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연 202212740 생물의소재공학과
<가난이 대물림되지 않는 세계를 꿈꾸며: 조세희의 책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읽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수백만 원, 수천, 수억 만 원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죽음 앞에선 모두가 공평하다. 돈이 많다고 해서 죽음을 거역할 수 있는 자는 이 세상에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급격한 산업화가 가속화되던 시절이라면 말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 속 난장이는 급격한 산업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식과 아내를 뒤로한 채 죽음을 택한다. 난장이를 죽음으로 점점 몰아간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많은 돈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이 행복이라고, 돈으로도 얻을 수 없는 소중한 것이 행복이라고. 물론 맞는 말이다. 행복을 뚝 떼어내어 물건처럼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행복의 기준은 개개인마다 다르기에 어떤 것이 행복한 것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삶의 기본적 요소인 의, 식, 주에 의거하여 생각해보면 몸을 보호할 수 있는 옷을 입는 것, 배부르게 먹고 싶은 음식들을 먹는 것, 안전하고 따뜻한 집에 사는 것, 등등... 모든 것의 기반이 되는 것은 결국 돈이다. 돈이 없으면 먹지 못하고 배우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어쩌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돈이 행복이 다가 아니에요.”라는 말이 모순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돈이 없으면 좀 더 많은 것을 배우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가난을 극복하기 더 힘들다. 자식을 낳아도 가난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그 자식 또한 가난의 연속이다. 반면, 부유층은 대부분 자식에게도 부를 물려준다. 결국 가난을 물려받은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인생에서의 출발점부터가 다른 셈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악순환이 되어버렸다. 안타깝지만 급속한 산업화의 비참한 결과이다. 나는 이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무섭다. 과연 내가 앞으로 이 현실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과 막막함은 커져만 갈 뿐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우리는 출생부터 달랐다.”, “그는 자라면서 더욱 강해졌지만, 우리는 자라면서 반대로 더 약해졌다.” 흔히 운명이라 말한다. 운명은 정말로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일까? 만약 인간의 노력으로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운명이라면 우리는 공평한 세상에 살고 있지 않다. 소설 속 난장이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극복하지 못하였다. 난장이가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니다. 난장이는 평생을 열심히 일하였고, 법을 어기지도 않았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도 올렸다. 하지만 결말은 죽음이었다. 나는 난장이 가족을 보며 각자 주어진 운명이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운명은 노력한다고 해서 거스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은 자식과 아내를 생각하면 어쩌면 무책임해 보일 수 있는 난장이의 선택을 누가 등 떠민 것일까. 바로 악마같이 검게 물들어 변해버린 사회이다. 우리의 사회는 점점 빈부격차가 커져만 가는 추세이고, 그렇다보니 부유한 사람만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현대인들이 한번쯤 깊게 고민해봐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참 안타깝지만 어떻게 보면 당연한 말이다. 부유층은 겪어 본 적이 없을 테니, 가난한 삶의 고단함과 무기력함을 겪어본 적이 없을 테니까.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닌데, 돈이 행복의 기반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다. 또한 답답하다. 사회적 강자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이 현실이. 권력이 있는 강자들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 온갖 못하는 일이 없고, 약자들은 그 아래에서 피, 땀 흘리며 악착같이 살아간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아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바뀔 수 없는 굴레인 것 같다. 약자들이 약자들을 돕는다고 이 현실이 달라질까? 아니다. 강자들이 생각과 행동을 바꾸지 않는 한 이미 썩을 만큼 썩어버린 현실이 다시 맑아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가난의 대물림이 끊긴다면 난장이가 꿈꾸던 일만 년 후의 세계가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난장이가 꿈꿨던 그런 세계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만 년 후의 세계에서 이미 너무 멀어져왔기 때문에. 다만, 가까워지는 것은 남아있는 우리의 몫이다.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에서 최대치 만큼을 노력하여 난장이가 꿈꿨던 그 세계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