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숭배란 어떠한 것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인 성경의 모든 말씀의 내용을 읽게 되면, 그리스도교가 조직 지향적이거나 건축 지향적인 생활 방식이나 숭배의 방식으로 제시되지 않으며, 교리나 법전에 의해 정의되지 않는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것은 특별하고 뚜렷하게 헌신적이고 종교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특정한 활동들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며, 따라서 그렇게 보지 않은 다른 활동들에 비해 하나님 앞에서 우월한 장점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삶의 모든 것과 삶의 모든 활동을 포괄하는 삶의 방식이다. 오직 이것만이 진실이기 때문에 바울은 그 당시 골로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네가 무엇을 하고 있든지, 온 마음을 쏟아라. 마치 네가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네 봉사에 대한 보상으로 네게 유산을 물려 줄 주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네 마음을 다 바쳐 주를 위해서 하듯 하라."(골 3:17, 23, 24, NEB)
권위주의적이고 행위 지향적이며 율법주의적인 종교 조직(이러한 종교 단체가 상당수 있다.)에서 자유로워진 많은 탈증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자유의 상태에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당혹스러워 하는 경우가 많다. Ⅰ거룩한 숭배의 형식과 내용 1976년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의 성원으로서 레이몬드 프랜즈는 "거룩한 봉사"라는 주제로 자료를 준비하게 되었고, 그 결과 파수대 기사의 제목은 "거룩한 봉사의 보배를 인식함" 그리고 "밤낮으로 거룩한 봉사를 드림"이었다(1976년 10월 1일자로 발행된 《파수대》 592- 602면까지 이르는 기사). 신세계역에서 "거룩한 봉사를 드리기 위해"로 번역된 그리스어 용어의 '라트레우오'는 다른 번역에서는 "섬김" 또는 "숭배"로 번역된다. 두 기사 모두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봉사가 전파나 집회 참석과 같은 특정한 활동에 한정된 것이 아니며, 특정한 장소나 특별한 방식으로 특정한 간격에 맞춰 분리된 시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며, 삶의 방식이며, 모든 삶에서 일어나는 봉사라는 성경적 증거를 제시했다. 성경이 '그분의 이름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입술의 열매'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희생을 기뻐하시므로, 선행을 행하고 다른 사람과 그러한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을 포함하여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제사'를 말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으로 다음 파수대 내용이 그것을 설명한다: *** 파77 1/1 13-14면 제9항 밤낮으로 거룩한 봉사를 드림 *** 9 그러니, “거룩한 봉사”는 우리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가지 활동이나 몇 가지 활동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우리 일상 생활의 모든 부면을 망라합니다. 간단히 말하여, 그것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여호와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 10:31) 그 사도는 로마서 12:1, 2에서 이 봉사가 매우 포괄적임을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거룩한 봉사]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이와 조화를 이루어 파수대 두 번째 기사는 "여러 가지가 관련돼 있지만 여러분의 목표와 지향점, 그리고 마음의 동기부여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정말로 '거룩한 봉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라고 밝힌 뒤, "여호와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이자 그분께 거룩한 자녀와, 부모의 거룩한 봉사의 상당 부분이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부모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밤과 낮"으로 드리는 거룩한 봉사의 한 특징이었다. 부부는 서로간의 관계에서 결혼의 존귀함을 유지하고, 성공적인 결혼을 위해 노력하는 거룩한 봉사를 한다. 가정주부는 집에서 "주께로" 향해 자신의 일을 할 수 있고 가정생활의 질을 개선하고, 환대, 친절을 나타내어 선한 이웃이 되므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의 중요성을 비공식적으로 부각시킬 수 있다. 가장들은 매일의 일을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께 하듯 하므로써 " 일에 정성을 쏟는 방식으로 좋은 소식이 인간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점을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줄 수 있다. 그러한 영으로 모든 것이 행해졌을 때,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기원전 720년 경,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가납될 봉사는 어떤 것인가 하고 물었다. 여호와는 예언자 미가를 시켜서, 그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주님[여호와/야훼] 앞에 나아갈까? 무엇을 가지고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 앞에 몸을 굽힐까? 번제물을 가지고,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분 앞에 나아갈까? 주님[여호와]께서 수천 마리의 숫양을, 수만 개의 기름 강을 기뻐하실까? 내 죄악 때문에 내 맏아들을, 내 죄 때문에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분이 네게 알려 주셨다. 주님[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단지 공의를 행하고 충성을 소중히 여기며 겸허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미가 6:6-8, NIV; 시편 15편과 비교)! 율법 계약은 단지 주기적인 동물 희생, 단식, 종교적 축제와 의식만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매일 거래하는 상행위의 공정성, 정의, 의로움, 정직과 동정심을 나타낼 것을 함께 요구했다. 그 율법은 이스라엘 동료들뿐만 아니라 종들과 외국인 거주자들 그리고 심지어 동물과 새에 대한 배려를 위해서도 친절을 요구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점은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희생제물 그 자체가 아니라 충성스러운 사랑이며, 번제물 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을 바로 아는 것이다. 즉 그분은 공의를 행하고 정의를 사랑하며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봉사의 절차(=형식)와 내용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기도, 찬양, 묵상, 모임을 통한 교제와 격려 등은 그 자체가 거룩한 숭배의 내용이 될 수 없고 거룩한 숭배를 하기 위한 절차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거룩한 숭배의 내용은 그러한 절차를 통하여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해야 하며, 인간의 관계에서 공의와 정의로써 행할 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확대하여 행복한 사회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것이 거룩한 숭배의 본질인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취지로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네가 남들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쓴다고 해서 계속 통치할 것 같으냐? 너의 아버지도 먹고 마셨지만 공의와 의를 행하였고, 그래서 잘되었다. 그는 고통받는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법적 권리를 지켜 주었고, 그래서 잘되었다. ‘그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다(렘 22:15, 16). 1980년 파수대 내용이 전체적으로 추진한 점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를 삶의 활동 영역과는 별도로 배치하려 한 점이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거룩한 봉사"를 구별하려고 시도했으며, 후자는 매우 독특하고 특이한 성격의 영역으로 제한시켰다. 이교도의 경우, 이러한 숭배는 사찰, 특별한 건물, 특별한 의식, 신에 대한 특별한 제물을 포함한다. 유대인들의 경우, 그것은 의식, 희생, 성스러운 축제, 제사장 봉사를 포함한 율법 계약을 이행하는 행위들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나님에 대한 봉사가 매우 광범위하고, 그래서 모든 삶의 영역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사실이며, 삶의 일부에만 영향을 미치는 활동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한 봉사'의 요소들을 의식 절차를 행하는 사람들에게나 "종교적인" 측면으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들에 주로 적용하여, 그들이 일상생활에서 정의와 공의, 자비와 동정심을 증거로 삼아 긍지를 가지게 하는 점에서는 매우 약화된 상태였다. 파수대의 내용은 이러한 점에서 비슷한 과정을 따르며, 동일하게 잘못된 관점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기본적이고 본질적인 인간생활의 행위"를 "주께 하듯 함'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것'으로 언급한 사실을 마주칠 때, 파수대 기사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봉사로 구분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어떻게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 거룩한 것이 아닐 수 있겠는가? 마치 하나님이 일상행위에 비해 특수행위에, 일반행위에 비해 특이한 것에 더 큰 가치의 프리미엄을 부여하는 것과 같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말씀에서 그렇지 않음을 분명히 보이셨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토록 뚜렷하게 '거룩한' 것으로 여기는 특별한 행위보다 자비, 동정, 정의를 매일 실천하는 것이 인간에게 항상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대로이다: 나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충성스러운 사랑을, 번제물보다 하느님에 대한 지식을 기뻐한다(호세아 6:6; 마태 12:7 과 비교). 올바른 동기의 부족(그들의 일상 생활에서 사람들과의 부당하고 불친절한 거래로 인해)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바로 그 "거룩한 봉사"의 행위를ㅡ유대 민족의 대부분에 의해 수행되었던 거룩한 날과 축제의 예물, 금식—가증스럽게 여기게 하셨다. 이것은 비록 특별하지만, 파수대 기사에서 표현한 바와 같이 "율법 계약에 순종하는 숭배"와 관련된 "일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난" 행동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매일의 삶과 일상 활동 과정에서 올바른 동기가 부여되지 않으면 모든 희생과 축제나 다른 봉사가 아무런 의미나 가치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사도들은 "야외 봉사", 집회 참석, 일부 종교 기관에서의 봉사, 또는 이 "살아 있는 제물"을 제공하게 하는 활동을 그들의 편지 어디에서도 나열하지 않는다. 워치타워 법인이 주장하는 하나님을 향한 봉사나 숭배에 대한 견해는 실제로는 단지 율법지향적이고 행위지향적인 불건전한 태도의 관점으로 회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것이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으로 적합하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기 위한 기준으로 규정되거나 규제되는 형태와 기능을 강조함으로써 마음의 역할과 자발성을 축소시킬 것이다. 그러한 관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신 자유"의 입구 밖으로 거꾸로 돌리게 하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종교들 중에서, 워치타워 종교만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Ⅱ 워치타워 종교가 거룩한 봉사로 규정하는 구체적인 것들 파수대는 일상적인 삶의 행위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봉사가 되게 할 수 있는 동기 부여의 중요성을 낮게 평가한다. 1980년, 앨라배마 주 가즈덴에 있는 왕국 회관에서 일어났던 일들은 그 사실을 설명된다. 연구가 끝날 때, 파수대 연구를 수행하는 장로인 팀 그레거슨은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우리 회중에 남편이 죽은 자매가 있는데, 그 자매가 힘든 시기를 겪고 있을 것이라 짐작하고서, 우리 중 누군가 한 명이 자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집에 방문했다면, 이것은 '거룩한 봉사'가 되는가?" 라고 질문을 던지자, 처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했지만, 마침내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그것은 거룩한 봉사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성경적 근거가 아니라, 파수대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자 야고보는 참된 숭배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 하느님 아버지의 관점에서 깨끗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숭배 방식은 고난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점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약 1:27, NW). 이 답변자와 비슷한 경향으로 이번 호의 파수대도 거룩한 길을 걷는 방법이 1919년에 충슬종으로 임명된 사람들이 이끄는 조직과 연합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8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 파23 5월호 15-16면 제8항 “거룩함의 길”로 계속 걸으십시오 *** 8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오래전에 유대인들이 겪은 일이 오늘날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일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데, 우리도 비유적인 의미에서 “거룩함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이든 “다른 양”이든 우리 모두는 “거룩함의 길”로 계속 걸어야 합니다. (요한 10:16) 그 길로 걸으면 지금도 영적 낙원을 즐기게 되고 미래에도 왕국이 가져올 축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원 1919년부터 수많은 남녀와 어린이들이 큰 바빌론 즉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의 영향에서 벗어나 이 비유적인 대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당신도 그중 한 명일 것입니다. . . . 그들은 마치 특정 연대가 거룩한 봉사를 지지하고 열리게 한 것으로 묘사하며, 오직 이러한 조직과 연합할 때 거룩한 봉사를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1980년, 레이몬드가 통치체에서 사임한 직후, "거룩한 봉사"의 적용을 야외 봉사와 집회 참석과 같은 것에만 적용하도록 계획된 또 다른 일련의 기사가 파수대 8월 15일자에 실렸다. 이 기사들은 사실 그리스도 이전 유대인들에게 "거룩한 봉사는 항상 율법 계약에 순종하는 숭배"와 관련된 것이었으며 "백성의 일상적인 일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음을 상당 부분 주장의 근거로 강조하였다.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먹고, 마시고, 일하고, 청소하고, 집을 청소하고, 권세자들에게 순종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 볼 수 있단 말인가? 라는 의문을 제기하며, 워치타워 출판물의 소식을 배포하고, 이 내용을 연구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등 "특별한", "일상을 초월하는" 활동만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봉사에 합당하다고 간주되었다. 그것은, 동기부여가 삶의 변화를 일으키고 일상적인 성격의 행위에 영적 자질을 부여하여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봉사가 되어 그 활동들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숭배의 표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경시하게 하였다. 동 파수대에서 이 논제에 기초한 "독자로부터의 질문"은 구율법 계약에 따른 이스라엘 봉사와의 비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 답변은 기사의 내용과 비슷하게 인간의 일이나 가족, 가정, 또는 이와 유사한 활동들이 하나님께 "거룩한 봉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완전히 배제시키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거룩한 봉사로서 가장 강조하는 야외봉사의 이면에 있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Ⅲ 워치타워 법인이 야외봉사를 거룩한 봉사로 강조하는 진짜 이유 ①가시적 이익 중심의 사고방식 만일 워치타워 법인이 주장하는 야외봉사가 거룩한 봉사가 되려면, 그것은 미가서나 다른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공의와 정의 평등과 자유가 확장되는 방향으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여태껏 나타난 결과는 어떠한가? 그들은 시간보고를 하게 함으로써 경쟁심을 부추겨 시간의 양으로써 거룩한 봉사의 정도를 나타내는 인상을 심어주고 오직 그것의 정도를 촉진시키는 방법으로만 시한부 종말론을 강조해왔다. 사실 파수대의 창간자라 할 수 있는 럿셀이 시한부 종말론을 도입한 이유가 그의 사업적 기질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 때 약간의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시한부 종말론과 관련되는 연대에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기를 정하는 것은 성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태도는 돌변하여 연대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그가 연대를 도입하면 사람들을 쉽게 흥분시키고 그의 가르침에 많은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의 판단대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게 되자 추가적인 그의 사업으로 일반적인 밀과 다름없는 밀을 '기적의 밀'이라는 이름을 붙여 시가의 60~300배에 이르는 가격을 받고 신자들에게 판 것이다. 중세의 면죄부와 같은 그런 수법으로 사업을 했지만, 그의 사업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오래 살지 못하고 64세의 나이로 그는 죽게 되었다. 그의 뒤를 이은 협회장들도 여전히 럿셀과 같은 이익을 위한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신자의 머리수와 조직의 인쇄시설이나 건물 확장을 위하여 '기적의 밀'을 파는 방법을 바꾸어 파이오니아 라는이름으로 시간을 바치게 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처럼 가르쳐왔다. 오늘날 워치타워 법인을 이끌고 있는 이사들은 사실상의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서, 그들의 예측시기가 틀렸다는 것을 진정으로 뉘우치지 않고, 주인이 더디 온다는 생각으로 동료 종들을 제명시킴으로써 술이 취해 때리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②일반 증인들의 복지에 무관심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때에 적절하게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동료일꾼들의 안녕과 복지에 신경쓴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좇기 위해서는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하므로 그 과정에서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을 위해 적절한 영육간의 양식을 준비하고 제공하는 것이 충슬종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게으르고 악한 종은 오직 그들이 차지한 이사 자리에 걸맞은 위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동료일꾼들을,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는 것처럼, 때려 그들의 출판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하는 것이다. 이 와중에서 얼마나 많은 여호와의 증인들이 신음과 고통을 겪으면서 학업도 중단하고 생활고로 허덕이게 되었는가? ③질을 고려하지 않는 양 중심의 증가 이러한 워치타워의 역사는 아무리 좋은 관점으로 이해하더라도 그들은 질보다는 양에 치중하였다는 질책을 면할 수 없다. 워치타워의 관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일부 증인들은 그래도 워치타워의 가르침이 일반 개신교보다 도덕적 수준이 높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외견상 그렇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포로가 되어 수용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매일 강제적으로 9시에 취침하고 아침 6시에 기상하여 담배도 피우지 못하게 하는 수용생활에 비교될 수 있다. 그들이 자의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제 수용소를 떠나는 순간 대다수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 이와 아주 비슷하게도 성령의 거듭남 없이(워치타워는 사실상 현재 성령의 거듭남을 부인한다) 교리를 어기면 제명이라는 족쇄를 가지고 협박하기 때문에, 일반 증인들의 도덕 수준이 어느 정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자발적인 믿음의 행위가 아님에 분명하기 때문에 관념의 포로에서 탈출하는 순간 자유를 얻게 되지만, 그 자유로써 어떻게 자신의 앞날에 대한 문제를 대처하고 처신해야 할지 모르게 되며, 워치타워 관념 안에서 가졌던 강제적 도덕(수혈, 기경배 거부 등)은 모두 폐기처분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 가져오는 결과가 아님에 너무나 분명하다. Ⅳ 결론 탈증인이 되면 당분간 상당한 외로움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믿음을 가지도록 격려하기 위해 주시는 그분의 종들의 예들은 대부분 외로운 시간을 견뎌낸 사람들이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사막과 산, 동굴과 땅굴"을 헤매기도 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보상을 기억하고, 우리는 마음을 다하여, '축 늘어진 손을 들어주고, 약한 무릎을 강하게 하고, 우리의 발을 위해 곧은 길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다면 비록 오랜 기간이라 하더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하나님과 그 아들의 초월적 사랑을 간직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연합 없이도 두려움 없이 견딜 수 있다. 오직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견디어 나갈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탈관념되고 탈증인이 됨으로써 부딪히는 문제를 서로 터놓고 이야기함으로써 우리의 나아갈 방향이 어디인지를 스스로 파악할 수 있다. 믿음은 우리를 하나님과 아들의 사랑으로 인도하고, 지속하고, 강하게 하고, 격려해 줄 것을 약속한다. 다른 탈증인들과 우정을 쌓아 가는데서 우리의 노력이 보상을 받을 때, 우리는 탈증인이 겪는 외로음과 어려움을 부수적인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결코 극복하지 못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참고 문헌: 레이몬드 빅터 프랜즈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찾아서> 제 18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