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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합니까?
존 맥아더 작성 2023년 9월 8일 금요일
사도행전의 처음 네 장에 묘사된 영적인 행복은 사람이나 악마의 박해로 인해 중단된 것이 아니라 그 구성원들의 죄로 인해 중단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처럼 사심이 없었지만 예외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그들의 죄는 탐욕과 속임수의 씨앗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아간의 죄가 여호수아서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은 사도행전에 있는 것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백성의 승리하는 전진을 방해하고 큰 승리의 정점에 죄를 진영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만적이고 비참하고 이기적인 행위였습니다.
예루살렘 성도들은 성령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드리고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죄는 사탄으로 가득 찬 마음을 드러냈습니다(행 5:3). 네 번째 장의 끝과 다섯 번째 장의 시작 사이의 대조는 이보다 더 극적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함께 재산을 팔아 그 값의 얼마를 자기 아내가 아는 가운데 숨겨 두었다가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팔리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서 당신의 것으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팔린 후에도 당신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습니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마음에 품었느냐? 당신은 사람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거짓말을 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쓰러져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는 사람은 모두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그 사람을 덮어 가리고 메고 난 후에 장사하였더라.
그 후 세 시간쯤 지났을 때 그의 아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들어왔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땅을 이 정도 가격에 팔았는지 나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예, 그게 가격이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기로 뜻을 같이 하였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한 자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너를 메고 갈 것이니라.” 그리고 즉시 그녀는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숨을 거두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가 죽은 것을 보고 메고 나가서 그의 남편 곁에 묻었더라.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모든 사람이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도행전 5:1~11)
아나니아의 이름은 “주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입니다. 삽비라는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그들의 행위는 결코 은혜롭거나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재산을 팔아 사도들에게 주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러나 2절에서는 드릴 때가 되자 “값의 얼마를 감추었”다고 알려 줍니다. 두 사람 모두 음모에 참여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그들의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약간의 영적인 명성을 원했습니다. 그들은 희생적으로 기부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그 돈의 일부를 스스로 갖고 싶어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돈을 사랑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했듯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느니라”(디모데전서 6:10).
여기 돈에 대한 사랑으로 오염되어 대중의 위선을 저지르기 위해 기꺼이 함께 공모한 두 인물이 있습니다. 그들은 땅을 팔았지만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가장하여 일부만 주님께 바쳤습니다. 그들은 그 행위를 통해 영적인 존경과 약간의 현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모든 것을 바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신성한 요구 사항은 없었습니다.
죄는 그들의 거짓말이었습니다.
이제 솔직해집시다. 이런 종류의 위선은 특별히 드문 죄는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허위로 돈을 기부합니다. 마치 바리새인들이 회당과 거리에서 자선을 베풀 때 나팔을 불게 한 것과 같습니다(마 6:2).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그들은 자기 상을 충분히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6:2, 5, 16).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의 선한 행실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합니다. 따라서 인간의 인정만이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입니다. 이 죄는 우리에게는 사소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선과 거짓된 거룩함을 미워하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부르셨습니다(눅 12:1).
이제 이 누룩은 초기 교회를 감염시키려고 위협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가혹하게 다루실 것이며 모든 사람에게 교회 생활의 심각성을 알리실 것입니다.
베드로의 반응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그들의 위선을 간파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받았을 충격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사도들 앞에 와서 그의 돈을 그들의 발 앞에 놓고는 그것이 자기가 재산을 팔아 얻은 돈 전부라고 우스꽝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는 아마도 사람들이 자신을 영적인 모범, 관대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갑자기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하니 (사도행전 5:3)—교회 예배에서 말하는 다소 대립적인 말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아나니아는 동기가 무엇이든 그가 구하는 승인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용적인 교회 지도자는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상당한 금액입니다. 좋아, 그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 아니며 우리는 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를 당황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그에게서 한 푼도 더 받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아닙니다. 그는 죄와 직접 맞섰습니다. “왜 사탄이 당신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까?” 베드로가 사탄이 아니라 아나니아에게 책임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하십시오. "왜?" 그는 물었다. 그리고 다시 4절에 “네가 어찌하여 이 일을 마음에 두었느냐”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죄가 아나니아가 돈의 절반을 간직한 것이 아니라 그의 위선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팔린 후에도 당신의 통제하에 있지 않았습니까?” (4절). 그는 그 돈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땅을 지킬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달리 행동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내가 내 재산을 팔았는데 그 돈의 일부가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죄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만큼 많이 줄 수도 있고 적게 줄 수도 있는 모든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자신을 위해 일부를 간직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주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엄중하며 최종적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아나니아를 죽였습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쓰러져 숨이 끊어지니라”(행 5:5). 이것은 바로 온 교회 앞에서 지극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법적 행위였습니다.
사용자 친화적인가? 거의 ~ 아니다. 사실 그 결과는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5절).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무시하고 교회의 순결을 더럽히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나니아를 모범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죄를 이렇게 심판하시는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지만 나답과 아비후(레위기 10장), 고라(민수기 16장), 아간(여호수아 7장), 헤롯(사도행전 12장), 그리고 성경 전반에 걸쳐 있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나니아도 즉시 그의 죄에 대해 심판을 받고 생명의 대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사람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이런 식으로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 우리가 모두 멸망하지 않는 것은 오직 주님의 무한한 자비 때문입니다(애 3:22, NKJV). 때때로 하나님은 육체적 죽음으로 죄를 심판하십니다. 바울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고린도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병들게 하여 성찬을 더럽히고 심지어 죽어가는 자들을 심판하고 계시다고 썼습니다(고린도전서 11:29-30).
그러나 아나니아에게는 질병도, 시간의 경과도 없었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하나님의 심판은 신속하고 두려웠습니다.
삽비라의 죄
삽비라는 남편의 운명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아마도 자기가 웅대하게 등장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후 세 시간쯤 지났을 때 그의 아내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고 들어왔다. 그러자 베드로가 “그 땅을 이 정도 가격에 팔았는지 나에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예, 그게 가격이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기로 뜻을 같이 하였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한 자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너를 메고 갈 것이니라.” 그 여자가 즉시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숨을 거두매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가 죽은 것을 보고 메고 나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였더라. (사도행전 5:6~10)
그녀는 의도적으로 성령께 거짓말을 하여 자신과 남편이 함께 공모하여 계획적인 위선 행위를 저질렀음을 증명했습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직접적이었고 아나니아도 즉시 남편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함
하나님은 교회의 순결을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이것은 신자들 사이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한 초기의 잊을 수 없는 교훈이었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나는 교회놀이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죄인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나는 사용자 친화성에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의와 진실과 진실한 마음을 원합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매우 진지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회적 활동이 아닙니다.
이번 에피소드의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또 “온 교회가 크게 두려워하니라”(행 5:11). 그날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많은 주의 깊은 자기 성찰이 이루어졌음을 여러분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요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를 정결케 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이 죄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분을 경외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죄에 맞서야 합니다. 여기에서 주님은 교회 집회의 가장 기본적인 모델을 제시하십니다. 죄는 엄중하게 다루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불신자들이 그러한 심각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죄악에 대해 이렇게 생각하십니다.
확실히 1세기 예루살렘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보다 경멸받는 죄인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쓴 것처럼,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베드로전서 4:17).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진노를 내리시기 전에 자기 백성을 심판하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가? 네, 하지만 자신을 정화해야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이미 질병과 사망으로 죄를 지은 성도들을 심판하고 계심을 경고한 후, “만일 우리가 자기를 옳게 판단하면 심판을 받지 아니하리라”(고전 11:31)고 말했습니다. 즉,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 신실한 교인의 역할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환영받고 받아들여진다는 느낌을 주려고 하는 평범하고 가벼운 마음의 말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말입니다. 이를 통해 불신자들은 교회가 회개하지 않는 죄인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의를 사랑하는 구원받은 자들을 위한 곳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마태복음 18장에 설명하신 다음과 같은 과정을 따름으로써 순결함을 유지합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조용히 그에게 권고하라. 만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니라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모든 사실을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가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라. 만일 그가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태복음 18:15-17, 강조 추가). 교회 권징은 매우 사용자 친화적인 개념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교회를 정화하고 심판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1:32)고 썼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이 문맥에서 우리 주님은 교제에서 죄를 다루는 방법을 설명하고 계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권징 과정을 통해 교회 안에서 자신의 뜻을 수행하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말은 그들이 그분이 설명하신 단계를 따를 때 그분께서 신자 안에서 그리고 신자들을 통해 그분의 교회를 정결하게 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결과, 회개한 신자들은 회복되고, 마음이 완악한 죄인들은 드러나서 교제에서 추방됩니다. 우리가 이 과정을 따르지 않고 교회를 순수하게 유지한다면 하나님은 심판에 개입하실 것입니다(고전 11:30).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리로다
이 시리즈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신자들의 교제를 넘어서는 영향을 미쳤습니다. . . 이 일을 듣는 모든 사람이니라”(행 5:11). 13절은 믿지 않는 자들이 감히 그들과 교제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이는 오늘날 널리 퍼져 있는 사용자 친화적 철학과 정반대입니다. 사람들이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게 하여 교회로 유인하는 대신, 하나님은 두려움을 사용하여 불신자들을 멀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구약과 마찬가지로 초대교회에서도 핵심 교리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믿는 사람 모두 그분을 두려워하도록 배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경솔하게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순종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두려움이었습니다. 구원은 즐거움에 동참하고 정서적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마음이 부르짖을 때 옵니다!
현대의 사용자 친화적인 움직임은 정반대의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보다는 그분을 재미있고, 유쾌하고, 태평하고, 관대하고, 심지어 관대하신 분으로 묘사하려고 합니다.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참조, 눅 18:13) 오만한 죄인들은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합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단을 설교하는 것만큼 잘못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진노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는 “만일 [심판]이 우리에게서 먼저 시작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썼습니다. (베드로전서 4:17). 바울은 복음 전도의 주된 동기 중 하나가 하나님의 진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경외함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느니라”(고린도후서 5:11).
사용자 친화성은 교회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습니까?
사용자 친화적인 철학은 교회를 잘못된 길로 급격하게 전환시켰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예배, 성경, 신학의 격하로 인해 심각한 교리적 타협이 초래되었습니다. 사실, 수십 년 동안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밝히는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옥이나 인간의 타락과 같은 기본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고 거부해 왔습니다.
사용자 친화적인 교회의 십자선에 항상 있는 교리 중 하나는 영원한 형벌에 관한 교리입니다. 이 교리에 대한 거부는 “조건부 불멸”이나 절멸주의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이단적인 사상은 구원받지 못한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살지 않고 단순히 근절될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사용자 친화적인 철학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이 견해는 자비로운 하나님이 피조물을 영원한 고통에 맡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대신 그분은 그들을 완전히 없애 버리십니다.
당시의 “조건부 부도덕”을 공격하면서 스펄전은 지옥의 영원성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기대했던 천국에 대한 희망을 거의 말살해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의인의 보상은 악인의 형벌보다 더 이상 지속되지 않습니다. 둘 다 같은 성스러운 입술로 말한 같은 구절(마태복음 25:46)에서 '영원한'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형벌'이 단지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만들어졌듯이 '생명'도 그래야 합니다.”[1]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느니라. 영원무궁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계 20:10). 성경 전체에서 지옥에 관해 가장 많은 교사를 하신 분은 주 예수님이셨습니다. “네 눈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막 9:47-48). 그리고 요한계시록 14장 11절은 환난 중에 적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의 영원한 상태를 묘사합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경시하는 설교는 전도를 강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것을 약화시킵니다. 설교자가 영원한 형벌의 현실이나 심각성을 부인할 때 복음의 긴급성은 완전히 상실됩니다. 그리스도의 분명한 메시지 중 많은 부분이 거부되거나 설명되어야 할 때 성경의 권위는 타협됩니다. 이 가르침은 죄의 심각성을 경시하며, 따라서 복음 자체를 전복시킵니다.
사용자 친화적인 경향을 받아들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자 친화성이 어떻게 성경적 진리와 양립할 수 없는지 주의 깊게 숙고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라 실용적인 관점입니다. 그것은 바로 정통 교리의 핵심을 잠식하고 있는 사고방식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주의를 신현대주의로 이끌고 있으며, 교회를 내리막길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답은 비우호적인 교회가 아니라,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교회처럼 서로 섬기며, 죄를 멀리하고, 서로 책임을 지며, 성경의 온전한 진리를 담대히 선포하라. 하나님의 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러한 장소가 매우 사용자 친화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은 참된 신자들의 교제 위에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회를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약속하신 대로 교회에 더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