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 벨로의 ‘허조그’
작가 ; 솔 벨로(1915-2005)
초판 출판 ; 1964
1976년 노벨 문학상 수상
아내에게 배신당한 모제스 허조그는 신경질적으로 안절부절 못한다. 이러한 병리 증상은 과거와 당대의 인물들에게 보내지도 않는 편지를 끊임없이 써 대는 버릇으로 나타났다. 이로서 우리는 그를 이 지경으로 만든 사건들, 특히 옛 친구 밸런타인 거스벅과 아내의 불륜에 대한 그의 생각을 하나하나 따라간다. 그가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꿈꾸며 시카고로 향할 때도 따라간다. 뻔한 결과이지만 피비린내 나는 복수는커녕 무기소지죄로 체포된다. 하지만 바로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쩐지 그의 인생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느끼게 된다.
사실 “메시지를 남기지 않았다.”는 문장은 모제스 허조그의 묘비명에 썩 잘 어울린다. 왜냐면 노골적으로 드러난 지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형식적인 의미를 전달하는 소설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오히려 허조그는 전체적으로 봐야 한다. 허조그라는 인물 안에 안달복달하는 내면과 우스꽝스러운 방향을 인간의 선택의 한계에 대한 보다 큰 탐구의 일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솔로의 소설이 지닌 힘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유명한 그의 문장뿐만 아니라 이러한 정신이 작용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인물이 무엇을 보여주는가 보다 그들이 정말 어떤 인간이며, 무엇을 하는가를 스스로 생각해보아야 한다. 허조그는 인생이 어떻게 항상 우리가 인생에 부과하는 형상보다 더 위대한지 깨닫아가게 되고, 그를 따라가면서 우리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된다.
이제 이 소설을 읽고 올린 독후감을 보자.
한여름날 베어버린 땀처럼 올해 여름동안 나에겐 끈적하게 허조그가 붙어있었다. 무책임하게 떼어버릴수도 없었고 또 유쾌하게 함께 하지도 못했다. <허조그>는 두번째아내 메들린과 가장 친한 친구 거스배치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된 허조그 모지스의 이야기다. 사건 중심의 소설이라기 보다는 허조그 내면의 소리와 그의 편지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그래서 흥미를 유발하는 긴장과 재미는 크게 없었다. 하지만 나의 지적 수준이 성장한 뒤에 다시 이 소설을 읽게 된다면 즐겁게 빠져들 수 있을것 같다.
글의 반이 허조그가 써내려간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는 어디에서건 누구에게나 편지를 썼다. 아내와 친구에게 배신당한 아픔을 토해내듯 '허조그 모지스'라는 지성인의 견해를 내뿜었다. 생존유무, 계급, 개인적 친분과 관계없이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 쓰는 행위를 멈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치열한 편지쓰기는 그의 유일한 상처치료법으로 보였다. 나같은 사람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편지쓰는 행위를 대신했었겠지. 또 누군가는 폭력이나 술로 그 행위를 대신했을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받고 또 그 자신만의 방법으로 언젠가 상처를 극복하게 된다. 솔벨로는 허조그 모지스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은 상처를 극복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의 편지, 독백은 독자인 나에게 어떤 공감도 충분한 동정심도 자아내지 못했다. 그의 앓는 소리가 지겨울 정도로 책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것이 바로 우리네 삶, 인생이 아닌가 싶다. 어떤 흥미진진한 사건들의 연속이 아닌 극복해야 할 사건들로 이루어진 인생. 대화보다는 독백이 더 많은, 자신을 달래기 위한 앓는 소리가 더 많은 인생.
메들린의 입장은 어땠을까? 허조그의 앓는 소리만 끊임없이 들었기에 메들린의 입장에 대해서도 궁금해졌다. 메들린을 중심으로 이 소설이 다시 써진다면 어떨까? 허조그는 과연 남편으로서의 의무를 다 했을까? 그에게도 여자는 있었다. 논문을 쓰지 못하는 것, 집을 사는데에 유산을 몽땅 탕진한 것 등 메들린을 원망한 모든 일들에 대한 선택은 허조그의 선택이 아니었던가? 물론 편을 들정도로 메들린이 꽤 괜찮은 여자였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허조그도 마찬가지이다.
허조그처럼 우리 인간들은 기억과 상처의 지배를 받는다. 허조그 기억속의 소노처럼 누군가의 기억속에서 아름답게 살아있는 것도 밑지는 장사는 아닌 것 같다. 누군가 인간은 읽은 책으로 만들어진다고 했지만 인간은 상처로 만들어진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상처에 대처하는 나름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들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아내의 불륜, 그것도 친한 친구와의 불륜이라는 소재의 설정은 나를 미칠듯이 자극했고 감정이입을 잘하는 나로써는 허조그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내가 겪는 일인것만 같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실제의 나는 책 밖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스스로 계속 각인시키며 책을 끝까지 읽어내려갔다. 여기서 솔직하게 한가지 고백하자면 본 책이 서평대상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빌려읽은 책이었다면 나는 허조그를 다 읽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다.
조금씩 평정심을 되찾으며 감정보다는 이성적인 판단으로 허조그를 바라보다보니 색다른 점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 나는 허조그의 아내인 매들린과 친구인 거스배치를 욕하기 바빴다. '어떻게 남편의 사랑을 배신할 수 있으며, 어떻게 친구의 우정을 배신할 수 있는거냐'라며 속으로 그들 둘에게 모든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하지만 세상에 원인없는 결과가 없고 이유없는 다툼이 없듯이 글을 지배하고 있는 허조그의 생각을 찬찬히 들여다보니 이혼사태의 원인은 일차적으로 허조그에게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낭만주의에 대한 논문을 쓰고 철학과 사색에 빠진 허조그가 지식인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허무주의에 빠져있었다는 사실을 포착하는 순간 명확해졌다.
첫번째로 이혼한 데이지와의 관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는 안정적이고 특별할 것 없는 결혼생활에서 극단적인 허무에 빠진다. 명확하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실이 싫어 어디로든지 벗어나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하는 허무주의는 허조그를 소노라는 일본인 여자와의 육체적관계로 까지 이끌어가고 결국에는 또다른 아내로 매들린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런 일련의 행위자체는 허조그를 허무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장에 이르기전까지 모지스 허조그는 지성인의 특권이라고 여겨지는 정의과 이론에 얽매여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채 살아갔다. 이것이 실제로 저자의 삶과 어느정도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본 책이 솔벨로의 자전적 소설인점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작가는 본인의 현실에 대해 괴로운 허무를 느끼고 삶을 지탱하기 위태로웠던 나날들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책이 빨리 읽히기 시작했던 건 2권부터였는데 아마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허조그와 내가 가졌었던 문제점이 일치해가는 것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허조그와 과거의 나는 삶의 많은 부분을 공유했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생활이 끝난 직후 재수결정을 앞두고 나는 처음 겪는 허무에 빠져있었다. 삶의 모든것이 하찮게 보였고 재미없었으며, 현재의 생각만으로 내 미래의 삶까지 모두 조망할 수 있을거라는 어린 착각에 휩싸여있었던 나는 삶보다는 죽음이 더 반가운 뒤늦은 사춘기청년이었다. 그런 나의 허무주의는 대학교1학년때까지 이어졌고 조금만 더 지속되었더라면 나 자신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하기조차 끔찍하다.
신기하게도 그런 나의 단단한 허무를 깨준 것은 군대였다. 군대에서의 땀과 부딪힘, 극복과 좌절과 같은 인간의 피부가 직접적으로 맞닿는 현실이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던 망상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허조그의 허무를 깨준 것은 다름아닌 사랑하는 자식과의 접촉이었다. 보기만해도 사랑스럽고 깨물어주고픈 딸 주니와의 만남을 통해 허조그는 삶의 의미를 깨닫고 아들 마르코에게 편지를 써 루드빌의 자기집으로 초대하려고 한다. 이 과정을 통해서 그는 스스로의 마법에서 풀려나게(편지쓰기를 중단)되고 이 땅에 뿌리를 내릴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마지막장을 읽고서는 무릎을 탁 쳤다. 소설 전반에서 답답했던 허조그가 결론적으로는 스스로를 극복한 것이 만족스러웠고 그 경험이 내 경험과도 일맥상통한다는 점이 탄성을 자아냈다. 두 사람의 인생(과거의 나와 책 속의 허조그)으로 미루어봤을때 인간에게는 분명 뿌리내릴 땅이 필요하다. 지적 욕구이상으로 필요한 것이 살갗을 맞대는 인간미이고 피부를 비비는 마찰이다.
이런 것을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영화 레옹이다. 킬러 레옹이 인간으로써 삶의 행복을 알게 된 건 마틸다와 따뜻한 관계였고 결국 그는 죽지만 그의 분신인 식물은 영화마지막장면에서 땅에 뿌리를 내린다.
사실 이런저런 의미를 차치하더라도 허조그라는 책이 쉬이 읽히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철학적 내용들이 곳곳에 등장하기도 하거니와 소설이 아주 흥미를 끄는 문체로 이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현실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수많은 청춘들-본인이 대학을 나온 지성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한번쯤 허조그를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을까싶다. 아무쪼록 현대 지식인들이 자기만족과 고루한 생각에 빠지지않고 삶에 긍정적인 역할을 기여할 수 있는 적극적인 사회가 열리길 기대하며 이만 글을 줄인다.
<작가- 솔 벨로>
솔 벨로(Saul Bellow, 1915년~2005년)는 미국의 소설가이다.
캐나다 퀘벡 주 출신으로 9살 때 일리노이 주 시카고로 이주, 시카고 대학교와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인류학을 공부하였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편집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시카고 대학으로 복귀하고, 그 후 미네소타·프린스턴·뉴욕 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했다. <훔볼트의 선물>(1975)을 쓰고, 이듬해인 1976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세 번이나 미국 도서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의 첫 장편 <허공에 매달린 사나이>(1944)는 입대하기 전의 한 청년의 심정을 일기체 형식으로 쓴 것이며, <희생자>(1947)는 유대인과 이교도(異敎徒)와의 관계를 그린 그의 출세작이다. <오기 마치의 모험>(1953), <하츠오그>(1964), <비의 왕 헨더슨>(1959) 등은 사회가 개인에게 가하는 압력의 실체를 철저하게 추구하여 인간의 허무성을 표백(表白)했다. 중편소설로는 현대인의 고경(苦境)을 그린 <현재를 놓치지 마라>(1956)가 있고, 1964년에 공연된 희곡 <마지막 분석>이 있다. 이 밖에도 <새믈러 씨의 행성>(1970)과 여행기 <예루살렘을 다녀오다>(1976)가 출판되었다. 2005년에 영면하였다.
솔 벨로(Saul Bellow)는 시카고의 도시생활을 묘사한 작품으로 유명해졌는데, 그의 출세작이 된 장편소설 『오기 마치의 모험』은 전후 미국의 자신감과 풍요를 담아 미국 문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속사포 같은 농담, 재치 있는 신조어, 시적 정밀성을 결합하여 1950년대 미국의 급속한 팽창과 다양성을 담아내기에 충분한 유동성 있고 폭넓은 목소리를 개발했다.
위대한 미국 소설의 탐색은 『오기 마치의 모험』의 탄생으로 끝났다는 마틴 에이미스의 찬사 등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이후 벨로는 상상력이 넘치는 피카레스크 소설 『비의 왕 헨더슨』에서 과거의 연인들, 죽은 철학자들, 미국 대통령들에게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는 ‘고통받는 농담가’를 주인공으로, 필사적이고 유쾌한 지성이 돋보이는 『허조그』에 이르기까지 야심작 여러 편을 잇따라 발표했다. 이 작품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친구에게로 간 아내 때문에 엉망이 된 자신의 삶과 끝없이 쏟아내는 자신의 말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허조그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성 관계의 어려움은 벨로 작품에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데, 자칭 ‘연쇄 남편’인 그는 자기 나이의 반도 안 되는 다섯 번째 아내를 두었으며, 마지막 소설을 발표하기 1년 전인 1999년에는 84세의 나이에 자식을 얻기도 했다.
1976년 노벨상위원회는 벨로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현대 문화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로 밝혔는데, 벨로의 위대성은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인상적이고 인용할 만하며 적절하고도 우스꽝스러우며 정밀하고도 확장적인 문체를 통해 이 같은 자질을 탁월하게 표출한 데 있다.
내 마음속의 어린이는 기쁘지만, 내 마음속의 어른은 회의적이다.』
76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지명 받은 「솔·벨로」는 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회의적』이라는 말은 어쩌면 공연한 짐으로 느껴진다는 뜻일 것이다. 사실 작가에게 상이란 영감이나 기쁨으로 느껴지기보다는 부담스러운 쪽이 더 클 것 같다. 「솔·벨로」는 해마다 이 무렵이면 「스톡홀름」발 「뉴스·캐스트」에 오르내린 이름이다. 또 미국의 작가 중에서 선정한다면 당연히 지명 받을 만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불과 30여년 가까운 작가 생활을 통해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로 꼽히고 있었다. 1944년 『공중에 떠있는 사람』을 발표하면서 이미 비평가들의 관심을 모았었다.
2차 대전 중에 쓰여진 이 작품은 입대를 앞둔 어느 청년의 의식을 묘사하고 있다. 막상 직장마저 포기하고 입대를 기다려도 통지서가 오지 않는다. 시민 생활로부터 단절된, 그렇다고 병영 생활도 아닌, 마치 공중에 떠있는 상태와 같은 질식과 허탈 속에 있는 한 청년의 고뇌야말로 그 시대의 인간상을 생생하게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벨로」는 가난한 이민의 아들로, 유대계 2세 시민이다. 그의 아버지는 소련의 「페트로그라드」에서 야채를 파는 영세 상인이었다.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캐나다」로 이주했다. 「벨로」는 1915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1924년 미국은 한창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벨로」가는 이 호황에 기대를 걸고 다시금 미국으로 옮겨왔다. 「시카고」는 그 첫발을 디딘 곳이며 오늘날까지 「벨로」가 떠나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벨로」의 문학 세계는 좀 특이한 것 같다. 그 내용이나 구성에 있어서 별로 재미가 없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언제나 「베스트셀러」였으며 문제작으로 평가되었다. 비판가들도 그의 소설에 독자들이 많은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유대인의 차가운 감성과 성서에 바탕을 둔 윤리관과 교양주의·도덕주의의 짙은 색채는 어디하나 독자들의 흥미를 자아낼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인기 있는 작가인 것이다.
「세일즈맨」, 「택시」 운전사, 법정의 수인, 아이들, 야생 동물들…필경은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런 군중들이 저마다 독자들에게 신비로운 공감을 주고 있는 것도 같다.
그는 「시카고」대, 「노드웨스턴」대, 「위스콘신」대 등을 전전하며 인류학을 전공한 지성파 작가이다. 그러나 「벨로」는 잠자는 지성을 스스로 경멸하고 있다. 아마 그의 문학 세계는 이런 데에 생명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첫댓글 이동민 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