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잘난 여자, 하지만 착한 여자
한미소. 그녀의 인생은 아무 문제없었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지만, 그 빈자리는 언제나 다정한 아버지와 세 명의 오빠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었다.
아버지는 명문대학 의과대학 교수, 정말로 인품 좋고 자상하시다.
첫째 오빠는 잘 나가는 연예 기획사 사장, 막내인 미소를 무척 아낀다..
둘째 오빠는 큰오빠의 든든한 배경으로 현재 뜨고 있는 영화 배우로 활발한 성격이며, 미소 콤플렉스가 더욱 심하다.
셋째 오빠는 레지던트 생활을 시작한 의과대학생이며, 역시나 누구 못지 않게 미소를 챙긴다.
유치원 다닐 때, 같은 진달래반의 어떤 남자아이가 발을 걸어 넘어뜨려 얼굴에 상처가 생겼을 때.
그 다음날 초등학교, 중학교에 다니던 세 명의 오빠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유치원으로 왔다.
그 남자아이를 향해 흥분한 주먹을 휘둘러 결국은 학부모들이 합의를 해야만 했었다.
그때 아버지는 화를 내시면서도 내심 뿌듯해하셨다.
여동생을 지극히 아끼는 형제들이 자랑스러운 표정이셨다.
그 후로 한미소는 절대로 오빠들의 쓸데없는 참견을 피하려 당당한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곱게 자라나면서도, 한미소는 강하게 자랐다.
그녀의 나이 19세.
그녀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이제껏 고백은 수도 없이 받아봤지만, 전부 거절했었다.
하지만, 도도한 그녀에게도 첫사랑이 다가왔던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 3반 교실.
친한 옥심이가 미소에게 호들갑을 떨면서 얘기했다.
"미소야, 너 이번에 등수 올랐더라? 2등이더라고?"
"그래? 1등은 수민이가 했겠구나?"
"아니, 뉴페이스! 그 성질 더러운 유지한! 걔가 이번에 1등 했단다."
"유지한? 누구야, 그게?"
한미소의 성적은 교내에서 알아주는 교내 순위 10위권.
늘 반장을 했을 만큼 활발하고 당찬 성격에 친구도 많다.
그리고 모델 제의를 자주 받을 만한 외모라 남학생에게도 인기가 높다.
그런 그녀에게 갑작스럽게 다가온 이름.
'유지한'
처음 듣는 그 이름에 미소는 갸웃거린다.
'보통은 1등에서 5등까지의 순위권 랭킹은 잘 변하지 않던데…….'
그런 생각에 잠긴 미소에게, 재잘거리면서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친구 옥심.
"유지한, 몰라?"
"모르는데?"
"음…. 그래! 맨날 그 녀석이 가는 장소가 있지! 따라와, 보여줄게!"
옥심은 미소를 끌고 학교 뒤뜰로 간다.
본관 뒤쪽에 있는 정원 구석 벤치에 앉아 있는 남학생이 보인다.
한눈에도 알아볼 만큼, 불량한 모습으로 그 남학생은 담배를 피우고 있다.
정말 불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름은 유지한. 별명은 유치한. 이름 때문에 붙은 별명이래."
"유치한?"
"근데, 우리학교 싸움 짱이랜다. 전 여자친구랑 헤어져서 요즘 계속 저렇게 축 쳐져서 담배만 피운대."
"실연 당해서 담배만 피운다고? 진짜 웃기고 유치하네. 싸움 좀 한다는 녀석 치고 제대로 된 놈 없어."
"그렇긴 한데…. 그래도 생긴 건 좀 잘생기지 않았냐?"
"흥! 우리 오빠들이 백 배는 잘 생겼다."
미소는 오빠들을 떠올리며 그 녀석과 비교를 하고 있었다.
미소의 시선은 그 유지한이라는 녀석의 담배연기를 향해 있었다.
"컥! 미소야, 그 멋진 오빠들 좀 소개시켜 줘라!"
갑자기 눈을 빛내며 안겨드는 옥심이 때문에, 미소는 그 녀석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교실로 옥심을 끌고 돌아왔다.
수업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미소의 휴대폰으로 메시지 하나가 전송되어 왔다.
'교문 앞에서 기다린다. 주민우.'
민우의 문자였다. 미소는 문자를 바로 삭제해버렸다.
'웃기시네.'
이럴 때면, 짜증이 밀려온다.
미소에게 접근하는 남자애들은 한결같이 다 똑같다.
친구라도 좋아-
하지만 친구로 지내면 지낼수록 착각을 한다.
미소의 남자친구라도 되는 양, 설치는 꼴이라니.
미소는 그런 구속이 싫다. 그런 착각이 싫다.
다 똑같은 남자들이 싫다.
미소가 시키는 대로 다하는 남자 같은 건 필요 없어.
집에 있는 강아지로도 족하다고 생각하는 미소였다.
"이제 마쳤어? 3반은 딴 반보다 항상 늦게 마친다∼"
교문 앞에 서 있는 민우.
언제나 바보처럼 웃음을 보이며 미소에게 충성을 다하려는 듯한 민우였다.
착한 아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래도 미소는 싫다.
이런 관계는 일찌감치 정리해버려야 한다.
혹시 나중에 집까지 따라 붙으면 오빠들이 가만있지도 않을 테니까.
"주민우, 앞으로 절대 교문 앞에서 나 기다리지마."
이럴 때, 미소는 차갑게 대할 수밖에 없다. 확실하게 냉정히 거절하는 것이 좋다.
"왜? 부담되는 거야? 친구로서 그 정도는…."
"친구! 친구! 친구! 지겨워. 친구로라도 싫어. 날 귀찮게 하지마."
미소는 스스로도 재수 없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민우에게 더 큰 상처주지 않게 일찍 잘라내려는 중이다.
'자꾸 기다리지 말란 말이야! 난 너에게 아무 감정도 생기지 않아!'
상처받은 듯한 민우의 얼굴을 보면서, 씁쓸히 웃는 민우의 표정을 보면서 미소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섰다.
'나쁜 애라고 욕 듣는 건, 항상 나야.'
미소는 말 많은 여자 애들이 자신을 욕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항상 남자를 거절할 때면, 여자 애들은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재수 없다, 저 애. 잘난 척 되게 하네.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그렇지만 미소는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 사귀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 뿐이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길.
항상 오빠들이 데리러 오려고 애쓰는 걸, 미소가 늘 거절한다.
'이렇게 걷는 것이 좋은 걸. 게다가 이 길은 언제나 조용하고 예쁜 걸.'
나무가 잘 심어져 가꿔진 인도, 깔끔한 블록이 깔린 그 길을 미소는 좋아하고 있었다.
언제나 그 길을 걸어가고 있지만, 항상 방해물은 생긴다.
오늘도 어떤 아저씨들이 미소의 앞길을 막는다.
앞을 막은 아저씨들을 당당하게 노려본 후, 그 아저씨들의 옆으로 계속 걸어나가는 미소였다.
"이 봐요, 학생!"
그런 미소를 불러 세우는 아저씨들은 꽤나 깔끔한 인상들이었다.
"가나 기획사, 알지?"
"우린 거기서 나왔어. 학생의 페이스가 정말 괜찮아서 그래. 이번에 오디션 있는데, 한번 와보지?"
"자, 여기 명함."
세 명의 아저씨들은 서로 명함들을 내밀고 있다.
미소는 아저씨들에게 그녀만의 특유의 예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한 기획사, 한대표님 아시나요?"
아저씨 중의 하나가 당황한 듯,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물론 알지. 그런데? 혹시 거기 대한, 한사장 소속인가?"
"아뇨. 소속된 건 아니구요. 우리 큰오빠거든요?"
"큰오빠?"
"동생이 오빠네 기획사 두고 딴 곳에 갈 것 같아요? 그리고 귀찮아요, 그런 건. 하고 싶은 마음 전혀 없어요."
미소는 상큼한 미소를 덧붙이면서 아저씨들의 표정이 어떻든, 신경 끄고 다시 길을 걸어갔다.
집 앞에 거의 도착할 무렵.
어떤 남자애가 또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소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오랜만이다, 한미소?"
"꺼져."
미소는 그 남자애를 무시하고 가려는데, 그 남자애가 미소의 한 손을 덥썩 잡는다.
"야, 최강 킹카를 무시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 나 열 받으면 무서울 걸."
"손 치워."
미소가 뿌리치려는 데, 그 남자애는 다른 손마저 잡는다.
"그만 튕겨라, 한미소. 나 천명공, 이제 참는 거 한계다."
목소리 톤을 낮춘 채, 미소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해대는 천명공.
그 녀석은 학교에서 잘 나가는, 소위 바람돌이 꽃미남이다.
간간히 잡지 모델 활동까지 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미소는 그런 녀석에게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지랄하네."
미소가 화를 내려고 하는데, 갑자기 낮은 음성의 욕설이 들려왔다.
"생 라이브 지랄쑈를 해라, 천명공."
미소가 그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떤 집 담벼락 위에 걸터앉아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그 녀석.
'유치한.'
저절로 이름이 떠올랐다.
'아니다. 유지한이지, 참.'
미소는 명공이의 표정이 일그러짐과 동시에 명공이가 손을 놓는 것을 느꼈다.
명공이는 지한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꽂으면서 말했다.
"뭔 참견이냐, 유치한! 한미소한테 관심있냐?!"
명공이의 말에 미소는 미간에 주름을 팍 잡았다.
미소의 머릿속에는 '지랄하네.' 라는 말이 가득 자리잡고 있었다.
"꺼져."
지한은 귀찮다는 듯, 그렇게 내뱉었다.
지한은 담배연기를 하늘로 향해 내뿜으면서 천명공 따위는 관심도 없다는 듯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애타게 지한을 노려보는 명공의 시선 같은 것은 느끼지도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힘이 들어간 주먹을 꽉 쥔 채, 한참을 노려보던 명공은 지한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오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다가 명공은 미소를 한 번 바라본 후에,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렇게 명공이가 가버린 후.
어색한 침묵 속에, 담벼락 옆에 한참 서서 지한을 바라보던 미소.
"어쨌든 고마워."
미소는 그냥 그렇게 말하고 뒤돌아 섰다.
유치한이라는 저 녀석도 혹시 더 귀찮게 굴기 전에, 집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녀석의 한탄 섞인 말이 그녀를 멈추게 했다.
"이…인…형…무지 보고싶다……. 젠장…빌어먹을…. 바보 같아…."
미소는 힐끔 그 녀석을 돌아봤다.
그 녀석의 시선은 미소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하늘을 향한 그 시선, 그 눈동자.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가득한 그 눈빛.
미소가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이제껏 만난 눈들은 모두 미소를 향했다. 미소를 모두 담고 있었다.
미소를 담지 않은 그 눈동자.
미소의 호기심을 당기는 그 눈동자.
"유지한. 맞지?"
미소가 그 담벼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바람에 살랑, 흔들리는 미소의 고운 머릿결.
아직은 쌀쌀한 그 바람에 흔들린 것은 미소의 머리카락만이 아니었다.
"유지한…."
미소가 한번 더 지한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지한은 미소를 쳐다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전혀 관심이 없는 듯, 하늘을 향해 그 지독한 담배를 내뿜고 있었다.
"……. 지한아."
미소의 목소리에 왠지 모를 떨림이 묻어났다.
지한은 여전히 하늘을 향한 그 시선을 미소에게 돌리지 않았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 그것들로 가득 차 미소를 볼 겨를이 없는 것이다.
미소의 예쁜 목소리가 지한의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이인형. 한 사람만 떠올리는 지한이었다.
미소는 지한의 담배가 다 태워지길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침내, 담배 한가치를 다 태운 지한.
그러나 지한은 다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뭐야….'
미소는 이상하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자신을 그렇게 무시하는 녀석을 처음 본 것이다.
지한을 애써 외면하고, 집으로 들어간 미소.
눈앞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눈빛.
자꾸만 곁에서 담배연기가 묻어나는 것 같다.
'담배연기는 싫은데…. 정말 싫은데…….'
미소의 머릿속에는 지한으로 가득했다.
'한 번 봤을 뿐인데….'
어느덧 미소는 학교에서 지한을 쫓아다니게 되어버렸다.
고 3.
공부해야할 나이이지만 그녀는 사랑에 빠진 것만 같았다.
발렌타인 데이, 처음으로 미소는 초콜렛을 샀다.
곱게 포장한 상자.
고민 고민하며 쓴 편지.
그러나 지한은 무표정으로, 마지못해 그것을 받았다.
미소는 자존심이 상했다.
분명히, 귀찮다는 듯이 상자를 받았던 지한이었다.
하지만 지한이 그 상자를 받을 때, 그녀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살짝 스친 지한의 손.
그렇게 지한을 계속 따라다녔다.
그 후로 지한의 곁을 맴돌았다.
'친구라도 좋아. 친구에서 연인이 될 수도 있잖아.'
미소는 예전에 누군가에게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이렇게 자꾸 지한의 곁에 있으면, 지한의 여자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다른 여자 애들은 지한에게 다가오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한은 언제나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미소를 바라보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 날도 미소는 지한을 따라가고 있었다.
지한이 자주 가는 학교 뒤뜰.
"지한아, 잠시만!"
미소는 조용한 뒤뜰의 정적을 깨면서 소리치듯 지한을 불렀다.
"지한아, 잠시만..."
벤치에 털석- 앉는 지한의 곁에, 찰싹 달라붙어 앉는 미소였다.
"잠시만 얘기 좀 하자."
"할 얘기 있으면 해."
지한은 습관처럼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지한아, 대학 어디로 갈 건지 결정했니?"
"……."
"이번에 2등 했더구나…. 난 3등인데…."
"그래?"
"난…. 너랑 같은 대학에 가고 싶어…."
"……."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생각해…."
"……."
"난 의사가 되고 싶어…. 지한이는 꿈이 뭐야..?"
"꿈?"
"응, 장래에 뭘 전공해서….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 줘."
"없어."
차갑게 내뱉듯이 말하며 담배연기를 미소 쪽으로 내뿜는 지한.
미소는 당황한 듯이 콜록콜록 거리면서, 손으로 독한 담배연기를 내 쫓았다.
"몸에도 안 좋은 걸….왜 피우고 그래?"
"그러게."
지한은 어이없게도 짤막하게 대답을 할 뿐이었다.
미소는 그런 지한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왜 내가 보는 만큼, 넌 나를 봐주지 않는 거니…? 어째서 그렇게 그 애를 그리워하니…….'
이렇게 성질 나쁜 녀석을 좋아하게 되다니, 미소는 스스로도 기가 찼다.
많고 많은 그녀의 추종자를 다 버리고, 그녀가 선택한 유지한.
하지만 지한은 그녀를 선택하지 않는다.
그래도 미소는 지한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가는 대로, 지한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날씨 좋은, 그 날도 지한을 따라 걸어가고 있었다.
미소는 슬그머니 지한의 팔짱을 꼈다.
지한은 미소의 팔짱을 뿌리치지 않았다.
미소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쉴새없이 곁에서 떠들며 쫓아다닌 효과가 있는 것일까.
지한은 요즘 간간히 미소의 말에 대답도 나름대로 해주고 있었다.
"응?"
미소는 뒤에서 무슨 소리가 살짝 들려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어떤 여자 애가 쓰러지는 모습이 보였다.
저번에 옥심이랑 같이 길 가다가, 갑자기 소근 소근거리면서 가리켰던 그 아이다.
"쟤야! 쟤! 유치한이랑 사귀던 애가! 이인형!"
그 여자 애가 쓰러지는 모습이, 미소의 눈에 들어왔다.
길에서 배를 움켜잡고 벽을 잡을 듯, 손을 휘젓다가 픽 쓰러져 기절하는 것 같았다.
'저 애는…. 지한의 여자친구라고 소문났던 애잖아? 전 여자친구쯤 되나? 아마 이름이 '이인형'이였지.'
미소는 그런 생각을 한 후에,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미소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옆에 있던 지한이는 자신의 팔짱을 낀 미소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넌 언제까지 날 따라다닐 거냐? 의사가 되려면 공부 열심히 해야하지 않나?"
모처럼 지한이의 긴 대사에 감격한 미소는,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다.
"널 좋아하는 걸. 어쩔 수가 없는 걸."
"……."
"그래도 열심히 공부는 하니까 걱정하지마."
싱긋, 미소는 예쁘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머리 속에서 뒤에 쓰러져있는 그 애가 떠올랐다.
'나,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의사가 되겠다고 하는 애가…. 쓰러진 사람을 모른 척 하다니…….'
문득…. 미소는 스스로에게 경멸을 느꼈다.
'다 지한이, 너 때문이야.'
미소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미소는 지한에게 물었다.
"지한아…. 너…나… 좋아해?"
미소는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지한을 쫓아가면서 물었다.
"별로."
지한은 무표정으로 미소를 보면서 차갑게 대답했다.
"…너, 이인형- 이라는 애……. 좋아해?"
미소는 마침내, 이인형의 존재를 물었다.
이때껏 지한이가 생각하고 있는게 분명한 그 아이의 이름.
지한의 마음 속에 아직도 가득한게 분명한 그 아이의 이름이다.
지한은 놀랬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고개를 돌리고 걸어갔다.
미소는 그 대답 없음에, 정답을 알아버렸다.
감이 너무 좋은 것이 탈이야, 미소는 안타깝게 살짝 웃었다.
한숨을 한 번 짧게, 내 쉬었다.
양 주먹을 꽉 쥐었다.
'내 것으로 만들기 정말 힘들어. 그냥 포기하자.'
더 이상 자존심을 다치는 것을 스스로도 용서할 수 없었던 한미소.
미소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미소의 팔짱이 스르륵 빠졌다는 것도, 미소의 걸음이 멈췄다는 것도 모르는 지한.
미소는 그냥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지한의 뒷모습을 보며 외쳤다.
"야, 유치한!"
지한은 걸음을 멈추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늘 그랬어. 나를 제대로 안 봤어. 나쁜 자식. 그래, 넌 나쁜 놈 해라. 난 착한 여자 역할을 맡을게.'
미소는 살짝 눈에 눈물이 맺혀 흐려졌지만, 곧 다시 닦아내고 다시 외쳤다.
"유치한! 가지마! 여기! 여기에!"
미소는 침을 꼴깍 - 삼키고, 쓰러져있는 인형에게로 뛰어가면서 외쳤다.
"여기에! 여기에! 이인형! 인형이 쓰러져 있어!"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지한은 잠시 멈췄다.
하지만 역시 지한은 뒤돌아보지도 않고 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러나 미소가 뛰어가는 소리에, 지한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돌아볼까?'
지한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다시 앞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 걸음엔 힘이 없었다.
지한의 머릿속에 가득한 인형에 대한 생각.
하지만, 걸음을 애써 옮겼다.
그러자 뒤쪽에서 미소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유치한! 이 나쁜 놈아! 매정한 자식! 넌 누구한테나 그렇게 매정하니!"
지한은 또 걸음을 멈췄다.
미소는 인형을 일으키면서 지한에게 소리를 질렀다.
"니 전 여자친구 아냐?! 그런데, 그냥 가냐!? 이 나쁜 놈!"
미소는 울먹거림이 섞인 말로 외쳤다.
한참이나, 서 있던.… 지한은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소가 끌어안고 있는 인형을 보았다.
"?!"
눈에 서서히 들어오는, 인형의 쓰러진 모습.
지한은 미소에게로 뛰어갔다.
아니, 인형에게로.
인형에게로 뛰어간 지한은 인형을 살펴봤다.
"뭐야? 왜 쓰러져 있어?"
지한은 미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미소는 차갑게 대답했다.
"빨랑 안 업고 뭐하냐, 유치한."
미소는 색다른 목소리로, 떨리지만 강한 톤으로 지한을 나무랐다.
"동작이 너무 굼떠, 유치한."
그 말에 황당했지만, 지한은 미소가 시키는 대로 인형을 업고 있었다.
"빨리 뛰엇!"
미소의 명령 같은 말에, 지한은 인형을 업고 달렸다.
병원.
수술실 앞에서 지한은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지한은 왔다갔다, 왔다 갔다를 반복했다.
"정신 사나워! 앉아서 기다려!"
미소는 지한에게 신경질 내듯 명령했다.
갑자기 캐릭터가 바뀐 듯한 미소의 말에 지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그러나 다시 곧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애꿎은 벽을 쾅 - 세게 쳤다.
"진짜 꼴사나워."
미소는 그런 지한에게 톡 쏘듯 화를 낸다.
"그래서 헤어졌니? 인형이가 너한테 질릴 만 하다."
미소는 주먹을 잡고 아파하는 지한에게 차갑게 말을 던졌다.
역시 황당한 지한은 화내듯 대꾸했다.
"인형이는 애초부터 나한테 관심 없었어! 니가 뭘 알아?!"
미소는 잠시 그런 지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바보 같아."
지한은 아무 말 없이 미소를 노려보았다. 지한을 바라보면서 미소는 일어섰다.
"난 왜 저런 바보를 좋아했을까…."
미소는 피식 웃으면서, 지한이의 뺨을 살짝 때렸다.
"난 간다. 잘 지키렴."
미소는 지한에게 인사를 했다.
"이젠, 널 따라다니지 않을 거야. 그리고 그렇게 인형이를 너무 걱정하지 마."
미소는 지한에게 윙크를 날리며 돌아섰다.
"바아보-! 맹장염 수술 가지고, 뭘 그리 걱정하고 벽 때리고 오도방정이냐. 쯧쯧, 유치한 녀석."
깔깔, 웃으며 사라지는 미소를 보면서 지한은 스스로가….
바보 같긴 하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보는 인형의 모습이….
저렇게 쓰러져있는 모습인지라 안 놀랄 수가 없었는걸.
지한은 그렇게 혼자서 스스로한테 변명을 했다.
그리고 아까 인형을 업었던 일, 그리고 응급실 침대 위로 안아 눕혔던 일이 떠올랐다.
'작은 키가 더 작아 보이고, 마른 몸이 더 말라 보였는걸…. 휴, 진짜 난 바보다.'
지한은 그렇게 한숨쉬며 의자에 앉았다.
미소는 지한이가 자신의 뒷모습을 보고 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병원을 걸어나가다 살짝 돌아봤지만, 역시 지한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비참하다…. 진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대체 어떤 나쁜 자식이 그랬지?
미소는 갑자기 화가 나려고 했지만, 다시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저런 성격 나쁜 녀석이랑 있으면 피곤해져. 담배연기도 질색이야.'
미소는 그렇게 혼자서 지한을 욕했다.
'바보 같은 놈을 좋아한 나도 바보 같아.'
미소는 그렇게 혼자서 스스로에게도 욕을 하고 있었다.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그 날.
미소는 저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자신을 보면서 울고 있었다.
마음이 이상하게 아팠다.
마음이…. 정말이지 너무 이상하게도 아팠다.
'제대로 된 남자를 만나면 되는 거야. 울긴 왜 우니?'
미소는 그 곱고 고운 붉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울 속에는 눈물을 그치지 못한 나약한 여자가 있었다.
'강해져. 넌 한미소야.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잘난 여자, 한미소다!'
화장대에 손을 뻗어 휴지를 뽑아내 눈물을 닦아내며, 미소는 새롭게 다짐을 했다.
'죽어라 공부해서, 대학생이 되고 나면 정말 멋진 남자를 낚을 거다!'
얼굴 괜찮고, 성격 괜찮고, 한미소가 사랑할만한 남자!
그 남자를 찾기로 마음먹은 미소는 거울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미소는 마음을 접었다.
서서히, 천천히 지한의 생각을 줄였다.
그리고 수능이 끝났다.
1지망의 대학은 아니었지만 2지망 대학 합격 후.
우연히 미소는 길에서 다정히 걸어가고 있는 인형과 지한을 만났다.
"안녕, 지한아?"
미소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지한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 오랜만이네."
미소에게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지한.
지한의 웃음을 처음 보는 미소의 마음 한 구석에는 어색한 두근거림이 다시 시작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웃음은 미소 앞에선 보이지 않았던 웃음이다.
옆에 그토록 원했던 인형이 옆에 있었기에, 지한의 웃음이 그토록 멋질 수 있음을 미소는 알고 있었다.
"인형아, 나 알지? 한미소."
미소는 인형의 뺨을 살짝 톡 건드리면서 붙임성 있게, 그녀만의 특유의 고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인형은 미소에게 거리낌없이 아이같이 순수한 표정으로 귀엽게 인사를 받았다.
"응, 알아. 학교에서 제일 예쁜 한미소."
미소는 그런 인형의 귀여움에, 속으로 끄덕거렸다.
'지한이가 좋아할 만 하구나. 귀엽다. 귀여운 스타일 좋아하나 봐.'
미소는 둘이 같은 대학에 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었다. 미소와는 다른 대학이었다.
어울리는 모습으로, 행복해 보이는 그 녀석들이 무척 부럽다.
"지한이랑 인형이랑 데이트하러 나왔나 보네. 재미있게 데이트해∼ 다음에 또 보면, 반갑게 인사하자!"
미소는 둘에게 손을 흔들며 가려고 하는데 인형이 말했다.
"전에, 나 쓰러졌을 때…. 도와줬다며? 정말 고마워, 미소야! 우리 친구하자!"
미소는 그런 인형에게 고개를 끄덕여주면서, 환하고 밝게 말했다.
"응, 다음에 꼭 보자!"
뒤돌아 선 미소는 걸어가면서 한번 더 다짐했다.
이젠 대학생이 되었으니까.
정말로 제대로 된 남자를 낚을 때가 온 거다.
오빠들보다 훨씬 멋진 남자만 된다. 지한이보다 더욱 더 좋은 성격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미소를 좋아하는 남자가 아니라, 미소가 좋아하는 남자이어야 한다.
미소는 속으로 조건을 체크했다.
우선, 자신만을 바라보며 귀찮게 하지 않을 것.
친절하고 다정하며 성격이 나쁘지 않을 것.
말이 너무 없고 차가운 것은 안 된다.
지한을 닮아서는 안 된다.
옥심이와 오랜만에 즐겁게 놀다가 집으로 돌아온 미소는 배가 고파져서 부엌에 갔다.
혼자 집에 있을 땐, 해먹을 게 없다.
"라면 끓일까? 안 돼. 라면은 몸에 나빠."
미소는 혼자 중얼거리면서 냉장고를 체크했다.
"뭐야, 해먹을만한 것이 없잖아! 오빠가 얼른 와야하는데…."
집안에 여자가 하나뿐인지라 늘 미소가 모든 걸 도맡아….
하지는 않았다.
문득, 미소는 오빠들에 비해 자신이 할 줄 아는 요리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언제나 아버지와 오빠들이 미소를 위해 부엌에서 기꺼이 요리를 했다.
설거지, 청소, 심부름…. 그 어떤 것이든 미소에게 시키지 않았다.
하나밖에 없는 막내딸, 막내여동생.
미소는 그렇게 자라왔다.
"음, 조건 하나 추가!"
미소는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살림도 잘하는 남자를 낚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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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us-_-@hanmail.net
갑자기 쓰고 싶어서 썼더니 -_-; 보통 쓰는 것보다 많이 썼네요;
한글97에서 15페이지 정도 쓴 것 같네요.
가볍게 가볍게 써보렵니다...연재중인 여자고등학교도 계속 쓸거구요.
부지런히 열심히 쓰겠습니다...
단편도 써놓은게 꽤 있어요;; 슬금슬금 올리는 중입니다^_^;
다른 분들은 별로 재미없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애착이 가는 캐릭터라서...=ㅂ=;;
단편에서 조연으로 썼던 인물을 주인공으로 연재를 해보렵니다~
헤헤>_< 소수의 분이라도 읽어주신 분들께
행운을 빕니다~
늘 예쁜 하루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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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오타와 제목 등을 수정하였습니다.
어색해 보이는 문구가 많아서 전반적으로 수정하려고 했더니 귀찮아서 그냥 대강만 수정하고..
전에 올렸던 글 삭제하고, 다시 올립니다.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시작 ]
한미소, 그녀의 남자 낚시 <1화>
eu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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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76
05.05.31 21:36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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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어욧 ㅜ!
[짝수홀]님, 꼬리말 감사드려요! ;ㅂ; 재미있으시다니 기쁩니다~
[표나재중]님, 꼬리말 가사드려요>_< 열심히 쓰도록 노력할게요~
진짜 재밋네요,ㅋ