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우리 주변에는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금세 얼굴이 굳어지는 분들이 곧잘 있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서도 내심 마음안에는 불편함과 짜증이 요동하기도 하구여. 자기 뜻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이내 예민해지고 굳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네번째 시간에서는 왜 금새 얼굴이 굳어지는가, 마음이 예민해지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려보고자 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다 같이 주말여행을 떠났다고 해봅시다. 산책을 하고 싶은데 가족들이 모두 선뜻 따라나서지 않으면 이내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 때 가족중 누군가가 "모처럼 방도 좋은 걸로 잡았는데 잠깐 쉬는게 어때요?" 하고 말이라도 좀 붙이려 하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리고 맙니다. 이러고 나면 무엇을 위한 여행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불쾌한 하루가 되고 말지요.
그런데, 위와 같은 상황의 일들이 내 주변에서, 내 안에서 참으로 많이 일어나는데요 이것이 영적으로는 어두운 마음과 관련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풀어가는 이야기는 아래에서 다시 하도록 하구여.
좀 전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자신이야 기분을 좀 내고 싶고 여행정취를 만끽하고 싶은데 가족들이 이내 자신의 뜻대로 따라와주지 않는다하여 저런 표정과 행동이 나오는 데에는, 이 외에도 일상에서나 직장안에서나 교회안에서나 많은 곳곳에서 자신의 어두운 마음들이 형태만 다를 뿐, 매번 돌출한다라는 것을 우리는 깨우쳐보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봅시다. 식구들이 산책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입을 다물어 버린 남편의 불만은 분명 누가 보아도 어린애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자신이 어린애 같아서 그런 표정과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어떤 식으로 합리화 하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우선 그는 연일 계속 되는 고된 일로 지쳐 있어, 이 기회에 잠시나마 일을 잊고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곧이어 바쁜 와중에 기껏 짬을 내어 이렇게 좋은 곳에 데려와 줬더니 방안에만 틀어박혀 뭐 하냐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말하자면 생색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점점 흥분하여 세상이 얼마나 냉엄한지 알기나 하느냐는 핀잔이 나오기도 하구, 그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냐며 서운해 하기도 하지요.
어린아이라면, 욕구와 불만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겠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자신의 욕구를 합리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서로가 점점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속내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 까닭입니다. 그래서 자칫 말다툼이라도 벌어지면 그칠 기색 없이 밤늦게까지 계속됩니다. 그렇게 해서 서로 이해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결국 어느 쪽도 이해하지 못한 채 끝이 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는 데에는, 화가 난 자신 스스로가 자신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아이러니하게 참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가정을 보셨을 것입니다. 남편, 아내 둘다 따지고들거나 말 많이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타입인데도, 어떤 문제가 생기면 남편은 그 문제에 대해서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 직성이 풀리고, 그래서 상대가 졸리든 대화하기 싫든 밤늦게라도 이야기를 해야 하고, 아내는 일단 접어두고 다음날이나 담기회에 다시 이야기 하자라는 식이요.
얼핏보면 이런 남편은 확실하고 매듭이 좋고 논리정연해 보일수도 있지만 이런 사람의 자라온 환경을 보면 어렸을 적 환경에서 부모님과 오래 떨어져 있었거나, 권위적이거나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온 분들이 많습니다. 반듯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근 이런 환경에서 자라온 분들은 어렸을적의 유아적인 의존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서는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그 유아적 의존욕구를 직접적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간접적으로 어떤 정의적인 메세지로 상대를 괴롭히는 꼴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어른이라면, 대개들 자신안에 있는 유아적인 의존욕구가 드러나거나 상대가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에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 부끄러움은 자기 행동을 합리화 하는 것으로 드러나기 마련인데요, 우리 사람이 비록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하나 이미 죄악의 세상에서 세상적 이론과 지식으로 물들어져 있는 우리네 사람들이 합리적이면 얼마나 합리적이겠습니까?! 그저 합리화하는 것일 뿐 아니겠습니까.
다시 돌아가서,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우리는 좀 피곤하니까 당신 혼자 갔다 올래요?" 하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양쪽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으니 꽤 좋은 의견일 수도 있지만 이 말은 그에게 더더욱 화나게 만들 뿐입니다. 자신의 진짜 불만을 아이처럼 직접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화가 나는 것입니다.
'난 다 같이 가고 싶어, 혼자서는 가기 싫어, 싫단 말이야' 이 말이 마음안에서는 메아리치지만 솔직하게 표현할 수 없으니 "기껏 데려와 줬더니..." 하고 생색내기도 하고, "저렇게 게을러서 원...' 상대를 비난하기도 하고, "여기 머하러 왔냐..." 여행의 참맛을 몰라도 한참 모른다는 식으로 상대의 감정은 완전히 묵살해버리는 꼴이 되는 것이지요.
자신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경우, 마음안에 짜증이 나고 예민해 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적으로 풀어보면 이런 사람도 근 대개는 어렸을 적 자라온 환경을 살펴보면 상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 답게 어리광도 피우고 부모는 그것을 받아주고 그렇게 부모와 아이사이에 애정의 교감이 오고가면서 정서가 함양되었어야 하는데, 부모에게 의존하지 못했던 어렸을적 결핍이 어른이 되어서는 자기 합리화나 만인에게 만족감을 주어야 한다라든가 그런 강박관념으로 형성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회원님들! 우리들은 모두가 죄를 버리기 원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기도하고, 죄로 인해서 넘어져도 또 다시 일어서고자 다시 기도하고 말씀봅니다. 주님의 보혈의 피를 뿌리며 기도하기도 하고, 때론 소리를 목청껏 내면서 악한 영들을 물리치기도 합니다. 맞습니다!! 저도 그리 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리고 죄를 버리는 더 좋은 방법은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가 삶의 자라온 환경에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모른다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적 행동 하나만 갖고서 맨날 싸울 수 밖에 없습니다.
간음을 합니까? 그래서 괴롭습니까?! 죄를 버리는 방법도 영계의 법칙을 따르면 우리는 비록 단번에 버리지 못한다해도 최소한 사단마귀에게 짓눌려서 억지로 억지로 버려나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품안에서 행복한 마음으로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신이 자라온 환경속에서 매 순간 자신이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를 되짚어 보시면 됩니다. 그러면 간음이라는 생각, 행동 이것을 버리려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왜 간음을 하는가?에 초점을 두게되고 근본적으로 더 빠르게 온전히 버릴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자꾸 하게 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거짓말을 했으니 그걸 놓고서 또 회개하고 또 거짓말하고 그러면서 난 왜 이럴까. 난 안되 그러지 마시고,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가를 자라온 환경을 되짚어 보시면 반듯이 그 안에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만든 여건이 있고 마음안에 거짓의 속성을 자리잡게 한 장본인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 장본인은 사람일수도 있고, 환경일수도 있고여...
그러한 것들이 내 안에 상처로 남아있는데, 난 그것을 모르고 그저 기도와 말씀으로 포장하고 살기에 신앙의 성장도 달려가는듯 하면서도 이내 넘어지고 자꾸 이런식으로 수십년을 제자리에서만 달리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처와 장애들을 기도하면서 주님의 관용과 용서의 마음으로 씻음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럼 다시! 왜 표정이 굳어지고 말문을 닫아버릴까요?! 소심해서? 꽁해서? 속이 벤뎅이라서? 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원인분석으로는 절대로 자기를 바꿀 수가 없습니다. 발견되지도 않습니다.
자라온 환경에서 아이로서의 의존욕구를 충족하지 못한 마음은 여러 갈래의 어두운 마음의 형성으로 나옵니다. 위의 경우는 서운함이나 노이로제 같은 자기식의 욕구불만 표출로 드러난 것이지만 그것은 사람마다 다르다라는 것입니다.
슬슬 정리합니다. 금새 표정이 굳어지는 이유는 내 안에 성숙치 못한 어린애 같은 마음인데 이제 어른이 되어서는 그것이 서운함이나 감정으로 자리를 잡은 것입니다. 서운함이나 감정이라는 악의 속성도 저마다 원인이 다르지만 그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큰 뿌리를 뽑아내면 그 주위의 곁가지 잔뿌리들은 같이 빨려나오듯이, 죄를 버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러난 열매 하나를 갖고서 뽑아내고 생기면 또 뽑아내고 그러지마시고, 뿌리를 뽑아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잔뿌리 하나하나 갖고 싸우지 마시고, 굵고 큼직한 뿌리들을 뽑아내는 것이 더 수월하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글을 보시는 우리들 모두, 다시 한번 내 안에 서운함이나 감정 또는 모든 이들을 만족시켜주려거나 모든 이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그런 신경적 예민함등이 과연 성장과정 어느 부분에서 상처로 남아 내게 이런 합리화와 육의 속성으로 드러나게 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