 예술이다. 나아가서는 캘리그라피가 한류 문화의 첨병 역할까지 해낼 수 있으리라 자못 기대해본다.
2020.7.18.
석야 신웅순의 서재, 매월헌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
졸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혼자서 고민하던 마음을 풀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좀,
담아 가겠습니다.
잡글입니다.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