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운동권 박형선 등 광주일고 동문들의 광주사태 31주년 작품인 부산저축은행 금융비리 사건이 2011년 5월에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비록 ‘부산저축은행 비리 사건’이란 명칭은 2011년 봄에 비로서 등장하였으나, 그들의 비리는 훨씬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박형선과 윤한봉 등 광주일고 동문들이 그 배후 혹은 주동자들이었던 1980년 봄의5·18사건 역시 그 역사적 뿌리가 있는 사건이었다. 그 사건
그 주동자들이 1980년 5월18일에 돌발적으로 등장한 것이 아니라, 여러 해 전부터 양성되고 있었다. 남민전의 하위조직 민학련, 청학위, 민투
등이 대거 광주사태에 참여하였던바, 1970년대의 남민전의 모태가 1960년대의 인민혁명당과 통일혁명당이었다.
광주운동권 임동규는 1960년대에 통혁당이 북한공작금으로 인수하여 운영하였던 바로 그 학사주점을 경영한 바 있다. 임동규의 견해에 따르면,
학사주점이 모태가 되어?인민혁명당 다음 국면의 운동을 이끄는 통일혁명당이 만들어졌으며, “그때만 해도 아직 무명의 병아리 거지시인이었던 김지하를
일약 대중적 시인으로, 급기야는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성장시키는 기반을 학사주점이 제공하였다” (임동규 2005).
1974년의 2차 인혁당, 즉 인혁당 재건위 사건 핵심관련자였던 도예종은 1960년대 중반의 제1차 인혁당의 수뇌였는데, 제1차 인혁당 사건
때 도예종을 숨겨주었던 인물이 바로 도예종이었다. 임동규는 자신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자였음을 그가 민노당에 기고한 글 “4월 혁명에서 남민전,
민주노동당까지 민중해방의 한길”에서 이렇게 피력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민혁명당 사람들과 연계되어 도예종 선생을 숨겨주게 되었다. 얼마 후 도예종 선생을 내가 직접 은닉하고 있는 것이
서로에게 현명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다른 방도를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사태는 우리의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인민혁명당 수뇌부가
검거되었고, 이어 우리의 은닉처가 노출되어 버렸다. 수사 당국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명백한 현행범이었다 (임동규 2005).
1964년 3월 24일부터 시작되어 6월 3일에 그 과격시위의 절정을 이루었기에 운동권이6·3항쟁이라고 부르며 정동년도 가담했었던 한일회담
반대 시위도 실은 인민혁명당이라는 자생간첩단이 배후조종한 것이었음을 임동규는 이렇게 증언한다:
인민혁명당 사건은 법정투쟁에 있어서 모범을 보였던 당시 진보역량의 총화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사과정에서 담당 검사가 기소를
거부하였고, 다시 당직 검사가 전격 기소하였으나, 재판 결과 전원이 무죄 및 집행유예로 석방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은
자생적이었다는 데서 희생자를 내지 않고서도 3·24, 6·3 투쟁을 배후 지도한 역사적 과업을 무난히 수행한 것이다 (임동규 2005).
임동규는 1977년 7월 14일 안용웅의 집에서 이재문의 집전으로 남민전 가입 선서식을 거행하였다. 남민전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집전자와
가입자가 칼을 서로 맞잡고 선서식을 거행했다 (임동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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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서의 5 ‧18』저자 김대령
인혁당 사건의 진실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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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혁당 사건(1):
통일혁명당의 무장투쟁준비
인혁당 사건(2):
인혁당 재건위와 남민전은 한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