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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빈목(西施顰目)
서시가 눈을 찡그린다는 뜻으로, 함부로 남을 흉내내다가 웃음거리가 됨을 말한다.
西 : 서쪽 서(襾/0)
施 : 베풀 시(方/5)
顰 : 찡그릴 빈(頁/15)
目 : 눈 목(目/0)
(유의어)
서시봉심(西施捧心)
서시효빈(西施效顰)
서시빈목(西施矉目)
효빈(效顰)
출전 : 장자(莊子)의 천운편(天運篇)
중국 월(越)나라의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가 눈을 찌푸린 것을 아름답게 본 못난 여자가 그 흉내를 내고 다녀 더욱 싫게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분수(分數)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남을 따라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장자(莊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도나 도덕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은 우화를 말했다. 공자(孔子)가 서쪽에 있는 위(衛)나라에 유세차 떠났을 때에 그의 제자 안연(顔淵)이 노(魯)나라의 악관(樂官)인 사금(師金)에게 선생님의 이번 여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사금은 공자(孔子)님은 곤경에 빠질 것이라고 하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사에는 짚으로 엮은 개를 쓰는데, 제상에 진열하기 전에는 대로 만든 상자에 넣고 수놓은 헝겊으로 싸서 소중히 다루네. 그러나 제사가 끝나면 내다 버리지. 그런데, 공자님도 옛날 성왕(聖王)이 쓰다 버린 짚으로 엮은 개를 주워다가 놀고 있네. 삼황오제(三皇五帝) 때의 예의와 제도는 오늘날에는 맞지 않으니 바꿔야 하네. 미인(美人) 서시(西施)는 가슴앓이병이 있어 언제나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네. 그러자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이 모양을 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찡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지. 그 흉한 모습을 본 마을 사람들 중에 부자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처자를 이끌고 먼 마을로 도망(逃亡)쳐 버렸다고 하네. 이 추녀(醜女)는 무엇이 서시(西施)를 아름답게 했는지 몰랐던 것일세. 성인(聖人)이 한 일이라고 무작정 흉내내는 것은 이 추녀(醜女)와 같다고나 할까 하고 말했다고 한다."
옳고 그름과 착하고 악함을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비유하여 효빈(效顰)이라고 말한다. 서시봉심(西施捧心), 서시효빈(西施效顰)과도 같은 말이다. 이 고사는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말엽(末葉), 오(吳)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한 월왕(越王) 구천(勾踐)은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절세의 미인 서시(西施)를 바쳤다. 그러나 월나라의 절세 미녀인 서시는 가슴앓이로 말미암아 고향으로 잠시 돌아왔다.
그런데 그녀는 길을 걸을 때 가슴의 통증 때문에 언제나 미간(眉間)을 찌푸리고 다녔다. 이것을 본 그 마을의 추녀(醜女)가 그 어여쁜 데 감탄하여 자기도 눈살을 찌푸리고 다니면 예쁘게 보일 것으로 믿고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찡그리며 서시의 흉내를 내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질겁을 해서 집 안으로 들어가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아무도 밖으로 나오려 하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은 이것을 보고 처자(妻子)를 이끌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이 추녀는 미간을 찡그린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만 염두에 두었을 뿐, 찡그림이 아름다운 까닭을 알지 못했다. 즉, 서시는 본래 아름다우므로 자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장자 천운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원래 반유교적(反儒敎的)인 장자가 외형에만 사로잡혀 본질을 꿰뚫어 볼 능력이 없는 사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으로 실로 의미심장하다.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孔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 정치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시키려는 것은 마치 서시빈목(西施顰目)을 흉내 내는 추녀의 행동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고사는 원래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에게 노(魯)나라의 악사장(樂師長)인 사금(師金)이 한 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 장은 사금의 말을 빌려서 장자가 공자의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외형에 사로잡혀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한 것이다.
장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도나 도덕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周王朝)의 이상정치를 그대로 노(魯)나라와 위(衛)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빈정대어 말한 것이다
서시가 하는 일이라면 눈살을 찌푸리는 것 마저 흉내낸다는 뜻으로써 남의 단점을 장점인 줄 알고 흉내내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을 비유하는 말이다. 요즘 잘나가는 연예인들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흉내내는 빠순이, 빠돌이 들에게 썩 어울리는 고사성어라고 할 수 있겠다.
서시로부터 유래된 고사성어 중에는 당돌서시(唐突西施)라는 말도 있다. 이는 진서(晉書)에 출전(出典)되는 말인데 한자 풀이로는 꺼리거나 어려워함이 없이 올차고 다부진 서시가 된다.
진(晉)나라에 주의(周顗)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매사에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 자였는데 하루는 친구 유량(庾亮)이 찾아왔다. 유량의 말이 “친구들이 자네를 악광(樂廣)과 비교하고 있네” 라고 하였다. 당시 악광(樂廣)은 진(晉)나라의 현인으로 죽어서까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이런 인물과 자신을 견준다는 말을 들은 주의(周顗)는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무염(無鹽)은 추녀이고 서시(西施)는 재색을 겸비한 미녀라네. 이는 갓난아이도 모두 알고 있거늘 당돌하게도 친구들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악광과 함께 나를 말한다면 이것은 무염을 서시와 똑같은 미녀라고 하는 것과 같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선녀와 같은 미모의 서시를 거스르는 일이 될 것이네. 그대들은 어찌 함부로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리하여 당돌서시(唐突西施)는 한자 본래의 직역과는 달리 즉 당돌하게도 서시와 비교하지 마라는 겸허한 뜻을 내포하게 되었다.
장자 천운편에 공자가 서쪽 위(衛)나라로 떠났을 때에 제자인 안연(顔淵)이 사금(師金; 魯나라의 太師 즉 音樂長)에게 스승의 출행(出行)에 대해 묻고 답하는 내용 중에 월(越)나라의 미인인 서시의 이야기가 나온다.
故西施病心而嚬其里, 其里之醜人, 見而美之, 歸亦捧心而 嚬其里.
고서시병심이빈기리, 기리지추인, 견이미지, 귀역봉심이 빈기리.
그러므로 서시가 그 고향에 있을 때에, 언짢은 일이 있어 눈살을 찌푸렸드니 그 마을의 못난 여자들이 그것을 보고 아름답다하여 제각기 가슴을 안고 눈살을 찌푸르며 돌아다녔습니다.
其里之富人見之, 堅閉門而不出, 貧人見之, 설妻子而去之走.
기리지부인견지, 견폐문이부출, 빈인견지, 설처자이거지주.
그 마을의 부자들은 그것을 보고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않았고, 그 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처자를 거느리고 그 마을을 떠났다고 합니다.
彼知美嚬, 而不知嚬之所以美. 惜乎! 而夫子其窮哉.
피지미빈, 이불지빈지소이미. 석호! 이부자기궁재.
저 못난 여자들은 서시의 얼굴에서 눈살의 찌푸림의 아름다움만 알았지, 어째서 그 눈살 찌푸림이 아름다운가의 까닭은 몰랐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애석하지만 당신 선생도 곤란을 당할 것입니다.
위의 글은 사금의 말을 빌려서 장자가 공자의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외형에 사로잡혀 본질을 망각한 것이라고 신랄하게 비난하는 내용이다.
장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도나 도덕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의 이상정치를 그대로 노나라와 위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빈정대어 말한 것이다.
그러면 서시가 어떤 여인이길래 이토록 전설적인 대접을 받는 것인가. 일단 그녀는 영웅호걸을 녹인 중국 미인계의 원조이며, 중국 월나라의 절세미녀로써 미인계 전술로 오나라를 망하게 한 일등공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종종 역사서를 보면 미인계를 이용한다는 말이 등장한다. 미인계란 목적 달성을 위해 아름다운 여인을 이용하여 경쟁 상대가 되는 영웅을 유혹하여 뜻하는 바를 이루어 내는 것을 말한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 치졸한 방법이다. 더더군다나 대장부 다운 기개가 없다.
여기서 아름다운 여인이란 단지 무언가를 이루고자 할 때 쓰는 수단일 뿐 여인의 인격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이는 여성도 종중 회원으로 동등하게 자격을 인정하여 권리와 의무는 물론 상속에서 동등한 자격을 인정하는 소위 딸들의 반란이라는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낼만큼 여권신장이 진전된 오늘날에 대접받기 더욱 어렵다.
옛 여인들은 단지 임무와 사명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유혹하거나 때로는 몸을 허락하기도 한다. 게다가 여자를 팔아 얻은 승리에 남성들이 취해 있을 때 정작 일을 성사시킨 여성들은 쓸쓸히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곤 했던 것이다. 미인계를 쓴 남성들도 스스로 영웅 대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연약한 여자를 이용하고 그것도 인간의 가장 순수하고 약한 감정인 사랑을 기만하는 치졸한 수법으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밝히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중국 역사 속에서 영웅호걸로 불리우는 남성들 중엔 뜻밖에도 미인계에 힘입어 일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공(功)은 모두 그들에게 돌아가고 미인들은 쓸쓸히 사라지곤 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몇 명의 여인들이 있으니 그 중 서시가 가장 유명하다.
때는 중국의 춘추(春秋) 말기(末期). 월(越)나라의 저라산(苧羅山) 근처에 사는 땔나무장수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하나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서시(西施)로 원래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그녀가 강으로 빨래를 하러 갔을 때 강속 물고기가 물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 반해 헤엄칠 생각도 잊고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이야기가 생길 정도였다. 이때 서시의 아름다움을 두고 침어(浸魚)라는 고사성어가 생겼다.
서시는 어렸을 때부터 가슴앓이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늘 얼굴을 찡그리고 다녔는데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아름다워 동네의 처녀들이 그 찡그린 모습을 흉내 내고 다녔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효빈(效嚬)이라는 고사성어이다.
서시는 그 아름다움 때문에 훗날 월나라의 수도로 뽑혀 가게 되는데 월나라 사람들이 모두 서시의 얼굴을 보기위해 나와 궁전에 들어가는데만 꼬박 사흘이 걸렸다고 한다. 월나라의 재상이던 범려(范蠡)는 서시의 얼굴을 보는 값으로 백성들에게 1전씩 받아 그 돈으로 무기를 사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서시가 살던 월나라는 춘추(春秋) 말기 지금의 절강성(浙江省) 일대를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 춘추시대는 주(周)나라를 명목상 모시면서 각지의 제후국들이 서로 힘을 겨루던 시기였다. 월(越)나라는 바로 인접한 국가인 오(吳)나라와 언제나 세력다툼을 하였고 오랜 분쟁은 두 나라를 원수의 나라로 만들었다.
오나라와 월나라는 어느 한쪽이 사라지지 않고서는 절대 전쟁을 멈추지 않을 정도로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다. 특히 서시가 살던 즈음에 오나라와 월나라의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먼저 월나라와의 전쟁으로 오나라의 왕 합려(闔閭)가 죽자 그 아들 부차(夫差)는 월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가시나무 위에서 잠을 자며 그 원한을 되새겼다고 한다.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와 손자병법(孫子兵法)의 저자(著者) 손무(孫武)의 도움으로 나라를 크게 일으켰다. 그리고 마침내 월나라를 쳐서 굴복시키고 월나라의 자존심에 상처를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이 쓰디쓴 쓸개를 옆에 두고 스스로 해이해지거나 흐트러질 때마다 그 쓸개를 맛보며 오나라에 당한 굴욕을 되새기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온 말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이다.
서시(西施)는 바로 이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시기에 굴욕당한 월(越)나라의 백성이었다. 월나라의 왕 구천(勾踐)은 오나라를 무찌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방법이라도 감행할 만큼 원한에 젖어 있었다. 그러한 시기에 서시는 구천(勾踐)의 원한을 풀기위해 오나라로 가야만 했다. 월나라의 재상이던 범려(范蠡)는 임금 구천(勾踐)을 도와 오나라를 이길 방법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그 중 그가 생각해낸 방법이 아름다운 여인을 통한 적의 무장해제였다.
범려(范蠡)는 월나라 각지를 돌아다니며 절세 미인들을 뽑았다. 그리고 그들에게 월(越)나라를 위해 자신의 감정과 목숨을 내놓게 할 교육을 시켰다. 그 속에는 갖가지 기예(技藝)와 남성을 유혹하는 법, 그러면서도 절대 월나라를 저버리지 않을 사명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녀들의 임무는 오나라 부차(夫差)를 유혹하여 그가 정치를 돌아보지 않고 주색에 빠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 월(越)나라 미녀들이 오나라에 공물로 바쳐지고 마침내 서시도 오나라로 가는 미인들 속에 끼게 되었다. 워낙에 출중했던 서시는 금새 오나라 왕 부차의 눈에 들었다. 부차는 충신 오자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시를 옆에 끼고 정치를 잊었다. 그는 서시가 연못에서 배타고 노는 것을 좋아하자 무리하여 인공 못을 만들게 하고 그녀를 위해 화려한 궁전을 새로 지었을 정도다.
그러는 사이 오나라의 국력은 급격히 떨어져 갔다. 충신이자 명장이었던 오자서는 심복지환(心腹之患)을 거론하며 간언하였으나 구천에게 매수된 백비(伯嚭)의 말을 철썩같이 믿은 부차에게는 이미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심복지환(心腹之患)이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한 것이다.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자 자결을 명령한다. 부차(夫差)의 명령에 분노한 오자서(伍子胥)는 스스로 눈을 파내 나뭇가지에 건 다음 죽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부차(夫差)가 월(越)나라에 패해 오(吳)나라가 망하는 꼴을 나뭇가지에 걸어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겠다는 것이었다.
오자서(伍子胥)의 우려와 범려(范蠡)의 계획대로 오나라의 힘은 약해졌고 그 기회를 노린 월나라는 오나라를 쳐서 이겼다. 부차(夫差)는 산 속으로 도망가 미인에게 속아 충신을 저버린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며 자결하였다.
월(越)나라의 임금 구천(勾踐)은 원수를 갚고 승리(勝利)하였지만 정작 오(吳)나라를 망하게 한 일등공신인 서시(西施)는 이후 그 행방이 묘연하다. 일설에 서시는 오나라가 망하고 자신의 임무를 다하자 강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도 전한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원래부터 서시를 사랑하였던 범려가 오나라가 망하자 서시를 구해내 그녀와 함께 도주하여 신분을 감추고 살았다고도 전해진다.
무엇하나 자신의 사랑과 인격을 포기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한 공에 대한 처우로 마땅치 않다. 승리는 남성들에게 돌아가고 단지 미인이었던 죄로 불행하게 살아야 했던 서시(西施)는 소외되었던 것이다. 서시(西施)의 이야기는 이후 많은 중국의 문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누대(樓臺)에 걸쳐 시인과 문인들이 그녀를 기렸고, 중국 최고의 미인으로 그녀를 칭송했다.
미인계(美人計)라는 잔혹한 전술로 불행했던 서시(西施)는 결국 감상적인 중국 문인들 덕분에 고통스러웠던 삶을 조금이나마 보상 받은 셈이다. 서시(西施)는 양귀비((楊貴妃), 왕소군(王昭君), 초선(貂嬋)과 더불어 중국 고대 4대 미녀로 꼽히는데, 이들 중 으뜸은 단연 서시이며, 미의 화신이자 대명사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태백(李太白)의 오서곡(烏棲曲)을 읊으며 서시의 당대 모습을 회상해 보고자 한다.
오서곡(烏棲曲) / 이태백(李太白)
姑蘇臺上烏棲時(고소대상오서시)
고소대 위에 까마귀 깃들이려 할 적,
吳王宮裏醉西施(오왕궁리취서시)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었네.
吳歌楚舞歡未畢(오가초무환미필)
오가 초무의 환락 끝나지 않았는데,
靑山猶銜半邊日(청산유함반변일)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었네.
銀箭金壺漏水多(은전김호누수다)
은 바늘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 많이 새었고,
起看秋月墜江波(기간추월추강파)
일어나 바라보면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었네.
東方漸高奈樂何(동방점고내악하)
동녘 어느새 밝아 왔으니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서시빈목(西施顰目)
월(越)나라의 유명(有名)한 미인(美人) 서시(西施)가 눈을 찌푸린 것을 아름답게 본 못난 여자(女子)가 그 흉내를 내고다녀 더욱 싫게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由來)한 말로, 분수(分數)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無條件) 남을 따라하는 것을 비유(比喩)하는 말이다.
중국 월나라의 절세미녀인 서시는 가슴앓이병이 있어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고 다녔다. 그랬더니 그 마을의 추녀가 이것을 보고 그 어여쁨에 감탄해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찡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그 마을 부자들은 대문을 굳게 잠그고 나오지 않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처자를 이끌고 마을에서 도망쳤다. 이 추녀는 미간을 찡그린 모습이 아름답다는 것만 마음에 두었을 뿐, 찡그림이 아름다운 까닭은 알지 못했다. 즉, 서시는 본래 아름다우므로 자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고사다. 여기에서 유래한 서시빈목(西施目)은 ‘서시가 눈살을 찌푸린다’는 뜻으로, 자신의 분수를 모르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을 빗대는 말로 쓰인다. 효빈(效), 서시봉심(西施捧心)도 같은 뜻이다.
장자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제도나 도덕도 변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춘추시대 말엽의 난세에 태어난 공자가 그 옛날 주왕조의 이상정치를 그대로 노나라와 위나라에 재현하려 하는 것은 마치 추녀가 서시를 무작정 흉내 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비꼬았다.
장자 추수편에 나오는 한단지보(邯鄲之步)도 뜻이 서로 맞닿는다. 수릉의 한 젊은이가 조나라 수도 한단에 가서 그곳의 걸음걸이를 배웠는데 한단 걸음걸이를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본래의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려 기어서 고향으로 돌아왔다는 뜻으로, 이 또한 제 분수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 내다 이것저것 다 잃어버림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자신을 아는 지기(知己)는 깨달음의 첫걸음이고, 철학의 출발점이다. 모든 것은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시작된다. 항심(恒心)이 부족하면 분주히 외물만 좇는다. 여기저기 헤맬 뿐 정작 ‘내 것’은 놓치고 산다. 누구나 존재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타인과 비교되지 않는 절대적 의미다. 노자는 “자기 자신에게서 멀어질수록 배움이 적어진다”고 했다.
서시(西施) : 시이광(施夷光)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미인. 본명은 시이광(施夷光). 양귀비와 더불어 동양에서 미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며, 특히 병약미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현대 중국어에선 서자(西子)라고 부르기도 한다.
저라산 출신으로 오나라에 패망한 월왕 구천의 충신 범려가 서시를 호색가인 오왕 부차에게 바쳤다. 서시는 그 미로 부차가 미색에 빠져 정치에 태만하게 만들었고, 마침내 부차와 오나라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고 전해진다. 이때 범려는 서시와 함께 정단이라는 미녀도 바쳤으나, 부차는 정단보다 서시를 더 총애했다. 그 일로 인해 정단은 상사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여러모로 말희, 달기, 포사와 함께, 고대 중국인들의 여성관을 엿볼 수 있는 인물이다.
오나라 멸망 이후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한무제 이전의 역사를 다루는 역사서 중 가장 신뢰도가 높은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이후의 행적이 전혀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설은 범려와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설로, 대중들에겐 잘 알려졌으나 정작 가능성은 적다. 그 까닭은 월나라 재상에서 퇴임한 뒤 범려의 행적에 관한 이야기가 적지 않게 있으나(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상인, 재상 노릇 등을 했다.), 이 중에 그토록 절세미녀였다는 서시에 대한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기 때문이다.
두번째 설은 사모하던 오자서를 월나라를 위해 살해한 후 죄책감으로 숨졌다는 설이다. 일설에는 몸에 돌이 매달린 채 바다에 수장 당했으며, 그녀가 죽은 후 가리비가 잡혔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리비의 속살이 서시의 혓바닥을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번째 설은 그 외모가 나라를 망칠 것을 우려한 구천의 왕비(범려의 부인이라는 말도 있다)가 꾸민 계략에 걸려 강에 빠져 익사했다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들이 적은 기록이며, 열국지에서는 이쪽을 채택했다.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에서는 이를 토대로 서시의 죽음과 범려의 행방불명을 실제와 좀 다르고 더 드라마틱하게 서술했다. 오가 망한 후 구천이 서시를 가지기 위해 범려에게 서시를 찾아오게 했는데, 범려는 서시를 데려오면 그녀로 말미암아 오가 망한 것처럼 월도 망한다고 간언하지만, 구천은 그녀에게 상을 주겠다는 명목으로 데려오라 달달 볶는다.
그렇게 떠나게 된 범려는 구천을 생각하며 "그의 관상대로 고생은 함께 나눌 수 있지만, 기쁨은 함께 나눌 수 없겠구나"라고 하며 월을 떠나야겠다는 마음과 마지막 충의로써라도 경국지색인 서시를 죽여 월의 패망의 길은 막겠다는 마음으로 오로 향하게 된다.
오의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범려는 서시를 찾았다는 부하의 말을 듣고 그녀가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된다. 그때 서시는 혼자서 부차가 그녀를 위해 만들어 준 연못 위에 화방 형태의 배를 타고 있었는데 서시를 보게 된 범려는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며 함께 도망치자 하지만, 서시는 그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왜 도망칠 수 없는지 물어보니 "자신은 몸으로는 부차를 사랑했으며, 정신으로는 오 대부를 사랑했습니다. 두 사람을 사랑한 자신이지만 나라를 위해 희생해야겠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이제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한 그녀의 슬기로움을 보고 감탄한 범려는 다시 자기 배의 올랐고, 서시를 태운 화방은 지는 저녁노을 속으로 점점 희미하게 멀어져만 갔었다.
범려는 그 모습을 보며 "마치 선녀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그때 갑자기 화방을 향해 번개가 내리쳤고 깜짝 놀란 범려는 다시 화방 쪽을 향해 노를 저어 그녀를 찾았지만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의 끝을 확인한 범려는 망명길에 오르기 전에 구천에게는 미녀를 조심하라는 경고과 작별의 편지를, 대부 문종에게는 토사구팽의 일화를 담은 편지를 전하고 망명길에 올랐다는 내용이다.
장자를 비롯한 사상가들은 서시를 좋게 보지 않았는데 나라를 망하게 한 것 이외에도 장자(莊子) 천운편(天運篇)에 나오는 '효빈'(效顰: 얼굴 찡그림(嚬)을 따라하다(效)) 설화가 그런 점을 잘 보여 준다. 서시봉심(西施捧心), 혹은 서시빈목(西施顰目)이라고도 하는 고사이며 빈축(嚬蹙)으로도 잘 알려진다.
내용은 월나라의 절세미녀인 서시가 가슴앓이병이 있어 언제나 미간을 찌푸리는데 워낙 아름다운지라 그 표정마저 절색이었다. 그런데 이웃 마을의 추녀 동시(東施)가 그것을 보자 자기도 가슴에 손을 대고 미간을 찡그리며 마을을 돌아다녔더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기겁해 부유한 사람은 집으로 뛰어들어가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은 가족들을 이끌고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갔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저 추녀의 못생김도 가히 경국지색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서시의 찡그림을 따라한 동시에게 잘못이 있는 거지만 서시가 그 빌미를 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별명은 침어(沈魚)와 경국(傾國)이다. 침어는 길을 지나가던 서시가 얼굴을 씻기 위해 강에 얼굴을 비치니 그 얼굴이 너무 아름다워 (서시를 보느라)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속으로 가라앉았다는(沈魚)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 원문은 정반대의 뜻이다. "모장은 고운 여인이니 사람이 보고는 아름답다 하지마는, 물고기가 보고는 물속에 깊이 잠기며, 새가 보고는 높이 날아가고, 고라니가 보고는 마구 도망가 숨어 버린다(毛嬙麗姬 人之所美也 魚見之深入 鳥見之高飛 麋鹿見之決驟)." 사람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것인지를 묻는 철학적인 화두에 가깝다.
그리고 서시와 정단이 오나라에 바쳐졌을 때 둘이 도착하자 그 아름다움을 구경하려고 군중이 몰려드는 바람에 성문이 부서졌으며, 둘을 본 오자서가 정단은 '성을 자빠뜨릴(傾城) 미인'이라 하여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했으나 서시는 '나라를 기울어뜨릴(傾國) 미인'이라 하여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서 경국지색이라는 성어가 유래했다.
여담으로, 복어 요리 중 가장 으뜸이라 불리는 황복은 명나라의 만력제를 비롯하여 역사 속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의 주식이 되었는데 이 황복을 서시의 유방이라고도 부른다. 복어의 모양이 유방의 모습과 같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는 사람도 있고 복어의 정소 부위에 해당하는 위가 터졌을 때 나오는 흰 액체를 젖에 비유하여 서시유(西施乳)라 표현한다는 사람도 있다.
차를 우리는 차호(茶壺) 중에도 아름다운 여인의 유방 모양을 본떠 만든 것들을 특별히 서시호(西施壺)라고 한다. 한편, 중국에서는 한국 속담 '제 눈에 안경'에 해당하는 말을 '정인안리출서시(情人眼里出西施)'라고 한다. 직역하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서시가 나타난다"라는 뜻이다.
서시(西施)는 어떻게 죽었는가?
절세미인인 서시는 춘추시대의 월(越)나라 사람이며, 중국역사상 유명한 4대미인의 한 명이다. 전해지는 책들이 서시에 대하여 적은 글은 그녀의 미모뿐아니라 그녀가 오월(吳越) 두 나라간의 싸움에서 맡았던 역할과 그녀의 최후에 대한 글도 있다.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서시는 월나라의 대부(大夫)인 범려(范려)는 서시의 집옆에 있는 약야계(若耶溪)에서 만났다고 한다. 서시는 범려가 언행이 뛰어난데 반하고, 범려도 서시의 미모에 반하여 두 사람은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만남과 사랑은 후세에 사람들에 의하여 소설과 희곡으로 쓰여졌는데, 명나라때의 희곡가 양진어(梁辰魚)가 쓴 완사기(浣紗記)가 대표적이다.
두 사람이 만난지 얼마되지 않아 오나라와의 전쟁은 시작되었고, 오나라왕 부차(夫差)는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죽은 선친의 복수를 위하여 병사를 이끌고 월나라를 쳤고, 결국 월나라는 망하고 만다. 오월동주(吳越同舟)와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는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월나라는 오나라를 신하국으로 만들었으며, 월왕 구천(勾踐)은 오나라의 수도로 끌려가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는다. 구천은 치욕을 견디며, 3년간의 노예같은 생활을 견디어낸다. 범려도 구천부부를 따라 3년간의 노역을 한 후 귀국한다. 구천은 월나라로 돌아온 후, 나라를 다스리는데 주력하고 복수를 위하여 여러가지 준비를 한다.
그러나, 복수를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키우는 것도 필요했지만, 상대방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도 필요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구천은 범려의 '미인계'를 채택한다. 범려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을 오왕 부차에게 보내어, 오나라의 정치를 문란하게 만들고자 한다.
서시는 오나라에 도착한 후, 절세의 미모로 금방 부차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부차는 점점 월나라에 대한 경계를 늦추었다. 이후 그는 소인의 간사한 말을 듣기를 즐기고, 오자서(伍子胥)와 같은 충신을 죽인다. 오자서가 죽은 후에는 오왕 부차의 주변에는 충언을 간하는 신하들이 없어졌고, 나라의 힘은 갈수록 약해졌다. 동시에 그는 큰 공사를 벌여 국력과 민력을 낭비하였고, 여러차례 중원을 침공하는 전쟁도 일으켰다.
오왕이 이와 같이 멸망으로 가는 행동들을 취한 것은 월나라가 미인계를 쓸 때부터 예측한 바였다. 상대방이 힘이 약해지면 내가 이길 수 있다. 월나라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더 이상했을 것이다. 결국 월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부차는 자결하고 만다.
그렇다면, 서시는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가?
첫째, 가장 민간에 널리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해피앤딩이다.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범려는 구천이라는 사람이 고난은 함께 할 수 있지만, 향락을 함께 즐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비록 그도 3년간 욕됨을 함께 참고 견디고, 정치를 위하여 군주를 위하여 사랑하는 여인까지 희생하였으므로 월나라의 최후승리에 최대의 공신이라고 볼 수 있었으나 그는 물러나는 길을 택하였다. 그래서 오나라가 멸망한 후 그는 서시를 데리고 배를 타고 강호에 은거한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들은 도지(陶地)에 정착하고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으로 고치고, 장사를 해서 돈을 모은다. 그는 자신의 총명함과 재능을 가지고 큰 부자가 된다.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 및 '월세가'에는 모두 범려의 지혜를 칭찬하고 있다. 이처럼 서시는 과거의 욕된 생활에서 벗어나 범려와 부유하고 안락한 일생을 보낸다. 이런 결말은 사람들의 이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고, 사람들이 자신의 청춘을 희생한 여인에게 더 큰 불행을 차마 안기지는 못하겠다는 심정에서 비롯될 것일 것이다. 명나라때 양진어의 '완사기'는 바로 이런 결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결말을 얘기하는 설도 있다. 당시 귀족계급의 의리없음을 꼬집는 것으로 서시는 전쟁후에 강에 빠져 익사당한다는 것이다. <<묵자. 친사>>편에는 서시가 강물에 빠져죽었는데, 왜냐하면 서시가 너무 예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묵자의 기록은 시간적으로는 실제 사건이 발생한 때와 근접하기 때문에 믿을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기록이 너무 짧다. 나중에 어떤 사료에 의하면, 오나라가 멸망한 후, 월왕은 서시를 가죽부대에 넣어 강에 던져죽였다고 한다. 당시와 송사에서도 서시가 익사하였다는 내용을 쓰고 있다. 이 설을 비록 잔인하기는 하지만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본다. 범려는 일찌기 구천이 "목이 길고 새 입을 하고 있어, 어려움을 함께 견딜 수는 있지만,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는 없다"고 판단 한 것과 동일하다. 구천은 오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데 큰 공을 세웠던 문종(文種)을 죽여버린데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서시와 같이 출신이 미천한 여인을 오나라에 파견하여 미인계를 펼쳤는데, 이것은 원래 드러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만일 다른 나라가 이 일을 안다면, 구천이 한 여자의 힘에 의지하여, 떳떳하지 못한 수법을 사용하여 오월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을 안다면, 구천은 다른 사람들에게 멸시당하거나 조롱당했을 것이다. 구천은 어떡하든 다른 나라들이 미인계를 쓴 것을 몰라야 했고 가장 좋은 방법은 살인멸구(殺人滅口, 죽여서 입을 막는 것)였다.
셋째, 어떤 사람들은 서시가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서시는 원래 선량하고 순박한 빨래하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미 범려를 깊이 사랑했다. 다만 월나라의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그녀는 부득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오나라로 갔다. 그리고 다른 남자와 함께 지낸다. 이것만으로도 그녀에게는 굴욕이었을 것이다. 이런 마음씨 고운 여자가 오나라에 가서 '간첩'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그녀를 더욱 힘들게 하였을 것이다. 그녀의 말을 잘 따르는 오왕 부차에게도 미안한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오나라가 멸망하고, 부차가 자살하자 그녀는 더욱 미안한 감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녀가 고국으로 돌아온 후, 다른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청렴한 범려를 대하였을 때, 범려의 깨끗한 명성이 자신으로 인해 더렵혀지기를 바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월나라가 그녀를 보내어 미인계를 썼다는 것은 절대 떳떳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므로 월왕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사물은 그대로인데 사람은 달라졌구나. 일들은 다 끝난 일이다(물시인비사사휴 物是人非事事休)." 이러한 상황하에서 그녀로서는 자신의 죽음으로 범려의 명성도 보전하고, 나라의 명성도 보전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서시의 진짜 최후가 어떠하였는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서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범려와 도망쳐서 행복한 일생을 마쳤기를 바랄 것이며, 정치투쟁의 잔혹함과 무정함은 그녀에게 익사설이나 자살설을 얘기한다.
▶️ 西(서녘 서)는 ❶상형문자로 卥(서)는 고자(古字), 卤(서), 覀(서)는 동자(同字)이다. 옛 자형(字形)은 새의 둥지나 그와 비슷한 꼴을 나타낸다. 그 옛 음(音)이 死(사; 사람이 없어지다)나 遷(천; 옮아가다)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西(서)는 해가 지는 것을 나타내는 데 쓰여지고, 해가 지는 방향(方向), 서녘의 뜻을 나타내게 되었다. 나중에 西(서)의 자형(字形)을 새가 둥지에 있는 모양으로 잘못 보아 저녁 때 해가 서쪽에 기울어 새가 둥지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西자는 ‘서녘’이나 ‘서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西자는 襾(덮을 아)자가 부수로 지정되어 있지만 ‘덮다’라는 뜻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西자는 새의 둥지를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갑골문에 나온 西자를 보면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새집이 그려져 있었다. 소전에서는 여기에 새의 형상이 추가되어 지금의 西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西자는 새의 둥지를 그린 것이기 때문에 ‘새집’이나 ‘둥지’라는 뜻으로 쓰였었지만, 후에 ‘서쪽’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木(나무 목)자를 더한 栖(새 살다 서)자나 巢(새집 소)자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래서 西(서)는 ①서녘, 서쪽 ②서양(西洋), 구미(歐美) ③(서쪽으로)가다 ④깃들이다 ⑤옮기다,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동녘 동(東)이다. 용례로는 서쪽에 있는 바다를 서해(西海), 동양이라고 불리는 아시아에 대립되는 유럽을 일컫는 말을 서양(西洋), 어떤 곳의 서쪽 부분을 서부(西部), 서쪽에 있는 지방을 서방(西方), 서는 가을이라는 뜻으로 가을 농작물의 수확을 일컬음을 서수(西收), 서쪽에 있는 산을 서산(西山),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서풍(西風), 서쪽 끝을 서단(西端), 서쪽으로 가는 길을 서로(西路), 집안의 서쪽에 있는 마당을 서정(西庭), 동쪽과 서쪽 또는 동양과 서양을 동서(東西), 어느 지점을 기준으로 하여서 그 서쪽을 이서(以西), 서쪽의 맨 끝을 극서(極西), 서시가 가슴을 쓰다듬는다는 뜻으로 함부로 흉내내다가 웃음거리가 됨을 이르는 말을 서시봉심(西施捧心), 수박 겉 핥기라는 속담의 한역으로 어떤 일 또는 물건의 내용도 모르고 겉만 건드린다는 말을 서과피지(西瓜皮舐), 제사의 제물을 진설할 때 생선의 머리는 동쪽을 향하고 꼬리는 서쪽을 향하게 놓는다는 말을 두동미서(頭東尾西), 제사상을 차릴 때에 어찬은 동쪽에 육찬은 서쪽에 놓는다는 말을 어동육서(魚東肉西), 제사 때 제물을 차려 놓는 차례로 붉은 과실은 동쪽에 흰 과실은 서쪽에 차리는 격식을 이르는 말을 홍동백서(紅東白西), 동쪽으로 뛰고 서쪽으로 뛴다는 뜻으로 사방으로 이리저리 바삐 돌아 다닌다는 말을 동분서주(東奔西走), 동쪽을 묻는 데 서쪽을 대답한다는 뜻으로 묻는 말에 대하여 전혀 엉뚱한 대답을 이르는 말을 동문서답(東問西答), 동쪽이라도 좋고 서쪽이라도 좋다는 뜻으로 이러나 저러나 상관없다는 말을 가동가서(可東可西), 때와 지역을 통틀어 일컫는 말로 옛날과 지금 동양과 서양을 가리키는 말을 고금동서(古今東西), 동쪽을 가리켰다가 또 서쪽을 가리킨다는 뜻으로 말하는 요지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는 말을 지동지서(指東指西), 아침에는 동쪽에 있다가 저녁에는 서쪽에 머문다는 뜻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이 여기저기 옮겨다님을 이르는 말을 조동모서(朝東暮西), 해가 서산에 가깝다는 뜻으로 나이가 들어 죽음이 다가옴을 이르는 말을 일박서산(日薄西山) 등에 쓰인다.
▶️ 施(베풀 시, 옮길 이)는 ❶형성문자로 음(音)을 나타내는 也(야, 시)와 그 이외(以外)의 글자 (언; 깃발)으로 이루어졌다. 깃발이 흔들거린다는 뜻으로 음(音)을 빌어 베푼다는 뜻으로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施자는 ‘베풀다’나 ‘실시하다’, ‘드러내다’, ‘뽐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施자는 㫃(나부낄 언)자와 也(어조사 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也자는 ‘야→시’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施자의 갑골문을 보면 사람을 줄에 매달아 놓은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고대에는 적의 시신을 창에 매달아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곤 했다. 施자는 그러한 모습을 그린 것이다. 금문에서는 也자가 발음요소로 쓰이면서 지금의 施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施자에 ‘드러내다’나 ‘뽐내다’라는 뜻이 있는 것도 적들에게 아군의 용맹성을 표현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施(시, 이)는 성(姓)의 하나로 ①베풀다(일을 차리어 벌이다, 도와 주어서 혜택을 받게 하다) ②실시하다 ③미치게 하다, 나누어 주다 ④널리 퍼지다, 번식하다 ⑤드러내다 ⑥뽐내다, 과장하다 ⑦기뻐하다 ⑧탄핵하다 ⑨효시(梟示)하다 ⑩흩뿌리다 ⑪좋아하는 모양 ⑫은혜(恩惠) 그리고 옮길 이의 경우는 ⓐ옮기다(이) ⓑ끌다(이) ⓒ연장하다(이)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만연하다(이) ⓔ버리다(이) ⓕ해제(解除)하다(이) ⓖ기울다(이) ⓗ비스듬히 가다(이) ⓘ바르지 아니하다(이)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실제로 행함을 시행(施行), 계책을 베풂 또는 그 계책을 시책(施策), 은혜를 베풂 또는 그 은혜를 시혜(施惠), 의술 따위를 베푸는 일을 시술(施術), 정치를 행함을 시정(施政), 공사를 실시함을 시공(施工), 자물쇠를 채워 문을 잠금을 시정(施錠), 건축이나 토목 따위의 일을 착수하여 진행함을 시공(施功), 어떤 일을 시행하고 조치를 취함을 시조(施措), 상을 주는 일을 시상(施賞), 논 밭에 거름을 주는 일을 시비(施肥), 승려나 절에 물건을 바치는 사람 또는 그 일을 시주(施主), 실제로 시행함을 실시(實施), 은혜를 갚아서 베풂을 보시(報施), 하려던 일을 그만 둠을 물시(勿施), 요구하는 대로 베풀어 줌을 허시(許施), 시행할 일을 계획함을 설시(設施), 많은 사람에게 널리 사랑과 은혜를 베풂을 박시(博施), 제기한 의견을 받아들여 시행함을 채시(採施), 명령에 좇아 일을 시행함을 거시(擧施), 정해진 범위를 벗어나 함부로 마구 베풂을 남시(濫施), 청원이나 요구를 들어서 그대로 베풀어 줌을 청시(聽施), 제 것을 남에게 잘 주는 이는 무턱대고 남의 것을 탐낸다는 경시호탈(輕施好奪), 사랑과 은혜를 널리 베풀어 뭇사람을 구제함을 박시제중(博施濟衆), 빈말만 하고 실행이 없음을 공언무시(空言無施), 남을 헐뜯는 나쁜 말을 하기 쉬움을 악어이시(惡語易施), 차례를 거꾸로 시행한다는 뜻으로 곧 도리에 순종하지 않고 일을 행하며 상도를 벗어나서 일을 억지로 함을 도행역시(倒行逆施) 등에 쓰인다.
▶️ 顰(찡그릴 빈)은 형성문자로 颦(빈)은 간자(簡字), 嚬(빈), 矉(빈)은 동자(同字)이다. 步(걸음 보)와 뜻을 나타내는 머리 혈(頁; 머리)部를 합(合)한 頻(자주 빈)에 낮을 비(卑)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顰(빈)은 ①찡그리다 ②얼굴을 찡그리다 ③눈살을 찌푸리다 ④이맛살을 찌푸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눈살을 찌뿌림을 빈미(顰眉), 눈살을 찌푸리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빈축(顰蹙), 찡그리고 신음한다는 뜻으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이르는 말을 빈신(顰呻), 월나라의 서시가 불쾌하여 찡그렸더니 어떤 추녀가 그걸 보고 미인은 찡그린다고 여겨 자기도 찡그렸다는 옛일에서 자기 분수를 모르고 남의 흉내를 냄을 이르는 말을 효빈(效顰), 월나라의 유명한 미인 서시가 눈을 찌푸린 것을 아름답게 본 못난 여자가 그 흉내를 내고다녀 더욱 싫게 보였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로 분수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남을 따라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을 서시빈목(西施顰目), 못생긴 여자가 서시의 눈썹 찌푸림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시비나 선악의 판단 없이 남을 흉내냄을 이르는 말을 동시효빈(東施效顰) 등에 쓰인다.
▶️ 目(눈 목)은 ❶상형문자로 사람의 눈의 모양이다. 처음엔 보통 눈과 같이 가로로 길게 썼는데 나중에 세로의 긴 자형(字形)으로 변한 것은 글이 세로 쓰기인 데 맞춘 것이다. ❷상형문자로 目자는 ‘눈’이나 ‘시력’, ‘안목’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目자는 사람 눈을 그린 것으로 갑골문에 나온 目자를 보면 사람의 눈과 눈동자가 잘 표현되어 있었다. 본래 目자는 가로로 쓰였었지만, 한자를 세워 쓰이는 방식이 적용되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目자는 눈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부수로 쓰일 때는 대부분이 ‘보다’나 ‘눈의 상태’, ‘눈’과 관련된 뜻을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眞(참 진)자나 鼎(솥 정)자처럼 솥을 생략할 때 目자가 쓰이는 예도 있으니 해석에 주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目(목)은 (1)예산(豫算) 편제 상의 단위의 하나. 항(項)의 아래 절(節)의 위 (2)생물 분류학(分類學) 상의 단위의 하나. 강(綱)과 과(科)의 가운데임 등의 뜻으로 ①눈(감각 기관) ②눈빛, 시력(視力) ③견해(見解), 안목(眼目) ④요점(要點) ⑤옹이, 그루터기(풀이나 나무 따위의 아랫동아리) ⑥제목(題目), 표제(標題) ⑦목록(目錄) ⑧조목(條目), 중요 항목 ⑨이름, 명칭(名稱) ⑩그물의 구멍, 눈 ⑪우두머리, 두목(頭目) ⑫품평(品評), 평정(評定) ⑬보다, 주시(注視)하다 ⑭일컫다, 지칭(指稱)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눈 안(眼)이다. 용례로는 직접 자기의 눈으로 봄을 목격(目擊), 안경낀 사람의 변한 말을 목사(目四),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실제적 대상으로 삼는 것을 목표(目標), 책 따위의 기사의 순서를 목차(目次), 눈 인사를 목례(目禮), 눈으로 셈함을 목산(目算), 눈으로만 가만히 웃는 웃음을 목소(目笑), 눈병을 고치는 데 쓰는 약을 목약(目藥), 오는 사람을 바라보고 맞음을 목영(目迎), 어떤 사물을 주의해서 봄을 주목(注目), 전에 비하여 딴판으로 학식 등이 부쩍 늘어서 눈을 비비고 다시 봄을 괄목(刮目), 공부할 지식 분야를 갈라놓은 것을 과목(科目), 낱낱의 조나 항을 항목(項目), 사물을 분별하는 견식을 안목(眼目), 서로 미워함을 반목(反目), 형식 상 표면에 내세우는 이름이나 구실을 명목(名目), 사람이나 사물이 어떠하다고 가리키어 정함을 지목(指目), 물품의 명목을 품목(品目), 좋지 못한 집단의 우두머리를 두목(頭目), 눈은 물건을 잘 보지만 자기의 눈 속은 보지 못한다는 말을 목단어자견(目短於自見), 고무래를 보고도 그것이 고무래 丁자인 줄 모른다는 말을 목불식정(目不識丁), 차마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딱하거나 참혹한 상황을 이르는 말을 목불인견(目不忍見), 눈으로 책을 알지 못한다는 말을 목불지서(目不之書), 눈으로 부리고 기세로 부린다는 말을 목사기사(目使氣使), 눈으로 먹고 귀로 본다는 말을 목식이시(目食耳視), 눈초리가 다 찢어진다는 말을 목자진열(目眥盡裂), 앞날을 내다보지 못하고 눈앞의 일만 생각하는 계책이라는 말을 목전지계(目前之計)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