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저 아래에 기차가 서 있는데, 거기가 '승부역'인가 보았다.
조그만 현수교도 보이고......
그런데 이상했다.
조금 전 지나갔던 기차가 떠나지를 않고, 아예 승객들이 그 기차에서 줄지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지? 왜 그럴까?' 생각을 해 보니, 그 답을 아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게 바로 관광열차인 '눈꽃 열차'인가 보았다. 이 간이역에 기차를 세워주고, 승객들이 주변에서 관광을 하도록 하는......
나는 서서히 승부역 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다리 한쪽 교각에 웬 나무 하나가 통째로 걸려 있었다.
그건..
지난 여름 홍수에(그렇다면 물이 저 높이까지 찼었단 말이지?) 떠내려가다 걸려, 물 높이가 낮아졌어도 그대로 남아 지금까지 있는 흔적이란 말이지?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내년(?)에 또 다른 홍수가 나서 저걸 쓸어갈 때까지 걸려 있을 거라는 얘긴가?
나에겐, 퍽 재밌는 요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진도 몇 컷 찍어 두었다.
기차에서 내렸던 승객들은 아예 강 건너편으로 몰려들 갔다.
'거기엔 뭐가 있길래?'
허기야, 나에겐 별 관심도 없었다.
우선 나는, 저 차와 반대쪽으로 올라가는 '태백행' 기차가 몇 시에 있는지 궁금했을 뿐이다.
여기서 오늘 밤을 묵을 순 없을 테니까.
더구나 커다란 산을 넘어온 뒤라, 내 심신은 많이 지친 상태였고, 무엇보다도 빨리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특히 신발과 바짓가랑이가 젖어 있어서, 걷는 것조차 여간 불편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그저 한가롭게 산길을 한 번 걸어보자고 시작했던 일이, 저 높은 산(겨울 산)을 통째로 넘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 나 스스로도 믿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 돼 버렸다.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동맥이다
저게 시(詩)ㄴ가?
하늘이 세평이라고?
좀 우스웠다.
내가 옛날 군대(전방)에 근무할 때, '하늘이 육백 평'이란 표현이 있었지만... '세 평'은 너무 과장된 표현이 분명했다.
허기야, 그만큼 산이 깊어 하늘이 적게 보인다는 뜻이긴 하겠지만......
승부역 쪽으로 갔던 나는, 일단 역무원을 만났다.
"위로 올라가는 기차는 몇 시에 있습니까?"
"아니, 어떻게 오신 분인데... 위로 가신다는 말씀인지......"
그는 기차에서 내려 관광하러 간 사람들이 아닌, 웬 낯선 이방인을 보고는 놀라며 물었다.
"아, 예... 저는 태백 쪽으로 가고 싶은데, 기차가 몇 시에 오는지요."
"그러세요? 여긴, 기차가 안 서는 곳인데요......"
"예? 그럼 이 차는요?"
"예, 이 차는 관광열차라 여기서 기착한 것이고, 일반 열차는 서질 않고 그냥 지나가는 곳입니다."
"그럼.. 여기선, 어떻게 외부로 빠져 나가지요? 버스가 있습니까?"
"아니요."
"예?"
"여긴 버스도 안 다닙니다."
"아니, 그럼... 여기 주민들은 어떻게들 외부로 나갑니까?"
알아본 즉, 여기 승부는 아래쪽(그러니까 내가 왔던 봉화거나 영주 같은 남 쪽)으론 차로 갈 수가 없고, 태백 쪽인 북쪽으로 길이 나 있는데, 막다른 지점이라, 그 쪽에서 들어왔다가도 길이 없어서, 여기서 돌려서 나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아니, 이런 오지도 있나?'
그래서 내가 방금 저 산을 넘어왔다고 하자, 역무원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어떻게 저 산을 넘어와요?"
"그러게요... 그래서, 저.. 죽는 줄 알았답니다."
"야, 이 겨울에!"
그는 한숨 비슷한 어감으로, 감탄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가 가르쳐준 이 곳에서 빠져나가는(?) 방법은,
관광객을 위한 상인들 대부분이 곧(오늘의 막차인 이 기차가 떠나면) 태백 방면으로 철수를 하니, 그 쪽으로 가서 사정 얘기를 한 다음, 그들 중 한 차를 얻어 타고 나가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위쪽으로 올라가면 마을에(승부리) 민가가 있고, 거기엔 민박하는 곳도 있다고 했다.
난감했다.
그렇잖아도 눈에 젖었던 신발은 찝찝했고, 다리도 천근만근인데......
그래도 하는 수 없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이 산골에서 빠져나가야만 하니까......
그래서 일단 포장마차들이 모여있는 관광지로 내려갔는데,
(위 사진 플랭카드 아래에 서 있는 사람들.. 주목)
이젠 관광객들이 기차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아닌 게 아니라 그들은,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보는 것이었다.
아래 위로 훑어보는 모습들이......
그랬다.
그들과 나는, 이곳에서는 똑같은 이방인이었지만,
나는 그들의 일행도 아니었지만, 외양으로만 봐도 전혀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선 진흙투성이의 신발부터.
관광열차로 편하게 관광하는 사람들과, 무모하게 겨울 산을 넘어온 나그네의......
둑을 내려가자 상인으로 보이는 남자들 서넛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
"저, 조금 전에 승부역에서 역무원의 얘기를 들었는데... 여긴, 대중 교통 수단이 없다는데, 제가 태백 쪽으로 나가야 하거든요? 근데... 여기서 차를 얻어 타고 나갈 수밖에 없다던데요......"
"아니, 어떻게 오신 분인데요?"
"예, 제가 방금 전에 저 산을 넘어왔거든요."
"어디서라구요?"
"예, 현동에서요."
"현동요?"
"예......"
사람들은 하나 같이 깜짝 놀랐다.
"아니, 거기서 어떻게 올라왔어요? 눈은 녹았던가요?"
"예... 높은 곳엔 아직 눈이 그대로든데......"
"그래요? 야, 여기 사는 우리들도 그 길을 잘 안 가는데... 더구나 이 겨울에, 눈길을요?"
그 사람들은 서로들 얼굴을 바라다 보았다.
"아이! 대단하시네......"
"그 게 아니고... 저도 아무 것도 모르고 넘어오다가, 죽는 줄 알았지요......"
"그럼요. 그럼요... 여기 사는 우리도 가끔가다 산에 오르면, 길을 잃을 때가 있는 험한 곳인데... 근데, 어떻게 그 산을 넘어옵니까? 등산하시는 분 같지도 않은데......"
'허긴, 나도 미리 알았다면 왜 그런 무모한 짓을 했겠는가?' 하면서도,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
"아무튼, 제가 태백 쪽으로 나가야 하는데... 저 좀 태워다 주실 분이 있을까요?......"
그때였다.
"제 차를 타고 나가시죠." 하고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우체국 택배'란 글씨가 적힌 조끼를 입은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승부역 공터에 빨간 우체국 택배차가 서 있는 걸 보았었던 게 떠올랐다.
"제가 지금 나갈 건데, 제 차 타고 가세요."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그렇게,
손쉽게(?) 나는 차를 얻어 탈 기회를 잡게 된다.
'이렇게 재수가 좋을 수가!' 하다가,
'아, 그것도 어젯밤 꿈 때문인가? 물속에 잠겨 '죽는 꿈'?'
그럴지도 몰랐다.
오늘, 죽으려다 간신히 살아난 것도 그렇고... 이렇게 차까지 얻어 타고 나갈 수 있으니......
차는 1 차 콘크리트 길을 타고 상류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여기요? 매 번 선거 있을 때마다 국회의원 후보들의 공약사업이 이 '도로 확장'인데... 사람들의 통행이 없다 보니 맨날 말 뿐... 도로가 이렇게 좁아, 다니기가 영 불편한 곳입니다."
인상 좋은 택배 직원은, 혼자서 신이 나(?) 묻지도 않은 말을 나에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계곡의 개울을 따라 올라가는 이 길은...
절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