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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의 행복/
"만약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흐를수록
난 점점 행복해지겠지,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 부절하지 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 쌩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
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기다림의 행복이
어떤 것인가 아십니까?
옛날 설날이 다가오면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고 좋았습니까?
설날 당일 보다 설날을
기다리는1주일 전
이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설날에 입을 옷을
매만지며 손꼽아 기다리던
기억들이 생각납니다.
그것이 기다림의
즐거움이고 행복입니다.
그런데 막상 설날이 되면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버렸습니다.
그래서한편으로는
허망하기까지 했습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결혼 당일보다
결혼 날을 받아놓고
준비하며기다리는 것이
더 행복하고 좋을 것입니다.
결혼하는 젊은이들은
막상 결혼해서 살면
그날부터 전쟁인
줄도 모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주일 동안 금식하기
위해서 굶습니다.
그 때는 먹고 싶은 생각
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그 때는 먹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강렬하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온갖 유혹이 다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 싶었는데
막상 금식을 끝내고
음식을먹고 나면
또 별 것도 아닙니다.
그때 느끼는 심정은
이것 때문에그렇게 안달
했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다림, 이것은 참
행복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오직
세상에 대한 사랑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당시 억압받는 삶을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는
이 약속은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이제
그 약속이 이루어질 때가
오지 않았느냐” 하고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그가 오시기만 하면”하고
모두 큰 기대를 했습니다.
그가 오시기만 하면 모든
고난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의 마음들이
얼마나 뜨겁고
간절했겠습니까.
그때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던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메시야의
오심을 더욱 간절한 마음
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안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36절을 보면 안나라는 여인은
결혼해서 남편과 7년을
살고 사별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혼자된
지 84년 동안 혼자 살면서
메시야가 오시기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오직 이 여인은
나라를 위해서,
민족의 앞날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여인이
결례를 행하기 위해서
성전에 온 아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그날 그에게 주어졌던
감동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사람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는 시므온
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도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면서
밤낮 기도하면서 메시야의
오실 것을 고대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진지하고
경건하게 밤낮 기도했던지
성령으로부터 “태어나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더 간절
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마침내
정결예식을 받기 위해서
성전에 온 어린 예수를
품에 안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그때 시므온은 어린 예수를
품에 안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 도다.”
그 말은 “이제는
이 민족의 앞날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 안 해도
되겠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정한 애국자요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조용히 금식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모습이 진정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나라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보면 너무
시끄럽고 요란합니다.
딴에는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떠들겠지만
곁에서 그들의 모습을 보면
나라사랑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모두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진정 나라를 사랑하고 애국하는
사람들은 자기 할 일을 다 하며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기 시므온이나 안나라는
여인이 진정한 애국자이고
민족을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조용히 성전 지하에
숨어 주의 도래를 기다리며
눈물로 금식하며 기도하기를
“주여 당신이 오실
때가 언제입니까,
언제까지 이 백성이
이렇게 고난을 받고
압박을 받아가며 설움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까”
하고 자신의 평안이나
가정의 평안도 포기하고
평생 수절하며
기도하는 그 모습,
그 모습이 진정 민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염려하면서
살아가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으면
성령께서 어느 날 오셔서
“염려하지 말라,
네가 죽기 전에
그를 보게 되리라”하고
계시를 해 주었겠습니까.
정말 열심히, 경건하게
나라를 사랑하고 생각하고
염려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를 격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간절한 모습
을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열심히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응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이유는 모두 내 뜻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순전히 나에게 집중된
기도만 하니까
고생하고 수고롭게 금식하며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 이 시므온과 안나가
그렇게 여러 해 동안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임이라”
이 약속은 하나님이
직접 주신 약속입니다.
장차 이 땅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메시야
가 탄생하면 높은 곳이
낮아지고 억눌린 민족이
자유해지고
어린 양이 이리와 함께
뛰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메시야
오시기를 사람들이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약속이 있는 사람은
기다리는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다림의 행복입니다.
인내는 기다림의 어머니입니다.
아브람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량한 들판을 걸으면서도
그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날마다
황량한 들판을 바라보면서도
꿈을 꾸며 살았습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그는 지난날에
보여주셨던 꿈들을
생각하며 그 꿈이 언젠가
현실로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그것이 약속이 있는
사람의 행복함입니다.
농부들이 씨를 심어놓고
새싹이 나오고 꽃이 피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기뻐하는 마음만큼
이나 행복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때로 주어지는 고난도
기쁘게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주어집니다.
고난을 기쁨으로 소화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고난을 모두
소망적으로 해결되리
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당시의 고난을 잘 이겨냈고
그 고난 속에서도 자존심
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지배를
받고 살았지만
오히려 로마인을 우습게
바라볼 수 있는 자존심
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의 조상이 그랬듯이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하는 노래를 부르며
살았을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같은 힘이 있고
용기가 있고
행복함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것이
축복이고 행복입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장차 주어질 천국에
대한 약속 때문에
바울이 얼마나 자신
만만하게 살아갑니까
. 그는 죽음 앞에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당당하고
의연합니까. 그것도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폴리캅이 불에
타 죽어갑니다.
그의 절친한 친구가
와서 “로마황제도
신이라는 말 한마디만
하게, 그리고 죽음을
모면한 다음에 회개하면
하나님이 너의 입장
을 참작하지 않으시겠나”
하고 회유할 때
폴리캅은 대답합니다.
“그렇게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의연하게
죽음의 길을 택하겠다.”
그리고 그는 초연한
모습으로 불에
타 죽어갑니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옵니까.
그것도 그에게 주어진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약속이 주어진
사람에게는 이런
용기가 주어집니다.
그것이 신앙이
주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가 나를 변화
시키고 세상을 변화
시키고 마침내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2007년 3월1일자
국민일보에 앞길이
보장되는 검사의 길을
그만두고 사직한
한 검사의 기사가
실린 적이 있습니다.
김우경 검사는 25세에
사법고시에 합격해서
포항지청장에 이르기까지
20년을 검사로 지내왔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마음에는 늘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는 마음속에 이 땅의
방황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어떤 일인가를을 해야
하겠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내가 저들을 위해서
무엇인가 할 일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는 오늘 검사의
삶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매일같이 사람을 죄인으로
추궁하고 죄의 올가미를
씌워 재판에 부치는
이 일에 회의가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날
이 땅의 방황 대는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길을 인도해 주는 사역을
위해서 마침내 미래가
창창한 검사직을 버립니다.
모든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그는 그 자리를 새로운
사역을 위해서 미련
없이 버렸습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출세의
길을 가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판인데
이 분은 용기 있게
그 자리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을
위한 사역자의 길
을 걷게 되었습니다.
김우경 검사가 그 자리를
용기 있게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자기에게
주어진 이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있고 기대가 있고
미래가 있다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약속이 없는 사람입니다.
약속이 없는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며
유대인의 자존심을
지키며 오늘인가
내일인가 기다리며
기도하고 고대했습니다.
그래서 안나와 시므온
이라는 사람이 나타
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약속이 없는 사람들은
현실에 매여 살아갔습니다.
당시 로마 치하에서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현실에 충실해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로마에 충성하고
온갖 혜택을 받고
현실에 안주해서 살았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삭개오 같은 사람입니다.
삭개오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에게 있다면 오직
현재만 있었습니다.
독립에 대한 생각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동족도 민족
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동족에게도
무자비하게 착취하고 모아서
로마에 바치고 자신은
구전을 챙겼습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동족으로부터 미움
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완용도 생각해 보니까
조선이 강한 일본으로부터
독립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 어디를 보아도 조선이
독립할 기운이 엿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친일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절대
충성하고 온갖 혜택을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림이 없고
꿈을 잃고 기다림의
소망이 없으면
현실주의자가 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의 나라
에서 포로생활을 합니다.
몇 년간은 돌아가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보니까 돌아간다는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불가능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중 한 부류는 그래도
우리는 돌아가야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그래서 짐 보따리를
풀지 않고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
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미래를 포기한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 판단을
하고 현실주의자
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보따리를 풀고
현지인과 결혼하고 아이
낳고 사업에 몰두하고
터전을 이루어 안주
하며 살아갔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비전을 잃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이 꿈을 잃고
산다는 것은 이렇게
현실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도 오늘 이
세상에서 이 꼴이 되어
살아가기 쉽습니다.
신앙인이 천국에 대한
미래와 꿈이 없으면
이렇게 오직 현실에
집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현실에 집착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그날이 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해방
이 온 것입니다.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갑자기
어느 날 해방이 왔습니다.
모두 집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그때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기다리던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짐 보따리
를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돌아가면서 그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얼마나 발걸음 가볍게
고향을 향해서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이 약속이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약속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땅에 천년 살 것처럼
정착하고 가정을 이루고
터전을 이루어 살던
사람들이 고민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갈 수도 없고
안 갈 수도 없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붙잡는 현실이
너무 무겁습니다.
처자들이 붙잡았습니다.
사업이 그들을 가지
못하게 붙잡았습니다.
힘들게 마련한 집이
그들을 붙잡았습니다.
그렇다고 막상 여기
남으려니 여기는
타향입니다.
여기는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그냥 남아있는 사람들이
흩어진 유대인들,
버려진 자들입니다.
예수께서 탄생하리라고
많은 사람들이 약속을
믿고 모두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기다리던 예수
께서 오셨습니다.
700 년 동안 기다리던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는데 아무 징조
도 소리도 없이 오셨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때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의 합창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고
멀리서 동방박사들이
찾아왔고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찾아 왔습니다
. 얼마나 요란했으면
그 멀리서 사람들이
다 찾아왔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조용했습니다.
아무 소리도 징조도
꿈도 없었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에게는 세상이 요란하고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요란한 징조가 있었어도
그 소리들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소리만 들리지 않은
것이 아니고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없는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약속이 없으니까
기다림도 없는 것입니다.
이 다음 예수 재림
때도 똑같은 현상
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날도 어느 날 갑자기
올 것이 분명한데
그날도 이 같은 현상이
발생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기다림이
무엇이고 약속이 무엇
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까 시므온과 안나
라는 노인들이 매일같이
금식하며 철야하며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 땅에 오신
그 예수님을 품에 안아
보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 모습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인
의 모습입니다.
가시 노릇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지라도
성자 될 날 기다릴
수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기쁨의
이유가 될 수 있고 ,
병든 자식,
속 썩이는 남편이지만
곁에 있어도 그저
살아있음으로 다행
으로 생각하며
기다림에 불평 않고
기다릴 수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 성숙
한 믿음일 것입니다.
저녁이 되면 돌아올
가족을 기다리는 것,
때가 되면 고추장에
밥 비벼 먹을 지라도
은혜로 말미암은
밥상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매일 아프고 힘들지만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의 치유를
기다린다는 것
모두 주체할 수 없는
즐거운 일 것입니다.
나 자신의 가난함, 병 듦,
]부족, 실패, 연약함조차
부러워하는 이들을 생각하면
이 기다림으로 불평함은
오히려 사치가 아닐까요?
기다림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다릴 수 있
는 그 무엇인가가 있는
하루를 주심에 감동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림에 감동하고
지독히 힘들고 어려운
삶일지라도 지극히 행복할
천국을 기다릴 수 있음에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나 자신의 처절하고 지루한
기다림마저도 부러워
눈시울 적시는 그 누군가
를 생각한다면 어찌
찬양 못 할까요?
겨울에도 눈을 감으면
뜨거운 여름이 보이지만
그 더운 날의 설레임은
그때가 되어서야 느낄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이 순간이 외롭고
슬프다고 보채지만
마시고 기다림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에는 처음과
끝이 있는 것처럼
지금의 고통은
먼 훗날 때에 이르면
행복한 사랑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마른 나무에서 꽃이
피어날 수 없듯
우리에게 홀로서기
가 끝나는 날
그 날엔 아름다운
꽃처럼 우리 앞에
주님께서 서 계실
것을 확신하면서
행복한 기다림의
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나이가
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마틴 허킨스
(마르틴 허켄스,
마틴 허켄스,Martin
Hurkens, 1953~)는
1953 년 네덜란드
출생으로 돈이 없어
오페라 가수의 꿈을 접고
32 년간 제빵사로 일하다
실업자가 된 지 2년이
지난 2010년 58 세의
나이에막내딸이 몰래
"홀랜드 갓 탈렌트
(Holland's Got Talent)"
에신청하여 우승하였다.
도전하기 망설였지만
딸의 간곡한 부탁에
용기를 낸 것이다.
유튜브에서
"You raise me up",
"Ave Maria" 노래로
유명해진 네덜란드
사람 마틴 허킨스
(Martin Hurkens)
이야기다.본격적으로
가수로 전향한 그가
마스트리흐트거리에서
녹음한 동영상은
소설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일랜드인의 정서가
잘 묻어나는그의 노래
를 듣고 있으면
"마음 깊은 곳으로
부터전달되는 은은한
울림을 받게 된다."
는 것이다.
위로가 필요한 시대,
특별한 기교나 화려함
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
을극복한 용기와 진정성
이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준다.
가수로서 별도의 직업
을 갖고 활동 중인
마틴은"우리는 늘
꿈을 꿀 수 있고,
때로는 그 꿈들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면서 꿈을 가지라고
권면(Encouragement)한다.
나이가 들어도 꿈을
포기하지 마세요.
무엇을 시도하기에
돈이 없다고
변명하지 마세요.
가난한 사람은
꿈의 부자입니다.
(눅2:22-33)
/기다리는 마음/
김 민부 작사,
장 일남 작곡에
"기다리는 마음"
이라는 가곡이
있습니다.
일출봉에 해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
에 눈물흘렸네.
이 노래는 사랑하는 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해가 뜰 때마다,
달이 뜰 때마다
혹시나 임이 나타나서
자기를 부르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와
환상 속에 빠질
정도로 애타게 임을
기다리지만 임은
기어이 오지 않고
아낙네들의 빨래
하는 소리에,
물레방아 돌아
가는 소리에
자신도 모르게 흘러
내리는 눈물을 삼키며,
지는 해 지는 달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또 하루를 보내야 했던
이의 기다리는 마음
이 애절하게 표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사람의
애절한 심정을 가지고,
아니 이보다 더 간절한
심정으로 일생동안
기다리며 살던 사람
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시므온
이라는 사람으로서
이천년 전에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기다렸던
사랑했던 임은 이성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본문에서 시므온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이스라엘
의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이신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까지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약속하심을
받고 결국 탄생하신
메시야 아기 예수를
만나뵙게 됩니다.
이 시므온은 무엇 때문에
이처럼 일생동안 의롭고
경건하게 지내며
그리스도를 기다렸을까요?
그것은 시므온이 살던
세상이 어두움의
세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세상은
개인적인 윤리,
사회적인 윤리가 다 파괴
되어지고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진 어두운
세상이었습니다.
종과 여자들의 인권은
여지없이 무시되었고,
기형아와 비록 멀쩡한
아이라도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기는
죽이는 것이 용납이
되었습니다.
이교도의 우상숭배가
만연했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경건하다고
스스로 자처하는
유대인들도 무거운
형식적 율법주의에
속박되어 있었고,
예언자들의 소리는
그친지 오래되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로마에
식민지된 상태에서
유대 백성은 로마의
압박과 수탈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또 로마에 빌붙어
유대를 다스리던
헤롯 왕가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상을
자행했으며 백성들로
부터 과중한 세금을
거둬들여 온갖 사치와
향락 속에서 지냈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세상 속에서
시므온은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이 어두운 세상이 밝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두운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되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절한 기다림의
소원을 들어주셔서
그로 하여금 탄생한
그리스도를 만나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어두운
세상에 어둠을
밝히실 빛으로,
온 인류의 위대한
희망으로 오십니다.
세상의 어두움을 밝게
비추이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입니다.
오늘의 세상은
어떠합니까?
시므온이 살던 시대보다
훨씬 물질문명이
발달했지만 죄로
인한 세상의 어두움
은 더 심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시대
보다 더 빠르게,
그리고 더 멀리
여행하고,
더 신속하게 의사
를 전달하고,
더 높이 건물을 지으며,
더 많은 문화의 혜택과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초나 전기가 부족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의 어두움은 정신적,
영적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삶의 여러 분야에
짙은 어두움이 전혀
걷히지 않고 있습니다.
피부색으로 인한 차별,
성으로 인한 차별,
출신지로 인한 차별이
여전하며, 무자비한 폭력과
지능적인 범죄가 계속
증가일로에 있습니다.
또, 약물 중독,
마약에 의한 범죄,
각종 성 범죄,
성의 난잡으로 인한
에이즈 공포,
환경오염, 핵에 의한
멸망의 공포와 온갖
종류의 분쟁으로 인한
평화 파괴의 위협
에 이 시대가
직면해 있습니다.
이 시대가 어떻게 될지
우리는 모두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끊임없이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 시대의 어둠
속에서 우리가
기다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치 이천년 전에
시므온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린 것같이 우리도
예수를 간절히 기다
려야 합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떠나간 임이 올지
안 올지 몰라서
불안과 탄식으로
범벅이 된 절망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성령께서 지시하시고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오시는
분에 대한, 오셔서
어두움을 비추시는
빛이 되시며,
어두움을 깨치시고,
새벽을 여시는 분에
대한 기대와 감격에
가득 찬 희망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기다림도
암울한 핵의 공포와
신이 내리신 최후의
형벌이라고 하는코로나-19
와 에이즈의 공포 앞에
불안해 하고 있는
인류에 참 소망을
주실 것에 대한 간절한
기대로 가득 차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어두움과 절망 속에서
우리를 구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이 시대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어두움에서 구하실
유일한 분이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이 시대가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간절한 기다림을
볼 수 없습니다.
대림절 기간에
그리스도의 오심
즉 성탄을 간절히
기다려야 하는 이유
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탄생은
보통 사람들의 탄생
즉 자연인의 탄생
과 구별됩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자연적인 남, 단순한 나심
의 사건만이 아니라
특별한 "오심",
"강림"의 사건,
즉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그분은 저절로 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오신 목적을
알려주는 칭호가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오십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명을 주시고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로서
즉 기름부음을 받은 분
으로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사명을 받으셔서
우리에게 오시는 분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사명은 바로
죄 가운데 있는
인간들의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전적으로 인간의
구원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며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민족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오셔서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분은 죄의 어둠,
실패의 어둠,
좌절의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죄로 인해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욱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 분은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 속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는 우리
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가 오신 것은 세상
모든 백성에게 미치
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우리에게 오시는 분이
바로 이러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과
벅찬 감격 속에서
성탄을 맞았습니까?
불행하게도 오늘날
진정한 성탄절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어
가고 있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오늘의 성탄절은
산타크로스와 선물,
카드와 화려한 장식으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의 위력이
우리가 진정으로 기다려야
할 그리스도를 우리의 관심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기다리느라
정작 우리가 기다려야 하고
벅찬 감동 속에서 맞이해야
할 그리스도는 마굿간에
홀로 쓸쓸히 남겨져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거리와 백화점에 등장하는
산타클로스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봉사를 전해
주는 상징이 아니라
단지 어떤 이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될 뿐입니다.
그래서 성탄절이 우리로
하여금 성탄의 주인공인
그리스도와 그 분의 사랑과
섬김, 나눔에 대해 관심
을 갖게 하기 보다는
어떤 선물을 받을까,
어떻게 성탄휴가를
즐겁게 보낼까에
관심을 갖게 합니다.
비록 성탄 카드를 보내며
성탄 츄리를 만들고,
성탄 예배를 드리며,
화려하게 성탄 축하 행사를
하며 반갑게 성탄 인사를
나누지만 진정으로
우리 마음 속 깊이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벅찬 감동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인들 조차 점점
성탄을 형식적으로 맞는
듯한 느낌을 금치 못합니다.
진정한 성탄 준비는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이
없으면 화려한 성탄
장식이나 행사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흔히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현대인들의 감정은
아주 메마른 것같습니다.
텔레비전의 쇼나
코미디를 보며,
농담을 즐기며,
많은 웃음을 웃지만
진정한 기쁨은
없는 것같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보아도
슬픈 일을 당하여도
우리의 눈에서는 쉽사리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가슴이 찡해지지 않고,
눈에서는 눈물이 마른지
오래 되어버렸습니다.
슬픈 것을 싫어하고
될 수 있는 대로
피할려고 합니다.
슬퍼할 줄을 모르고,
슬퍼할 줄 모르기
때문에 순수함을
맛보지도 못합니다.
진한 감동을 느끼거나
벅찬 감격에 젖어
보지도 못합니다.
물질을 통해 순간적인
만족만 얻으려고 합니다.
사랑도, 우리의 감정과
정서도 인스턴트화 되고,
물질화되었습니다.
자신의 욕망이 속히
이루어지기만 바라고
차분하게 기다릴 줄
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간절한
기다림 속에서 이 대림절
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시므온처럼 간절하게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만이 그리스도와
감격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탄절을 보내면서도
그리스도를 만나는
벅찬 감격이 없는
것은 우리에게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마음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오신 사건이 정말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시므온은 평생동안
사랑하는 임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그리스도를
기다렸고, 결국 그리스도
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가슴에 안고
감격에 벅차
하나님께 찬송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이제 이 시므온처럼
우리 개인의 소망이시며,
인류의 희망이시고
구원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하며 대림절의 남은
기간을 보냄으로써
벅찬 감격 속에 성탄절
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 2:25-27
/아직도 기다림이
있다면 행복합니다/
사랑이 가슴에 넘칠
때진실 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사랑의 감정을 가슴
가득히 담고 살아갈
때누구라도 행복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늘 되풀이되는 일과
속에서정신없이 맴돌
다가도가끔 푸른 하늘
을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 난 이런 소망
을가만히 외어 봅니다.
언제나 사랑하며살게
하옵소서 라고,나의
이 바람은 큰 사랑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내 주변에
있는 것들부터우선
따스한 시선으로바라
보자는 아주작은 사랑
의 마음입니다.
사실 입으로는 사랑
을외치면서도 정작
마음의문은 꼭꼭 닫아
두는때가 얼마나
많습니까,사랑은 결코
큰 것에서부터시작되는
것이 아니라고내 주변
에 있는 것들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시작
되어 가지를뻗치는
게 사랑이라고 감히
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랑이란 것은
관심을 갖지 않으면 결코
솟아나지 않는 정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솟아나는 정이 아닌
것이지요,퍼낼수록
다시금 맑고도그득하게
고여 오는 샘물.
당신도 당신의 가슴
속에 있는사랑이라는
샘물을 자주그리고
되도록많이 퍼내지
않으시렵니까,
미안해 하지 말아요.
늘 부족하다 하지 말아요.
당신의 존재로 꿈을 빚는
나 는마음의 보석 상자
를 간직했는데요,
힘들어 하지 말아요.
늘 안타까와 하지 말아요.
당신의 마음 하나로
깨어나는 나는
또 하나의선물로
채우는 걸요,
빛을 삼켜먹은 어둠이
어제를 유린했던
시간 었지만,
다시 그려나가는
내 안의 아름다움은
당신이란 이름의
선물 때문인걸요,
한 세상 키 작은 잎새가
된다해도 바람이 할퀴고
간 들녘으로 남는다해도,
당신이 함께 하는 하루는
눈부신 선물인걸요,
사랑이라는 선물은
손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
하나 되어버릴 때
사랑은 안개처럼
스며듭니다.
사랑이라는 선물은
손으로 풀어보는
것이 아니며,
마음으로 바라보면
스스로 풀리는
선물입니다.
마음에 사랑이
서로를 향해 당기고
있다면 그 사랑은
향기가 진동합니다.
사랑이라는 선물은
한없이 퍼 주고
나눠주어도,
깊은 산골 샘물처럼
마르지 않습니다.
보석같은 하루가
되시길 바라며,
/조급함 느긋함/
마귀는 조급하게
하고 서두르게 합니다.
그래서 실수하게 하고
일이 안 되게 하지요
마음에 조급한 생각이
들면 일단 그 일을
잠시 내려놓으세요.
하나님은 느긋
하게 하고
막힘이 없이
잘 흐르게 합니다.
그래서 신중하게 하고
일이 잘 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처럼 보여도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마귀를 미쳐버리게
만드는 비결이 있습니다.
"우리 하루만 더
기도해 보고 결정합시다"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서두르면 안돼요.
하루가 지나도
변함이없으면
그 일을해도 됩니다.
하루가 지나도 마음에
요동함이 없으면
그 일을 결정해도 됩니다.
중요한 결정일수록
하루 정도숙성시켜서
결정을 하세요.
포도도 나무에서 포도를
따 바로 먹으면 맛있을
것 같아도 맛 없어요.
밀가루 반죽을 해서
바로 빵을 만들면
부드럽지 않고
딱딱해서 못 먹어요.
밭에서 방금 캔
감자는바로 먹기에는
너무 독해요.
포도도, 빵도, 감자도
하루 정도 숙성을
시켜야 제 맛이 납니다.
결정도 하루정도
가라 앉혀야본래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순간
우리는 거룩한 신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 거룩을 완성하는
데는 평생이 걸립니다.
거룩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매일 매일기도와
말씀 묵상이라는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으로
받지만거룩은 은혜의
수단인영성훈련
으로 완성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룩에
대한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십니다.(빌2:13)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신앙
속에서그리스도를 닮아
가는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
절기에우리 모두 주님
을 닮아가는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 이로 인하여 무릇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 32 : 6)
어느 날 아침, 나는 내 일에
열중해서 급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오다가 응접실을 지나쳤는데
문이 조금 열려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나는 타오르는 난로 앞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보았다.
갑자기 당혹감이 밀려왔다.
그분은 나의 손님이다.
나는 그분을 내 마음에 영접했다.
그분은 언제나 나를 찾아오셨지만
나는 그분을 등한시하고 있었다.
풀이 죽은 표정으로 나는 말했다.
"자비로우신 주님,
저를 용서하소서.
매일 아침 여기에
계셨습니까?"
"그래, 매일 아침 너를
만나기 위해 여기에
있겠다고 너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라.
나는 큰 대가를 치르고
너를 구속해 주었다.
나는 너와 교제하기를
원한다.만약 네가
너 자신을 위해서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없다면 내가 그것을 하겠다."
주께서 나와의 교제를
원하시고,
또한 내가 그분과 함께
있기를 바라시며
나를기다리신다는
사실은다른 어떤
일보다도하나님과
함께하는나의 명상의
시간을변화시켜 주었다.
당신의 마음의 응접실에
주님을 홀로 기다리게
하지 마라.
그리고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함께할 시간을 찾아라.
주님과의 교제만큼중요
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의 소망/
사무엘 베켓은 1940년대에 지금은
고전이 된 「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희곡을 썼는데,
이 작품에 나오는 고도는 누구일까요?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뜻할까요?
기독교 윤리학자 루이스 스메데스는
"고도는 다름아닌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한 탈출구로 매달리는
허무한 꿈을 상징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연극이 끝났는데도 그 두 사람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무대
에 서 있을 뿐입니다.
공연 50주년 기념식에서 어떤 사람이
작가 베케트에게 묻기를 "자 이제는
고도가 누구인지 말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낸들 어찌 알겠습니까?"
「고도를 기다리며」는
많은 사람들의 삶, 곧 공허하고
의미도 없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도 사랑과
은혜와 지혜의 하나님이 없다면
그 인생은 아무런 소망도 없이
공허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소망은 다릅니다!
우리는 기대 속에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딛 2:13).
이러한 소망, 곧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한 후 장차 올
세상에 이루 형용할 수 없는
행복한 삶이 있다는
소망이 우리를 지켜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