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도착한 말들 [이기철]
나무가 봄에 보낸 말들이 가을에 도착했다
열매를 쪼개면 봄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나의 무지는 바람과 햇볕의 전언을 알아듣지 못했다
풋 순이 열매의 몸으로 둥글어지는 동안
아무래도 나는 동시대의 비극에 등한했나 보다
전쟁 누스를 보며 밥을 먹고
세 개의 태풍을 맞으면서 희랍 비극을 읽었으니까,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모처럼 지구가 한 가족이 되는 날도
무덤들에게 그곳은 편안하냐고 묻지 않았으니까,
물소리를 따라나서던 한 해의 발이 멈추는 곳에
데리고 오던 생을 물끄러미 세워 둔다
나무에게도 나에게도 생이란 것은 무거운 것이니까,
몸이 야윈 바람이 텅스텐 소리를 내면
더는 수정할 수 없는 문장을 종이 위에 눌러 쓴다
열매의 말은 페이지가 너무 많아
손가락에 침 묻혀 넘겨도 다 읽을 수가 없다
-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 노란 산수유 꽃이 제일 먼저 피기 시작했을 때
탄성이 절로 나고 하! 봄이 꽃잔치를 하겠구나 입술을 열었는데
매화 보러, 벚꽃 보러, 어디든 돌아다니며 하! 하!거렸는데
우리가 눈치채지 못했던 바람과 햇볕의 노고에
온통 자연은 자연스러웠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들이 합창을 부를 때에도
탄성의 여운은 사라지지 않을 것을 믿었다.
하지만 계절 앞에서는 장사가 없나 보다.
어느덧 머리가 희끗해지고 울긋해지고 불긋해지고
어!하다가 아!로 탄성 아닌 신음을 토해내는 날이 왔다.
시월의 마지막 날을 불당동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도시가 연식이 좀 되면 가로수가 제법 기품을 띤다.
시몬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낙엽을 발끝으로 툭, 툭 차며
가을에 도착한 말들을 정리해 보았다.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기철시인의 '영원 아래서 잠시'를
반값에 샀다.(어, 이거 작년에 나온 시집인데 벌써 누가 버렸네.)
버림받은 시집을 들고 집에 돌아오며
오늘밤은 시집속의 가을 문장을 툭, 툭 차며 책갈피에 묻어두어야겠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