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44
8월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연중 제1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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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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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JRbOemqE-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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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영광-십자가-영광>
타볼산은 팔레스티나의 여러 산 가운데 아름답기로 유명한 산입니다. 이 산은 갈릴래아 산악지역 남쪽에 위치한 에스드렐론 평야에 위치해있는데, 정상의 높이가 575미터이지만 평야 가운데 위치해 있다 보니 꽤나 높고 웅장해보입니다.
1954년 산 정상에 오르는 차도를 닦았는데 산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야 합니다.
현재 산 정상에는 꽤 넓은 성터가 있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기념하기 위한 아름다운 성당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변모 사건을 꽤나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간부급 제자 세 명(베드로 요한 야고보)만을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중 제자들은 특별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입고 계시던 의복이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 앞에 당황해하고 있던 제자들이었는데, 더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그들 앞에 두 사람이 갑자기 나타났는데, 말로만 들어오던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 모세와 대 예언자 엘리야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두 사람과 함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신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정말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의 변모 사건, 대체 무슨 의도일까? 뭐 어쩌라는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변모 사건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예언서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은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입니다. 적들에게 체포되고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십자가형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얼굴은 또 다른 방식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빛나고 위풍당당하고 말씀 한마디에 뭐든 못할 것이 없는 공생활 기간 동안의 승리의 메시아가 아니라 때리면 맞고 순순히 십자가에 못 박히는 한 나약한 인간의 얼굴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참혹했던 삼일이 지나가면 예수님께서는 원래 지니셨던 영광스런 얼굴을 다시 한 번 회복할 것입니다.
영광-고통-영광의 과정을 거치는 메시아의 운명을 미리 잘 이해하고 있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핵심제자단 세 명만 데리고 타볼산에 오르셨고, 또 그들이 보는 앞에서 변모하신 이유가 뚜렷해진 것입니다.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아들 예수의 영광스런 모습을 핵심제자단에게 미리 살짝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한 배려를 베푸신 것입니다.
변모 사건은 곧 도래할 예수님 수난의 때,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예수님,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예수님 앞에서도 제자들이 그분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 사건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곧 다가올 아들의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이 당혹해하지 말고 두려워도 하지 말고 당당하게 맞설 힘과 용기를 지니도록 힘을 주신 것입니다.
비록 꿈결같이 짧은 한 순간의 기억이었지만 이 짤막한 영광의 순간에 하느님의 목소리와 모세와 엘리야의 증언이 덧붙여져 아들 예수가 자신에 대해 예언하는 것을 제자들이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오늘도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우리 주변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직도 세계 도처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과 우리 인간의 죄로 인해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무자비한 폭력이 무죄한 어린 양을 짓밟습니다. 악이 선을 능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얼굴이 있습니다.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주님 얼굴입니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어느 날 영광스런 얼굴의 주님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입니다. 빛나는 광채를 지닌 주님께서 세상의 악을 정복하실 것입니다. 그때 끝까지 인내한 우리도 비참하고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영광스럽게 빛나는 주님 얼굴을 닮아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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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JL6JPhAk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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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나라 행복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워질수록 커진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주님의 변모입니다. 마르코 복음은 바로 직전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 마르코는 높은 산에서 주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오심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그분의 본성이 빛이심을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옷은 그분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사제는 사제 옷이 있고 법관은 법관 옷이 있으며 경찰관은 그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옷이 변했다는 말은 그리스도를 빛 자체이신 하느님으로 볼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해 제자들을 산 높이 데리고 오르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정체성을 온전히 볼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는데 성체를 영하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실 때 그분의 새로운 정체성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라 믿고 성체를 영했지만, 그전에는 그저 비타민처럼 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믿고 이해하기 전까지는 하늘 나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 나라는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배반하고 나서 비로소 그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피를 흘리셨음을 깨달았을 때 옵니다. 다시 말해 산에 오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인간을 구하시기 위해 흘리신 당신 피임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재벌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병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돈 버느라 바빠서 아들 하나 있는 것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들은 그야말로 세상 물정 모르는 망나니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돈을 물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직접 한 달 동안 일을 해서 번 돈을 가져오면 내가 모든 재산을 너에게 물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겠다.”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좀 달라고 하여 이것이 자신이 번 돈이라고 거짓말을 시키며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돈을 벽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황당했습니다. 아버지는 “다시 벌어 오너라.” 하고 말했습니다.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또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렸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그 돈을 벽난로 불에 던졌고 아들은 화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다가 아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 아버지나 나를 감시하는 것 같다. 다 아시는구나. 돈 한 번 벌어보지 뭐.’
건설 현장에서 손발이 부르트고 온몸이 매를 맞은 듯 아픈 것을 참으며 한 달을 버텨 자신이 직접 번 돈을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난로에 집어 던졌습니다.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그 돈을 꺼내기 위해 불 속에 손을 넣었고 타들어 가는 돈을 끄집어내어 불을 껐습니다. 이 과정에서 아들은 손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제야 아버지는 “고생했다. 아들아. 내 모든 돈은 다 너의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주는 재산의 가치를 모를 때는 아버지가 아무리 큰 선물을 줘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알게 되면 아버지가 주는 것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가치가 됩니다. 그때 참으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높은 산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려가시는 이유는 바로 당신께서 흘리실 피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과정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고 시나이에서 계약을 맺게 해 준 것에 아무 고생도 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파라오를 섬길 때 더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엘리야가 아합 왕 밑에서 우상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기 위해 바알 예언자들과 싸워 이겨 그들의 목숨을 거두는 과정이 쉬웠을까요? 하지만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길 때가 더 좋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을 위해 흘린 피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씻어주시기 위해 흘리신 피의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두 방법이 있는데 묵상을 통해서, 그리고 실천을 통해서입니다. 그리스도 수난의 가치를 묵상하고 나도 이웃의 죄를 위해 피를 흘려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죄를 씻기 위해 흘리는 피의 가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일본 어떤 선생님은 어둠의 세계로 빠지는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손가락까지 잘라야 했습니다. ‘미즈타니 오사무’ 선생입니다. 밤에 돌아다니는 선생님으로 유명한 그는 일본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이 서 있는 교사로 불립니다. 밤에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을 선도하기 위해 마약중독, 매춘, 야쿠자와 관련이 있던 학생들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느 학생이 야쿠자 조직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하자 야쿠자 두목이 “손가락 하나를 두고 가라.”라고 협박하였고 오사무 선생은 자신의 손가락을 자르고 학생을 구출했습니다. 심지어 그 학생은 일본인도 아니고 대만 유학생이었습니다. 오사무씨는 마약 상인에게 옆구리를 찔리고 엄지손가락이 잘리는 등 숱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13년 동안 밤거리에서 학생과 만났고 5000여 명의 학생을 다시 ‘낮의 세계’로 불러들였습니다. “손가락 하나를 잃는 아픔은 매우 컸지만 한 소년의 미래를 위해 내 손가락 하나쯤은 희생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밤거리에서가 아니라 이 선생님의 사랑과 희생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자신이 귀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손가락을 잘리는 고통을 거부한다면 선생님 희생의 가치를 모를 것이고 그만큼 덜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웃을 위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이유입니다. 내가 이웃을 위해 피를 흘리는 만큼 우리 행복은 커집니다. 이것이 높은 산에 올라 조금씩 그리스도의 참모습을 보는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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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9,2-10 : 예수님의 모습이 그들 앞에서 변했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의 여정을 시작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예시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광은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도 이 미래의 영광을 기대하고 지향해 가면서, 삶의 어두운 나날들에 의미를 부여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고통과 시련의 시기를 생략할 수는 없다. 베드로가 엉겁결에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5절) 하고 소리치는 것처럼 그 시기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예수님의 변모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고, 또한 시련과 박해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기 위한 것이다. 아직은 천상에 ‘초막’을 지을 때가 아니다. 오히려 지상에서의 싸움을 시작해야할 때이다. 온갖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에게 순종함으로써 극복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수난과 죽음의 시련을 거쳐 우리보다 먼저 천상영광에 오르셨다.”(R. Schnackenburg, Vangelo secondo Marco, Roma 1973, Vol. II, p. 44.)
예수님의 변모시의 찬란히 빛나는 옷은 신적 세계의 표지이며 기쁨과 승리를 상징한다. 부활 때 천사는 순백의 옷으로 나타난다(16,5). 구름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현존의 독특한 상징이다. 세 사도에게 예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예외적이고도 형언할 수 없는 체험을 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이 찬란한 변모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있다. 우선은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4절)와 구름 가운데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는 소리다. 구약의 위대한 두 인물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단계적으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구약성서상의 이 두 인물은 그리스도와 함께 마지막 때가 도래하는 그 순간에 실현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아버지의 말씀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계시해주는 말씀이다. 즉 사도들에게 그 신비를 이해하고 구원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라는 권고이다. 갈바리오 위에서 예수께 일어날 사건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께로부터 나오셨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은 사람만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 십자가 밑에 있던 백인대장이 고백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39)는 고백은 오늘 아버지의 말씀의 반향일 것이다.
그리스도의 변모가 지니는 의미는 우리의 삶이 고통을 영광의, 부활의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고, 그러한 자세로 영적으로 더욱 진보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안에서 고통을 통해 영광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은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서만이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의 고통은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있던 고통이었다.
고통의 신비란, 고통이 고통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에 신비라는 것이다. 고통 자체가 신비일 수는 없다. 그 고통을 통해서 참된 부활의 기쁨을 가질 수 있다는 데서 나온다. 그러므로 고통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는 같은 것이다. 이것이 오늘 변모축일을 지내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의 모습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바꾸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 고통은 하나의 은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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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의 변모 이야기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와 베드로의 수난 거부 사건 뒤에 자리하며,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더욱 확고히 하는 동시에 사람의 아들이 부활하리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오르신 높은 산은 특별한 가르침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변모하시고 옷이 새하얗게 빛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하신다.’는 신앙을 가르쳐 준 모세와, 하느님께 되돌아갈 것을 가르치던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와 대화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는 천상의 존재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예수님의 변모 뒤에 구름 속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왔던 말씀인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와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과 수난을 시작하시기 전, 곧 예수님의 삶에 큰 획을 긋는 중대한 전환점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리고 오늘은 세례 때와는 달리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를 덧붙여 예수님의 수난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합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필리 3,21)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을 우리가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사도 14,22)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도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55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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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을 때(마르 8,31), 베드로 사도는 부활 예고 말씀은 흘려듣고 수난 예고 말씀에만 놀라서 예수님을 강하게 말렸습니다.(마르 8,32)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대단히 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이 말씀은, 제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는 ‘꾸중’ 가운데에서 최고로 가혹한 ‘꾸중’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게서 물러가라.”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의 본분을 지키라는, 즉 제자로서 스승이 가는 대로 스승의 뒤를 따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인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우선 당장 편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자신을 포함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반응에 무척 놀랐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정말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무슨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또 어떤 사심을 품고서 한 말도 아니고, 사랑하고 존경하는 스승님의 수난과 죽음 예고 말씀에 놀라서 그것을 말린 것뿐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엄하게 꾸짖으시자 제자들은 모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뒤에,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르 8,34) 이 말씀도 제자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십자가’ 라는 말은 ‘끔찍하고 비참한 죽음’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제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듣고 싶어 한 말씀은, 또는 듣고서 좋아했을 말씀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마태 19,28).” 같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십자가에 관한 말씀은 듣고 싶지도 않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말씀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제자들은 모두 의기소침해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때문에 기가 꺾이고 풀이 죽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기와 희망을 주시려고, 그래서 제자들이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서 당신의 뒤를 더욱 잘 따를 수 있게 해 주시려고 당신의 본 모습을 보여 주셨고,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 주셨습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2-4)
여기서 예수님의 옷이 새하얗게 빛났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서 눈부시게 빛났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이라는 말은, 그 영광은 지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것’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산’에서 세 가지 체험을 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영광을 본 것은 ‘첫 번째 체험’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본 것은 ‘두 번째 체험’입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루카 9,31), 마르코복음에는 대화 내용이 생략되어 있고, 두 사람이 나타났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이 나타난 일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눈 일은, 그 두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고 있음을 나타내기도 하고, 구약시대 전체가 예수님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5-7)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그냥 이대로 영원히 지내면 좋겠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다는 말은, 무서워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영광에 압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의 ‘황홀경’에 도취되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은 십자가를 건너뛰고 곧장 영광으로 직행하기를 바라는 인간적인 소망을 나타낸 말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의 소망을 차단하시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은 일은 제자들의 ‘세 번째 체험’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직접 보증해 주신 말씀인데,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하느님과 같은 신성을 지니신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는 말씀에서 ‘그의 말’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과 앞의 34절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가리킵니다. 십자가를 생략하고 영광으로 직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나 모든 신앙인에게나,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것도(마르 9,9)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왜 꼭 십자가를 거쳐야만 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경우에는 인류의 속죄를 위해서이고, 우리의 경우에는 단련과 정화를 위해서입니다. 어떻든 하느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신앙인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의 뒤를 따라야 한다는 것을 더욱 강조하신 시청각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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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을 3가지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첫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보다 느린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고전 역학의 법칙이 적용됩니다. 뉴턴의 물리학입니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 동역학의 법칙, 작용 반작용의 법칙’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힘과 운동을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로 가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적용됩니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는 세상입니다. 빛의 속도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돌아오면 시간이 변한 것을 알게 됩니다. 빛의 속도로 1년을 다녀온 사람에게 지구에서의 시간은 100년이 흐를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세상은 빛의 속도를 넘어서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는 세상입니다. 양자역학이 적용됩니다. 양자역학에서는 물질을 관찰자가 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가 보면 물질이 생깁니다.
우리의 삶도 3가지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삶은 감각적인 삶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면서 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생명은 이런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도 이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욕망이 가는 곳으로 우리의 몸도 함께 있습니다. 생로병사의 삶을 받아들입니다. 두 번째 삶은 이성적인 삶입니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을 슬퍼합니다. 원하지 않는 만남을 괴로워합니다.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함에 안타가워 합니다. 감각에 종속되는 몸과 마음에 허무함을 느낍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철학, 과학, 문학, 예술, 건축이 발전하였습니다. ‘왜?’라는 질문을 통해서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답을 찾았습니다. 예언자들은 ‘왜?’라는 질문에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세 번째 삶은 깨달음의 삶입니다. ‘왜?’라는 질문의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삶입니다. 감각적인 삶과 이성적인 삶을 뛰어 넘는 삶입니다. 짜라투스트, 부처, 마호메트는 깨달음의 삶을 살았고, 그 삶을 전하였습니다.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성서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를 3가지 차원에서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옷도 변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대화를 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천막을 3개 지어서 지내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모습이 변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과거의 예언자와 대화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부활이었습니다. 교회는 전승에 따라서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 주시고자 거룩한 변모의 표징을 드러내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신데렐라처럼 신분이 변하는 것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사람들의 칭송이 거룩함은 아닐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주름진 얼굴이지만, 거친 손이지만 절망 중에 있는 이들에게 희망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 중에 있는 이들에게 사랑의 미소를 보여 주는 것이 거룩함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거룩해 지기 위해서는 산에 올라야 합니다. 기도의 산, 봉사의 산, 희생의 산, 나눔의 산에 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산에 오를 때 몸이 너무 무거우면 지치기 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필요 없는 것들을 내려놓고 올라야 합니다. 욕심, 시기, 질투, 원망, 불평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거룩해 진 것은 내가 알리는 것이 아니라, 남이 알아주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알아주고, 이웃들이 알아주고, 하느님께서 알아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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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독서는 모든 이의 재판관이며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연로하신 분으로 나타나, 세상의 주인인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왕권을 주시는 환시에 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종”으로서 겪으시는 수난 때에, 장차 영광스러운 심판관으로 오시는 “사람의 아들”의 표상을 당신 자신에게 부여하며 완성하실 것입니다.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모세와 엘리야가 나누는 거룩한 대화 내용을 전해 주는 복음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전에 야이로의 딸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목격한 세 제자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십니다. 주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 모습이 영광스럽게 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리브산에서 죽음의 고뇌를 겪으시기 전에, 죽음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를 거두신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 제자들은 장차 하느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목격하고, 믿음의 순수함으로 말미암아 부활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때 말씀과 행위에서 능력에 찬 예언자들이며, 장차 오시기로 한 메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모세와 엘리야가 영광에 싸여 나타나서, 주님께서 세상을 떠날 일을 이야기합니다.
모세는 메시아의 예형과 그림자로서 율법을 나타내고, 엘리야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한 인물로 예언을 나타냅니다. 둘 다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돌아가시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며, 이는 하느님께서 성경과 율법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오래 전부터 밝혀 주신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머지않아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탈출은 당신의 떠나가심, 곧 당신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구원자의 수난은 특별한 찬양의 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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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높은 산’을, 학자들은 헤로몬산 아니면 타보르산으로 추정합니다. 헤르몬산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주님의 거룩한 변모가 바로 이어질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는데, 산의 높이가 2,814미터에 이릅니다.
그러나 교회 전통은 높이 575미터인 타보르산을 주님의 거룩한 변모 장소로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셨던 나자렛과 가깝고, 당시 초기 교회의 성지 순례 여정의 불편함을 덜어 주었기에 일반적으로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산의 정확한 위치나 높이보다 산에서 이루어진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의미가 우리에게는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야고보 그리고 요한만을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그들이 거기에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자의 상징인 모세,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시며 진정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십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맛보게 하고,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걸을 때 그들이 인식해야 할 주님을 엿보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영광을 보지만, 동시에 사람이 되신 말씀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깊이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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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선별된 제자들과 신적영광 체험>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은 예수께서 곧 다가올 자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선별된 제자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앞에서 당신의 신적 영광을 미리 보여 주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받게 될 영광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 자기계시적 사건으로서 공관복음서 모두가 보도하고 있습니다. (마태 17,1-9; 마르 9,2-10; 루카 9,28-36) 이와같이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은 복음서상의 실제사건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공관복음서 모두가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는 역사적 사건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내용을 보면 마태오와 루카는 마르코복음의 원전을 놓고, 일단 그 내용과 구조를 따르면서 고유의 특성을 살려 이 대목을 편집합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님의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은 아닌데, 즉, 사건의 주요내용은 같을 수 있으나 제각기 약간의 수정, 변질, 첨가, 삭제 등의 편집방식으로 조금씩 다른 의미를 주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사건을 놓고 세 복음서가 같은 사건을 다루고 있으나, 이 사건을 통하여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제각기 다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력에 따라 '가해'에는 마태오복음에서 오늘 '나해'에는 마르코복음에서 '다해'에는 루카복음에서 이 대목을 복음으로 봉독하는 것입니다.
각 복음서의 외형상 차이를 살펴보면,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9,2-10)을 베끼면서 베드로와 제자들의 위상에 흠집이 날 만한 구절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겁에 질려서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엉겁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마르6절)와 "제자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었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물어 보았다"(마르10절)는 부분을 삭제해 버립니다.
또한 마태오와 마르코는 예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자신의 변한 모습(얼굴과 옷)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루카는 이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고,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모습이 변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저자 특유의 의도를 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의 복음이 어느 복음서에서 봉독되든 간에 이 축일의 핵심사상은 부활하신 예수와 지상 삶의 예수가 동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하느님으로써 누리는 영광은 이미 지상 삶의 예수 안에 묻혀있다는 것인데, 그 영광은 사실 모든 인간의 눈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사실 예수께서 그 영광을 애써 숨기시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인간에게 그 영광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첫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이미 박탈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가지고 있는 메시아적 능력은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통하여 적어도 제자들로부터 검증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는 사실은 아직 그들에게 감추어져 있는데, 이렇게 감추어져 있는 예수님의 하느님으로서의 영광이 드디어 몇 명의 제자들에게 체험되도록 허락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체험이 느닷없이 갑작스럽게 허락된 것은 아니고, 변모사건 전에 사전준비가 있었는데, 복음서를 살펴보면 세 복음서 모두가 변모사건을 위해 일련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우리가 마태오복음을 통해 묵상한 바와 같이 ①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②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③ 예수 추종의 길, ④ 종말의 시기에 관한 단절어, 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의 순서가 바로 그것입니다.(마태 16,13-17,9; 마르 8,27-9,10; 루카 9,18-9,36)
예수의 일행은 갈릴래아 호수 주변의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다가 필립보의 카이사리아에 도착합니다. 필립보의 카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헤로데 필립보가 세운 도시로서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떨어진 곳인데, 여기서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부터 이어지는 대목이 오늘 복음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고백이 겉으로는 정확하고 장황하였으나 그 실속은 형편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예고를 통하여 자기들이 고백한 메시아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 것임을 알아야 했고, 그 길이 곧 자신들 또한 가야할 길임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시지만, 사람의 아들로서 고통 받고 죽어야 하며, 그러나 다시 부활하여 하느님 지존의 영광을 드러내는 주님으로 우뚝 서게 되실 것임을 제자들에게 순서대로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미리 볼 수 있는 특권은 단지 몇 명의 제자들에게만 오늘 허락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이 산은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도시가 헤르몬 산맥 아래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헤르몬 산이나 그 산맥에 속하는 산일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적 영광을 보여 주시는데, 이 영광을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은 특별히 뽑힌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만 허락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말씀으로만 가르치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내용을 실제로 보여주시는 것인데, 말하자면 예수께서 이론적 가르침을 뒤받침 할 만한 일종의 산 체험이나 견학 내지는 실습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세 명의 제자들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거룩하게 변한 예수님의 얼굴과 옷), 자신의 귀로 들으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잘 들어라") 예수에게 감추어진 신적 품위를 얼마동안 향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 나타난 모세(탈출 33,18-23)와 엘리야(1열왕 19,9-13)도 거룩한 산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믿음을 감사해야 할 사람들인데, 이들은 구름이 일자 사라지고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구름 속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느님의 사랑 받는 아들이며, 제자들은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율법(모세)과 예언(엘리야)의 성취자로 계시되며, 세상 끝 날까지 예수님 홀로 제자들이 들어야 하는 주님으로 계시된 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의 아들이 죽었다가 부활할 때까지는 철저하게 함구되어야 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오늘 일은 말로만 이야기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참다운 제자 됨의 추종으로 살아야 하고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의 모습은 우리가 지향하는 구원의 목표입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영광을 받게 될 그 찬란한 모습을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며, 그것을 이해시키시려고 직접 체험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주님 거룩한 변모 축일'을 지내면서 영광을 받으신 주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그래서 아름다우신 주님께 관한 체험들을 떠올려보십시오. 우리가 받았던 수많은 은총의 시간들과 그 체험들은 주님을 이해하고 믿는 데 소중한 추억이며 신앙의 힘입니다.
세례와 견진 성사를 통해 받았던 은총의 체험, 또는 피정이나 신심 행사를 통해 체험한 것도 있을 것이며, 생활 안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받았던 소중한 체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내 삶의 생생한 체험이 그분의 마음과 정신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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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하느님의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곧 하느님의 현현입니다.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축일을 동방교회에서는 빛의 축제일이라고 부릅니다. 이 축일의 의미를 <본기도>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증언으로 신앙의 신비를 밝혀주시고, 저희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되게 하심’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는 그분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 함께 공동상속자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변화의 힘을 입습니다. 그 힘을 입고 우리도 변화될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산에 오르자 구름이 산을 덮고, 주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자리 잡았고”(탈출 24,15-16) 모세를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시켰듯이 말입니다. 마치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마리아를 덮었”(루카 1,35)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변화를 이루시는 거룩한 영께서 오늘 우리를 그 빛나는 구름으로 덮어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힘에 덮인 이들입니다.이미 빛나는 믿음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의 크신 자비의 구름에 덮인 이들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변화의 힘을 주시고, 그 영광된 모습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 7)
이는 단지 아들의 신원을 밝혀주신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곧 우리가 어떻게 살 때 변화를 입을 지를 알려줍니다. 곧 “그분의 말을 들을 때”입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가르쳐줍니다. 곧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이요, 들려오는 말씀이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이요, 말씀의 능력을 수락하는 일입니다. 곧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될 것’(에페 21-22 참조)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우리가 변모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명’(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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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주님!
말씀의 권능으로 저를 덮으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장소가 되게 하소서.
구름 속에서 울려오는 당신 음성으로 저를 덮으소서.
저의 비천한 몸을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시키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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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마르9,3)
오늘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타볼산에 오르시어, 그들 앞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의 결과인, 영광스러운 부활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신성과 인성을 두루 갖추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충실하게 믿은 이들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을 미리 보여준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영광스러운 부활을 희망하면서 조금만 참고 힘내면서 십자가의 길을 잘 걸어가자는 메시지를 전하는 사건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는, 장차 일어날 미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내가 거룩하게 변해야 하는 '현재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삶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산에서 내려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이신 당신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십니다.
예수님 부활의 필수전제요, 필요충분인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삶의 자리는 나의 죽음과 나의 부활이 함께 일어나야 할 곳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크고 작은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이 바로 예수님께서 거룩한 변모를 통해 보여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죽고 부활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주님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내가 죽는 사람, 회개하는 사람, 거룩하게 변하는 사람, 부활하는 사람, 그렇게 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됩시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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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변모를 꿈꾸는 나에게>
마르코 9,2-10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시다)
그 무렵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제자들이 모두 겁에 질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그들이 둘러보자 더 이상 아무도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그들 곁에 계셨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
<변모를 꿈꾸는 나에게>
꿍꿍이속이야 무엇이든
대개 사람들이란
변모를 꿈꾸지
추레한 모습에서
빛나는 모습으로
어눌한 모습에서
능수능란한 모습으로
볼품없는 모습에서
눈길끄는 모습으로
아무것도 아닌 모습에서
뭔가 그럴듯한 모습으로
꿈꾸는 변모라는 것이
대개 이런 거 아니겠어
그런데 말이지
뭐에서 뭐로 변모되든
나는 나 아닌 무엇이 아니라
나는 나라는 거는 변함없지
그러니까 말이야
어떻게 변모되는냐가 아니라
내가 누구냐가
중요한 거지
그래서 말인데
나의 모습에 안달하지 않고
나를 바르게 가꾸는 거야
그러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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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고등학교 다닐 때,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아침 7시 30분까지 등교하고, 밤 10시에 귀가하는 일과였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과목을 공부하는 것이 아닌, 학교에서 가르치는 공부를 무조건 해야만 했습니다. 두발, 복장도 제 맘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빨리 되고 싶었습니다. 어른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저를 보면 누구나 어른이라고 부릅니다. 막 성인이 되었을 때는 주점에서 신분증 검사를 요청하면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제게 신분증 검사를 하겠다고 하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고 싶은 어른으로 살고 있지만, 이 어른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자주 느낍니다.
학창 시절의 규제가 오히려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보호받고 싶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보호받고 있음이 얼마나 커다란 안정을 주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른의 무게가 참 무겁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사실이 있습니다. 세상은 어른이라고 보호해주지 않으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에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더 열심히 살 힘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인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신 뒤에,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사실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모습이 변하다’라는 동사가 종종 쓰이는데, 모두 영적인 변모를 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변모는 영적인 변모가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변모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눈부시게 빛나는 옷은 천상 영광의 표징 가운데 하나로 주님의 부활이 단순히 영적인 것이 아님을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와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있는 자리라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되었을까요? 베드로가 나서서 그 자리에 그냥 눌러살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바로 그 순간 구름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들려오지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보호 아래에서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면서 편안함과 기쁨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부활 사건 이후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보호 아래 사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줍니다. 열정적으로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고, 어떤 박해의 위협에서도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늘 기쁨과 희망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도 거룩하게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보호 아래에 있지 않으면 거룩하게 변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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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에서도 도움이 될 것은 꼭 있습니다.>
‘관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관심 종자, 관심 병자라고도 불립니다. 타인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병적인 수준에 이른 상태를 말합니다. 이들은 타인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게시판에 글을 작성하고, 댓글을 달며, 이목을 끌만한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관종’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관종이 되면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분위기를 이끕니다.
그러나 정말로 잘못된 것일까요? 나대는 것도 그의 고유한 성격일 수도 있으므로, 이를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주목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관종의 삶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책임감이 없다면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나대고 주목받으려는 나의 말과 행동에 책임질 수 있다면, 나름대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다면 가장 큰 가치를 살 수도 있지 않을까요?
관종을 무조건 나쁘다 생각하지 마시고, 좋은 가치로 변화시켜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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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지금 여기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부활을 첫 번째로 예고하신 후(마태8,31-33)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는 가르침을 주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만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당신의 변한 모습을 보여 주셨는데 예수님께서 입은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렇게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마르9,2-3)
사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세상의 빛(요한9,12)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변모를 통해 당신의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을 힘겹게 따르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얼떨결에 예수님께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마태17,4) 하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영광스럽고 황홀한 순간에 계속 머물고 싶다는 말입니다.
사실 좋은 것을 보면, 차지하고 싶은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17,5)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 말씀은 부활의 영광은 차후의 일이니, 집착하거나 안주하지 말고 지금 당장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에서 내려와 일상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일상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얼마나 살아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귀한 체험과 뜨거운 감동도 오래가지 못합니다.
온몸으로 전율을 느꼈던 신앙체험은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입니다. 불쏘시개의 역할은 불이 붙게 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체험은 하느님께 대한 굳건하고 변치 않는 신앙을 키우고, 그 신앙의 결실인 사랑의 봉사로 이어지는 데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손희송) 황홀한 체험에 집착해서도, 안주하고 고집을 부려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일상으로 내려왔듯이 삶의 자리에서 말씀의 의미를 살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체험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삶이 그것을 말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는 곧 체험하게 될 부활의 표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2코린 3,18) 요한 사도는 고백합니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3,2)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실천함으로써 우리의 마음도 해와 같이 빛나야 하겠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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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관상과 활동>
-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
오늘은 주님의 거룩한 변모축일입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날마다의 오늘이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입니다. 이래야 늘 새롭고 풍요로운 영적 삶입니다. 아침 성무 일도 첫 후렴도 이를 입증합니다. "오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도다."
오늘 축일은 9월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40일 전에 지냅니다.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하시기 40일 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 축일은 1457년 제209대 교황인 갈리스토 3세가 로마 전례력에 도입했습니다.
십자가의 길, 광야 여정중 지친 제자들에게 당신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케 하신 주님의 자비로운 은총입니다. 기도와 일, 관상과 활동은 영적 삶의 리듬이자 함께 갑니다. 기도와 관상을 통해 주님을 만날 때 심신도 새로워져 광야 인생을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관상과 활동-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日常化’-로 정했습니다. 행복기도문 일부를 인용합니다.
-“끊임없는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중에
주님을 만나니
주님은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기쁨과 평화, 희망과 자유를 선사하시나이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광야 세상 살이에 부패하고 변질되기 쉬운 삶을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시켜 주시는 주님과의 만남은 절대적입니다. 주님과 만날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신비롭게 변모됩니다. 바로 우리가 평생 날마다 참여하는 시편성무일도 미사의 공동 전례미사은총이 신비 변모 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날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의 삶을 살게 해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성서의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주님과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새삼 인간이 물음이라면 주님은 답임을 깨닫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순전히 은총의 선물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은 수난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하셨고, 주님은 이를 만류하던 베드로를 참으로 혹독하게 꾸짖었습니다. 멋진 신앙고백으로 주님의 극찬과 더불어 반석이란 베드로 이름까지 받은 시몬이 졸지에 사탄이자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심한 질책으로 의기소침해진 제자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하느님 중심의 삶을 새로이 하고자 주님은 이들에게 당신의 신비 변모 체험을 선물하십니다. 바로 오늘 복음 서두가 이를 입증합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모습이 변하셨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하얗게 빛났다.’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하면서 세 제자들 역시 내외적으로 변모되어 정화되고 성화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신비 변모 체험 은총은 끊임없이 오늘도 계속됩니다. 주님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해야 살 수 있는 우리 영혼들입니다. 이런 신비 변모 체험의 결핍으로 날로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높은 산’이 상징하는 바 이 거룩한 미사전례가 거행되는 성전입니다. 아니 ‘오늘 지금 여기’의 우리 삶의 자리 역시 어디나 주님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주님의 변모 장면중 다음 대목에 눈길이 갑니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구약의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아요 둘다 에녹과 더불어 승천한 분들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평소 예수님은 기도중에 모세와 엘리아야 함께 깊은 영적 우정을 나눴음을 봅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를 영적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주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의 솔직하고 열정 가득한 순수한 반응 역시 베드로답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영적 집착과 독점욕의 유혹에 빠진 베드로입니다. 아무리 수도원 피정이 좋다하여 수도원에 내내 머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하느님을 찾지 않으면 거룩한 성지의 수도원도 세속이 되어 버립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고 만나야 할 거룩한 성지는 바로 내 몸담고 있는 평범한 일상의 자리입니다. 성지가 있어 성인이 아니라 성인이 있는 곳이 성지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 각자 삶의 자리에서 성인이 되어 평범한 일상의 신비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이미 그 옛날에 일상의 평범한 삶의 자리에서 밤의 환시 신비 체험중 주님을 만난 다니엘 예언자입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으리라.”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통해 실현되고 있는 주님의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바로 이 주님과 함께 광야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산위에서의 거룩한 변모체험에 집착하는 베드로와 그 일행은 물론 우리 모두에 대해 하느님은 지체없이 명령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주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나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요 빛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습니다. 주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 치유와 위로를 받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광야 인생,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우보천리, 그분을 따라 한결같이 사는 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아우구스티노처럼 ‘진리의 연인’이 되어, 베네딕도 16세 교황처럼 ‘진리의 협력자’가 되어 사는 일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새삼 인생광야여정중인 우리들에게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의 우정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은 우리가 참으로 신비체험을 필요로 할 때 그 체험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의 신비스런 변모를 체험하게 하시고 우리 또한 당신을 닮은 모습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영성체후 기도가 참 고맙고 적절합니다.
“주님, 저희가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비오니, 영광스러운 변모로 보여 주신 아드님의 그 빛나는 모습을 닮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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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 안에는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가득합니다.
"내가 보고 있는데, 마침내 옥좌들이 놓이고, 연로하신 분께서 자리에 앉으셨다."(다니 7,9)
"불길이 강물처럼 뿜어 나왔다. 그분 앞에서 터져 나왔다."(다니 7,10)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다니 7,13)
다니엘 예언자가 본 꿈의 환시 장면입니다. "연로하신 분"은 성부 하느님을,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성자 예수님을, 그리고 성부에게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성령이시니, 장엄하고 숭고한 성삼위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자리입니다.
다니엘 예언서를 읽어 보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네 짐승들의 환시가 먼저 나오고 이어서 오늘의 대목이 나옵니다. 혐오스런 광경에 이어지는 영광의 장면이 극명하게 대비되지요. 놀라는 예언자에게 환시 속에서 천사가 먼저 등장한 네 짐승들과 나중의 천상 거룩한 법정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그 거대한 네 마리 짐승은 이 세상에 일어날 네 임금이지만,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백성이 그 나라를 이어받아 영원히, 영원무궁히 차지할 것"이라는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4)
이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현장은 황제나 대사제의 대관식을 떠올리게 해 줍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악을 물리치시고 사랑과 정의로 통치하시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언어와 민족과 나라가 다른 모든 이들이 성삼의 하느님을 섬기며 그 빛을 받아 영원히 빛날 것입니다.
복음은 주님께서 거룩히 변모하신 높은 산의 현장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분의 옷은 이 세상 어떤 마전장이도 그토록 하얗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다. 그때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마르 9,3-4)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모습이 변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본 빛이 사람의 손에서 나올 수 없는 색의 흰빛이었다고 전합니다. 앞서 읽은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이 꿈의 환시였다면 지금 이 순간은 현실이고 실재입니다.
게다가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셨으니 제자들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하느님과 각별히 친밀했던 이들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거룩한 사람으로 섬기는 성인들입니다.
"그때에 구름이 일어 그들을 덮더니 그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마르 9,7)
성부 하느님은 목소리로, 성령은 구름으로 성자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이 역시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이 충만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다니엘 예언서의 장면과는 달리, 이 순간에는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말을 거셨지요. 제자들은 관조자나 관찰자의 신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상대자가 되어 그분 말씀을 듣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이 세상과 분리된 어느 곳에 영광스러이 따로 떨어져 자리하시지 않고, 하늘을 뚫고 세상에 내려오셔서 인간과의 구체적 관계 안으로 들어오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 말씀의 내용은 소개와 명령으로 간결히 이루어집니다. 즉 예수님을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러니 그의 말을 들으라'고 명령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세상에 예수님을 보증하시는 소개장은 "사랑"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무슨 신분이나 타이틀, 직업이나 주거지로 서로를 소개하는 것과 달리 하느님은 사랑의 관계로 아드님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분'라는 자격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영원무궁히 존중받고 섬김 받으셔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느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독백에 그쳐서는 안 되는, 명백히 응답이 요구되는 말씀이십니다. 제자들에게는 응답과 실천을 통해 이 말씀을 실현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집니다.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의 말을 듣는 것. 이것은 하느님께서 말을 거셔서 그분과의 관계 안으로 들어온 모든 이에게 부여되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의 얼굴을 관상하는 오늘, 그분의 영광에서처럼 그분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는 가난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우리 형제와 이웃의 얼굴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존중받고 환대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보증이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듣고 경청하며 이 사랑을 확인하고 키워나가야 하지요. 그리하여 예수님 영광의 빛이 우리 마음에 가득할 것이고, 주님의 거룩한 변모의 영광을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일상 안에서 실현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로써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현실이 되시고 실재가 되어 가는 기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님 영광의 빛인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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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Vdtt3eNYzU&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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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새하얗게 빛났다."(마르 9, 3)
변모의 시작은
관계의
시작이다.
관계는
관계의 여정을
걸어간다.
변모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관계의 시작은
사랑의 참된
시작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새로워 질 수
없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빛나게 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은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하느님과
관계가
성숙의
본질이다.
거룩한 변모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실행이다.
실행하지
않고서는
거룩한 변모로
이어질 수 없다.
십자가도
회개도
실행이다.
사람이
되어오시고
거룩하게
변모하시는
예수님의 삶에서
하느님과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된다.
거룩한 변모는
관계이며
실행이다.
예수님께서는
새하얗게
빛나는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신다.
거룩한 변모는
정신의 참된
성숙이다.
성숙의
여정으로
되찾게 되는
우리의
본모습이다.
사랑은
정신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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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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