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호용 광주 내려와 작전 "직접 점검"
자위권 발동후 집단발포 "수수께끼"
3.7.11공수이어 20사단 추가 투입
계엄사,21일 오후 4시 "윤흥정.정웅 지휘계통서 제외"공식결정
44 신군부의 전략
전남도청앞에 모인 10만시민들이 [계엄군철수]를 소리 높여 외치고 있을때 신군부는 시민들의 바람과 정반대의 결정을 내린다.
계엄군 증파.
21일 오전 현재 광주 시내에 배치된 계엄군은 *최세창준장이 지휘하는 3공수여단 5개대대 (전남대 광주시청 광주역 배치) *신우식준장의 7공수여단 2개대대(조선대 도청) * 최웅 준장의 11공수여단 3개대대(조선대 도청)등 10개대대 3천 4백 여명.
이밖에 향토사단인 31사단병력 1천 5백여명과 경찰 1천 2백여명이 시위진압과 주요시설 경계근무에 나서지만 공수부대의 보조차원에 머문다. 7천여명에 가까운 병력투입에도 불구하고 사태가 더욱 악화되자 신군부는 잇따라 병력과 장비증파결정을 내린다. 시위사태 악화가 [경찰과 현지 지휘관의 우유부단한 태도로 초기 강경진압에 실패했다]는 판단에 다른 것이다.
3.7.11 공수 시위 진압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진압에 대한 사과와 공수부대의 철수를 요구하고 있던 시민들의 요구는 무시된다. 20일 밤 8시 신군부는 [위기에 처해 있는 공수 여단의 작전을 돕고 시위를 효율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20사단 2개연대를 광주에 추가 투입한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에따라 21일 새벽 2시 30분 서울 용산역에는 박준병소장의 20사단 61연대(연대장 김동진대령),62연대(이병년대령)병력 3천 2백여명이 열차에 오른다. 이들은 이날 오전 10시 상무대에 도착 본격적인 작전에 착수한다.
20사단 병력이 광주에 도착할 즈음 이희성계엄사령관은 관계지휘관과 참모들을 불러 [광주사태]를 분석한후 6개항을 결정한다. *계엄군을 광주시내로 부터 외곽으로 전환 재배치하는 한편 *자위권 발동 * 1개연대의 추가 투입 *전투력공백 보전책으로 2개 훈련단 훈련동원 소집 *폭도소탕작업은 23일 이후에 의명 실시 * 경계강화등이 주요 내용이다.
시위 작태를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보다는 대규모 병력 동원을 통해 무력으로 집압하겠다는 신부군의 의도를 명확히 드러낸 결정이다. 특히 [자위권]발동 경고는 21일 오후 광주 시내 일원에서 자행된 집단 발포를 예고하는 것으로 [발포는 있었지만 명령한 사람은 없는것]으로 돼있는 집단 발포경위 규명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신군부가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병력 증파를 결정하고 있을 당시 광주에서는 신군부의 비공식회합이 열린다.
21일 오전 광주에는 신군부의 실세인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모습을 나타낸다. 정호용 사령관은 19일부터 전교사에 머물면서 공수여단 작전과정을 제어해 온 상태. (정호용 특전 사령관은 지난 88년 12월 7일 청문회를 통해 자신이 5월 20일 광주에 있던 7여단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시인한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광주방문에 대해서는 본인의 부인과 함께 일부 이견이 있으나 당시 광주 지역 보안부대 수사관인 허장환씨는 양심선언을 통해 전사령관의 광주 방문이 사실이라고 증언한다. 허수사관의 양심선은 내용 [21일 서울에서 전두환 보안 사령관이 광주에 도착. 상무대 전투병과교육 사령부에서 사태진행과정에 대한 브리핑을 받은 후 헬기로 광주 일원을 살펴본후 상경했다. ]
[21일 수사회의 과정에서 505 대공과장 서의남중령은 오늘 사령관님께서 부대에 들르시지는 않았지만 광주에 다녀갔고 전교사회의 결과 역시 자위력 구사를 최종 결정했으니 폭도들에게 곧 사살 명령이 내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보안사령관의 광주 방문이후 윤홍정전교사사령관,정웅 31사단장으로 이어지던 계엄군의 공식지휘계통이 붕괴된다.
무장 헬기 작전 동원
그동안 공식지휘계통 뒤편에 숨어 실질적으로 정국을 주도해온 신군부는 신사령관과 정사단장의 시위진압방식에 강한 불만을 표시하며 두사람을 명령계통에서 제외 시키고 사태 진압전면에 신군부의 측근을 등장시킨다. 이같은 움직임은 이날 오후 3시를 전후해 그 전모를 드러낸다. 21일 오후 2시 53분 소준열행정학교장이 돌연 광주로 향한다. 이어 오후 3시 35분 에는 시위의 전국확산방지와 지휘체계 일원화 광주 외부도로망 차단들을 골자로 한 참모총장 지시가 각부대에 하달된다.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되는 부분은 지휘체계의 일원화. 참모총장 스스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명령계통에 이상이 있으며 이원화된 지휘체계를 바로 잡을 필요가 있음을 처음으로 인정한다.
정부와 계엄사는 각각 이날 오후 4시 윤흥정사령관과 정웅 사단장을 지휘계통에서 제외키로 공식 결정한다. 신사령관은 이날 단행된 개각에서 체신부장관으로 입각한다. 개각 발표와 함께 공수여단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31사단에서 전교사직접통제로 작전통제권이 전환된다. 비록 형식적이긴 했지만 그나마 유지했던 정웅 31사단장의 통제권이 상실되는 순간이다 (정사단장은[이미 20일 오후부터 공수여단장들이 자신의 지휘를 받지 않는 채 전교사의 명령을 직접 대대장들에게 전달했으며 대대장들도 사소한 사실만 보고 할뿐 중요사항에 대해서는 일체 보고하지 않는 등 지휘권이 박탈된 상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휘체계 변화와 함께 20사단 60연대(연대장 정수화 대령)의 광주 투입이 추가로 결정된다. 이어 오후 4시 30분에는 광주에 진주해 있던 각 공수부대에 철수 명령이 내려진다. 23일로 예정된 소탕작전을 위해 공수여단을 광주 외곽으로 재배치하는 한편 20사단을 광주 인근 주요지역에 투입, 일단 광주를 봉쇄키로 결정한다. 이에 따라 전남대에있더 3공수여단은 교도소로,도청과 조선대의 11공수는 주남마을로 7공수 33대대는 녹동마을로 각각 이동한다. 20사단 3개연대의 증파결정과 함께 광주에는 시위진압을 위한 장비 또한 크게 보강된다.
가스살포를 위한 5백MD,코와 귀를 자극하는 CS액등 시위진압 장비가 속속 도착한다. 오전 9시 전교사는 육본에 무장헬기지급을 건의하고 육본은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무장헬기 10대 지원을 결정했으며 이들 헬기는 도청앞 집단 발포가 있던 오후 1시께 광주에 도착 본격적인 임무에 착수한다. (무장헬기를 통한 기총소사 논란은 집단 발포경위와 더불어 중요한 논쟁거리로 남는다. 이부분은 [집단발포편]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 또한 광주 시민은 물론 전국민들을 상대로 선무활동 또한 조직적으로 진행된다.
이날 오전 10시 20분 전남 출신 중령급 이상 장교 46명이 광주에 도착한다. 이들은 도착 즉시 가족들과의 면회등을 갖고 신군부의 각본에 의한 선전활동을 시작한다. 계엄사는 또 이날 오전 광주에서의 유혈충돌사실을 최초로 발표하는 한편 그동안 금지해 오던 언론매체의 광주 사태 보도를 허용한다. 이어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이날 밤 7시 30분 담화문겸 경고문을 발표한다.
[(전략)지난 18일 수백명의 대학생들에 의해 재개된 것은 상당수의 타지역 불순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터무니 없는 악성유언비어의 유포와공공시설파괴 방화장비 및 재산 약탈 행위등을 통해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데 기인한 것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이번 사태를 악화시키기 위한 분술분자및 이에 동조하는 깡패 등 불량배들로서 급기야는 예비군 및 경찰의 무기와 폭약을 탈취하여 난동을 자행하기에 이르렀으며 이들의 극한적인 목표는 너무나도 자명하여 사내의 악화는 국가 민족의 운명에 파국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 명약관화할 것입니다. (중략) 계엄군은 폭력으로 국내 치안을 어지럽히는 행위에 대해서는 부득이 자위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하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18일 이후 자행된 과잉진압과 20일 밤이후 발포에 따른 사상자, 도청앞 집단발포와 이로인한 피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자위권발동]만을 경고한다.
대대적인 선무공작
이같은 담화는 오히려 광주 시민들을 흥분시킨다. 행여 하는 심정으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던 시민들은 자신들이 어느덧 깡패에 불순분자로 변한데 대해 어이없어 하며 거리로 나선다. 병력증파와 장비보강,지휘체계 재정비,대대적인 선무활동 전개등 작업을 마무리한 신군부는 현지 파견 부대에 광주 봉쇄를 지시한다. 전남대등에서 교도소로 철수한 3공수여단은 순천 방면으로 향하는 도로를 차단한다. 11공수는 소태동에서 화천방면으로 나가는 도로를 , 31사단은 오치에서 담양인근 방면 진출입을 통제한다. 21일 오전 광주에 도착한 20사단은 극락교와 백운동 고속도로 툴게이트 등에 배치되 송정리 목포 전주 방면등을 차단한다. 21일 밤 광주는 1만여명의 군병력에 에워싸인채 고립무원의 도시로 변한다.
첫댓글 좌우간 광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넣었던 신군부들은 역사의 뜨거운 맛을 봐야 합니다...이런 사람들이 영남에서는 의인처럼 받들어지는 현실이 남북관계나 한일관계처럼 답답하기 그지 없습니다......
앞으로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르겠지만, 대한민국이 완전한 민주국가가 되는 날 전두환, 박정희는 이등병으로 강등될 것입니다.
26년이 지났는데도 이글을 보니 당시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